무아(無我)의 수행(修行) II

지혜로 관찰(以慧觀之)

‘위무지혜고(爲無智慧故)로 계언유아(計言有我)라, 지혜가 없기 때문에 내가 있다고 계교(計較)해서 말한다’

불교에서는 아공(我空), 법공(法空)을 느끼는 것이 지혜가 있다고 말하고, 기억력은 좋고 하지만 내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지(無智)인 셈입니다. 참다운 지혜가 없기 때문에 내가 있다고 계교해서 말을 하는데,

‘이혜관지(以慧觀之)컨대 실무유아(實無有我)라, 지혜로써 몸뚱이를 관찰하건대 실로 내가 있지가 않다. 그러면, 아재하처(我在何處)오, 나라는 것은 대체 어느 곳에 있는고?’

‘두족지절(頭足支節)을 일일체관(一一諦觀)이라도 머리에서 발까지 뼈마디마디를, 요불견아(了不見我)라, 일일이 하나하나 다 자세히 살펴서 관찰해 본다 하더라도, 마침내 나를 발견할 수가 없다’

‘나’ 라는 것이 머리에 있습니까, 발에 있습니까, 피부에 있습니까, 나다, 내가 좋다 내가 귀하다 내가 기분 나쁘다 이런것이 머리에 보아도 없고, 발을 보아도 나라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 몸뚱이 어디에 보아도 나라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내가 어느 곳에 있는가 하고, 머리부터 발까지 또는 뼈 마디마디 다 ?어봐서 일일이 자세히 관찰해 본다 하더라도 마침내 나를 발견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처유인급중생(何處有人及衆生)이오, 어느 곳에 사람과 중생이 있는고?’

‘중생업력(衆生業力)이, 가위공취(假爲空聚)라, 중생의 업력으로 해서, 잠시간 공 무더기가 되었다’

우리 과거세에 닦고 지어 쌓아 내려온 업력이 있고 또한 금생도 우리가 생활하는 것이 지금 업력을 쌓고 있는 것입니다. 업력이란 것은 중생이 행동하는 기운입니다. 생각하면 그것이 남아 있고, 말하면 말하는 기운이 남아 있고, 그러한 기운을 업력이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마치 거품이나 마찬가지로 텅 빈 공(空)의 뭉치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물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중생의 업력이 가짜로 잠시 간 텅 빈 공의 뭉치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종중연생(從衆緣生)이니, 무유재주(無有宰主), 여숙공정(如宿空亭)이라, 뭇 인연 따라서 생겨났으니, 그를 다스리고 주재하는 주인이 없는것이 마치 빈 정자에 머문 것이나 같다’ 고 합니다.

우리 몸은 지금 내 것도 네 것도 아닌 것입니다. 우리 업력이 인연 따라 일어나서 된 하나의 빈 집이나 똑같습니다. 다만 내 몸이다고 집착할 뿐입니다.

이 법문을 몇 십번이고 몇 백번이고 읽으면서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요. ‘나’ 라는 것 떼기가 제일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 떼면 벌써 도인 안되겠습니까.

여기에서, 중생업력 가위공취라, 중생이 업력으로 해서 가짜로 잠시간 공무더기가 되었다 하는 공무더기 즉, 공취(空聚)라는 말도 역시 굉장히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현대 젊은이들은 원자구조론(原子構造論) 같은 것을 배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산소는 무엇인가 또는, 수소는 무엇인가 할 때에, 수소는 원자 핵을 중심으로 해서 전자(電子) 하나가 빙빙 도는 것입니다. 텅 빈 공간 속에서 하나의 광명파도(光波)가 이렇게 뚜렷이 돕니다. 이것이 내나야 공취라, 공무더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 말하자면 일체 존재의 가장 근원이 원자(原子) 아닙니까, 물론 그 밑에는 소립자(素粒子)가 되겠지요마는, 원자 그것은, 원자핵(原子核)을 중심으로 해서 전자(電子)가 도는 것인데, 태양을 중심으로 태양계에서 제일 거리가 먼 명왕성(冥王星)과의 거리보다도, 원자핵과 전자와의 거리 비율이 더 높고, 더 멀다는 것입니다.

일체 만유는 그런 원자(原子)가 이렇게 모이고 저렇게 모여서 하나의 원소(元素)가 되고 또는 분자(分子)가 되고 해서 물질(物質)이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따지고 보면, 사람 몸이나 어떤 것이나 모두가 다 실은, 공(空) 무더기가 모이고 모여서 일체 만유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원자핵을 중심으로 해서 전자가 하나 되면 수소이고, 여덟 되면 산소가 되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 경전에, 과학도 무엇도 없을 때에, 공취(空聚)라는 이런 말씀을 했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가 그야말로 참, 감탄해 마지않는 것입니다.

이렇게도, 진리란 것이 벌써 거의 삼천년전 옛날에 이와 같이 소상(昭詳)히 나타났던 것입니다. 지금 과학적으로 제아무리 따져본다 하더라도 흠 잡을래야 잡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구조나 일체 만유의 구조에 있어서나 말입니다.

중생이나 우리 사람이 어디에가 있는가 하면, 중생의 업력따라 갑니다. 업의 힘이 내나야 다 에너지, 힘 아니겠습니까. 가사 죽어지면 몸은 다 죽어버리지마는 에너지가 남는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 식(識) 곧, 업식(業識)만 파장 따라서 자기 부모 태(胎)안에 붙어서 그것이 영양섭취해서 커나가는 것입니다. 우리 몸도 처음에는 한 점(點)에 불과합니다. 사람 눈에도 안 보이는 한 점이, 그것이 업식입니다. 그놈이 영양 섭취해서 커나가는 것입니다.

참으로 기묘(奇妙)합니다. 그래가지고서 이제 공(空)을 모아서 산소도 모이고 수소도 모이고 각 원소들이 모여서 몸뚱이를 구성한다는 것입니다.

중생의 그런 업력이 잠시간 텅 비어 있는 공을 모아서, 세포를 모아서, 여러 가지 인연 따라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업력 기운이 공 뭉텅 이를 모아 가지고 이루어진 것이, 이것이 나의 몸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내 몸, 이것은 어떤 것인고 하면, 무유재주(無有宰主)라는 것 입니다. 이것은 다스리고 주재(主宰)할만한, 내 것이라고 고집할만한 주인(主人)이 없다는 말입니다.

주인이 없는 것이 마치 비유하면, 여숙공정(如宿空亭)이라, 빈 정자에 머문 것이나 같다는 말입니다. 실은 주인이 없는 것인데 망상(妄想)으로 ‘나다, 내 것이다’ 이렇게 고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도 실감(實感)이 잘 안 갈 것입니다. 따라서 몇 십번, 몇 백번 읽고 외워 보십시요. 그리고 참선도 하고 염불도 해 보십시요. 그러면 조금 더 ‘분명히 내가 없는 것이구나’ 하고 실감이 들 것입니다. 그러면 공부가 그 만큼 훨씬 더 익어진 셈입니다.

이 법문은 지관(止觀)이라는 천태지의(天台智의 538∼597) 선사(禪師) 법문에 있는 말씀입니다.

댓글 달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항목은 *(으)로 표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