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람

가람 伽藍 , sanghārāma sangharama –
1. 원래의 뜻은 승단(僧團)이 정주(定住)하는 원림(園林)으로, 한자 음역(漢音譯)은 승가람마(僧伽藍摩), 생략하여 가람(伽藍)이라 부른다. 인도에서는 비구의 주거인 승방(⇒ 비하라)이 있는 구역(승지[僧地])과 재가신앙(在家信仰)의 대상인 불탑을 중심으로 하는 구역(불지[佛地])의 복합된 구성을 말하며
B.C. 2세기경의 석굴사원 차이티야 당(堂)과 비하라 굴과의 합체에서 그 초기형태를 볼 수 있다. 파키스탄의 탁실라, 간다라 지방의 평지나 산정에 있는 쿠샨조 시대(1세기 무렵 이후)의 가람유지(遺址)에서는 사각형의 구조에 높은 벽, 내측 안뜰에 면하여 나란히 늘어선 승원 등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인접한 구역에는 탑지(塔地)가 있으며, 승지와 불지를 구분하는 양식은 동아시아에도 전파되었다.
1세기말 경에 시작된 중국의 불교사원은 처음엔 부도사(浮屠祠⇒ 부도)라 불렸고 상륜(相輪)을 받든 층탑형 누각에 금인(佛像)을 모셨으며, 주위에 회랑을 돌렸다. 3~4세기경 불사리(佛舍利)신앙이 전파되자 층탑에 불사리를 안치하고 별도로 불전을 꾸며 회랑으로 둘러싸게 하는 일탑식(一塔式) 가람배치가 성립되었다. 가람 배치는 건축양식과 같이 전통적인 궁전누각의 형식을 따랐으며 인도나 중앙아시아의 영향은 건축의 세부적인 것 외에는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가람은 북위(北魏)의 관영사찰(官營寺刹)에서 발전하여 평성(산시성 대동[山西省 大同])의 급대사에서는 오금부도(오층탑), 기도굴산수미산전(耆闍崛山須彌山殿, 佛殿), 강당 이외에 선방(禪房), 사문좌(沙門座) 등이 갖추어졌으며 낙양천도 이후에는 더 큰 규모의 영녕사(永寧寺)가 조영되었다. 이들은 일탑식이었으나 전통적인 쌍궐을 본뜬 쌍탑식도 있었다. 이는 운강석굴이나 용문석굴의 불감석각(佛龕石刻)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당대(唐代)의 가람 구성은 그다지 분명하지는 않으나 ‘회창(會昌)의 배불(排佛)’(845)을 겪은 서안(西安)의 청룡사지가 1973년 발굴조사되어, 동에는 불전(金堂), 서에는 불탑이 있었음이 판명되었다.

한국, 고구려의 사적(寺蹟)은 발굴된 예가 드물어 일반적 형식이 불분명하나 평양의 청암리 폐사(廢寺)터에는 팔각당(탑?)을 중심으로 그 동서와 북쪽에 장방형 건축이 있었으며 백제나 고신라의 사원터에서도 일탑식에 속함이 판명되었다. 통일신라시대에 이르자 쌍탑이 출현, 문무왕 19년(679)에 건립된 경주사천왕사는 그 조기(早期)의 좋은 예다. 목탑 대신에 석탑이 퍼지고 같은 양식의 가람배치가 널리 전파되었다. 동의어 절

2. 절, 사찰, 사원, 도량(道場), 정사(精舍)와 같은 말이다. 산스크리트어 ‘상가 아라마 (sangha arama)’를 음역한 승가람마(僧伽藍摩)의 줄인 말이다.
부처님 성도 후 당시 마가다국(Magadha國)의 빈비사라(頻毘娑羅, Bimbisara, BC 582~554 재위)왕이 마가다국의 서울 왕사성(라즈기르 Rajgir) 부근에 지어서 부처님께 보시한 죽림정사(竹林精舍)가 가람의 시초이다.
중국의 선종 사찰 이래로 정립된 가람의 기본구조는 7당(堂) 가람이다.
① 불전(佛殿), ② 강당, ③ 스님들의 생활공간인 요사(寮舍)에 승당(僧堂 혹은 僧房; 스님들의 거처),
④ 부엌(주고/廚庫), ⑤ 욕실, ⑥ 동사(東司, 뒷간, 해우소/解憂所), 그리고 ⑦ 산문(山門) 등이 7당으로 꼽힌다. 그리고 큰 절의 경우, 금당(金堂) ? 강당 ? 탑 ? 식당 ? 종루(鐘樓) ? 경장(經藏) ? 승방(僧房)의 일곱을 일컫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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