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樂能捨 信敬如聖 難行能行 尊重如佛
慳 貪於物 是魔眷屬 慈悲布施 是法王子
자신의 향락을 버리면 믿고 공경하기를 성인과 같이 함이요, 어려운 수행을 행하면 부처님과 같이 존중할 것이다.
재물을 탐하는 이가 악마의 권속이요, 자비로 남에게 베푸는 이는 법왕의 아들이다.
무릇 역대의 성인들은 모두 자신의 향락을 접어둔 이들인 것을 알 수 있다.
『법구경(法句經)』의 이야기가 있다. “한 승려가 숲에서 오래 수행을 하면서도 탐욕을 버리지 못했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 그를 제도코자 함께 숲에 묵으셨다. 그런데 때 마침 물속의 거북 한 마리가 뭍으로 기어 나오고, 그 뒤를 따라 물개가 나오며 거북을 먹으려 하였다. 그러자 거북은 머리와 꼬리, 그리고 네 다리를 몸통 속으로 감추어 버렸다. 물개가 조금 떨어지면 거북은 걷고, 다시 먹으려면 집어넣고 해서 거북은 그 위기를 면하는 것이었다. 이를 보던 승려가 부처님께 “거북은 목숨을 보호하는 배갑(背甲)이 있어서 물개는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라 하였다.
부처님께서 이르시길 “세상 사람들이란 이 거북이만도 못한 것 같다. 그들은 모두 무상을 알지 못해서 육정(눈,귀,코,혀,몸의 감각기관과 의식작용)을 멋대로 하여 외마(外魔)가 침범해 오기 쉬움이요, 죽은 뒤에는 생사가 끝이 없어서 오도(五道 : 천상, 인간, 아귀, 축생, 지옥)를 윤회하여 무한고뇌를 받는 것이다. 이는 모두 마음 탓으로 생긴 일이니, 힘써 열반의 안락함을 구해야 한다. 마치 육욕(六欲)감추기를 거북같이 하고, 마음 방호하기를 성(城)과 같이 하라. 그리하여 지혜로써 마(魔)와 싸워 이기면 재앙이 없게 될 것이다”라 하셔서 수행하는 이에게 육욕(六欲)이 얼마나 해독한 것임을 알게 하셨다. 또한 ‘자비로 남에게 베푸는 이는 법왕의 아들이라 할 것’이란 말은 재물로서만 베풀라는 말이 아니다.
『현우경』에 보면, 어느날 우파사나란 여인은 『법구경(法句經)』을 외우고 행하려 힘썼다. 그러던 어느 날, 천신이 상공을 지나다가 경외는 소리를 듣고 허공에 멈추어 칭송하였다. “장하여라, 누이여 법을 잘 연설하십니다. 지금 내가 천상의 보배를 주어도 누이에게는 하찮게 여겨질 것입니다. 대신 기쁜 소식을 하나 전하겠습니다. 존자 사리불과 목건련이 사밧티에 오다가 이곳 숲에 머무르십니다. 누이는 내일 그분들을 초대하여 공양하시고 축원할 때는 내 이름도 함께 일컬어 주시오.” 그녀는 놀라 물었다. “당신은 누구기에 모습은 없고 소리만 들립니까?” “나는 귀신의 왕 ‘바이슈라마’입니다. 법을 듣기 위해 이 허공에 머물러 있습니다.” “하늘은 거짓이 없다고 하는데, 당신은 천신이요 나는 사람이니 어떤 인연으로 날 더러 누이라고 하십니까?” “부처님은 법의 왕이시고 사람과 하늘의 아버지입니다. 나는 남자신도요, 당신은 여자신도이니 다 같이 법의 형제이므로 누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녀는 기뻐하면서 “부처님께서 백 겁 동안 부지런히 고행하신 것은 오로지 나를 위해서이다. 부처님의 은혜로 천신과 나는 법의 형제가 되었구나.”라고 한 것과 같이 재물에 눈 어둡지 않고 부지런히 경전을 독송하면, 여러 하늘 신들이 듣고 그 사람을 옹호하는 것이다.
高嶽 岩 智人所居 碧松深谷 行者所捿
飢峩木果 慰其飢腸 渴飮流水 息飢渴情
높은 산 험한 바위는 슬기로운 이가 거처하는 곳이요. 푸른 솔 깊은 골짜기는 행자가 깃 드는 곳이다.
배고프면 나무열매를 따 먹으며, 주린 창자를 달래고, 목마르면 흐르는 시냇물로 마른 정(情)을 가실 것이다.
이 말씀은 반드시 수행자가 산곡(山谷)에 머물러야 된다는 말은 아니다. 요즈음은 오히려 산보다는 도시에서 수행하기가 더 어렵다. 따라서 어떠한 역경에서도 스스로를 지킬 줄 아는 슬기로움이 필요한 시대이다. 즉, 진정한 수행인이라면, 시대를 살필줄 아는, 그러면서 개인의 행이 뒤따르는 것이 당연하며, 고독과 궁핍의 어떤 환경에도 개의치 말고 수행에 힘쓰라는 말로 알아야 할 것이다.
법공 스님/동국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