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의 무애자재한 모습을 설화식으로 표현한 이야기들에서는 원효가 무애자재(無碍自在)하여 일시에 몸을 백 곳에 나투었다고 합니다.
『삼국유사』에 나타나는 ‘몸을 백그루 소나무에 나타냈다(分軀於百松)’ ‘몸을 백가지로 나투었다[分百身]’ ‘몸을 여러 곳에 나타냈다(數處現形)’ ‘백 곳에 형상을 드러냈다(百處現形)’ 등의 표현이 대개 이 뜻입니다. 일찍이 원효는 송사(訟事)로 인해 몸을 백 그루의 소나무에 나타냈던 일이 있고, 이로 해서 모두들 그의 위계(位階)를 초지(初地)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설화가 아니라 불교교리에 근거를 둔 매우 상징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원효는 현재 화엄지(華嚴地)에 머무는 대권보살(大權菩薩)로 이해되기도 했고, 성종성(聖種性)의 대종사(大宗師)로 인식되기도 했습니다.
『화엄경』에서는 52, 혹은 53계단을 설정하고 있습니다.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회향(十廻向), 십지(十地), 등각(等覺), 묘각(妙覺) 등 보살의 수행계위 52위 중 십지(十地)는 41위로부터 50위에 해당하고, 십지 중의 초지(初地)는 환희지(歡喜地)입니다. 환희지는 보살이 무량겁을 수행한 끝에 처음으로 의혹을 끊고 깨달음에 눈을 뜬 경지이며, 이 경지에 도달한 보살은 나머지 십지 사이에 두번째 무량겁을 겪은 뒤 성불을 하게 됩니다. 부처의 이치를 깨달아 다시는 성인의 지위에서 내려오지 않고, 자신을 이롭게 하면서도 남을 이롭게 하는 행동을 하므로 기쁨이 많아 환희라는 명칭이 붙었습니다. 언제나 싱글벙글하는 경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십신(十信)으로부터 십회향(十廻向)까지는 범부의 위치[凡夫位], 그리고 초지(初地) 이상은 성자의 위치[聖者位]로 구분됩니다. 이와 같은 구분에 의할 때, 원효의 위계가 초지(初地)였다거나 그가 화엄지(華嚴地)에 머무는 대권보살(大權菩薩)이었다는 설은 그가 성자(聖者)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는 인식을 토대로 하여 생겨난 것입니다.
그리고 원효가 성종성(聖種性)의 대종사(大宗師)였다는 설은 다음의 김부식(金富軾)이 지은 영통사대각국사비명「靈通寺大覺國師碑銘」에 보입니다.
불법이 양(梁) 대통(大通) 원년 정미(527)년에 처음 신라에 들어온 뒤 1백여 년 만에 의상(義想)과 원효(元曉)가 일어나니, 두 분은 성종성(聖種性)의 대종사(大宗師)였다. 말광(末光)의 비친 바 여파(餘波)의 가한 바에 모두 암흑 속에서 벗어나 고명(高明)에 나아갔다.
불체성(佛體性)의 종류를 여섯 가지로 분류한 육종성(六種性) 중의 네 번째가 성종성(聖種性)입니다. 이것은 십지위(十地位) 중에서 종성(種性)을 증견(證見)하고 범부의 성(性)을 끊은, 즉 성자의 위치에 들어간 단계를 말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원효의 설명이 참고가 됩니다. 그는 “십지위(十地位) 중에서 종성(種性)을 증견(證見)하고서 범부(凡夫)의 성(性)을 끊기 때문에 성종성(聖種性)이라 한다”고 하여 십지(十地)의 보살위(菩薩位)는 곧 성종성(聖種性)에 해당한다는 의미로 해석한 바 있기 때문입니다. 『화엄경』에는 초지보살(初地菩薩)이 부지런히 정진하면 백 명의 부처를 볼 수 있고, 능히 백 가지로 변신할 수 있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원효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습니다.
부처의 몸이 실제로는 작은 티끌의 수와 같이 많은 몸이 아니지만, 자재(自在)한 때문에 티끌과 같은 몸을 나타낸다.(如來之身 實非微塵 以自在故 現微塵身) (「열반종요(涅槃宗要)」)
이처럼 원효는 초지보살이 능히 백 가지로 변신할 수 있다고 한 『화엄경』의 구절을 자재(自在)한 때문에 수많은 몸을 나타낸다는 의미로 이해했습니다. 따라서 초지보살은 대자유의 몸이 된다는 『화엄경』의 내용과 원효가 백 곳에 몸을 나타내었기에 그의 위계를 초지라고 했다는 설화는 같은 문맥이라고 하겠습니다.
이것은 매우 상징적인 이야기입니다. 너무 바쁜 일이 있을 때, 우리는 “몸이 열 개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원효가 일시에 몸을 백 가지로 분신했다는 이야기에는 소박한 사람들의 희망이 투영되기도 했고, 원효 무애행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기도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원효의 위계가 초지(初地)였다고 하는 것은 그가 이입(理入)의 경지를 넘어서 행입(行入)의 경지에 도달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쉽게 말하면 이입이란 이론적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하고, 행입이란 실제적인 단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원효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치에 따라 믿고 이해하였으나, 아직 증득하여 행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입(理入)이라고 한 것이니, 계위(階位)가 초지(初地) 이전에 있다. 행입(行入이라고 한 것은 이치를 증득하여 수행하여 무생행(無生行)에 들어갔기 때문에 행입(行入)이라고 한 것이니, 계위가 초지 이상에 있다. (「금강삼매경론」, 김달진 p.351)
六行 중 앞의 信·住·行·回向의 四位는 理入의 계위고, 뒤의 地·等覺의 二位는 行入에 해당 한다.(此六行中 前四位是理入階降 後二位者 行入差別) (「金剛三昧經論」)
행입(行入)이란 이론적이고 관념적인 이해의 단계를 지나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실천의 단계로 접어든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원효(元曉)의 위계(位階)가 초지(初地)에 해당한다는 인식은 그의 실천행(實踐行)에 대한 높은 평가에 그 배경이 있습니다. 원효의 실천행이 수행(修行)은 물론이고 교화(敎化)에서도 유감 없이 발휘되었던 사실을 유의하면, 그의 위계가 초지(初地)에 해당한다는 평가는 설득력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요석궁에서 아리따운 공주를 품에 안고 봄꿈을 꾸었던 원효, 공주와의 만남은 우발적인 파계도 실수도 아니었고, 무애도인의 도력을 자랑삼아 시험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세속을 떠나 불문으로 갔던 그가 다시 세속의 거리로 돌아오는 강렬한 몸짓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원효는, “戒相에 머물지 않기 때문에 계바라밀을 具足한다”고 했고, 또 “출세법(出世法)은 세간법(世間法)을 치유하는 법이고, 출출세법(出出世法)은 출세법을 치료하는 법이다”라고 한 「섭대승론」의 구절에 주목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8地 이상의 보살은 출세로부터 다시 벗어나며, 이런 보살이 머무는 곳은 이미 더러운 땅이 아니라 깨끗한 땅이라고 토로했습니다.
그가 거사의 모습으로 살았다고 해서 불교를 아주 떠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더욱 열심히 교학에 정진했고, 한층 자유롭게 교화했습니다. 그가 환속했다고 세속에서만 살았던 것도, 또한 대중의 교화에만 전념했던 것도 아닙니다. 그의 교학은 만년까지 지속되었고, 절에서 머문 경우도 많습니다.
그는 55세에 행명사(行名寺)에서 「판비량론」을 저술했고, 분황사에서는 「화엄경소」를 지었으며, 초개사에서 현풍을 드날렸고, 마침내 혈사에서 입적했습니다. 원효는 요석공주와 설총, 그 처자식에게 집착하면서 살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곁을 훌훌히 떠나가 버리거나 수행자라는 구실을 붙여, 인간적인 정이나 세속적인 의무를 외면해 버린 비정하고 무책임한 사내는 아니었습니다.
원효는 穴寺에서 많이 살았고, 또한 입적도 이 절에서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혈사 곁에 설총의 집터가 있었다고 합니다. 원효가 세상을 떠나자 설총은 그 유해를 부수어 흙에 섞은 뒤 상을 만들어 분황사에 모셔 두고 공경 사모하며 매우 슬퍼했다고도 합니다. 아들 설총이 분황사의 원효소상 옆에서 절하니 그 소상이 문득 고개를 돌려 돌아보았기에 고려 후기까지도 이 절의 원효상은 옆을 돌아보는 자세로 있었다고도 합니다.
「금강삼매경론」에는 출가와 재가의 어느 한 쪽에도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곧 이 경 ‘입실제품(入實際品)’의 다음과 같은 내용이 그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여, 이와 같은 사람은 이상(二相)에 있지 않느니라. 비록 출가하지 않 았다 할지라도 在家에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닌 때문이다. 비록 법복이 없고, 바라제목차계(波羅提木叉戒)를 갖추 지 않았다 할지라도, 또한 布薩에 들어가지 않았다 할지라도, 능히 제 마음으로 無爲自恣하여 성과(聖果)를 얻으며, 이승(二乘)에 머무르지 않고 보살도에 들어갈 것이고, 뒤에 地를 다 채우게 돨 때에 불보리(佛菩提)를 이루게 될 것이다.
菩薩 如是之人 不在二上 雖不出家 不住在家故 雖無法服 不具持波羅提木叉戒 不入布薩 能以自心 無爲自恣 而獲聖果 不住二乘 入菩薩道 後當滿地 成佛菩提 (「金剛三昧經論」)
김상현/동국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