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관(修行觀) Ⅱ

원효의 수행론에서 중요한 것은 지관이행(止觀二行)입니다.

지(止)란 밖으로 향하는 모든 상(相)을 멈추어 산란한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카메라를 흔들지 말고 고정시키란 말입니다. 자꾸 참선해라 수행하라고 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세숫대야에 물을 떠놓고 흔들면 상이 다 깨지니까 흔들리지 않게 마음의 바다를 가만히 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멈추기만 하면 되느냐? 아닙니다. 그렇게 하는 동시에 자세히 관찰하라는 것입니다.

이건 결코 모순이 아닙니다. 이때 그치라는 것은 대상에 투사하는 것을 그치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그치면 비로소 있는 그대로 보인다고 원효는 말합니다. 아무리 울고불고 한다고 해서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불교인들은 정말로 연기를 알고 무상을 깊이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언제나 미소 짓는 사람이 됩니다. 모든 것에 ‘그러려니’ 할 수 있으니까요.

지(止)만을 닦는다면 마음이 가라앉아 게을러지고 여러 선을 구하지 않고 자비를 멀리 떠나게 됩니다. 이 때문에 관(觀)을 닦아야 한다는 거죠. 관이란 대상을 관조하여 인연생멸상(因緣生滅相)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원효는 지관쌍운(止觀雙運)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지와 관의 두 수행은 반드시 함께 이루어져야 함은 새의 두 날개와 같고 수레의 두 바퀴와 같다. 두 바퀴가 갖추어지지 않으면 실어 나르는 능력이 없고, 만약 한 날개가 없다면 어찌 허공을 나는 힘이 있으랴. 그러므로 지와 관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곧 보리의 도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원효에 의하면, 지를 수행함으로써 범부의 집착과 이승(二乘)의 겁약(怯弱)한 소견을 다스릴 수 있고, 관을 닦아서 널리 중생을 살펴 대비심을 일으키기에 이승의 옹졸한 마음을 제거할 뿐만 아니라 범부의 나태한 뜻을 다스릴 수 있다고 합니다. 마음은 가라앉아도 안 되고 지나치게 흥분해서도 안 됩니다. 원효에 의하면, 가라앉거나 들뜬 마음을 멀리 떠나 자연스럽게 머무르기 때문에 등지(等持)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원효는 진정한 정(定)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하나의 경계에 머무름에도 두 가지가 있다. 만약 한 경계에 머무르면서도 혼미하고 사리에 어두워 자세히 살피지 못한다면 그것은 곧 혼침(昏沈)이며, 만약 한 경계에 머물러 있으면서 가라앉지도 들뜨지도 않은 채 자세하고 바르게 생각해 살핀다면 이를 곧 정(定)이라고 하는데, 생각하고 살피는 것으로서 혼침과 구별한다. 그러므로 마음이 머물거나 옮겨 다니는 것으로서 선정과 산란함의 다른 모습을 구별하지 않음을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재빠른 판단은 비록 빨리 바뀌어 가지만 정(定)이 있기 때문이고, 느리고 둔한 생각은 비록 경계에 오래 머물러도 이는 산란함이기 때문이다.(『금강삼매경론』)

원효는 『중변분별론소』에서 만약 마음이 가라앉는 번뇌에 물들면 마음을 채찍질하여 들리게 해야 하고, 만약 마음이 들뜨는 번뇌에 오염되면 마음을 단속하여 가라앉게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원효의 선(禪) 이해는 지와 관을 포괄하는 것으로 세간의 선(禪)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원효는 『금강삼매경』의 핵심을 일미관행(一味觀行)으로 파악했습니다. 『금강삼매경론』의 수행 구조는 관(觀)과 행(行)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관은 경계와 지혜에 통하는 것으로 공간적으로 논한 것이며 행은 시간적으로 논한 것입니다. 또 관이 인식의 문제라면 행은 실천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식의 주체와 인식의 대상은 무엇인가? 인식의 주체, 카메라를 가만히 두느냐? 세숫대야 물을 흔들어보느냐? 노란 안경을 쓰고 보느냐? 다 달라지잖아요. 또 대상도 마찬가지로 아침에 비스듬히 비추느냐, 아니면 중천에서 비추느냐, 해가 서산에 걸렸을 때 비추느냐에 따라 보여지는 대상이 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보살의 실천행은 수행과 교화의 두 방면에 관련됩니다. 곧 상구보리하는 향상문에도, 그리고 하화중생의 향하문에도 실천행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원효의 실천행은 자신을 위한 자리행(自利行)과 남을 위한 이타행을 함께 구현하려는데 있었습니다. 원효가 생각하는 보살도란 선정과 지혜를 닦되 동시에 대비(大悲)도 실천함으로서 자신은 물론 남도 함께 이롭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금강삼매경』 중의 “어여혜정 이비구리(於如慧定 以悲俱利)”라는 구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습니다.
만일 대비를 버리고 바로 선정과 지혜를 닦는다면 이승(二乘)의 지위에 떨어져 보살도를 장애하고, 만일 자비만 일으키고 선정과 지혜를 닦지 않는다면, 범부의 병에 떨어질 것이니 그것은 보살의 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금강삼매경론』)

선정과 지혜는 자리를 위한 것이고 대비는 이타를 위한 것이지만, 만약 대비를 버리고 선정과 지혜만을 닦는다면 보살도가 아닌 이승의 지위에 떨어지고 말 것이라고 원효는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수행자가 선행을 즐기지 않거나 대비를 멀리하게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지만을 닦지 않고 반드시 관도 함께 닦아야 하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지(止)만을 닦으면 마음이 가라앉거나 혹은 게으름을 일으켜 여러 선행을 즐기지 않고 대비를 멀리 여의게 된다. 이 때문에 관을 닦아야 한다.(『대승기신론소기회본』)

그러면 어떻게 관찰해야 하는 것일까요? 원효는 내형(內行)과 외행(外行)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습니다.

내행이란 관에 들어가 고요히 비춰보는 행이고, 외행이란 관에서 나와 세간을 교화하는 행이다. 나오거나 들어가거나 중도를 잃지 않기 때문에 둘이 아니다라고 한 것이다.(『금강삼매경론』)

이처럼 원효는 외행을 세간을 교화하는 행으로 해석했는데, 이 또한 대비로 중생을 교화하는 보살의 이타행을 강조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원효의 수행관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우리가 익숙하지 않은 용어들이 많고 이 부분에 깊은 고민이 없었기 때문에 어려운 건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관심을 갖고 이해하려 하면 할수록 애매모호하던 말들이 가슴에서 되살아날 때가 있을 겁니다.

제가 공부해 본 불교는 결코 관념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매우 구체적이고 실존적이고 사실적인 종교입니다. 불교는 마음, 마음하니까 얼른 보면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일수도 있겠지만 그 마음을 분석적으로 과학적으로 접근해가는 게 불교입니다. 불교의 한 분파인 유식학은 현대에 와서 서양 사람들이 심층적으로 분석해 온 심리학과 거의 합일되고 있잖아요. 그런 점에서 불교의 마음은 과학적인 얘기지 그냥 관념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효는 구체적으로 수행이라든지 행동이라든지 실천적인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겁니다. 그냥 학문적이나 철학적으로 하지 않았다는 거지요.

원효는 그의 『발심수행장』에서 발심과 수행의 중요성을 서술했고, 『대승육정참회』에서는 모든 악업의 장애를 참회로 제거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대승기신론소』에서는 신성취(信成就)에 이르는 수행 과정에 중점을 두고서 지관의 수행을 논했고, 『금강삼매경론』에서는 일미관행을 통해서 본각(本覺)의 근원으로 들어갈 수 있음을 밝힌 것입니다.

원효의 수행관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경험에 기초한 것이었고, 깊은 신심과 종교적 체험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오회(五悔) 중에서도 예배제불(禮拜諸佛)을 가장 중시했던 경우나, 자신이 창안한 쟁관법으로 엄장의 수행을 지도했던 점, 그리고 세간의 선을 비판하면서 부침 없이 자세하고 바르게 생각하고 관찰하는 것이 진정한 선(禪)이라고 주장했던 것 등이 그렇습니다.

원효 실천행의 두드러진 특징은 자리와 이타를 함께 닦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수행자가 대비(大悲)를 실천하지 않고 선정만을 닦는다면 보살도가 아닌 이승의 지위에 떨어지고 말 것이기에, 지의 수행만이 아니라 관도 함께 닦아야 한다고 했던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이러한 원효의 수행관은 자신의 교화활동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훗날 원효의 위계가 초지(初地)에 해당된다는 설이 나타났는데, 이러한 원효 인식의 배경에도 그의 실천적인 수행과 교화에 대한 높은 평가가 이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김상현/동국대 교수

댓글 달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항목은 *(으)로 표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