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결코 관념적인 종교가 아니며, 이론만을 추구하는 학문도 아닙니다.
의지적인 노력에 의해서만 허망을 진실로 전환할 수 있다고 강조하는 실천적인 종교입니다. 수행이나 교화, 그 어느 것도 실천에 의해서만 이룩할 수 있는 것이고, 만행(萬行)과 만덕(萬德)을 이루고서야 근원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불교는 주장합니다. 따라서 불교에서의 실천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원효는 뛰어난 학승이면서 동시에 무애의 자유인이었지만, 또한 용맹으로 정진하던 수행자였습니다.
원효는 또 자신의 허물 돌아보며 참회할 줄도 알았습니다. 원효의 『발심수행장』에는 그의 종교적인 체험이 스며 있습니다. 발심은 발보리심으로, 궁극적인 깨달음인 보리에 뜻을 일으켜 구하는 것입니다. 원효는 “직심(直心), 심심(深心), 그리고 대비심을 발한다면 악한 것을 버리지 아니함이 없고, 선한 것은 닦지 아니함이 없으며 한 중생도 제도하지 아니함이 없기에 이를 무상보리심이라 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또 『발심수행장』에서 발심과 수행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모든 부처님이 적멸궁을 장엄하신 것은 오랜 세월 욕심을 버리고 고행한 까닭이요, 중생들이 불타는 집에서 맴도는 것은 끝없는 세상에서 탐욕을 버리지 못한 때문이다.
수행자가 바른 서원을 세우는 일은 중요합니다. 올바른 원과 뜻이 서지 않은 상태의 노력은 헛된 세월만을 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원효는 수행자가 올바른 뜻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말세의 수행자 중에는 바르게 원하는 이는 적고, 거짓으로 구하는 사람은 많다.…곧게 마음을 정하여 이치에 합당하게 하고, 자기를 제도하고 다른 사람을 구제하여 무상의 도에 이르도록 하는 것을 일컬어 뜻을 바르게 한다고 한다.
이처럼 수행자가 세운 뜻과 발원은 올바른 것이어야 하고, 근원을 향한 것이어야 하고, 세상에 빛이 되는 것이어야 하는 것임을 원효는 강조했던 것입니다.
믿음이란 결정적으로 그렇다고 하는 말입니다. 이치가 실로 있음을 믿고, 수행으로 얻을 수 있음을 믿으며, 닦아서 얻은 때에는 무궁무진한 덕이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만약 어떤 사람이 능히 이 세 가지의 믿음을 일으킨다면, 능히 불법에 들어가 모든 공덕을 나타나게 하고 모든 마(魔)의 경계로부터 벗어나 더 이상 높음이 없는 도에 이른다.(『기신론소』)
이상은 믿음에 대한 원효의 설명입니다. 그에 의하면, 믿음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치가 실로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이치란 도리, 진리 등과도 같은 말이지만 불성, 진여의 법 등이 보다 가까운 뜻입니다. 이치가 있다고 믿는 것은 근본을 확신하는 것인데, 근본은 곧 진여의 법이다. 진여의 법은 모든 부처님이 귀의하는 바며 온갖 행위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그 이치는 닦아서 가히 얻을 수 있음을 믿습니다. 그리고 닦아서 얻은 이치에는 무궁한 공덕이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이상의 세 가지를 결정적으로 그렇다고 믿는 일, 그것이 믿음을 일으키는 일이라고 원효는 말했습니다. 새롭게 발심한 사람일지라도 실제로 수행에 정진하기란 어렵습니다. 이에 관하여 원효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저들의 수행에 있어서 일찍이 수행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행하기가 어렵다. 지금도 닦지 않는다면, 지금 익히지 않았기 때문에 훗날에도 역시 닦지 못할 것임에, 이처럼 오래오래 되면 점점 더 어려워진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그 어려움을 우러러 익힌다면, 익혀 행함이 점점 늘어나 어려움이 바뀌어 쉽게 될 것이다. 이것을 새로 발심한 이가 닦아 나아가야 할 대의라고 한다.(『보살계본지범요기』)
수행이 어렵다고 내일로 미룬다면, 훗날에도 여전히 어렵습니다. 지금은 어려워도 노력하면 차차 쉬워질 것입니다. 그래서 원효는 수행자의 정진에 대해서 불부비개로 불을 일으키는 일에 비유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기도 했다.
행자가 부지런히 닦아 쉬지 않는 것은 마치 불을 낼 때 불부비개로 잠시도 쉬지 않고 부비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연법(煙法) 이전에는 죄가 강하고 복이 약하여 수행하기 쉽지 않음이 마치 산에 오르는 것과 같고, 인법(忍法) 이후에는 죄가 약하고 복이 늘어나기에 수행이 어렵지 않음이 마치 산에서 내려오는 것과 같다.(『중변분별론소』)
수행 경력이 적은 사람의 수행이란 산을 오르는 것처럼 힘겹지만, 정진으로 수행의 공덕이 불어나면 그 사람의 수행은 산에서 내려오는 것처럼 쉬워진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원효의 수행관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경험에 바탕하고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표현에도 그의 체험적 인생관이 배어있습니다.
만약 단지 이루어지는 것만 있고 무너지는 것이 없다면 증익변(增益邊)에 떨어지고, 오직 무너지는 것만 있고 이루어지는 것이 없다면 손감변(損減邊)에 떨어지게 된다. 이루어짐과 무너짐이 있기에 두 극단을 떠날 수 있다.
단지 성공만 있고, 실패가 없는 인생은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무너지는 경험도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실패를 통해서, 부수어지고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겸손을 배우는 것입니다. 만약 실패만 거듭하는 인생이라면, 절망하고 좌절합니다. 때로는 성공해야 하고 이루어지는 경험도 해야 합니다. 성공도 실패도 그 어느 한쪽에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원효의 『대승육정참회』는 그 자신의 종교적 고백이며 신서(信書)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이 시작됩니다.
법계에 의지해 노닐려 하는 이는, 행주좌와 몸가짐에 헛됨이 없어야 한다. 언제나 제불(諸佛)의 불가사의한 덕 생각하고, 언제나 실상(實相) 생각하여 업장을 녹여야 하리.
법계에 노닐고자 한다면, 어떤 상황에서건 몸가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과거의 잘못된 업장은 역사의 짐이자 굴레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과거의 잘못에 대한 자기반성과 참회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원효는 “모든 악업의 장애는 참회로써 제거하는 것”이라고 했고, 『금강삼매경』의 “만약 본심을 잃으면 곧 마땅히 참회해야 하는데, 참회의 법은 청량(淸凉)한 것”이라는 구절에 주목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참회로써 과거의 잘못된 행위 그 자체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 다만 먼저 지은 업이 현재에까지 흘러드는 것을 차단하려는 것입니다. 이에 관해서 원효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전에 있던 죄는 참회로 미칠 바가 아니며, 그것을 전에 있던 것이 아니게 할 수는 없다. 다만 그것이 나타나지 못하게 할뿐이니, 나타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오직 참회만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렁렁전의 죄를 참회한다는 것은 종자의 왕성한 작용을 현재에까지 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금강삼매경론』)
과거의 잘못된 관행에 오늘을 무방비상태로 내맡겨 둘 수는 없습니다. 과거의 잘못이나 죄악의 힘이 오늘의 삶에까지 범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지난날의 잘못에 대한 비판과 참회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들의 업장(業障)은 어제오늘 지은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먼 옛날부터 지어온 수많은 잘못들이 쌓여서 역사의 멍에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죄업(罪業)에도 그 실체나 자성(自性)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죄업의 실체가 없기에 반성과 참회의 길이 열리며, 죄업을 소멸할 방법이 있게 됩니다. 죄업의 실체가 없기에 죄업의 공포에 집착하거나 사로잡히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렇다고 죄업의 실체가 없다는 말을 따라 도무지 죄업이란 없다고 착각하여 뉘우칠 줄 모른다면 더 많은 고통에 얽혀들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원효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습니다.
방일하여 뉘우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업의 실상을 사유하지도 않는 이는, 죄의 자성 없지만 장차 지옥에 들어갈 것이다. 마치 종이호랑이가 환술사(幻術士)를 삼키듯.
모든 업장은 망상을 쫓아서 생겨납니다. 이 때문에 전도된 갖가지 망상에 얽혀서 온갖 번뇌를 일으키고 자기 스스로 얽맵니다.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육정(六情)을 통제 없이 내버려두면 고통의 상황을 초래하는 것이지요. 이 때문에 원효는 육정을 통어(統御)하여 참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효는 쟁관법(錚觀法)으로 엄장(嚴莊)을 지도하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쟁관법은 징 같은 것을 치면서 염불하는 수행법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금광명경』에는 금고(金鼓)를 치면서 참회하는 내용이 있어서 주목됩니다. 이 경의 참회품에 의하면, 금고를 치면서 참회게송을 소리 내어 읊듯이 쟁관법도 산란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수행에 몰두할 수 있도록 하는데 효과적이었을 것입니다.
김상현/동국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