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 멧돼지로 현신한 지장보살
우리나라 제일의 생지장도량으로는 보통 철원의 심원사를 꼽는다. 생지장이란 ‘살아계신 지장보살’이란 뜻이다.
심원사 법당에 들어서면 크기가 한 자 남짓한 지장보 살상을 뵈올 수 있다. 이 지장보살을 뵙고 있노라면 옛날 교복 자율화가 되기 이전의 단발머리 여고생이 연상된다.
꼭 단발머리를 빗어내린 듯한 모습의 지장보살은 수더분하 기가 시골의 소녀를 빼다박은 듯해서, 거기에서 그 어떤 숭고미나 경건미는 찾기가 어렵다. 그만큼 소박한 모습을 하고 있는 분이 바로 생지장보살이다. 심원사는 신라 진덕여왕 I년(647)에 그 유명한 영원조사가 창건한 절인데, 한때는 수행하는 대중들이 천 명을 넘을 때도 있어서 중세에는 매우 큰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보개산 줄기 남쪽으로는 심원사가 있고 북쪽으로는 석대암이라는 조그만 암자가 있다. 현재는 민통선 안쪽이기에 쉽게 가볼 수 없는 곳인데, 석대암 뒤쪽으로 난 봉우리를 환희봉이라 부르고 있다. 이 환희봉을 대소라치라 하기도 하는데 그 대소라치 너머에는 수백 호의 화전민이 살고 있었다.
이곳은 워낙 산세가 험준한데다 땅이 척박하여 농사를 짓는 것만으로는 생계를 꾸려 가기가 어려웠다. 기껏해야 조, 옥수수, 콩, 기장 따위가 고작이었고 그나마 일조량이 모자랄 경우에는 냉해로 흉년이 들곤 했다. 그렇게 되자, 마을 사람들은 자연스레 사냥을 곁들이게 되었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농사를 지었고 겨울 한 철은 사냥을 주업으로 삼았다. 특히 눈이 내리는 날이면 노루나 멧돼지 몰이 가 적격이었고 토끼나 족제비도 그런대로 수입이 짭짤했다. 사냥꾼들은 나름대로 수렵대라고 하는 조직을 형성하고 있었다.
수렵대 대장은 이순석이란 사람이었는데 그는 다섯 자밖에 안 되는 작달막한 키였지만 담이 세기로 소문이 났다. 물론 힘도 장사였고 또 날렵했다. 하루는 이순석이 친구 한 명을 대동하고 사냥을 나갔다. 창을 들고 활통을 어깨에 메었다. 둘은 대소라치 깊은 골짜기에 이르렀다.
숲은 우거져 한낮인데도 침침했고 겨울이라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눈은 아직 내리지 않았다.
이 골짝 저 골짝을 찾아 헤맸지만 다람쥐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았다. 정말이지 그즈음 들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렇게 개미 새끼 한 마리 구경할 수 없는 날은 아직까지 없었다. “여보게, 대장. 오늘은 아무래도 허탕인 것 같네. 참 이상하군. 이렇게 개미 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 적은 없었는데.” “친구, 둘이 있을 때는 대장이라 부르지 말고 그냥 이름을 불러 주게. 쑥스럽구먼. 그리고 사냥이란 게 꼭 잡히기를 바랄 순 없지. 어쩌다 운이 좋으면 큰 것이 걸려들지 누가 아는가?” “그야 자네 말도 일리가 있기는 하네. 하지만 요즈음 우린 먹을 양식마저 떨어졌다네.” “아니, 가을에 수확을 했을 게 아닌가.
이제 초겨울인데 벌써 양식이 떨어지면 보릿고개를 어찌할 셈인가” “쉿!” 친구가 손가락을 입에 대며 짧은 파열음을 냈다. 순석이 얼굴을 돌렸다. “저기, 저기 좀 보게. 저게 뭘까? 호랑이 같기도 하구 아니야 곰? 아니 아니, 저것은 돼지가 분명해.” 친구가 소리를 낮추며 말하는 사이 순석의 손에는 이미 화살을 메긴 활줄이 팽팽하게 당겨지고 있었다. 순석은 손에 땀을 쥐며 시위를 놓았다.
“표-!” 화살은 돼지의 왼쪽 어깻죽지에 정확하게 꽂혔다. 비틀거리며 달아나는 돼지는 노오란 털을 지니고 있었다. 아름다운 황금빛멧돼지였다. 숲 사이로 언뜻언뜻 내리꽃히는 햇살을 받을 때는 더욱 아름다웠다. 두 사람은 핏자국을 따라 능선과 골짜기를 벌써 몇 개나 넘었다. 계곡에 이르렀을 때 돼지의 흔적은 더 이상 없었다.
그들은 목이 말랐다. 마침 그들이 앉아 있던 옆에 조그마한 웅덩이가 있었다. 타는 갈증을 적시기 위해 그들은 엎드려 한 참 동안 정신없이 마셔 댔다. 순석이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어어!” 친구가 순석을 바라보았다. “여기 물 속에 뭐가 있어. 물이 출렁이지 않게 잠시만 기다려 봐.” 잠시 후 동그라미를 그리며 번져 가던 파장이 멈추고 물은 거울처럼 깨끗했다. 거기에 순석이 방금 전에 쏘았던 화살이 꽂혀 있었다. 순석은 화살을 잡아당겼다. 화살 끝에 돌 하나가 묻어 나왔다.
단발머리를 빗어 내린 것 같은 조그만 석상이었다. 손에는 조그마한 돌멩이가 쥐어져 있었다. 순석은 그 석상이 지장보살임을 간파했다. 언젠가 어떤 스님으로부터 들은 지장보살을 생각해 냈다. 손바닥 위의 밝은 구슬은 너무나 영롱하여 얼음인 듯 비치는 대상에 따라 색깔을 바꿈이 자유롭네. 몇 번이나 분부했던가 오욕의 어둠을 뚫고 나오라고 하지만 그 속에 갇힌 중생 밝은 구슬을 보려 하지 않네. “여보게, 이분은 지장보살님일세. 저 왼손에 들고 계시는 작은 구슬을 보게나. 지장보살은 명주를 들고 계시거든.” “그래? 우리 건져 올려 보세.” 그들은 있는 힘을 다해 지장보살 석상을 들어 올렸으나 수면까지는 쉽게 떠오르는데 더 이상은 무게 때문에 들 수가 없 었다.
하지만 그 석상은 크기로 보아 그 석상의 두세 배라도 장정 혼자 충분히 들어 올릴 수 있을 정도로 작았다. 순석은 화살이 꽂힌 석상을 조용히 내려놓으며 합장을 했다. “지장보살님! 저희가 어리석어 성상을 몰라뵙고 활을 쏘았습니다. 얼마나 어깨가 아프시겠습니까? 하오나 저희들의 어려운 생활 형편도 참작해 주옵소서. 저회들은 농사를 짓는 것만으로는 생계를 이어 나갈 수 없어서 사냥을 하게 되었고 고귀한 생명을 수없이 빼앗았나이다.
보살님께서는 저회들의 잘못을 용서하옵소서. 만일 저희들을 용서하신다면 내일 다시 찾아 뵙겠으니 그 증거로 샘가에 나와 앉아 계시옵소서. 그렇게 되면 저희들도 당장에 출가하여 지장보살님을 모시고 지성을 다해 수도를 하겠나이다.” 그들은 그처럼 기도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순석은 수렵대 3백여 명을 이끌고 지장보살이 잠겨 있는 샘으로 올라갔다.
과연 지장보살 석상은 웅덩이 가에 나와 앉아 계셨다. 이를 본 순석과 그의 친구는 그 자리에서 미리 준비해 간 배코칼로 삭발을 했다. 그리고 수렵대 3백여 명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그 자리에는 절이 세워졌다. 절 이름을 석대암이라 했다. 석대암에 모셔진 지장보살 석상은 2백여 년 동안 중생들의 귀의 처가 되었다. 그러다가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민통선이 이어져 신도들이 참배할 수 없게 되자 석대암에 모셔져 있던 지장보살 석상은 보개산 남쪽 기슭웨 자리한 심원사로 이사를 하신 것이다.
지금도 심원사 지장보살상에는 그때 이순석의 화살을 맞은 자국이 왼쪽 어깨에 선명히 나 있다. 이는 지장보살이 살생을 업으로 하고 살아가는 대소라치 사람들에게서 산짐승을 보호하려는 자비심에서 현신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수렵이나 어업, 또는 정육점, 도살업을 주로 하는 신도들이 심원사를 찾아 지장보살께 참회기도를 올리고 나면 사업이 더욱 번성한다고 하여 연일 초만원을 이루고 있다.
한 번은 지장보살을 모신 석대암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법당을 맡은 부전스님이 옥등잔에 불을 켜다가 잘못하여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옥등잔은 절반으로 쫙 갈라지고 못 쓰게 되었다. 부전스님은 송구하기 그지 없었다. 값을 떠나서 성보를 깨뜨렸다는 자책감에 몸둘 바를 몰라했다. 그는 다시 다른 등잔을 구하러 요사채로 내려오는데 갑자기 등뒤 법당 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여보게, 부전. 내가 옥등잔을 붙여 놓았으니 걱정하지 말고 와서 불을 붙여라.” 부전은 얼른 되돌아 법당으로 달려갔다. 불을 켜보니 옥등잔은 깨어진 금이 남아 있을 뿐 좀전처럼 불을 밝힐 수 있었다. 기름도 새지 않았다. 부전은 지장보살 석상 앞에서 무수히 절을 했다. 이 지장보살 석상은 청록색이다.
나중에 여러 번 개금불사를 했지만 며칠 안 가서 저절로 벗겨지곤 했다고 한다. 그래서 금은 아예 개금을 하지 않은 순수한 돌 색깔 그대로 모셔 놓고 있다.
<동봉스님이 풀어쓴 불교설화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