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나라 순제의 불심

원나라 순제의 불심

황해도 벽성군 북숭산에 있는 대가람 신광사는 나한도량으로 유명한 절이다. 여기에 모셔진 5백 나한은 윤질이라는 중국의 사신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예물로 모시고 온 것이다.

그때가 고려 태조 6년(923)이었다. 1334년 고려 충숙왕 복위 3년 원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순례(1333–1367 재위)는 국가의 재정을 기울여 동양 제일의 대가람을 세웠다. 그것이 바로 신광사이다. 순제는 젊은 시절 아목가라는 벼슬 자리에 있었다. 그는 뜻하지 않은 사건에 연루되어 고려의 탐라도, 즉 오늘날의 제주도로 귀양을 갔다.

거기서 몇 해를 갇혀 있다가 육지로 들어오는 배를 얻어 타고 몰래 목포항에 입항했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감시의 눈길이 심해 결국 목포 땅은 밟아 보지도 못하고 다시 황해도 해주로 가는 배를 갈아타야만 했다. 며칠을 배 안에서 시달린 아목가는 해주항이 가까워 오자 갑판에 나와 멀리 육지를 바라보았다.

그는 너무나 기뻐 춤이라도 덩실덩실 추고 싶었다. 바다에서의 며칠은 그에게 있어서는 몇 년과도 맞먹는 지루한 시간이었다. 배가 닿자 그는 갑판을 박차고 뛰어내렸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는 것은 육지의 땅 냄새가 아니었다. 원나라의 문종(1329–1332 재위)이 보낸 칙서였다. 그 내용은 그가 제주도를 빠져 나온 것이 들통 나서 원나라 조정에서 해주 부근 대청도에 그를 재감금하라는 것이었다.

아목가는 하는 수 없이 해주에서 마련해 준 배를 타고 대청도로 향했다. 죽기보다 싫은 고도의 외로움이었지만 어쩔수가 없었다. 그는 거기서 1년 남짓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때 그는 마침 휴가를 얻어 황해도 서해안 일대를 두루 관람하였다. 해주에 다시 건너와 북숭산에 이르렀을 때, 숲속에서 알 수 없는 서기가 하늘로 치솟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한달음에 달려 갔다.

거기에 부처님 한 분이 계셨다. 깊이 묻히지는 않았지만 썩는 낙엽들이 오랜 세월을 말해 주며 그 위에 쌓여 있었다. 그는 낙엽을 헤치고 불상을 꺼냈다. “부처님의 처지가 어쩌면 저와 그리도 같사옵니까. 비와 이슬을 맞고 온갖 눈과 바람을 견디셔야 했으니 제 마음이 매우 아프옵니다.” 아목가는 어릴 적부터 부처님과 인연을 맺어 왔다.

열댓 살 되었을 때 그는 가장 가까운 시종과 함께 절에 갔다가 거기서 부처님의 법문을 들었다. “우리가 부처님을 존경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그의 꺠달음이 고매하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 분을 존경하는 것은 그분께서 자신에게 주어진 왕위와 재산과 국토와 미녀들까지도 초개같이 버리셨다는 데에 있습니다. 부처님은 실천가이십니다.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는 명예와 부와 권력과 여자를 깨끗하게 버림으로써 그런 것들의 덧없음을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그 자신이 실천에 옮겨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출가를 한다는 것은 한 국토를 관리하는 국왕의 자리보다 더욱 장한 일입니다” 아목가는 감성이 예민하고 풍부한 나이였다. 스님의 법문을 들으면서 출가해 버릴까도 마음을 먹었었다. 그때 스님은 신도들을 앞에 놓고 다시 법문을 계속했다. “그러나 출가라는 것이 생각처럼 쉬운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집착하던 대상을 초월한다는 것은 자신을 송두리째 죽여 버리는 위대한 작업입니다. 그러므로 출가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요, 장한 일입니다.” 아목가는 그후 불교를 일으켜 보겠다는 원대한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가 왕자인 만큼 언젠가는 왕위에 오를 것이고 그렇게 되면 불교 중흥에 한몫을 하겠다고 맹세를 했었다. 그런데 그에게 다가온 것은 화려한 왕위가 아니라 비참한 귀양살이였다.

그는 부처님을 뵈오면 자신의 처지가 비바람과 눈과 이슬에 맞으며 숲속에 누워 계시는 부처님과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의 두 눈에서는 슬픔을 주체할 수 없어 흐른는 눈물이 장마비에 경사진 밭 골이 패듯 얼굴에 주름을 만들어 냈다. 그는 부처님께 무릎을 꿇은 채 기도했다.

“부처님이시여, 부처님께서는 이미 버리신 왕위의 자리를 저는 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 자리를 탐내는 것은 욕심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백성들을 보살피기 위함이며 불교를 중흥시켜 보려는 또 하나의 원력 때문입니다. 부처님이시여, 제가 만일 환궁하여 천자의 자리에 오르면 부처님께 이 세상에서 가장 장엄하고 아름다운 금당을 지어드리겠습니다.” 숲속에서 비바람과 눈, 서리, 이슬을 맞고 있는 불상은 바로 옛날 이곳에 절이 있었다는 증거였다.

신광사가 여기 있었다. 신광사는 그래도 꽤나 큰 도량이었는데 전란으로 완전히 소실되고 불상 한 구가 땅 속에 묻혀 있다가 아목가에 의해 발견된 것이었다. 아목가는 원을 세우고 나서 무수히 절을 했다. 무릎은 벗겨져 피가 흘렀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온몸이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는 사흘 밤 나흘 낮을 기도했다. 그는 모든 것을 부처님에게 내맡겨 버린 것이었다. 귀양살이가 풀리는 것도 부처님의 가피라 생각했고 환궁을하여 등극을하더라도 그것은 오직 부처님의 뜻이라 생각했다.

그는 가능과 불가능을 논리적으로 따질 생각이 없었다. 다만 모든 문제를 부처님이 해결해 주실 것으로 믿고 나흘을 기도한 것이다. 대청도에서 휴가 날짜가 다 되었다는 통고만 오지 않았어도 그는며칠이 더 걸릴지 몰랐을 것이다. 그는 지친 몸을 이끌고 대청도로 돌아왔다. 한편 중국의 원나라는 국내 정세가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혼란 속에서 숨가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문종이 세상을 떠나자 영종이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한 달도 채 안 되어 반대파들에 의해 암살되었다.

조정에는 천자가 있어야 했다. 그러나 아무나 그 자리에 모실 수는 없었다. 그들은 고려국의 대청도에 귀양 가 있는 아목가를 생각했다. 대청도에서의 생활도 이젠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던 아목가는 며칠 후 중국으로부터 온 사신에게서 뜻밖의 낭보를 접하게 되었다. 환국해서 천자의 자리에 올라 나라를 다스려 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부처님의 가피라 생각하고 기쁘게 배에 올랐다. “아! 얼마나 오랜만에 보는 고국의 산천이냐!”

그는 연신 감격스런 마음을 금치 못하며 천자의 자리에 나아가 순제라고 명명했다. 그에게는 산적해 있는 문제들이 많았다. 우선 정치적으로 안정을 꾀해야 했다. 어수선한 정치하에서 기우뚱대던 국가 경제를 바로 세워야 했다. 민심도 수습을 해야 했다. 그는 등극 직후 1년 동안은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나갔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다. 피곤한 몸을 쉬느라 의자에 기대어 졸고 있는데 해주의 북숭산에서 뵈었던 부처님이 나타났다. “순제여! 당신은 나에게 한 약속을 잊으셨소이까?” 정신을 차린 순제는 그제서야 바쁘게 돌아가는 정사 때문에 부처님께 약속한 것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중국의 재력을 기울여 그 불상이 발견된 해주의 북숭산에 절을 짓기 시작했다.

원나라의 대감, 즉 영의정이 이끄는 37명의 뛰어난 공장이 참여했다. 영의정의 이름은 송골아라했다. 그리고 고려에서는 시중 김석견과 밀직부사 이수산이 이끄는 국내 제일의 목공과 석공들이 참여했다. 그때 지어진 건물은 법당인 대웅전, 즉 보광명전을 비롯하여 장랑, 누각, 재료, 석탑, 나한전, 침실, 석경판을 봉안할 해장전, 중문, 종루, 양진당, 영마전 등 동국 제일의 대가람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절 이름을 신광사라 했다.

이 이름은 옛날부터 내려오던 이름을 그대로 쓴 것이어서 순제가 창건한 신광사를 창건이라 하지 않고 중창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이 절은 그 후 한 번도 불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한 과객이 이 절에 머무르고 있을 때 누각의 남쪽을 바라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이 절을 처음 지을 때, 원나라 순제는 유명한 도참가를 초빙하여 지리를 살펴본 뒤 남산에 돌로 된 항아리를 묻고 그 속에 물을 저장하게 했었다. 그래서 여지껏 불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 돌항아리가 기울어지고 금이 가서 물이 새고 이으니, 어쩌면 좋겠는가, 앞으로 몇 년밖에 안 남았구나.” 과연 몇 해 뒤인 1677년(조선 숙종 3년) 4월 5일 원인 모를 화재가 일어나 전각, 불상, 요사채, 승방, 등을 완전히 태워버리고 말았다.

다음 해 신광사는 다시 복원불사를 시작하여 보광전, 설법전, 약사전, 시왕전, 만세루, 승료, 탑 등을 복원하여 중건하고 27년이 지난 1705년(숙종 31년)에 이르러 나한전을 세웠다.

<동봉스님이 풀어쓴 불교설화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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