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여러 날 왕후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녀의 병세는 갈수록 악화되어 아무리 어의가 달려오고, 좋다는 약을 다 써보아도 도대체 효험이 없었다. 애장왕(800–808 재위)을 비롯하여 왕자와 공주, 대신들과 궁녀에 이르기까지 모두들 근심에 싸여 왕후의 쾌유를 빌었다. 애장왕은 왕후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어서 일어나시오. 힘을 차려야 하오. 임자가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알기나 하오? 그리고 뭐니뭐니 해도 짐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은 중전뿐이오” 그때 신하 한 사람이 있다가 말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우리 신라는 불교를 통해서 성장해왔고 통일을 이루었으며 또 오늘날까지 유지되어 왔사옵니다. 그것은 불교에는 그만큼 우리가 상상할 수 업는 어떤 힘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신라 전지역을 두루 찾아서라도 고승의 힘을 의지함이 좋을 듯 하나이다. 통촉하옵소서.” 애장왕은 지푸라기라도 잡고픈 심정이었기에 어떠한 방법이든 마다할 리 없었다.
그렇게 해서 애장왕은 전국의 명산대찰에 사신을 급파하여 덕이 높고 도력이 뛰어난 고승이 있으면 모셔 오도록 했다. 한편 고승을 찾아 헤매던 한 무리의 신하들은 우두산(오늘날의 가야산) 근처를 지나다가 하늘로 피어오르는 신령스러운 광명을 발견했다.
그들은 숲을 헤치고 계곡을 건너고 산등성을 돌고 돌며 빛이 솟아오르는 곳을 찾아 다녔다. 마침내 빛이 솟아오르는 근원지를 찾은 신하들은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 신령스런 광명은 삼매에 든 두 고승의 정수리로부터 나오는 것이었다.
신하들은 고승이 삼매로부터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한나절이 훨씬 지나서야 두 고승은 삼매로부터 깨어났다. “어디서 오신 분들이신지요?” “예, 저희는 왕의 특사 자격으로 덕이 높고 도력이 있는 고승 석덕을 찾아왔습니다. 두 분 스님의 법호가…?” “산승은 순응이라 하고 여기 이 스신은 이정이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무슨 덕이 있으며 도가 높겠습니까? 공연히 헛걸음만 하셨습니다.
그나저나 연유는 무엇이온지요?” “왕후께서는 불치병에 신음하고 계십니다. 병명도 알 수 없거니와 아무리 좋은 약도 효험이 없고 어의도 손을 놓고 있는 실정이옵니다. 두 분 고승께서 부처님의 가피로 구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나라를 위한 일이고 백성을 위한 일입니다.” 순응화상과 이정화상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기, 오색 실을 드릴 터이니 이 오색실을 속히 가지고 돌아가시어 치료하십시오.” “이 실이면 왕후께서 나으실 수 있겠습니까?” “장담은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 차도는 있으실 것입니다. 이 실의 한쪽 끝은 문고리에 매시고 다른 한쪽 끝은 정원의 나무에 매십시오.” “정원의 나무라!” “정원에 무슨 나무가 있습니까?” “배나무가 있습니다.”
“배나무라면 더욱 좋습니다. 속히 떠나십시오. 부처님의 자비가호는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신하가 돌아가서 순응과 이정이 시킨 대로 실의 한 쪽 끝은 문고리에 매고 다른 한 쪽 끝은 배나무에 맸다. 그리고 두 스님이 일러준 대로 왕궁에서는 기도를 시작했다. “대방광불화엄경 대방광불화엄경 대방광불화엄경…” 대방광불화엄경을 부르는 소리가 온통 궁궐 내에 가득했다. 그 소리는 궁내외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 내기에 그만이었다.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남녀노소 빈부귀천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대방광불화엄경’ 일곱자에 갈무리되어 울려퍼졌다. 사흘이 자나자 왕후의 병세는 차도가 있었다. 그런데 정원의 배나무는 서서히 말라 가고 있었다. 왕후가 완전히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날 배나무는 완전히 말라 버렸다. 왕과 신하들은 이 엄청난 부사의력에 감동되어 몸소 신하들과 왕자들을 이끌고 우두산으로 두 스님을 찾아 갔다.
한편, 순응과 이정 두 고승은 중국에 건너가 유학을 하고 돌아와서는 대가람 터를 찾고 있었다. 그것은 중국의 지공화상탑묘에서 있었던 기연 때문이었다. 신림의 제자 순응화상은 그보다 나이가 한참 아래인 이정과 함께 신라 혜공왕 2년(766) 중국으로 구도의 길을 떠나 여러 곳을 다니며 수학했다. 특히 화엄학에 관심이 있어 화엄학을 전공한 순응과 이정은 몇 년 뒤에 신라로 돌아왔다.
그들은 신라로 돌아오기 전 지공화상의 탑묘를 참배하게 되었다. 지공화상은 본디 양무제(502–549 재위)때 활약했던 고승이었는데 ‘동국답산기’라는 저술을 남겼다. 이 책은 일종의 기행문으로 중국과 고구려, 백제, 신라의 명산을 두루 답파하면서 보고 느낀 점들을 기록한 것이었다. 지공화상은 입적할 때 유언을 남겼다.
“내가 입적한 뒤 신라에서 두 사람의 승려가 찾아올 것이다. 그들에게 나의 책 ‘동국답산기’를 전하거라.” 그 유언은 2백여 년이 넘도록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이어져 왔고 마침내 순응과 이정이 탑묘를 찾아가자 지공의 몇 대 후손들이 ‘동국답산기’를 전해주면서 유언까지 전했다. 두 스님은 유언을 생각하며 지공화상의 현신을 기도했다.
불보살이 중생의 기도에 감응하여 헌신하듯 지공화상 또한 헌신 하리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기도는 일 주일간 계속되었다. 순응화상과 이정화상은 교대로 목탁을 잡았다. 이윽고 일 주일의 기도가 끝날 무렵 탑으로부터 지공화상이 나타났다.
그는 오색구름을 타고 있었다. “그대들의 구도심은 참으로 놀랍구나. 내 이제 그대들에게 옷과 발우를 주어 법이 신라로 전해짐을 증표하겠다. 불법이란 능한 자가 가져 가는 것이다. 그리고 너희 신라 땅 우두산 서쪽에서 불법이 크게 흥하리니 그곳에 가서 대가람을 세우라.” 지공화상은 말을 마치고 오색구름과 함께 탑 속으로 사라졌다.
구법의 행각, 즉 유학길에서 돌아온 순응화상과 이정화상은 신라로 돌아와 곧바로 우두산을 찾았다. 그들은 우두산의 산세가 빼어나고 맑은 물이 흐르는 것을 보고 임시로 터를 잡아 정진을 계속했다. 그들은 삼매에 들어 이을 때는 항상 정수리로부터 신령스러운 광명이 하늘을 향해 치솟곤 하였는데 애장왕의 신하들이 찾아갔을 떄도 광명은 솟아올랐다.
이러한 인연으로 말미암아 애장왕은 국가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았고 마침내 해인사라는 대가람이 창건되었다. 애장왕 3년(802)의 일이었다. 그러니까 순응과 이정이 유학길에서 돌아온 지 20여 년이 훨씬 지나서였다. 애장왕이 태자 헌덕왕에게 자리를 물려줄 즈음 왕후는 성목 태후가 되었고 순응도 입적하였다.
순응의 뒤를 이어서 이정이 계속해서 불사를 했다. 그때 성목 태후는 전답 2천 5백 결을 하사하였으며 이정이 해인사불사를 완성하도록 온 힘을 기울여 도와주었다. 거기에는 물론 헌덕왕의 불심도 크게 작용하였다.
<동봉스님이 풀어쓴 불교설화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