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 처녀의 보은

호랑이 처녀의 보은

신라 제38대 원성왕(785–798 재위) 때의 일이다. 서라벌에 김현이라는 젊은 낭도가 살고 있었다.

김현은 불심이 두터운 데다 남다른 열정은 있었지만 아직 짝을 찾지 못했다. 해마다 음력 2월 초여드렛날부터 보름날까지 서라벌의 남녀들은 너나할것없이 흥륜사 전탑을 돌면서 각자의 소원을 빌었다.

이때 빈 소원은 거의 다 이루어졌고 그것이 신라의 연례행사로 전해져 왔다. 불교에서는 2월 초여드레에 부처님의 출가한 날을 기리는 출가재일 행사가 있고, 2월 보름날에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날을 기리는 열반재일 행사가 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출가는 세간적 삶을 마감하고 진리를 구현하기 위해 출세간적인 고고한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게다가 열반이란 출세간적인 삶의 완성을 뜻한다. 신라인들이 초여드렛날부터 보름날까지를 탑돌이 행사기간으로 정했다는 것 자체는 그만큼 소중하다.

불교에서 이 두 재일은 초파일과 섣달 초여드레 성도재일과 더불어 4대 명절로 꼽는다. 4월 초여드레는 부처님이 이 땅에 세간적 모습으로 오신 날이요, 2월 초여드레는 세간적 삶을 마감하고 정신적 삶을 새롭게 시작하신 날이며, 섣달 초여드레는 우주와 인생의 참된 가치를 어울림의 법칙, 즉 연기의 도리로써 깨친 날이다.

이를 ‘세 여드렛날’이라 하고 거기에 열반재일을 더하여 4대 명절이라고 한다. 김현은 소원을 빌기 위해 탑돌이를 했다.

그런데 그때 김현과 간발의 차이로 뒤따라 탑을 도는 여인이 있었다. 한참을 태연한 체하며 돌았지만 김현은 자연히 그 여인에게 마음이 쓰였다. ‘도대체 어디 사는 여인이며 누굴까? 시종도 거느리지 않은채 젊은 처녀가 혼자서 탑돌이를 하다니…’ 김현은 마음을 가다듬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하지만 눈길은 자꾸만 뒤따르는 여인에게로 갔다.

얼핏 보니 참으로 아름답기 그지없는 여인이었다. 마침 열나흗날 밤이라 달은 휘영청 밝았다. 김현은 밝은 달빛에게 감사했다. 여인도 부지런히 염불을 외워 댔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김현은 걸음을 늦추어 여인과 나란히 서서 보조를 맞추었다. 김현이 다감스러운 눈길을 주자, 여인 또한 싫지 않은 모양이었다. 마침내 탑돌이는 건성이 되었고 둘은 서로 팔을 엇걸었다. 김현이 말했다.

“어디 사는 낭자오이까?” “마음이 가면 되었지 거처는 알아 무엇하오며, 신분은 알아 무엇하리까?” 김현은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참으로 아름다우십니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하오. 혹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는 아니신지?” 여인은 아름답다는 남자의 말에 목례로 답했다. 입은 열지 않았다. 처녀의 대답이 더욱 김현의 마음을 끌어당겼다.

약간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잠깐 조용한 곳으로 가서 얘기라도 나눔이 어떠하올지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일진대…” “여기도 조용하지 않습니까? 하오나 도령의 듯에 따르지요.” 여인은 순순히 따라나섰다. 김현은 여인의 손을 잡아 끌고 조용하고 후미진 곳을 찾았다.

달빛이 아름답게 흐르는 밤이라 어디든 조용하게 느껴졌지만, 아무래도 초봄의 쌀쌀함을 피하기 위해서는 움막에라도 들어가야 했다. 마침 흥륜사 행랑 가운데 방 하나가 비어 있었다. 김현은 여인에게 눈짓을 했다. 둘은 방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에 들어서자 마자 김현은 마음이 급했다. 그는 벽장을 열어 보았다.

이불이 있었다. 목침도 있었다. 그는 요와 이불을 한꺼번에 꺼내어 폈다. 여인은 김현의 동작을 넋 나간 사람처럼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환락의 시간이 지나고 허무와 포만이 둘을 행복하게 했다. 여인이 포만을 느낌에 대해 김현은 허무를 느꼈지만 그것이 그들에게는 더없는 행복감이었다. 자정이 지나고 또 시간이 흘렀다. 여인이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었다. “아니, 이 밤중에 어딜 가시려오?” 김현의 물음에 여인이 답했다. “소녀, 이제 집으로 돌아갈까 하옵니다.

밤이 너무 깊었으므로 어머님과 오빠들이 찾을 것이옵니다.” “그렇다면 나도 같이 가겠소.” 여인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것은 안 될 말이옵니다. 저의 어머니는 이해하실 수 있사오나 제 오빠들은 도령님을 그냥 두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러니 제발 그 말만은 거두어 주십시오.” 김현은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한참을 가다가 서산 기슭에 이르렀다. 오두막이 한 채 나타났고 여인은 그 집으로 들어가며 김현에게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방안에는 늙은 할미가 있었다. 가구라고는 별로 없었고 병풍 한 폭만이 벽 쪽에 기대어 서 있었다. 할미가 김현을 보고는 여인에게 누구냐는 듯 눈으로 물었다. 여인이 사실대로 고하자 할미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김현을 바라보았다. “얘야, 하기는 잘 했다만 안 한 것보다 못하구나. 그러나 이미 저지른 일이니 길게 나무랄 수도 없구나.

그나저나 네 오빠들이 들어오면 가만 두지 않을텐데 어쩌면 좋겠느냐?” 여인이 말했다. “어머니만 믿겠습니다. 숨길 곳을 일러 주십시오.” “병풍 뒤에 너희들 모르는 골방이 하나 있다. 그리로 어서 숨기도록 해라. 시간이 없구나.” 김현은 뭐가 통 알 수가 없었다. 머리 속이 복잡했다. 도대체 자기한테는 한마디도 건네지 않고 모녀끼리만 말을 주고받았고, 게다가 여인의 오빠들이 무서우면 얼마나 무서운 자들이며 병풍 뒤에 골방이 있다는 것은 뭘까. 그리고 자기를 거기다 숨기려는 의도가 김현으로서는 너무도 의아했다.

여인이 손을 끌고 등을 밀면서 병풍 뒤로 가니 거기에 벽과 같은 형태로 작은 쪽문이 있었다. 김현은 시키는 대로 골방에 들어갔다. 조금 있으려니, 과연 밖이 소란스럽더니 이내 방안으로 누군가 들어오는 기척이 있었다. 김현은 쪽문 틈으로 살펴보다가 깜짝 놀라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하였다. 집채만한 호랑이 세 마리가 들어와서 사람의 말을 하는 것이었다. 호랑이들은 킁킁 냄새를 맡는 듯했다. “아니, 이거 사람 냄새 아니야.” 다른 호랑이가 말했다.

“글쎄, 그런 것 같애.” 다른 한 마리 호랑이도 말했다. “시장하던 차에 마침 잘됐다. 찾아서 요기를 해야겠는 걸.” “어머니, 어디다 숨겨 놓으셨어요? 빨리 내놓으세요.” “누이야, 네가 숨겼냐. 있으면 우리도 함께 먹자.” 그때 할미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너희들 코가 이상하구나. 냄새는 무슨 냄새가 난다고 그러느냐? 그래, 너희들 고뿔이라도 걸린 게냐.” 그때였다. 하늘에서 소리가 났다.

“너희들은 소중한 생명을 많이 해쳤구나. 너희들 중에 한 놈을 죽여 악을 징계하겠다.” 호랑이 세 마리는 그 소리를 듣자 모두 근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처녀가 말했다. “세 분 오빠는 멀리 달아나십시오. 만일 징계를 한다면 제가 그 벌을 대신 받겠습니다.

어서 피하세요, 어서.” 세 호랑이는 이기적이었다. 누이의 말을 듣자마자 꼬리가 빠져라 도망을 쳤다. ‘역시 불제자답군. 아! 참으로 아름다운 마음씨로고.’ 여인이 벽장문을 열고 김현에게 나오라고 손짓을 했다. 여인이 말했다. “이제 이렇게 된 바에 숨김없이 말씀드리지요. 처음에는 수줍기도 하고 또 우리 집안이 여느 보통 인간의 집안과 달라 낭군께서 우리 집에 오신다는 것을 사양했습니다.” 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군요.” 여인이 말을 이어 나갔다.

“저와 낭군은 비록 유는 다르나 하룻밤의 정사를 통해 즐거움을 같이했으니 부부의 의를 맺은 것입니다.” 김현은 계면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이제 저의 세 오빠는 악이 극하여 하늘의 미움을 샀습니다. 하지만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재앙을 제가 혼자 받기로 했습니다.” “원, 저런.” “하여, 다른 사람의 손에 죽느니보다 차라리 낭군의 칼날에 죽어 은덕을 갚을까 합니다.”

여인은 김현이 뭐라 말할 것 같은 표정을 짓자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잠자코 들으십시오. 제가 내일 시가에 들어가 사람들을 해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보통사람으로는 저를 어찌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나랏님이 높은 벼슬을 약속하고 사람을 선택하여 저를 잡게 할 것입니다. 그때 낭군은 겁내지 말고 나랏님께 품하여 그 공을 세우십시오. 그것이 바로 저를 위하는 길이요 낭군을 위하는 길이며 제 가족을 위하는 길입니다. 성 북쪽의 숲까지 나오시면 공터가 있습니다.

거기서 저는 낭군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김현은 기가 막혔다. 이 아름다운 여인이 호랑이라니, 또 설사 호랑이라 한들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겠는가 싶었다. 김현이 말했다. “사람과 사람이 관계함은 인륜의 떳떳한 도리입니다. 물론 이류중생과 관계함은 떳떳치 못한 일이고요. 하지만 나는 사람을 상대한 것이지 이류를 관계한 것은 아닙니다. 설사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우리는 임 잘 지냈고, 또한 배필이나 다름없습니다.

어떻게 사람의 탈을 쓰고 자기 짝을 죽여 한 세상의 부귀와 영달을 꾀할 수 있겠소. 차마 그 일은 할 수 없소이다.” 여인이 울면서 말했다. “저도 비록 호랑이이기는 하지만 죽음을 원하지는 않습니다. 하나 저의 죽음은 하늘의 명령이며, 또한 하루빨리 축생의 몸을 벗어나 인간이 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제가 죽음으로써 다섯 가지 이익이 갖추어집니다. 즉, 첫째는 전생의 죄를 씻는 것이니 하늘의 부름으로 대신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으니 축생으로서의 업이 끝나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제가 죽음으로써 낭군께서 잘되실 수 있음입니다. 넷째는 우리 일족이 하를 면할 수 있으니 그보다 다행이 없사오며, 다섯째는 백성들이 편안히 잠들 수 있으니 나라의 기쁨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저를 위하여 절을 짓고 부처님의 경전을 풀이하고 읽어 주시어 제가 좋은 몸을 받는 데 도움이 되게 해 주십시오. 그것이 낭군께서 제게 보답하는 가장 큰일입니다.

부탁입니다. 저는 어차피 죽게 되어 있으니까요.” 말을 마치자 여인은 방을 뛰쳐나갔다. 다음날, 과연 사나운 호랑이 한 마리가 성안으로 들어와서 사람들을 헤치고 다녔다. 그러나 사람을 죽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원성왕이 이 소식을 듣고 명을 내렸다. “호랑이를 잡는 자에게는 2급의 벼슬을 주겠노라.”

방을 본 김현에게 2급 벼슬을 먼저 주어 격려했다. 김현이 칼을 들고 북쪽의 숲속 공터로 나갔다. 아직 사람들은 몰려들지 않았다. 거기에 범이 보였다. 범은 김현을 보는 순간 낭자로 둔갑해 버렸다. 그리고 반갑게 맞으며 말했다.

“잘 나와 주셨습니다. 낭군은 잊지 마십시오. 오늘 내 발톱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은 모두 흥륜사의 된장을 바르고 그 절에서 부는 법라 소리를 들으면 깨끗이 치유됩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여인은 김현에게서 칼을 빼앗아 스스로 목을 찔러 넘어졌다. 그녀는 다시 호랑이의 모습으로 돌아가 널브러져 있었다. 잠시 후 사람들이 김현의 뒤를 쫓아 공터로 나왔다. 김현은 사실을 숨기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호랑이는 이미 잡혔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은 여러분들이나 가족들 중에서 행여 이 호랑이에게 다치신 분이 계시면 그 다친 상처에 흥륜사의 된장을 바르시고 흥륜사의 법라 소리를 들려주십시오. 그러면 상처가 곧 나으실 것입니다. 자, 그럼.” 사람들은 함성을 질러 댔다. “와.” “와, 와.” 김현은 벼슬을 했고 서천가에 절을 지어 호원사라 했다. 이는 호랑이의 원을 들어준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항상 ‘범망경’을 강설하여 호랑이의 저승길을 인도했으며, 제 목을 찔러 김현을 성공케 한 은혜에 보답하였다. 원래 이 이야기는 김현이 세상을 떠날 때 공개한 그의 비망록에서 비롯된다.

그는 호랑이 처녀와의 만남과 헤어짐을 그만이 알 수 있도록 비망록에 적어 두었다. 그 글은 ‘논호림’이라는 제목으로 지금까지 전한다고 ‘삼국유사’ ‘감통편’에 기록되어 있다.

<동봉스님이 풀어쓴 불교설화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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