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롱 아씨의 소원

아롱 아씨의 소원

중앙선 철도를 따라가다 보면 원주, 제천을 지나 희방역이 있다. 이곳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가면 소백산 줄기 연화봉 아래 오롯하게 자리하고 있는 절이 바로 희방사이다.

경북 영풍군 풍기읍 수철리에 해당하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고운사의 말사다. 선덕여왕12년(643)에 두운조사가 창건했으며 철종 1년(1850)에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강월화상이 다시 중창하였다. 그러나 6.25때 4동 20여 칸의 당우와 사찰에 보관되어 오던 ‘월인석보’권1권과 권2는 판본마저 소실되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주존불은 무사하여 두운조사가 기거하던 천연동굴 속에 봉안하였다가 1954년 주지 안대근화상이 대웅전을 중건하고 다시 큰 법당에 모셨다. 작자도 주인공도 알 수 없는 부도 2기가 있는데 높이는 1.5미터와 1.3미터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이 희방사는 호랑이와의 인연에 의해 지어졌다는 매우 독특한 창건설화를 갖고 있다.

태백산 심원암에 두운조사라는 고승이 주석하고 있었다. 어느 날 문득 운수행각이 하고 싶어진 두운스님은 바랑을 챙겨 심원암을 떠났다. 꽤 많이 걸었으리라 생각하고 닷새째되는 날 소백산으로 찾아들었다. 산세를 보아하니 줄기차게 뻗어 내린 그 중턱에 마치 연꽃봉오리를 연상할 수 있는 조그마한 산봉우리가 있었다.

둘레를 쭈뼛쭈뼛 살피던 두운스님은 마침내 천연동굴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정착하게 되었다. 그는 천연동굴 외에 초암을 하나 더 짓고 광으로 사용했다. 어느 해 추운 겨울날이었다. 소백산은 눈이 내렸다 하면 보통 장정의 키를 넘곤 했으며 이듬해 봄이 되어서야 그 눈이 녹았다. 밖에는 눈이 펄펄 내리고 있었다.

이제 갓 서른을 넘긴 두운스님은 눈오는 밖을 내다보며 감상에 젖어 있었다. 밤이었다. 눈은 멎었고 달은 한껏 밝게 비치고 있었다. 홀로 고독을 삼키며, 설경을 구경하고 있는데 갑자기 부엌 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두운스님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부엌 쪽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그는 순간 그 자리에 굳어 버리고 말았다.

집채만한 호랑이가 고개를 빼고 쭈그려 않아 있었던 것이다. 잠시 후 정신을 가다듬어 보니 호랑이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두운스님은 생각했다. ‘저놈이 필시 배가 고픈 게로군.’ 두운스님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웃통을 벗어 던지고 호랑이 앞으로 성큼 나갔다.

“자, 나를 먹어라. 내 너에게 이 육신을 보시하겠다.

나는 불도를 닦는 사람으로서 일가칠척 하나 없는 혈혈단신이다. 거칠게 전혀 없으니 눈물만 짓지 말고 어서 그 주린 배를 채워라.” 그러나 호랑이는 오히려 한걸음 뒤로 물러설 뿐 덤비려 하지 않았다. 두운스님은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는 호랑이 앞으로 바싹 다가섰다. 호랑이는 떡하니 입을 버리고 있었다.

‘이놈이 아무래도 목에 뭐가 걸린 모양이야. 뭘까. 생선가시? 아니, 그럴 리 없지, 호랑이가 생선이나 잡아먹고 살아갈 놈이 아니니까. 그렇다면?’ 고개를 이리저리 기웃거려 봐도 눈에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팔을 걷어 부치고 입을 버릴 고 있는 호랑이에게 달려들어 입속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뭔가 잡히는 게 있었다.

그는 직감으로 그것이 여인의 비녀임을 알았다. 다음 순간 그의 손에는 호랑이 침과 뒤범벅된 비녀가 잡혀 나왔다. 순간 두운스님의 입에서 벽력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놈. 이 고얀 놈. 아무리 배가 고프기로서니 사람을 잡아먹어? 이놈 내가 당장 너를 때려죽이고 싶으나 살생을 금하는 불도를 닦는 사람으로 너와 같은 업을 짓고 싶지 않아 살려 주는 것이니 차후에 한 번 더 사람을 해치는 일이 있다면 용서하지 않으리라. 이놈.”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두운스님은 자신에게 내심 놀랐다. 호랑이 앞에서 큰소리를 치고 있는 자신이 대견스러웠다.

“당장 물러가거라. 이놈.” 호랑이는 말귀를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두어 번 주억대고는 어슬렁거리며 부엌을 빠져나갔다. 호랑이가 가 버리고 난 산사에는 다시 고요가 찾아들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밤이었다. 그날도 두운스님은 마음공부에 여념이 없었다.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우리 부처님은 설산에서 고행하실 때 한번 자리에 않으시면 6년 동안 꼼짝도 하지 않으셨다는데 나는 이 무슨 꼴인가. 부처님은 얼굴에 거미줄이 엉기고 머리에는 새들이 둥지를 쳐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셨다는데 나는 이게 무슨 모양인가. 아, 벌써 서른 고개에 올라섰으니 언제 마음을 깨칠까.’ 그때였다. 초암 앞마당에서 쿵하고 소리가 들렸다. 두운스님은 머리 끝이 쭈뼛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직 생사를 초월하려면 멀었나 보군. 이렇게 무서움을 느끼는 걸 보면.’ 그는 그러면서 자신을 향해 한 번 피식 웃고 방문을 열어제쳤다. 방문 바로 앞에는 호랑이가 웅크리고 않아 있었다. 두운스님은 밖으로 나갔다.

“이놈, 이번에는 못된 짓을 하다가 구해 달라고 온 것이냐?”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는 곤두박질을 칠 뻔하였다. 뭔가 시커먼 물체에 걸려 앞으로 고꾸라지면서 손에 잡히는 게 분명 보통의 것이 아니었다. 두운스님은 등불을 준비하여 다시 밖으로 나가 보니 그것은 멧돼지였다. 호랑이 발톱과 이빨자국에서 선지피를 흘리고 있었다.

두운스님은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이놈, 네가 영물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구나. 중이 고기 먹는 것을 보았더냐? 어서 너나 가지고 먹어라. 그리고 다시는 이런 물건을 절에 물고 들어와서는 안된다. 가거라.” 호랑이는 고개를 다시 주억거리더니, 그 멧돼지를 물고 어둠에 묻혀 버렸다. 다음날이었다.

두운스님은 멧돼지 피를 깨끗이 씻어 내고, ‘오늘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공부하리라’하고 정진에 들어갔다. 아침에 시작한 정진은 점심도 잊어버리고 저녁 공양조차 건너뛰었다. 그는 완전히 삼매에 몰입해 있었다. 그는 백골관을 닦고 이었다.

‘이 몸이 죽고 나서 세월이 흐르고 나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백골뿐이리라. 아, 집착할 수 없는 백골이여! 그런데 중생들은 그 쓸모 없는 백골에 집착하여 악을 저지르고 있구나. 내가 생사를 초월하지 못해 호랑이에게서 두 번씩이나 무서움증이 일었으니 이 모두는 백골에 대해 집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산야에 백골만이 흩어지리라. 아! 집착할만한 것이 못되는 백골이여.’ 어느새 땅거미가 지고 밤이 찾아왔다. 열 여드렛날 밤의 달은 이슥해서야 산머리에 교태를 드러냈다. 주위는 고요했고 산은 온통 흰눈으로 덮여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찬바람이 휩쓸고 지나가는 소리가 나더니 뒤이어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두운스님은 그 소리에 선정에서 깨어났다. 두 번이나 호랑이가 다녀간 뒤였기에 오늘밤도 분명 호랑이의 짓일 거라고 생각한 그는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문을 열었다.

밝은 달빛 아래 과연 호랑이가 쭈그리고 않아 있었다. 그런데 그 앞에 웬 물체가 있었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일까 하고 나오던 두운스님은 기절초풍을 하고 말았다.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아주 젊은 여인을 물어다 놓은 것이었다. 달빛을 이용하여 가까이 살펴보니 20을 전후한 묘령의 여인이었다. 두운스님은 어이가 없었다. 그는 호랑이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네, 이놈, 전에 그렇게 타일렀는데도 또 못된 짓을 했구나. 이놈 당장 물러가거라.” 두운스님은 우선 사람을 만져 보았다. 몸은 얼음장처럼 굳어있었으나, 아직은 숨기운이 붙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망설였다. 출가사문이 여인의 몸에 손을 댈 것인가. 그렇게 되면 불계를 파하는 것이 된다. 하지만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 보다 대승적인 자세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여인을 안고 방으로 들어갔다.

따뜻한 물에 수건을 적셔 여인의 온몸을 찜질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살결은 아름다웠다. 이처럼 아름다운 여인을 아직 본적이 없는 두운스님의 가슴은 방망이질을 해 댔다.

그는 팔다리를 주무르고 배를 문질렀다. 얼마나 지났을까. 여인이 깊은 숨을 몰아쉬면서 꿈틀댔다. 두운스님은 기뻤다. 사람을 자기 손으로 소생시켰다는 데에서 어떤 뿌듯함을 느꼈다. “좀 정신이 드십니까?” 여인이 두운스님을 보자 화들짝 놀라며 일어나려다가 다시 쓰러지면서 힘없이 말했다.

“여기가 어딘가요?” “소백산 내에 있는 토굴입니다. 소승은 수행하는 수도승입니다.” “스님이시라고요? 아니요, 그럴 리 없습니다. 당신은 호랑이가 분명합니다.” “내가 호랑이라니요. 아마 무서운 꿈을 꾸셨나 보군요. 소승은 분명 사람입니다.

소승의 이름은 두운이라 합니다.” “호랑이가 스님의 모습으로 둔갑을 잘한다고 하던데요. 제 기억으로는 호랑이의 난을 만난 게 분명합니다. 당신은 분명 호랑이입니다.”

두운은 비로서 여인이 자기를 두고 호랑이라고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말했다. “아가씨가 호랑이 난을 만나 너무나 놀란 나머지 소승을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하지만 소승은 수도승이고 이곳은 절이 맞습니다.

그리고 아가씨를 물고 온 호랑이는 지금 밖에 있을지 모릅니다. 자, 보시지요.” 두운이 물을 열자 호랑이는 아직도 밖에서 쭈그리고 앉아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있는 듯하였다. 그리고는 적이 만족한 모양인지 기지개를 늘어지게 펴더니 어슬렁거리며 사라져 갔다.

여인은 비로서 안심이 되는 모양이었다. “이제 분명히 기억납니다. 제가 여기까지 오게 된 사연도 모두 말입니다. 말씀드려도 되올는지…” 그녀는 두운스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운스님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녀는 지금까지의 얘기를 털어놓았다. “저는 경주 서라벌 계림에 사는 호장 유석의 딸 유아롱입니다. 호장이라면 고을 아전 중 최고 윗자리여서 저희집은 경제적으로 넉넉한 집안입니다. 오늘 낮에 저는 혼례를 치렀습니다. 대례를 치르고 폐백이 끝나 밤이 되자 저는 신방에 들어갔습니다. 바로 그때 무슨 불이 번쩍하면서 제 몸이 공중으로 붕 뜨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뒷일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아롱 아가씨의 얘기를 듣고 있는 두운스님의 손에는 땀이 고였다. 본인이야 어떻든 말들 두운스님으로서는 아찔한 이야기임에 틀림없었다.

“아, 그랬군요. 그러면 아직 초야도 치러 보지 못한 순결한 아가씨가 틀림없겠군요. 난 또.” 아롱이 약간 서운한 눈빛으로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스님은 저의 순결에만 관심이 있고 제가 얼마나 고생했는지는 전혀 무심하시군요.” 두운스님은 아차 싶었다. “그렇군요. 그래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정말 큰일날 뻔 하셨습니다. 두운스님은 어색하게 뒤통수를 만지며 말했다. “부모님과 신랑이 걱정 많이 하시겠습니다. 그나저나 신랑은 잘 생겼습니까? 마음에는 드시던가요?” 그렇게 물으면서 두운스님은 또 한 번 실언했구나 싶었다.

공연한 것을 물었다고 생각했다. 웬지 자꾸 딴 얘기가 튀어나와 연신 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이 여인의 신랑을 두고 질투하는구나. 그래서는 안 되는데, 나는 어디까지나 불도를 닦는 수행자가 아닌가?’ 여인이 말했다. “글쎄요. 저는 아무래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호랑이란 본디 육식동물이라서 사람을 보기가 무섭게 잡아먹어야 할텐데 어찌하여 저를 이 깊고도 험한 산중까지 업고 와 그냥 버리고 갔을까요? 의심스럽습니다.” “아무래도 전생의 인연이겠지요.” “전생의 인연이라니요?” “이 산승과 인연이 깊은 탓일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나저나 잠이나 푹 주무시고 다음날 날이 밝으면 얘기합시다.” 그러나 산사에는 방이 한 칸밖에 없었기 때문에 한 방에서 함께 지내야 했다.

‘정말 내가 이 아롱아가씨와 인연이 깊은 것일까? 내 불쑥 말해 놓고 보니 그도 그럴 것 같은데, 아무래도 공연히 실언을 한 것 같네. 허, 그나저나 어쩐다?’ 대충 여인을 덮어 주고 밖으로 나왔다. 찬바람이 싸아 얼굴을 때렸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시 마음을 다잡아먹고 방으로 들어와 가부좌를 틀고 않았지만 도저히 정신 집중이 되지 않았다. 신경은 온통 등 뒤쪽에 누워 자는 아롱 아씨에게 쏠렸다.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하기를 몇 번. 다시 방안에 들어온 두운스님은 가만히 잠자는 아롱 아씨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대려다가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안 돼. 절대로 안 돼. 나는 중이다. 나는 불계를 받아 지니고 수행하는 수도자다. 나는 중이다. 나는 중이다. 중, 중, 중…’ 그는 다시 정신을 가다듬어 삼매에 들고자 애를 썼다.

그러나 쉽사리 삼맹에 몰입할 수 없었다. 답답했다. 20여 년 동안 수행한 결과가 이 정도라는 데에 회의도 느꼈다. 그는 이제 서른 고개를 넘어선 혈기 왕성한 젊은이였다. 승복으로 가린 그의 가슴에서는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는 그런 자신이 한없이 미웠다. 그때였다. 아롱 아씨가 뒤척이는 소리가 났다.

그는 고개를 돌릴까 하다가 꾹 참아 보았다. 여인이 가녀린 음성으로 말했다. 그녀의 음성이 너무나도 매혹적이어서 자기도 모르게 두운은 여인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아직 안 주무셨어요? 그만 주무세요, 스님. 으음.” “산승은 이게 잠자는 모습입니다. 저는 누워서 잠자지 않고 않아서 잡니다.” “스님, 배가 좀 고픈데요. 뭐 먹을 만한 게 없을까요?” 두운스님이 먹을 것을 찾으러 부엌으로 나가려 하자 어느새 여인이 두운스님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그냥 한 번 해 본 소리예요. 그냥 않으세요. 그리고 아까 스님께서 전생의 인연이라 하셨는데 그 얘기나 들려주세요.” “글쎄요. 아롱 아가씨와 부모님의 인연도 그렇고 신랑과의 인연도 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될 어떤 인연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와의 인연은 아무래도 호랑이와의 인연이 깊기 때문이리라 생각합니다.” “호랑이와의 인연이라고요?” “사실 호랑이와 나와의 인연은 참으로 묘하게 맺어졌습니다.” 두운스님은 그 동안 호랑이의 목에 걸린 여자의 비녀를 빼내 준 이야기며, 멧돼지를 물고 왔던 이야기 등을 자세하게 해 주었다. 두 손으로 턱을 괴고 두운스님의 얘기를 듣고 난 아롱아씨가 재미있다는 듯 깔깔거리고 웃었다.

“그렇다면 호랑이가 스님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저를 데려온게 아닐까요?” “그렇다고 봐야지요. 그런데 아가씨를 데려온 것은 은혜를 갚기보다는 인연을 맺어 주기 위함이라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부처님과의 인연을 맺게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말씀을 듣고 보니 참 재미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가마를 타고 시집을 가는데 저는 호랑이를 타고 시집을 왔으니 말입니다.” “시집이오?” 두운스님은 소스라치게 놀라 물었다. “그렇잖습니까? 게다가 다른 사람들은 모두 보통 남자들에게 가는데 저는 산중에서 수도하는 스님에게 왔으니까요.” 두운스님이 말을 잘랐다.

“그렇게 말씀하지 마십시오. 아롱 아가씨는 여기 나한테 시집을 온 것이 아니라, 부처님과 인연을 맺기 위해 온 것입니다.” “스님의 말씀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왜냐구요? 생각해 보십시오. 부처님과 인연을 맺기 위함이라며 이 먼 곳 깊은 산중까지 오지 않더라도 서라벌에는 수많은 절들이 있고 큰스님들이 있습니다.”

듣고 보니 아롱 아씨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두운스님은 할 말을 잊었다. “스님, 저는 스님과 인연이 있는 게 분명합니다. 정식으로 혼례를 치를 수도 없어도 스님은 바로 저의 낭군이십니다. 부정하지 마시고 저를 받아들이십시오.” 두운은 점점 난처해졌다. 아니 아롱 아씨가 너무나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더 망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아주 완강하게 거부했다.

“안 됩니다. 그건 절대로 안 됩니다.” “왜 안 되옵니까? 무엇이 두려우십니까? 여기는 우리 둘밖에 없고 또 나중에 우리가 아무리 순결을 지킨다 해도 누가 그것을 인정하겠습니까? 스님, 어서요.”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여인이 달려들었다.

두운스님은 가만히 여인을 떼어놓으며 말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우린 그럴 수가 없습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때 여인이 훌쩍이기 시작했다. 흐느끼는 여인의 두 어깨가 가볍게 출렁이고 있었다. 두운스님에게는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래도 단단히 걸려들었다 싶었다. 당장 달려들어 마음은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여인의 눈물에 강해져야 한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두운스님은 여인의 등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남이야 믿건 말건 상관없습니다. 우리만 순결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부처님 말씀에도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즉, 나이가 많은 여인은 어머니처럼 생각하고, 한두 살 연상이면 누님처럼 여기며, 나이가 적은 여인이라면 누이동생처럼, 딸처럼 생각하며, 또는 일가친척처럼 생각하라구요. 그래서 나는 앞으로 아롱 아씨를 누이동생으로 생각하겠소. 아롱 아씨도 나를 친오빠로 여겨 주시오. 새봄이 되면 내가 아롱 아씨를 서라벌 계림의 집에 데려다 주겠소. 우리 그 동안 불도나 열심히 닦읍시다.”

두운스님의 말을 듣고 나서 아롱 아씨는 고개를 들어 스님을 쳐다봤다. 참 장하고도 잘생긴 모습이었다. 장부다운 기상이 넘쳐흘러 혼례를 치루었던 신랑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멋진 남자였다. 그러나 스님이 워낙 완강하기 때문에 마음이 아팠지만 그를 따르기로 했다. 무엇보다 견딜 수 없는 것은 자존심을 꺾어야 함이었다.

그 다음날부터 두 사람은 좋은 도반이 되었다. 눈이 내리면 눈을 쓸고, 밥을 지어 함께 공양을 하고, 함께 가부좌를 틀고 않아 선정에 들었다. 아롱 아씨의 마음도 이젠 많이 가라앉았고 두운스님 또한 친절하게 공부를 지도했다. 어느덧 추운 겨울이 물러가고 그 빈 자리에 봄이 들어앉았다. 눈도 다 녹았다.

이젠 어디를 떠나더라도 눈 때문에 막힐 일은 없었다. 두운스님은 아롱 아씨를 다정하게 불렀다. “아롱, 이제 내가 할 일이 있소. 눈도 녹았고 봄도 다가왔으니 내가 처음 아롱에게 약속한 대로 서라벌의 계림에 있다는 당신 집에 아롱을 데려다 주려 하오. 그러니 행장을 꾸리시오.” 아롱 아씨는 사실 떠나고 싶지 않았다.

다정하게 지도해 주는 두운스님에게서 친오빠와 같은 정을 느꼈고 무엇보다도 이제는 이 산중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다. 탐욕과 질투와 온갖 번뇌, 갈등으로 얽매여 사는 세속의 삶이 싫어졌다. 그래서 그녀는 스님에게 자기 생각을 말했다.

하지만 두운스님은 그럴 수 없다며 일단 다시 오는 한이 있더라도 부모님을 찾아 뵙고 딸이 살아 있음을 알려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신랑과의 관계도 이어지든 끊어지든 깨끗하게 매듭을 지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소백산을 떠났다. 경주까지는 6백 리가 넘었으므로 거의 열흘이 지나서야 계림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들이 막 집에 들어서려는데 대문 안쪽에서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문틈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문을 열고 마당으로 들어서니 한 하인이 문간에 서 있다가 비명을 지르며 도망을 갔다. 잘 아는 하인이었는데 왜 그럴까하고 생각하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가가니 아버지와 어머니가 지켜보는 가운데 무당이 춤을 추고 있었다.

손에는 날이 시퍼런 칼을 들고, 다른 손에는 방울을 쥐고 있었다. 진오기굿을 하고 있었다. 불쌍하게 호환을 당해 간 딸의 넋을 건지려는 굿이었다. 아롱 아씨는 문득 자신을 생각했다. ‘정말 나는 죽은 걸까. 이처럼 버젓이 살아 있다고 보는 이 몸은 오히려 죽고 난 뒤 나타난다고 하는 귀신은 아닐까. 아니야 나는 죽은 게 아니라 죽게 되었다가 소생한 거야. 나는 살아 있어. 나는 아롱이가 틀림없어.’ “나는 아롱이가 틀림없다…아.”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사람들이 모두 돌아보았다.

사람들은 아롱 아씨를 보자 기겁을 하고 달아났다. “귀신이다. 귀신이 나타났다. 죽은 아롱 아씨의 귀신이 미진한 원을 풀기 위해 나타났다.” “달아나자.” “뛰어, 빨리빨리.” 아롱 아씨의 어머니가 두 손을 싹싹 빌면서 아롱 아씨 앞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아가, 에그 불쌍한 것, 네가 그렇게도 갑자기 갈 줄 어찌 알았겠느냐. 그래, 이제 무슨 미진한 원이 있어서 이리 왔느냐. 에그 불쌍한도 하지.” 아롱 아씨가 말했다. “저는 귀신이 아니고 사람입니다. 죽은 게 아니에요.” 아롱 아씨의 말을 듣는지 마는지 아롱 아씨의 어머니가 하소연하듯이 말했다.

“네 소원이 무엇이든 다 들어 줄 테니 산 사람들에게 해코지는 하지 말렴. 에그 에그, 불쌍한 우리 아롱아.” “어머니 저는 사람입니다. 귀신이 아니에요. 어머니의 무남독녀 아롱이입니다.

어머니 정신 차리세요.” 이 상황을 보다 못한 두운스님이 모녀 사이로 나서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이 아가씨는 바로 시주님의 딸 아롱이입니다. 제가 전후사정을 말씀드리지요.” 얘기를 다 듣고 난 유석 내외는 비로소 의심이 풀리고 아롱 아씨를 딸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난처한 일이 아니냐고 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한 사람은 젊은 여인이고 한 사람은 젊은 남자인데 두 젊은 남녀가 그것도 하룻밤이 아니라 석 달 동안을 한방에서 지냈으니 불을 보듯 뻔한 일 아니냐는 거였다. 유석이 결심한 듯 말했다. “우리 아롱이와 혼례를 치른 신랑은 아롱이가 죽은 것으로 알고, 이미 다른 사름을 아내로 맞았소.

그러니 스님께서 내 딸 아롱이를 맡아 주시오. 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부처님이 정해주신 배필인 듯하오. 뒤치다꺼리는 내가 알아서 해 주겠소.” “배려하심은 감사하오나 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 아롱 아씨도 저를 좋아하고 저 역시 아롱 아씨가 마음에 드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오나 저는 불제자로서의 길을 걷겠습니다.” 호장 유석이 말했다.

“스님의 뜻이 견고함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우리 또한 부처님을 믿는 사람으로 스님을 환속시키고 싶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같은 방에서 석 달 동안이나 함께 지냈으니 두 사람은 식만 올리지 않았을 뿐 부부나 마찬가지입니다. 거절하지 마십시오. 제 딸이 부족해서 그러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아롱 아씨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훌륭한 현모양처감입니다.

그러나 저와의 관계는 따님이 소상하게 말씀드릴 것입니다.” 아롱 아씨가 그간의 얘기를 털어놓았다. 오히려 아롱 아씨는 자신이 두운스님을 남편으로 맞으려 했으나 두운스님의 굳은 결심에 감복되어 함께 불도를 닦았다는 이야기까지 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호장 유석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참으로 미안합니다.

스님은 큰스님이 되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줄도 모르고 무조건 스님에게 우리 아롱이를 맡기려 했습니다. 스님께서 이해하십시오.” “괜찮습니다. 이해라니, 당연한 말씀이지요.” “그리고 가능하시다면 우리 집에서 며칠 더 묵다 가셨으면 합니다.

우리가 스님의 가르침을 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것마저 거절하지는 않으시겠지요?” 그렇게 해서 두운스님이 유석의 집에서 며칠을 묵고 떠나려 할 때 유석이 말했다. “스님, 우리 아롱이가 소원이 있다고 합니다.” 소원이라는 말에 두운스님은 지레 겁먹은 표정이 되어 물었다.

“아롱 아씨 소원이라니요?” “예, 우리가 스님을 위하여 절을 지어 드리고 싶습니다. 현재 스님께서 주석하시던 곳에 새롭게 절을 짓고 다리를 놓아 드리겠습니다. 그것마저 거절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해서 지어진 절이 희방사다. 그리고 절 앞의 큰 개울에 무쇠로 다리를 놓았다. 그것이 수철교, 즉 ‘무쇠다리’다. 희방사가 속해 있는 마을을 수철리라 함도 바로 여기서 기인하였다.

<동봉스님이 풀어쓴 불교설화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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