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눌수록 커지는 기쁨

부처님이 사위국 제타 숲 ‘외로운 이 돕는 동산’에 계실 때였다.

어느 날 여러 비구들이 부처님 앞에 나아가 아뢰었다.

“세존께서는 무엇 때문에 보시가 한량없는 공덕이 된다고 찬탄하십니까?

저희들은 왜 그런지 알지 못하니, 원컨대 설해 주옵소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비구들아 자세히 들어라. 이제 너희들에게 설해 주리라.

기억하건대 한량없는 과거세에 범예왕이 바라나시를 다스리고 있었다.

나라를 잘 다스려 백성들이 안락하고 풍요롭게 살았다.

코끼리`말`소`염소` 따위 짐승들도 번성하였는데, 어느 날 그 나라에서 점성술이 가장 뛰어난 어떤 바라문이 왕에 이렇게 아뢰었다.

“지금 이 나라에 화성이 출현했으므로 12년동안 큰 가뭄이 계속되어 많은 백성들이 굶어 죽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왕은 밤 낮 근심에 쌓여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어떻게 해야 백성들을 살릴 수 있을까?’

하루는 왕이 산사를 불러 창고에 있는 곡식들을 백성들의 수와 맞추어 계산해 보게 하였다.

산사가 명령에 따라 계산해 본 결과 한 사람에게 하루 한 되씩 준다면 6년까지는 공급할 수 있었다.

국왕의 몫은 두 되씩을 계산하였다.

이로부터 나라에는 가뭄이 들어 국가의 창고를 풀어 산사가 계산한 대로 곡식을 배급해 주었다 한 해가 가고 두 해가 가고 6년째도 이미 저물어 가고 있었다.

이제 백성들은 모두 굶어죽을 판이었다.

이 사이에도 굶어죽는 백성들이 수없이 많았다.

그런데 어느 날 바라문이 왕을 찾아와서 울면서 말했다.

“이제 곡식이 떨어져 곧 죽게 되었습니다.

원컨대 대왕의 몫에서 얼마의 양곡을 나눠 주십시오.”

범예왕은 이 말을 듣자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지금 이 굶주림과 목마름을 참지 못한다면 앞으로 수없이 태어나야 할 미래세는 어떻게 그 추위와 더위, 그리고 굶주림과 같은 고통을 견뎌낼 수 있겠는가?

이렇게 생각한 범예왕은 곡식의 절반을 바라문에게 보시하였다.

보시하는 순간 범예왕의 지극한 정성에 감응하여 천상의 궁전이 움직였다.

이때 천상의 제석천이 깜짝 놀랐다.

‘무엇 때문에 나의 궁전이 흔들릴까?

나의 목숨이 끝나려고 이러한 변이 일어나는 것일까?’

이렇게 생각하며 세상을 관찰해 보았더니, 바로 범예왕이 굶주리는 이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나누어주는 것과 같은 매우 어려운 보시 였다.

제석천은 범예왕의 그 마음이 과연 진실에서 우러나온 것인지를 시험해 볼 생각으로 곧 병들어 죽게 될 바라문의 형상으로 변신한 다음 지팡이를 짚고 궁궐 앞에 나타나 왕에게 구걸했다.

왕은 걸인을 보고 이렇게 생각했다.

‘지금 남아 있는 나의 몫을 보시하든 하지 않든 간에 결국 죽고 말 것이다.

차라리 깨끗히 보시하여남을 이롭게 한다면 죽어도 여한은 없으리라.’

왕은 즉시 남은 곡식의 절반을 거지 바라문에게 주니 바라문이 대왕에게 물었다.

“자신의 죽음을 돌보지 않는 이런 보시는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대왕은 혹시 이 보시의 공덕으로 제석천왕이나 범천왕, 또는 전륜성왕이 되고 싶다거나 아니면 세상의 영화와 향락을 바라고 이런 보시를 하는 것은 아닙니까?”

“나는 그런 것을 바라고 한 것은 아니오.

오직 소원이 있다면 미래세에는 정각을 성취하여 저 추위와 더위와 굶주림의 고통에 허덕이는 중생들을 구제하려는 것뿐이오.”

이 말을 듣자 병든 바라문은 “참으로 훌륭하오.

전에 없던 일이오.” 하며 찬사를 올리고 곧 본래의 모습인 제석천으로 되돌아왔다.

“대왕은 지금부터 백성들에게 명하여 빨리 밭을 갈고 씨를 뿌리게 하소서.

앞으로 이레 만에 틀림없이 단비를 내리게 하리라.”

이 말을 들은 범예왕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왕은 즉시 백성들에게 명을 내려 밭을 갈고 씨를 뿌리게 하였다

과연 이레가 되자 하늘에선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이래서 백성들은 옛날과 같이 곡식이 풍성하고 안락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비구들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때의 범예왕이 바로 나의 전신이었다.

이 때문에 나는 항상 보시의 과보가 한량없다는 것을 찬탄하는 것이니라.

(찬집백연경)

부처님은 보시의 공덕에 대해서 끝이 없도록 찬양하고 칭송했다.

보시의 공덕이 왜 이리 한량없이 큰가 하는 것은 스스로를 한번 되돌아보면 알 것이다.

하잘 것도 없는 소유물도 남에게 준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하물며 자신의 생명 연장을 포기하고 남에게 식량을 나눠준다는 것은 범부로서 선뜻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보시는 바로 남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남의 불행을 나의 불행으로 남의 생명을 나의 생명과 똑같이 바라보는 대자대비 사상의 발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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