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겨운 노스님의 기도
1969년 운허 스님은 양주 봉선사 주지로 대웅전을 중창하고 한국불교 역사상 최초로 대웅전(大雄殿) 이라는 현판 대신 한글로 ‘큰법당’이라는 현판을 달았다. 대웅전에 한글로 ‘큰법당’이라는 현판을 단 것은 결코 단순한 변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한국불교에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역사적인 신호탄이었다.
뿐만 아니라 운허 스님은 큰법당 기둥에 붙이는 주련까지도 과감하게 한글로 써서 붙이도록 했다.
이 때 봉선사 큰법당 기둥에 한글로 써 붙인 주련은 “온 누리 티끌 세어서 알고, 큰바다 물을 모두 마시고, 허공을 재고, 바람 얽어도, 부처님 공덕 다 말로 못하고”라는 네 줄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한문 속에 갇혀 있는 팔만대장경을 한글대장경으로 옮겨 간행해야 한다는 운허 스님의 간절한 소원은 동국대학교 안에 동국역경원을 설치하기로 하는데 까지는 이루어졌으나, 번역, 윤문, 편집, 발간 등 엄청난 예산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 엄청난 비용을 대줄 곳이 없었다. 운허 스님은 일흔넷의 노구를 이끌고 서울 우이동 삼각산 도선사 석불전으로 올라가 처절하고도 눈물겨운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오직 기댈 것은 기도뿐이었던 것이다.
“부처님. 이제 이 늙은 중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 사바세계 고행중생을 건지기 위해 부처님께서 설해주신 팔만사천법문이 불행하게도 이 땅에서는 어려운 한문 속에 갇혀 이 땅의 중생들이 보려 하나 볼 수 없고, 배우려 하나 배울 수 없고, 따르자 하나 따를 수없으니, 역경사업이 원만히 성취되지 않으면 아니 되옵니다.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이 늙은 중, 죽기를 각오하고 부처님전에 간절히 발원하오니, 역경사업을 원만히 성취하도록 길을 열어주시던지, 아니면 차라리 이 무능한 늙은 중, 부끄러운 목숨을 그만 거두어가 주시옵소서.”
살을 에는 차가운 삭풍이 몰아치는 차디찬 석불전에서 운허 스님은 처절하고도 눈물겨운 기도를 14일나 계속 했다. 제자들도 울고, 비구니들도 울면서 제발 그만 기도를 멈추시라고 애원했지만 운허 스님은 74세의 노구로 기도를 계속했다.
그리고 14일째 되던 날, 드디어 국회에서 역경사업 지원안이 통과되었는데 이날 지원액은 1천3백5십3만원이었다.
“허허 그것 참 이상도 하구나. 내가 도선사 석불전에 기도한 게 꼭 열 나흘째였는데, 마지막 하루를 다 채우지 못한 채 예산이 통과되었으되 그 액수가 천3백5십3만원이라니 하루에 100만원씩 쳐주신 셈이 아니냔 말이다.”
“어어 정말 그러고 보니 희한한 일입니다요 스님.”
운허 스님은 역경과 포교사업을 위해서는 아무리 어려운 일도 다 감수하셨다. 양주 봉선사에서 수원 용주사까지는 교통도 불편하고 먼 길이었다.
그러나 역경사업을 위한 역경사(譯經士)를 수원 용주사에서 양성하고 있었으므로 운허 스님은 양주 봉선사에서 수원 용주사까지 왕복하시며 역경사들을 가르치셨다. 그러면서 당신은 지극정성 역경사업 성취를 기도하고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스님, 그렇게 기도를 하시면 과연 효험이 있는 것입니까요?”
“암, 효험이 있구 말구. 사사로운 욕심을 채워달라는 기도는 효험이 없지만 중생을 건지게 해주십시오. 병든 중생을 도와주게 해주십시오. 어리석은 중생을 깨우치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순수하고 올바른 기도는 반드시 부처님께서 성취되게 해주시는 게야. 지극정성 올바른 기도를 올리면 반드시 효험이 있지. 열심히 올리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