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法)를 버려라

원효는 생존때부터 이미 극단적 비난 아니면 극단적 존숭의 표적이 되어 있었다. 아홉명의 제자가 있었다고는 하나, 계승 발전은커녕 그들의 이름조차 묻혀버렸고, 급기야 고려 때 의천은 원효가 더 이상 당대의 자원으로 이해되거나 활용되지 않는다고 탄식했다.

“마명이나 용수라야 겨우 따라잡을 원효의 위대한 학문을, 지금 무식하고 게으른 자들이, 안타깝게도 이웃집 아저씨 보듯 지나치는구나.(著論宗經闡大猷, 馬龍功業是其 , 如今惰學都無識, 還似東家有孔子).”

원효가 잊혀진 이유는 둘이다.

첫째, 저술의 난해함: 그가 쓴 글을 해독하고 이해하기가 어렵다. 누구도 원효가 섭렵한 해박함과 그의 해석의 독창성을 따라잡기 힘들다. 더구나 그 저술들은 주석이라는 간접적 형태로, 그것도 수없이 많은 종류 속에 흩어놓았기에, 그의 사유의 핵심(종요)을 체계적으로 파악하기가 어렵다.

둘째, 삶의 불기(不羈): 그가 잊혀진 근본 이유는 그의 삶의 행적이 불교 안에 갇혀 있지 않기 때문이다. <송고승전>의 저자 찬녕은 그를 두고,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사람((都無定檢)’이라고 평했다. “시정잡배들과 술집과 창기집에 드나드는 사람. 화엄의 이치를 근엄하게 강의하다가도, 신성한 절집에서 거문고를 뜯으며 춤추고 노래하는 사람. 여염집에 빌붙어 지내는가 싶더니, 깊은 산속에서 좌선에 들어있는 이 사람,”

그것도 모자라 불교의 최후 보루인 금욕의 계를 깨고, 요석궁의 공주와 동침하더니 자식까지 낳고 산데 이르러서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다.

이 앞에서 사람들은 막막해하거나 두려워한다. 그리하여 그를 이야기와 신화 속에 가두고는 그만 편안해 한다. 일반인들은 요석궁의 로맨스를 가십삼고, 학자들은 그의 주소(註疏) 가운데 한 둘을 붙들고 ‘자기가 본 바가 바로 원효’라고 악착하고 있다.

아들 설총이 “어떻게 살아야합니까”라고 묻자 원효는 “불교(法)를 버려라”고 충고했다. 무덤에서 마신 해골물은 그에게 더 이상 불교의 조언이 필요없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불교는 방편적으로는 존중해야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졸업해야 할 물건이다. 이 돈교(頓敎)의 가르침을 익히 들었겠지만, 거기 원만(圓滿)하게 철저했던 사람은 없다. 원효만이 그렇게 했다. 자신의 삶을 놓치고 불교에 매여 산 사람은 얼마나 많았던가. <금강경>이 그렇게 경계하는데도, 뗏목을 지고 다닌 사람은 얼마나 많았던가.

원효는 불교라는 가르침에 기생하고 있는 기존 교단과 이른바 고승대덕들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질타했다. “사자 속 벌레같은 자들, 불교에 기생하면서, 결국은 불교를 갉아먹고 무너뜨리는 자들이여!”

모든 것이 불교이고, 또 모든 것이 불교가 아니다.”

비난과 자기고착은 모르는 것에 대한 불안감과, 자기가 제어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의 발로이다. 원효는 당대에 들어와 있던 모든 사유와 문헌을 섭렵하고, 그 모든 것이 ‘도구적으로 공존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깨인 눈으로 보면, 불교 아닌 것이 없다.

소승도 대승도, 선도 정토도 다 불교의 노파심의 발로이다. 다만 근기에 따라 상황과 풍토에 따라, 보다 유효하냐 덜 유효하냐의 차이가 있을 뿐, 그 작은 시내들은 불법의 큰 바다에 함께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얕고 자잘한 가르침들도 내버려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의 불교 사상은 그의 삶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바, 그의 파천황이야말로 원효를 원효답게 하는 진정성이면서 또한 미래 한국불교의 세계적 자원이기도 하다. 왜 잎을 따면서 줄기는 놓치려 하는가.

원효는, 불교가 인도, 중국, 한국, 일본, 중앙아시아를 포괄하는 국제적 경쟁을 하고 있던 시절, 그 이름을 천하에 떨치며 해동에 불교가 있음을 알렸던 선구이다. 그의 성공의 비결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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