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스님은 “도를 이루려면 가난부터 배워라”고 가르치면서 스스로 철저한 무소유의 삶을 보여주었습니다. 음식은 영양실조에 걸리지 않을 정도면 된다며 소식으로 일관해왔는가 하면, 여름에는 삼베, 겨울에는 광목으로 옷 한 벌에 바리때 하나만으로 지내는 청빈한 삶을 이어 왔으니, 그나마 그 한벌 옷도 여든 나이가 되도록 손수 기워 입었습니다.
“스님, 입고 계신 옷이 저희가 보기에는 상당히 남루하고 누더기입니다만 몇 년 동안 입으셨습니까?”
“삼십 년 넘었어. 이 옷이 두 갠데 번갈아 가며 입어. 삼십 년 넘었어. 거의 사십년 됐어.”
“평상시에 안 입고 예식 있을 때에만 입으십니까?”
“장 입고 다니는 옷이라.”
“늘 입고 다니시는 옷이군요.”
“오늘 특별히 입고 나온 줄 아는 모양이네. 나 장 입고 다니는 옷이야.”
“……”
“나 제일 못났기 때문에 좋은 옷 입을 자격이 없어. 아무 자격이 없는데 좋은 옷 입을 수가 있나.”
그러나 큰스님은 삼십 년 남짓 한결같이 다니던 가야산 포행길을 언제부터인지 힘겨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가야산 호랑이도 한 자락 가사 밑에 어느덧 80대의 노구를 이끌고 있었습니다.
스님을 찾아온 어느 기자와의 대화 한 자락입니다.
“스님, 한 말씀만 여쭈겠습니다.”
“뭐를?”
“일천삼백만 불자가 있는데 그 불자들에게 한 말씀만.”
“한 말씀만? 내 말에 속지마라. 자신의 말에 속지 마라.”
“내 말…?”
“내 말 말이여. 내 말한테 속지말어. 나는 늘 거짓말만 하니까.”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내 말에 속지 마라, 그 말이여.”
1993년 9월에 당신의 저서인 ‘성철스님법어집’ 11권과 선종의 종지를 담은 ‘선림고경총서’ 37권이 완간되는 것을 보고 나서 두 달만인 그해 11월 4일 아침에 성철 큰스님은 열반하였습니다.
“내 말에 속지 마라”는 말을 던져주고는 영영 우리 곁을 떠난 것입니다. 그 날 새벽, 해인사 퇴설당에서 제자들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고 큰스님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참선 잘하라!” 그 한 말씀이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러고는 제자 어깨에 몸을 기대었습니다.
처음 출가한 그 방에서 마지막 열반의 길에 드니, 행운유수行雲游水의 사문의 길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법랍 59년, 세수82세로 큰스님은 열반 게송을 남기고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일생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갈래나 되는지라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마침내 생사를 벗어나 적멸에 든 큰스님은 입적한지 이레째 날 평생을 주석한 해인사 퇴설당을 떠나서 일주문 밖에 마련된 연화대로 향하였습니다.
그 날, 퇴설당 위로는 일시에 새떼가 날고,다비장에서는 때늦은 낙엽들이 무수히 쏟아져 내렸습니다. 스님 떠나던 그 날도 그러더니, 백련암 뒷산 하늘에서는 마치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환한 빛이 피어올랐습니다. 이는 드물게 보는 방광이었습니다. 그리고 서른 시간이 넘게 걸린 다비는 일백여 과에 이르는 영롱한 사리를 남겼습니다. 다비식에서 사십구재에 이르는 동안 큰스님의 떠남을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뭇 대중의 발길은 해인사 앞뜰을 가득 메우며 끊일 줄 몰랐습니다.
성철 큰스님은 속인으로 왔다가 끝내 부처의 길을 택하였습니다. 그 분이 ‘우리의 부처’로 불리는 까닭은, 오직 진리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던 용기, 그리고 그 결의를 평생토록 지킨 남다른 실천궁행 때문입니다. 큰스님 가고 없는 가야산, 그러나 한평생 오롯한 선승의 길을 걸어 온 큰스님의 자취는 지금도 매서운 죽비소리가 되어서 날마다 새롭게 우리 곁에 다가옵니다.
자기를 바로 보라
남을 위해 기도하라.
남 모르게 남을 도우라
일체 중생을 대신해서 참회하고
일체 중생이 행복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
누누이 이르시던, 그 참되고 소박한 가르침은 오늘도 가야산의 메아리가 되어 영원으로 울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