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상의 화엄종

의상의 화엄종

법사 의상(義湘)은 그 아버지는 한신(韓信)이라 했으며, 성은 김씨다.

나이 29세에 서울[경주] 황복사(皇福寺)에서 머리를 깎아 스님이 되었다.

얼마 후 중국으로 가서 부처의 교화(敎化)를 보고자 마침내 원효와 함께 요동(遼東)으로 갔다가, 변방(邊方) 순라군(巡邏軍)의 정탐자에게 잡혀 있기 수십 일에 간신히 빠져 나와 돌아왔다.―사실이 최후(崔侯=최치원)가 지은 의상본전과 원효대사의 행장에 있다.―

영휘(永徽) 초년에, 마침 당나라의 사신으로 본국에 돌아가는 사람이 있었으므로 그 배에 실리어 중국으로 들어갔다.

처음에 양주(場州)에 머물렸더니, 주장(州將) 유지인(劉至仁)이 의상을 청해다가 그 관아(官衙) 안에 머무르게 했는데, 접대가 매우 성대했다.

조금 뒤에 종남산(終南山) 지상사(至相寺)를 찾아가서 지엄(智儆)을 뵈었다.

지엄은 지난 밤 꿈에 하나의 큰 나무가 조선에서 나서 가지와 잎이 널리 퍼져 중국으로 와서 덮었는데, 그 위에 봉황새의 보금자리가 있었으므로, 올라가 보니 한개의 마니보주(摩尼寶珠)가 있었으며 광명이 멀리 비치는 것이었다.

꿈을 깬 후 놀랍고 이상스러워 깨끗이 소제하고 기다렸더니 의상이 왔던 것이다.

지엄은 특별한 예로 영접하고 조용히 말했다.

「나의 어젯밤 꿈은 그대가 나에게 올 징조였구나.」

그리하여 제자가 됨을 허락하니 의상은 화엄경의 미묘한 뜻을 은미(隱微)한 부분까지 분석했다.

지엄은 학문을 서로 질의할 만한 사람을 반가이 맞아 새로운 이치를 발명해 냈으니, 심오하고 은미(隱微)한 이치를 찾아내어서 남초(瓷草)와 천초(淺草)가 그 본색을 잃은 것과 같다 하겠다.

이윽고 본국 신라의 승상 김흠순(金欽純)―혹은 인문(仁問)이라고도 쓴다.―양도(良圖) 등은 당에 와 갇혀 있었는데 고종(高宗)이 장차 크게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치려하니 흠순 등이 몰래 의상을 권하여 먼저 돌아가도록 하므로 함형(咸亨) 원년 경오[670]에 본국으로 돌아왔다.

본국 조정에 이 사실을 알리자 조정에서는 신인종(神印宗)의 고승 명랑(明朗)에게 명하여 밀단(密壇)을 가설하여 비법으로 기도하니, 국란을 벗어날 수 있었다.

위봉(儀鳳) 원년(676)에 의상은 태백산으로 돌아가 조정의 명령을 받들어 부석사(浮石寺)를 지어, 대승(大乘)의 교법을 포교했더니 영감이 많이 나타났다.

지엄의 문인(問入) 현수(賢首)는 수현소(據弦疏=華嚴經探玄記)를 찬술(撰述)하여 그 부본을 의상에게 보내고 아울러 서신을 보냈는데 은근했다.

그 서신에서 말했다.

「서경(西京) 숭복사(崇福寺) 중 법장(法藏)은 해동 신라 화엄법사(華雌法師=의상)의 시자(侍者)에게 글을 올립니다.

한번 작별한 지 20여년, 사모하는 정성이 어찌 염두에서 떠나겠습니까?

더욱이 연운(烟雲) 만리에 바다와 육지가 첩첩이 싸였으므로 이 몸이 다시 뵙지 못할 것을 한스럽게 여기오니 회포 연연하여 어찌 말로써 다 할 수 있겠습니까?

전생에 인연 같이 했고 금세(今世)에 학업을 같이 했으므로, 이 과보(果報)를 얻어 대경(大經)에 함께 목욕했으며, 특히 선사(先師)께 이 심오한 경전의 가르침을 입었습니다.

우러러 듣건대 상인(=의상)께서는 고향에 돌아가신 후, 화엄경을 개연(開演)해서 법계(法界)의 끝없는 연기(緣起)를 선양하여, 겹겹의 제망(帶網)으로 불국(佛國)을 새롭게 하와 이익줌이 크고 넓다 하오니 기쁨이 더욱 더합니다.

이에 불타(佛陀)가 돌아가신 후에 불교를 빛내고 법륜(法輪)을 다시 굴려 불법을 오래 머물게 할 이는 오직 법사뿐임을 압니다.

법장(法藏)은 진취(進趣)함에 이룸이 없고, 주선함에 도움이 적었으므로, 우러러 이 경전을 생각하니 선사께 부끄러워 분에 따라 공부하며 잠시도 놓지 않고 원컨대 이업(業)에 의빙(依憑)하여 내세의 인연을 맺고자 하나이다.

다만 스님의 장소(章疏)는, 뜻은 풍부하나 글이 간략하와 후인에게 이해시키기 어려우므로 이로써 제가 스님의 미묘한 말씀과 신묘한 뜻을 기록하여 의기(義記)를 만들었습니다.

근일에 승전법사(勝詮法師)가 베껴서 고향에 돌아가 그것을 그 땅에 전할 것이오니 상인은 그 잘잘못을 상세히 검토하셔서 가르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마땅히 올 내세(當來)에서는 몸을 버리고 다시 태어나 함께 노사나불(畵舍那佛)께 이와같은 무진한 묘법을 청수(聽受)하고 이와 같은 무량광대(無量廣大)한 보현보살의 원행을 수행(修行)하기를 원하나이다. 혹 악업이 남아 일조에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상인은 과거의 교분을 잊지 마시고 제취중(諸趣中)에서 정도를 가르쳐 주시기를 삼가 바라나이다. 인편이 있을 때마다 안부를 부탁하나이다.

이만 불비(不備) 하나이다.」

―이글은 대문류(大文類)에 실려 있다―

의상은 이에 열 곳의 사찰에서 교를 전하니 태백산의 부석사, 원주의 비마라사(毗摩羅寺), 가야산의 해인사, 비슬산(炚瑟山)의 옥천사(玉泉寺), 금정산(金井山)의 범어사(淹魚寺), 남악(南嶽=지리산)의 화엄사(華嚴寺)들이 그것이다.

또 법계도서인(法界圈書印=法界圖)과 약소(畧疏)를 지어 일승(一乘)의 요긴함과 중요로움을 포괄했으니 천년의 본보기가 될 만하므로 여러 사람이 다투어 소중히 지녔다.

그 밖에 지은 것이 없으나 온 솥의 고기 맛을 알려면 한 점 살고기만 맛보아도 되는 것이다.

법계도(法界圖)는 총장(總章) 원년 무진(668)에 이루어졌는데, 이해에 지엄도 또한 세상을 떠났다.

공자가『기린을 잡았다』는 구절에서 붓을 끊음과 같다.

세상에서 전하기는 의상은 불타의 화신이라 한다.

그의 제자에는 오진(悟眞)·지통(智通)·표훈(表訓)·진정(眞定)·진장(眞藏)·도융(這融) 모두 아성(亞聖)이며 각기 전기가있다.

오진은 일찍이 하가산(下柯山) 골암사(骨巖寺)에 살면서 밤마다 팔을 뻗쳐서 부석사(浮石寺) 석등(石燈)에 불을 켰다.

지통은 추동기(錐洞記)를 지었는데 대개 친히 의상의 가르침을 받았으므로 문사(文辭)가 정묘한 지경에 도달하였다.

표훈은 일찍이 불국사(佛國寺)에 살았는데 상시 천궁(天宮)에 왕래했다. 의상은 황복사(皇福寺)에 있을 때, 무리들과 함께 탑을 돌았는데, 언제나 허공을 밟고 올라갔으며 층계는 밟지 않았으므로, 그 탑에는 사닥다리를 놓지 않았다.

그 무리들도 층계에서 삼척이나 떠나서 허공을 밟고 돌았으므로, 의상은 그 무리들을 돌아다보면서 말했다.

「세상 사람들이 이것을 보면 반드시 괴이하다 할 것이니 세상에 교훈될 것은 못 된다.」

이 나머지는 최후(崔侯=최치원)가 지은 의상의 본전과 같다.

덤불을 헤치고 연진을 무릅써 바다를 건너니,

지상사 문이 열려 귀한 손님으로 접대했다.

화엄을 캐어 와서 고국에 심었으니,

종남과 태백이 똑같은 봄빛이다.

<三國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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