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형율사가 가사를 받다

여형율사가 가사를 받다

명(明)나라(1363-1661) 여형(如馨)율사의 자는 고심(古心)이며 강소성(江蘇省) 을양현(栗陽縣)의 양(楊)씨였다. 가정(慕靖1522-1566) 때에 서하소암(棲霞素腐)에서 중이 되어 율사로서의 다섯 가지 덕

(① 계율을 지키고

② 안거(安居)를 엄수하며

③ 율장을 이해하고

④ 선정을 닦고

⑤ 3장을 연구하는 것 )

을 엄정히 행하며 예불과 송경을 부지런히 하고 3년이 되도록 스승을 시봉하였다.

그 때 경을 공부하는 사람은 많았으나 계율을 숭상하는 이는 드물었다.

이에 여형은 탄식하고

「불법이 세상에 널리 유포되려면 계율에 힘써야 하나니, 율학을 전공하여 부처님 은혜를 갚으리라」

결심하였고, 화엄경을 보다가 문수보살이 오대산에 계시는 줄을 알았다.

문수보살을 친견할 생각으로 바람을 지고 길을 떠나 3년 만에 오대산에 이르러 금강굴 앞에서 서산에 넘어가는 해를 보면서 주저하노라니, 어떤 할머니가 흰머리에 헌 옷을 입고 가사를 받들고 숲 속에서 나오면서 그를 부르는 것이었다.

『스님, 성인을 뵈오려고 불원천리 오셨구려. 이 가사는 아들이 옛날에 입던 것인데 어쩌다가 중간에 안 입게 되었기에 지금 스님에게 주는 것이오. 문수보살은 만나기 어려우니 애쓰지 마시오.

설사 보더라도 알지 못하면 무슨 이익이 있겠소.』

여형율사는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데 할머니가 두어 걸음 떠나 가다가 말하는 것이었다.

『스님, 내가 문수요.』

여형이 곧 따라가서 붙잡으려 했으나 할머니는 간 곳 없고 가사만 손에 들려 있었다.

할 수 없이 눈물을 흘리며 돌아섰다.

그 절에 있는 스님은 꿈에 신장이 와서 말하기를,

『우바리(優波離) 존자가 올 터이니 가서 영접하라.』

고 말하였다.

그래서 대중이 서로 전하여 신도들까지 향과 꽃을 가지고 길에 줄을 지어 공양했다.

여형은 묘덕암(妙德壇)에 있으면서 오대산의 다섯 봉우리에서 광명을 놓은 것을 보았는데, 광명 속에서 문수보살이 손으로 정수리를 만져 주자 마음이 환히 열리었고, 다시 여러 곳으로 행각하면서 승속의 귀의를 많이 받았다.

금릉(金陵)의 길상리(吉祥理)에 이르러 고림사(古林寺)를 짓고 있으니, 여러 스님들이 몰려와 법회가 흥왕하게 되었다.

신종(神宗)황제가 조칙을 내려 오대산으로 오게 하고, 내시 장연(長然)을 보내 황제를 대신하여 보살계를 받게 했는데 여형이 법좌에 오르니 오색구름이 공중에 서리었다.

내시가 서울에 돌아가 사연을 아뢰니, 황제는 혜운율사(禁雲律師)라는 호를 내리고 금정비로관(金頂毘盧冠)과 가사·바리때·석장을 보내어 원만한 공덕을 기렸으며 일을 마치자 이내 고림사(古林寺)로 돌아왔다.

<문수성행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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