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식보생론(成唯識寶生論) 제4권
논에서 말하기를 식(識)은 자체의 종자로부터 생긴다고 하였다. 원인의 성질이 똑같기 때문에, 막히고 걸림이 있지 않다. 의지의 대상[所依]이요, 인식의 대상[所緣]인 5식신(識身)1)의 경계는, 식의 상(相)이므로, 오히려 의식(意識)과 같다 하리라.
혹은 심왕(心王)과 심소(心所)의 자체성질을 떠나지 않고, 눈 등의 식은 똑같이 함께 업(業)을 지으니, 결과를 낼 수 있는 원인[能生因]이므로, 의처(意處)·법처(法處)와 같다고도 한다.
이것은 소달라(蘇呾囉)2)의 뜻을 표시한 말이다. 경(經)에는 단지 의(意)라고만 설했을 뿐 종(宗)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저 반대파들 또한 성립시키지 못하고, 여기에 내세운 바는 오직 약간의 뜻뿐이다. 만일 이 뜻을 세운다면, 마땅히 다시 설하여 널리 논서(論書)를 짓는 일이 없어야 하리라.
이것은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오히려 비밀한 뜻 등으로 설하여, 과(果)를 성립시키고, 경계를 근거로 ‘사람에 나의 실재성이 없는 이치’에 들어가게 하는 것처럼, 12처(處)를 설함도 또한 이와 같다. 만일 눈 등 색의 자성(自性)을 떠나고 나면, 곧 ‘사람에 나의 실재성이 없는 이치’에 들어갈 수 있다. 왜냐 하면 이것은 열둘에서 안과 밖을 차별하여, 눈 등과 색 등의 여섯 경계가 이와 같이 굴러 생기기 때문이다. 역시 저 차별의 견해를 따르지 않는다면, 내지 눈의 접촉과 눈 등의 작용도, 이 자체의 성질을 떠나서 마땅히 별도로 다시 하는 일이 없어지리라. 만일 눈 등을 의지하여 사업을 만들고, 자유롭게 수용(受用)한다면 이를 일러 ‘나와 나의 것에 집착한 묶임’이라고 한다. 이제 이 가운데에서는, 오직 안과 밖의 경계만을 화합하여 자유로울 뿐이다. 눈 등의 작용에 생겨남과 사라짐이 있음로 이것 또한 ‘나’의 눈 등을 원인으로 삼지 않으면, 접촉할 상대가 없기 때문에 언제나 유정과 더불어 서로 버리어 떠나지 않으니, 단지 원인이 된다고 말할 뿐이다. 그러나 작용의 주체가 눈 등의 경계에 대한 뜻은 앞에서와 같다. 그러므로 저것에서 다른 종류가 생기지 않는다. 이를 근거로 ‘사람에 나의 실재성이 없는 이치’를 깨칠 수 있다.
만일 ‘사람에 나의 실재성이 없는 이치’를 조화롭게 극복할 수 있다면, 고요한 경지로 향한 사람은 이 또한 들어갈 수 있다. 왜냐하면, 나고 죽음에서 온갖 괴로움에 시달림을 당하기 때문이다. 괴롭고 무상(無常)함으로 나고 죽는 가운데서 마음속에 싫어하며 버릴 생각이 일어나니 ‘나가 없다는 견해’의 힘으로 한꺼번에 버릴 수 있다. 나의 존재에 대해 끊기를 두렵게 여기는 자는 차례의 원인을 다해야 하니, 마치 섶을 다 태우고 나서야 불이 꺼지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이러한 무리를 위하여, 12처를 설한다고 말씀하셨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이 가운데 ‘사람에 나의 실재성이 없는 이치’를 위해, 십이처(十二處)를 설하지 않았다. 이의 두 양상(樣相)은 평등하여 차별이 없는데, 별도로 물건의 성질을 두었다. 그러므로 나란 견해로 뒤바뀌었으니, 다스려서 끊어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이 이치에 맞는다면, 마치 뒤바뀜으로 뒤바뀜을 다스리는 격이니, 이것은 인정할 대상이 아니다. 또한 잘 알지 못하였다. 내가 세운 이것의 처(處) 등엔들 어찌 차별이 없으랴. 심왕과 심소의 체상(體相)도 차별한다. 만일 이 뜻이 심왕과 심소를 좋아할 때라면, 저 눈 등의 자리[處]는 귀 등의 자리[處]가 아니다. 이에 따르면 이 설(說)은 모양[相]의 차별이기 때문에 이역시 이와 같다. 똑같은 때에 하나의 식이 저기에서 생기지 않는다. 이 눈 등 경계의 자성이 원하여 구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 색 등이 금의 성질[金性]에 머무를 때, 은 등의 성질[銀性]이 아니다. 상(相)에 차별이 없다면 이러한 금 등은 색(色) 등을 떠나고 나서도, 그 다른 물건이 있다고 달리 말할 수 없으리라. 이 도리에 따르면 이것은 차별이 없으니, 자체의 성질에 색 등이 있다고 말하지 못한다. 만일 말한 대로라면, 모양이 뒤바뀌었기 때문에 다스려서 끊을 수 없다. 이것은 앞서 집착한 유정의 성질과 똑같으니, 마치 저 유정(有情)이 나가 없는 곳에서 나를 보는 것과 같다. 이것은 뒤바뀐 성질이다. 이 견해가 뒤바뀌었으니, 이것을 색 등의 경계처럼 버린다면, 나의 뒤바뀜을 없앨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마음이 서로 이어짐이 끊임이 없어서 뒤바뀜이 없다고 한다면.
이 또한 이치에 맞지 않다.
이 가운데 자체의 성질이 원하여 구하는 것과 서로 유사하여 뒤바뀌지 않는다고 하면.
이 또한 앞뒤를 잘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설한 것을 말한다면 방편으로 ‘사람에 나의 자성이 없는 이치’에 깨달아 들게 하였다고 하였다.
색 등의 곳에 그 자체의 성질이 있다고 설하였으니, 오히려 의처(意處)·법처(法處)와 같으리라.
만일 심왕(心王)과 심소(心所)가 나의 자성이라면.
저 좋아하여 즐기는 자는 곧 다투거나 따지는 일이 없으리라.
만일 심왕과 심소를 떠나서 별도로 나의 자체가 있다면.
참으로 비유가 없다. 이의 언론은 분별한 바와 같이 총체적 양상의 종류이기 때문에 가장 뛰어난 뜻[第一義]이 아니다.
만일 방편으로 ‘나의 실재성이 없는 이치’로 향하도록 설했다면.
이 또한 그렇지 않다. 이치에 맞게 ‘이 교묘한 방편을 안전하게 건립하여, 색 등의 경계[處]를 설했다’고 관찰해야 하리라.
그러나 부처님의 말씀에는, 단지 다음과 같이 마땅히 해야할 일만이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사람에 나의 자성(自性)이 없는 이치’에 들게 하려는 의도였으니, 어찌 번거롭게 다시 별도로 오직 마음만이 있을 뿐이라고 말씀했겠는가. 이것이 이미 있지 않았다면, 어째서 12처(處)를 설하여 비밀한 뜻이라고 말씀할 수 있었겠는가.
이 또한 이치에 맞지 않다. 그밖에 다시 ‘법에 나의 자성이 없다’3) 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 지극히 중대한 일에 깨달아 들게 하시려고, 세존께서는 드디어 색 등의 모든 법에는 자체의 성질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온갖 그 외 다른 위대한 보살들에게, 저 여래(如來)의 훌륭하고 미묘한 자리를 얻게 하고, 온갖 중생계에 고루 미치어 매우 훌륭한 이익을 주시려고 하였다.
이 일을 어떻게 한다는 것인가.
말하자면 색 등의 모든 법이 서로 유사하게 앞에 나타남은, 단지 오직 이 마음뿐이다. 식을 제한 외에 일찍이 조금의 물질도, 색 등의 성질로 볼 만한 일이 없다. 이를 근거로 색 등의 모든 법은 자체의 성질이 없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 말의 의도는 온갖 일의 자성(自性)이 자기 식의 힘 때문에 변하여 생기는 이치가 결정적으로 성립된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알고 있는 대상을 따른다 해도, 소유한 온갖 일은 다 식을 떠나서 별도로 취할 수 없다. 단지 오직 이것[識]만이 모양의 상태를 나타냈을 뿐이다. 이 때문에 진실로 자성이 없음을 분명히 알고, 곧바로 ‘법에 나의 실재성이 없는 도리’를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만일 ‘법에 나의 실재성이 없는 이치’를 깨달아 들어간다면, 이것이 무엇보다 훌륭하다는 근거를 가지고, 이렇게 말하는 것인가.
보이는 경계는 오직 뒤엉켜 혼란할 뿐이다. 훌륭한 내용의 이치에 근거한다면, 본래의 성품은 텅 비어 없다. 이를 선양한다면, 훌륭하게 중관(中觀)4)과 부합되리라.
보이는 경계가 없다면, 식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진실로 아직 잘 알지 못해서다.
어떤 취지에서 그렇다고 하는가.
우선 다음과 같이 심왕과 심소법을 말하리라. 보이는 경계가 그 일과 들어맞지 않는 데서 허망하게 받아들여 진실이 아닌 모양을 취하니, 뒤엉켜 혼란함이라고 이름한다. 어찌 단지 오직 식만이 있을 뿐이라고 말하지 않겠는가.
만일 모든 법에는 하나라 함도 또한 없다고 말한다면, 그대는 또 어째서 선양할 말이 있다고 하는가. 경계가 이미 없으니, 식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꿈 등의 비유를 들어 이것을 잘 깨닫게 하리니, 이상과 같이 말한 대상에 수고롭게 의혹을 품지 않아야 한다. 바깥 경계를 얻지 못하면 단지 오직 식만이 나타날 뿐이니, 이것을 어째서 식의 뜻이 이치에 맞지 않다고 하랴. 만일 구체적 내용을 든다면, 업의 주변에서 직접 결과를 더하기 때문이다. 이 말로써 곧바로 논란의 답이 성립되었으리라.
역시 또 자체를 근거로 다름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성립될 수 있어야만 비로소 달라진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충분히 자체를 지녔음에도, 이 가운데 또 자성의 뜻을 말하는 격이다라고 하였다.
이 또한 똑같이 앞에서 이미 분석하여 끝낸 일이니, 이 뜻은 그렇지 않다. 그 작용의 기구를 떠나서 반드시 다른 일이 있어야만 비로소 작용하게 된다면, 마치 자기가 되려 자신을 가진 것과 같다. 때문에 알맞지 않다는 것이다. 중생에게 ‘법에 나의 실재성이 없는 도리’를 깨우쳐 주시려고, 오직 식이 있을 뿐이라고 설하심은 오히려 타당하다. 만일 일체의 법이 전혀 없다고 말한다면, 모두 나의 실체가 없어지니, 이에 따라 ‘나의 실재한 자성이 없다’라고 이름한다. 그러면 함께 모두 다 나의 자성이 존재하지 않음을 인정한다. 이와 같이 곧바로 ‘법에 나의 자성이 없으니, 모든 법은 존재하지 않음’이 성립한다. 이를 근거로 식(識)도 또한 똑같이 그렇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성질[性]이 이미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여기에다 안전하게 세우려는가. 저 온갖 법이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허망한 내[假我]가 번갈아 세계를 이어가는 성질과 같다. 그 자체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였으니, 번갈아 세계를 이어가는 자체도 전혀 자성(自性)이 없으리라.
이거야말로 곧바로 ‘법에 나의 실재성이 없는 도리’가 성립된다. 말하자면 온갖 법은 모두 다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식도 또한 똑같이 그렇다고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것[識]이 이미 없다면, 어떻게 이것을 의지해서, 미혹(迷惑)한 사람들을 ‘법에 나의 실재성이 없는 도리’에 들게 하려는가.
나의 실체가 없기 때문에, 결국 ‘모든 법에 실재성이 없는 도리’를 깨달아 들게 하였으니, 모두가 이와 같이 훌륭한 방편이라고 인정하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건립하기에, 저 방편을 성립시켜서, 12처를 설하며 ‘사람에 나의 실재성이 없는 도리’를 깨닫게 하려는 것인가.
참으로 일체의 법이 전혀 없어야만, 그제야 비로소 ‘법에 나의 자성이 없다’고 이름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법에 나의 실재성이 없다’는 소리[聲]는, 모든 법이 다 자체가 없다고 밝힌 것이 아님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번갈아 세계를 이어간다는 말도 또한 여기에서와 똑같이, 통틀어 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밝히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뜻에는 모든 인연으로 생기는 법에 나의 실재성이 없으나 저것이 존재하니, 이 ‘나의 실재성이 없다’고 설한 것이다.
그 상(相)은 어떠한가.
말하자면 나라고 부름은 자체의 성품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에 나의 자성이 없다’고 이름함이요. 전혀 모든 법의 자성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색 등의 모든 법도 한 몫을 따라 의지해서, 자성이 없다고 설함이요. 전혀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므로 ‘법에 나의 실재성이 없다’는 말은 전혀 자체가 없다고 하지 않았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만일 온갖 법의 일이 모두 없다고 말할 경우라면. 마땅히 ‘법에 자성이 없다’라고 이름하지 않아야 하며, 이치로는 마땅히 ‘모든 법이 전혀 없다’고 말해야 하리라.
그렇다면 단지 집착 대상인 ‘법에 자성이 없다’는 연(緣)에 공능(功能)이 있어서 차별을 얻을 뿐이기 때문이다. 다른 자체의 성질을 떠나서 저것의 실재한 나의 자체[實我自體]를 가려낸다면, 어느 때이고 밝혀낼 상(相)이 있지 않으니, 이를 ‘모든 법에 자성이 없다는 뜻’이라고 말함이요, 시원하게 벗어버리고 전적으로 부정하여 텅 비었다고 하지 않는다.
그러면 집착되었다는 것은 이 무슨 말인가.
소위 무명(無明)으로 뒤바뀐 견해를 분별 없이 집착하고, 그 자기 마음을 따라서 종자가 성숙되면, 다른 것으로 인하여 구르고 변해서 나타난 형상이 똑같지 않으니, 바깥 경계에 별도로 자체의 성질이 있다고 집착한다. 뒤바뀐 견해대로 바깥 형상이란 견해를 삼았기 때문에 자기의 소견에 고정적 집착이 생겼을 때, 이를 집착한 일이라고 이름한다.
이것은 또 무엇인가.
한 물건도 없다고 말한다.
어찌 물건이 없는데도 집착이라고 이름하는가.
이것이 근거이기 때문에 그렇다.
만일 이 집착에 조금의 실물(實物)이 있어서 자체가 비지 않았다면.
그러면 마땅히 이 감각[情]의 집착이라고 이름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이 뜻에 서로 응함이 있으므로 그 헤아려 집착한 실제의 일 자체가 서로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실제의 물건이 있다면, 헤아림의 집착이라고 이름하지 않지만, 이 한계[分齊]가 가깝게 보는 경계이기 때문에 이것은 모두 다 집착된 일이라고 말한다. 가령 식을 가지고 이 경계를 삼을지라도 헤아림의 대상으로 여겼을 때는, 이 또한 되려 집착되었다는 뜻이 성립된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집착된 식 또한 자체의 성질이 없으니, 곧 유식의 성품이다. 이것은 온갖 존재의 법이 모두 자체가 없는데, 깨달아 들어갈 수 있는 미묘한 방편이다. 단지 이 본래의 식만이 경계를 따라서 형상을 나타낼 뿐이다. 그러니 바깥 경계를 조금이라도 인정할 수 없다. 색으로부터 식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이와 같이 나타날 수 없으며, 상분(相分: 마음속의 映像)의 식 자체도 또한 없는 것이다.
만일 이와 다르게 단지 색만을 부정하여 버릴 뿐이라고 말한다면.
이 유(唯)의 소리로 유식(唯識)이란 말을 설해도, 곧바로 식을 인연하는 식을 성취하지 못하리라. 그 경계를 두었으므로 또다시 곧바로 색을 인연하는 식이 성립되고, 이것을 존재한 경계로 여긴다. 왜냐 하면 그 체(體)가 저기에서 떠나서는 말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제불세존(諸佛世尊)이라야 비로소 분명히 알고 살필 수 있다.
분명히 알고 살핌이란 어떤 것인가.
이 뜻은 다음에 내가 마땅히 풀어 설명하리라. 이것은 곧 그 마음과 마음에서 생기는 법에 진실한 사실이 있고, 말로 밝히는 길을 뛰어넘은 곳에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일체의 법은 모두 다 존재하지 않음이 성립함도, 시원하게 벗어나와 텅 비었다 함과 똑같지 않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진리를 분명하게 깨닫고, 훌륭하게 방편에 들어가서 유식(唯識)의 교리를 설해야만 이치에 부합된다. 그 차례를 따라서 점차 모든 분별의 그물을 찢어 없애버릴 수 있으며, 소유한 바른 인연이 생겨나는 원인의 성질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만일 안전하게 건립한 ‘말로 밝히는 경계를 떠나서 이 참답게 존재한 일’을 인정한다면, 이것은 곧 되려 저 색 등에도 또한 똑같이 주어져서[荷負] 참된 자성의 존재가 성립하리니, 오히려 식에서도 마찬가지리라.
만일 그렇다면 되려 마땅히 저에게 물으리라. 어디에 이러한 도리가 있을 수 있겠는가. 남의 밝힐 대상이 아닌 식이 있다고 인정함을 보고 또한 색 등도 똑같이 이렇게 버리게 하니, 일찍이 꿀을 좋아한다고 우유도 역시 탐내게 했다고 하는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만일 또 좀더 헤아려서 ‘저것은 이것과 서로 떠나지 않은 성질이 있으니, 일이 싹 등과 똑같다’고 말한다면.
능히 따라서 결과를 내는 원인의 작용이 있으리라.
저것이 만일 서로 떠나지 않는 성질이 있다고 말한다면.
다행히 한쪽 방면을 보여줄 수 있으리니, 이치로써 세밀하게 따져보면, 결코 공동의 인정을 끌어내지 못하리라.
만일 식이 오히려 경계로 여길 때와 같다고 말한다면.
집착된 자체이기 때문에 집착된 일이라 이름하니, 실제한 일의 모양새는 저것이 생기는 원인이 된다. 색도 또한 이와 똑같이 집착하는 성질이기 때문에 또한 마땅히 연(緣)이 생기는 일이 있어야 타당하리라.
인연을 짓는 일과 더불어 식과 마찬가지라고 한다면.이것은 이에 곧바로 조금도 좋아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저 5취(聚: 5蘊)에서도 모두 다른 것을 의지해서 일어남[依他起]5)은, 인정한 바이기 때문이다. 두루 헤아려 분별[遍計分別]하는 법성(法性: 법의 體性)의 뜻이, 반드시 여기에서도 이치가 저기에서와 똑같아야 하므로 현재에 이러한 바른 가르침의 말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 색도 또한 식을 떠나 있을지라도, 실제로는 다른 것을 의지하여 일어남이 마치 받아들임[受] 등과 같다고 말한다면.
이러한 취지에는 일정하지 않은 허물이 있다. 집착된 몫에 또한 식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받아들임 등은 연(緣)이 생기는 몫이니, 이것은 이 네 가지 쌓임[四聚]6)의 자체 성질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그 되 비친 형상의 몫을 나타냈으니, 곧 마음과 마음으로 생겨서 모인 것을 의지하여 시설했기 때문이다. 이 도리를 근거로 그 비유는 반드시 성립하겠지만, 그러나 세울 대상에서는 따라서 합하는 뜻이 없다. 역시 또다시 있을지라도 세우고 나면 잘못이 성립되리라. 인연으로 생겨 일어나는[緣起] 색(色)도 또한 받아들임 등의 자체의 성질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법칙에 맞도록 원인의 자리에 차별이라는 말을 두고, 그 허물이 덜어지기를 바라면서 식이 현재 집착된 모양에서 차별이 생겼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곧 그 일정하지 않은 잘못을 없애기 때문에 모양 가운데 두었다. 그러나 모두가 인정한 받아들임 등의 자체는 스스로 깨치는 성질이다. 경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미 이 도리를 두었으니, 참으로 의지할 만하다. 그러나 색은 따로 존재하면서도 별도의 유래가 없다. 뜻으로 추구하여 살펴보아도 참으로 같은 이치가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일체의 식은 모두 다 존재하지 않으니, 알아야 할 경계는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또 말하기를 만일 그 외 다른 식이 있다면, 그 외 다른 식과 더불어 경계가 될 수 있는가라고 하였다.
또한 어떤 이가 말하기를 모든 부처님의 경계는 그 법이 있으니, 모두가 그 외 다른 식의 경계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만일 부처님의 경계에서 자신의 마음으로 취하여 경계를 삼지 않았다면, 여기에 능히 베푼 말씀이 있다고 용납하지 못한다. 이와 같이 설했다면 모두가 거짓 베풀었음이 성립되리라. 마치 어떤 일을 곰곰이 생각하고 헤아려서 말로 밝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 말의 뜻이 표현된 모양이 곧 오직 식만이 여러 가지 모양을 나타낼 뿐이기 때문이다. 비록 바깥 경계가 없을지라도, 그 일을 접촉한 것과 유사하게 식이 생길 수 있다. 그러면 이것은 언론(言論)의 원인이 된다. 마치 생기고 나서 이내 사라지는 소리라고 말함과 같다. 가령 박사(博士)가 가르침을 쉬는 사이 잠시 소리를 멈출지라도, 당연히 그 메아리를 듣는다. 참으로 저기에서 감각으로 얻을 대상이 있지 않으나 그 가운데서 함께 언론을 펼치니, 단지 업(業)만이 조작될 수 있을 뿐이라고 인정해야 한다.
받아들임은 이 감각[受]이다. 저것이야말로 곧바로 실제의 내가 있다고 인정하게 된다. 어찌 또 당시에 별도로 ‘참나’가 있을 수 있다고 하겠는가. 동시에 두 식이 생김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 외 다른 식은 쉴 틈 없이 그 자체가 무너져 없어지리라.
이러한 간절한 논란도 역시 상응하지 않는다. 그 외 다른 식이 이것을 받아들이는 데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역시 이 말을 가지고 겸하여 나머지 논란도 부정하리라. 저가 만일 경계의 존재를 알려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 것과 같다. 이 또한 공동으로 보는 모양의 경계에서 구획(區劃)을 정하고 이를 안다고 말하니, 또 역시 저와 더불어 똑같이 힐책을 부르리라. 저가 말한 대로라면, 여래에게 온갖 훌륭한 덕이 있음을 말로 밝혔다고 하여, 그대 역시 마땅히 훌륭한 덕을 깨달아 알았음이 성립되어야 한다. 이에 따르면 문득 부처님의 경계가 아니다. 실로 또한 똑같지 않음은 식미제(食米齋)7)와 같다. 이 공동의 모양은 실제로 있는 물건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바깥 경계를 근거로 앞에 나타나는 힘이 아님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비로소 이 가운데 단지 마음이 모인 구획으로 인해 곧바로 생겨 일어날 뿐이라고 자세히 살필 수 있다. 이미 이 도리가 있었으니, 부처님의 경계에서는 논란이 성립되지 않는다. 여기에 논란을 따라서 논리가 생기다 보니, 주변의 뜻도 얼마간 두루하였다. 그러나 비밀한 뜻의 결과에 대해 그 원인을 마땅히 설해야 하리라. 이 비밀한 뜻에 두 원인이 있으니, 첫째는 다른 교(敎)와 서로 틀린 점을 말한 것이요, 둘째는 바른 이치에 해로움이 있다는 점이다.
유식(唯識)의 교리를 설하면, 즉시 서로 어긋난다. 이 아급마(阿笈摩)에 성립시킨 말이 없기 때문이다. 또 저 환망경(幻網經) 가운데에 부처님께서 색 등의 경계에 분별을 일으키는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곧 이 눈의 식이 알아야 할 색(色)이 실제로 존재한다거나, 일정하게 머물러 있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단지 허망한 감각만으로 옳지 못한 분별을 일으켜서, 결정적 견해로 삼았을 뿐이다. 그리고 언론(言論)을 일으켜서는. 오직 이것만이 참다울 뿐이요, 다른 뜻은 잘못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널리 말씀하시고, 내지 법에 이르기까지 차례로 설해서 많이 들어 아는 슬기로운 제자들이여, 마땅히 다음과 같이 배워야 하리라. 내가 과거·미래·현재의 안식(眼識)을 관(觀)하고, 안식이 소유한 온갖 색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저 경계에는 영원한 결정이 없고 허망함도 없으며 달라짐도 없다. 실제의 일을 얻을 수 있다든지, 혹은 소유함과 같다든지, 혹은 뒤바뀜이 없는 성질이라든지, 모두 다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하셨다. 세존께서는 ‘오직 세상을 벗어나서 이 진실을 성취한 성자(聖者)만을 제외하고, 이것이 모두 허망하다고 설하셨으니, 아급마와도 다르고, 바른 이치에도 서로 어긋나니, 마땅히 우선 설해 주어야만, 비로소 물음의 실마리를 일으켜서 의심의 정(情)을 드러내리라. 어떻게 또 이와 같은 말씀을 알겠는가 라고 한다면.
이것은 진실이 아니니, 오히려 식을 말함과 같다. 이것이 만일 말의 뜻이 12처를 설했다면, 그 하나의 성질과 하나의 성질이 아님으로 인해서, 곰곰이 생각하여 살필 때, 이를 가지고 경계를 삼으려 하나 감당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말한 바가 곧바로 그 뜻과 같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때문에 지금에야 시도(試圖)하여 헤아려 보니, 이 색과 소리[色聲] 등이 호응되어 생긴 경계가 각기 자체를 따라서 그 식을 근거로 모양의 생김새를 만들어 낸다. 색 등의 일 모양은 이 식의 경계이니, 색의 식을 색이라 이름하고 소리의 식을 소리라 이름한다. 나머지는 이것과 비교하여 알아야 한다.
이 색성(色聲) 등은 마땅히 따로 지닌 몫[支分]이 없어야 하나, 자체가 하나이니, 유분색(有分色)8)과 같다. 이로 말미암아, 곧 스스로 의지할 경계에는 따로 지닌 몫의 성질[支分性]이 없기 때문이리라.
그렇지만 이 색 등은 존재하는 사물(事物)로서 자체는 막히고 걸리니, 적절하게 처리될 대상이다. 그 똑같은 종류에 많이 머무는 성질이기 때문에, 능동적으로 식을 내는 것 등과 똑같이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9)
[이 사이는 극미(極微)의 뜻에 대한 논이다.]10)
헤아리는 힘이므로 있고 없음을 결단하기 때문이다. 모든 헤아림 가운데서는 현량(現量)11)이 뛰어나다.12) 만일 바깥 경계가 없다면, 어떻게 이와 같이 감각의 정[覺情]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이 일은 나의 특별한 감각기능[別根]으로 알 대상이다. 특별한 감각기능은 꿈 등과 같이 비록 바깥 경계가 없을지라도, 또한 있을 수 있음은 이미 앞에서 자세히 분별한 것과 같다. 이것이 만일 뒤에 인연할 때 보이는 경계가 이미 없어졌다면, 어찌 현량(現量)이 모든 인식 수단[量]의 으뜸이라고 인정하는가. 만일 그 당시에 현량의 감각이 생겨서, 이것은 나의 특별한 감각기능이 알 대상이라고 한다면, 이 때 경계에서는 결국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오직 이 의식(意識)만이 결정할 뿐이기 때문이다. 눈의 식은 당시에 이미 달라져 없어졌기 때문이다. 뜻이 이미 이러하니 저 경계가 어찌 현량의 성립이라고 인정하리요. 더욱이 수이론자(殊異論者)13)가 온갖 법은 찰나에도 머물지 않는다고 인정함이랴. 이 감각이 일어날 때 색 등의 온갖 경계는 또한 다 이미 사라졌으니, 현량의 이치가 어찌 성립될 수 있겠는가.
비록 앞과 같이 잘 풀어 다 설명했을지라도 여전히 이 매우 깊은 법의 뜻을 헤아려 엿볼 수 없으니, 다시 논란을 일으켜 말하노라. 헤아리는 힘[量力]이기 때문에 단정해서 ‘있다’고 한다면, 때로는 이것이 비량(比量)14)을 어기는 근거이기 때문에 색 등의 경계에서 부정되어 ‘없다’를 성립시킨다. 비록 실제로 인식수단을 근거로 있고 없음을 결정할지라도, 그러나 저기에서 특별한 감각기능의 견주어 앎과 바른 가르침 등의 모든 헤아림 가운데에서, 특별한 감각기능이 가장 뛰어나기 때문이다. 직접 깨달은 경계가 바로 결과의 성질이기 때문에, 반드시 이 경계에서 어기는 잘못이 없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그 외 다른 인식수단에서 이것을 성립시킨다. 이것은 곧 특별한 감각기능이 색 등의 경계에서 이미 직접 깨달아 안 것이다. 어찌 저것을 비량(比量)과 서로 어긋나도록 할 수 있기에 대뜸 색 등의 존재성을 부정하려는가. 또 어떻게 바깥 색[外色]이 특별한 감각기능의 경계를 성립시키겠는가. 또한 만일 경계가 없다면 여기에서 이러한 감각이 생길 수 없으니, 이 일은 바로 나의 특별한 감각기능이 아는 것이다. 이 말의 의미를 말하리라. 각기 달리 스스로 깨달아서 받아들임이 계속 일어나며, 거듭 마음의 인연을 일으켜서, 널리 베풀어 설한 것으로, 마치 일찍이 괴로움·즐거움·더러움 등을 받아들임과 같으리라.
이것은 참으로 그렇지 않다. 그 외 다른 데에서도 또한 그렇다. 특별한 감각기능은 꿈 등에서 이러한 일이 있음을 보는 것과 같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자세히 말했다. 꿈 등의 자리에도 역시 뚜렷하게 보는 색 등의 온갖 경계가 있는 것이다. 곧 말한 바와 같이 ‘반복하여 살피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 것은, 이 세운 원인에 결정하지 못하는 허물이 있음을 드러냄이다. 그러나 꿈이나 눈어질병, 그리고 범죄로 거스른 마음의 손실(損失)이기 때문에, 마치 특별한 감각기능[別根]과 유사하게 눈앞에 밝게 보는 것과 같다. 비록 실제의 경계는 없을지라도 보는 일이 있음은, 또 역시 식의 자체 성질을 벗어나지 않는다. 받아들여 할 일을 바로 현장에서 받아들여, 적절하게 처리하기 때문이다. 이 도리에 따라서 마음은 색 등의 실제 경계를 성립시키려고 한다. 이것이 식을 떠난다면 서로 어기는 잘못이 있다. 자만을 일삼으면 이것은 또다시 원인이 성립되지 않는 허물이 있으리라. 이것이 뒤의 인연을 깨달을 때, 보아야할 경계가 이미 없어지리니, 어찌 현량(現量)을 인정하겠는가. 눈 등의 모든 식이 색 등을 볼 때 저것은 참으로 이 적절하게 처리함이 생길 수 없으리라. 이것은 단지 그로 인하여 각각 따로 안에서 깨달아 아는 상분(相分)의 성질이기 때문이다. 이것[相分]이 앞장서므로 의식(意識)이 뒤를 따르며 그 결정된 모양을 취하고, 이를 한데 모아 생각을 짜 맞춰야만 비로소 결단을 내릴 수 있다.
또다시 당시에는 식이 함께 일어나지 않으리라.
가령 그렇게 그 색 등의 온갖 경계가 있을지라도 눈 등의 식이 사라졌으니 뒤에 어찌 볼 수 있겠으며, 볼 수 없다면 볼 대상이 어찌 성립되겠는가. 바로 이 때에 바랄 대상은 무엇이며, 그 사라진 식에서 어찌 보는 작용이 있을 수 있으랴. 더욱이 색 등도 식과 함께 똑같이 없어짐이랴.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색 등의 온갖 경계는 볼 수 없으나, 저 보는 힘을 빌려서 거듭 살피는 마음이 색 등을 관찰하는 것이다. 어찌 특별한 감각기능이 인식의 성질을 성립시킨다고 인정하겠는가. 또 저 때에 의식(意識)이 적절하게 처리함을 모두가 현량(現量)의 성질이라고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며, 볼 수도 없기 때문이며, 함께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다.
어떤 다른 스승이 말하기를 여기에서 최초로 그 경계를 받아들임은, 분별 의 번뇌에 물드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저것은 반드시 바깥 색의 실제 경계를 인연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 또한 이치에 맞지 않다. 이것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말로 밝히는 색 등의 바깥 경계를 떠나서는 이 식의 알 대상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으로 자신이 깨닫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에도 짜임새 있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곧바로 온갖 경계를 인연하여 모양의 생김새를 차별한다. 저들은 단지 이와 같은 내부 인연이 있음을 인정할 뿐이다. 이 또한 그 모양의 생김새가 나타나는 때를 따라서 단지 식에 의지할 뿐이니, 오히려 함께 괴로움·즐거움·더러움 등을 성립시키는 것과 같다. 그러나 저 색 등 바깥 경계를 가지고 특별한 감각기능의 인식수단으로 여겼기 때문에, 이것은 단지 이 허망한 감각만을 집착할 뿐이다. 오히려 피차(彼此)가 업 등의 많고 적음과 길고 짧음을 수량(數量)하는 것과 같다. 되려 이 논란을 가지고, 그 외 나머지 의심도 물리치리라. 꿈에서 본 일을, 꿈에서 깨고 난 뒤 관련된 일을 되돌려 생각하면, 비록 그 당시에 경계가 없을지라도 윗자리[上]의 마음에 아는 일이 있으니, 현량(現量)도 또한 그렇다. 이것이 원인이기 때문에 다음 시기에 의식(意識)이 결정해서 아는 일이 없지 않으니, 저들 또한 더욱 특별한 감각기능의 인식수단을 부정하지 못한다. 자체 내부의 깨달음에 심왕과 심소가 생겨서, 자체의 깨달음을 떠나지 않고, 현량이 있음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깥 경계를 가지고 현량(現量)을 삼았으니, 이 허망함은 더욱 늘어난다. 당장 부정할 대상이다, 마치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성립되지 않는 잘못을 벗어나려는 짓이다. 아직 해석한 글을 못보고, 단지 쓸데없는 말만 일삼을 뿐이라면, 이것은 분명하게 들어맞지 않는다.15)
그대는 전혀 바깥 색 등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고, 다시 이것에 의지해서 현량(現量)이 있음을 밝히려고 한다.16)
그러면 성립시킨 일이 배척당하는 잘못을 멀리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또 이전에 앞 경계를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면, 의식(意識)이 기억해낼 수 없다. 결정해서 마땅히 저 바깥 경계에 대해 이전에 이를 받아들인 적이 있다고 인정해야 한다. 이를 근거로 색 등의 경계에서 특별한 감각기능의 성질을 인정함은, 이에 성립되지 않음을 볼 수 있으리라.
이전에 받아들인 경계라야, 비로소 기억할 수 있다고 한다면 까닭이 무엇인가.
이치가 있기 때문이다.
이미 설한 상(相)의 식과 같다고 한다면.
비록 바깥 경계가 없다 하더라도, 경계의 모양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눈 등의 온갖 식이 드디어 생겨 일어날 수 있음은 앞에서 이미 설한 것과 마찬가지다.
다음은 또 어째서인가. 이것으로부터 기억이 생긴다고 한다면, 이 식으로부터 뒤에 새겨둔 생각[念]과 서로 응하여, 곧 이 모양에 분별하는 의식이 생겨 일어난다. 그 경계를 받아들임으로 인해서 새겨둔 생각이 비로소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 뜻은 성립하지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색 등의 경계에서 현량(現量)의 성질을 결정하고, 소유한 모양의 생김새를 분명히 알아야 하리라. 기억을 일으키는 성질이기 때문에, 오히려 즐거움 등과 마찬가지다. 기억의 자리[記憶上]에 형상(形像)을 안치(安置)하고, 이를 받아 취해서 앞모양을 결단하고 안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리라.
그러면 받아들임이 없지 않으니, 마치 돌 등에 그 불꽃 등이 있지만, 의식(意識)이 생길 때도 또한 이 억념(憶念)을 일으킬 수 없는 것과 같다.
이 결정을 근거로 비량(比量)의 힘을 의지하고 색 등의 경계에서, 마땅히 반드시 존재[有]를 정하여 직접 이를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이와다르다면, 인정한 바 억념은 곧바로 존재하지 않음이 성립된다. 또 여기에 받아들인 경계에서 현량(現量)이 성립되기 때문이다.
세상의 언론(言論)은 이를 ‘봄’이라고 이름한다. 만일 색 등에 이 억념의 성질이 함께 성립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면.
반드시 이 잘못이 있으리라. 곧 여기에서 바깥 색의 경계가 억념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이치로는 성립을 인정하지 못하니,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마치 경계를 떠나서 그 보는 작용이 있을 수 있다는 것과 같다. 억념도 똑같이 그렇다. 그 세움의 주체가 함께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종(宗)17)과 유(喩)18)에서 그들을 깨우치려고 하나, 경계에서 받아들임이 전혀 힘의 작용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