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식보생론(成唯識寶生論) 제3권
논에서 말하기를, 나락가파라(落迦波羅)는 사슴을 사냥하는 자와 같다1)고 하였다. 마땅히 다음과 같이 알아야 한다. 단지 서로 해치는 고통을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처(器處)2)에서 공통된 모양의 고통 역시 받지 않는다. 이 옥졸은 저들을 해치기 때문이다.
만일 이와 다르다고 한다면, 저 옥졸들은 뜨거운 쇠가 끓어오르는 곳에서, 불태움을 받는 고통도 참을 수 가 없을 텐데, 어느 여가에 저들을 핍박하며 해칠 수 있으랴. 이 뜨거운 곳에서 몸이 움직여 구를 때면, 나락가(那落迦)의 무리는 자기 몸의 마디마저 지탱할 수 없으리니, 더욱이 어찌 다른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단지 뜨거운 쇠 안이 펄펄 끓어 솟아오르니, 몸이 그것에 억압되어 조금도 자유롭지 못할 뿐이다. 그러나 저 옥졸들은 용감하고 굳세게 저들을 해친다. 그러므로 반드시 저들의 고통을 받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마치 요리하는 사람이 뜨거움을 피해서, 쇠 젓가락으로 뜨거운 기름 속에 튀겨지는 생선을 뒤적이는 것과 같다.
어떤 이는 옥졸을 가지고 나락가(那落迦)로 여기면서, 서로 해치는 데 공능(功能)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면 곧 옥졸의 뜻을 어기게 된다.
그러나 나락가(那落迦)의 무리가 불태우는 해침을 당할 때, 서로 해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다면, 곧 옥졸이라고 할 수 없다.
나락가(那落迦)를 나락가파라(洛迦波羅)로 성립시켜, 종(宗)을 삼는다고 말한다면.
종(宗)을 어긴 잘못이 있으리라.
또다시 만일 저 뜨거운 쇠의 극심한 고통의 접촉[觸]을 받기 때문에, 모든 나락가가 저들을 해칠 수 없음은 마치 살아 있는 목숨들을 불꽃이 달아오르는 숯 속에 둔 것과 같다. 혹은 이 무리가 마땅히 이 고통을 받지 않기도 하니, 도사천(覩史天)3)과 같다고 하였다.
이것은 옥졸(獄卒)이 나락가(那落迦)가 아님을 밝힌 것이다. 곧 이 견해에 대해, 외부인은 달리 해석하였다. 경(經)을 이끌어 증명하였으나, 극히 정반대의 실수를 저질렀다. 그래서 잠시 조금이라도 지혜가 있는 무리에게, 그 치우친 견해를 밝히기 위하여, 대강 분명한 조목을 들어 보리라.
저들이 대뜸 따져 말하기를 지옥 경계에서 옥졸의 무리가 고통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인정하지 않는다. 때문에 경의 말씀대로 말하면 ‘너희들 필추(苾芻)여, 나락가(洛迦)가 있으니, 6촉처(觸處)4) 라고 이름한다. 만일 모든 유정이 그 가운데서 살고 있다고 한다면, 저들이 눈으로 온갖 물질[色]을 볼 때, 다 모두 싫어할 일을 분명히 보리라’고 하셨다. 실제로 저 유정에게는 이러한 일이 있으니, 옥졸이 유정이 아니라면 어째서 관찰해 볼 대상이라고 하는가. 유정을 인정하지 않는 논리에 집착한 자를 대하여, 곧바로 ‘함께 모여 허공을 씹는 짓’이라고 하리라고 하였다.
저들이 논란을 늘어놓아 말하기를 모든 나락가(那落迦)가 저 고통을 받을 때, 그 차별이 있음은 별도로 달라진 몸을 얻었기 때문이다. 마치 한 무간(無間)5)의 죄가 많은 무간의 죄와 같으리라고 하였다.
이 또한 아직 충분히 남의 의미와 취지에 익숙하지 못하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나락가(洛迦)에 태어난 유정의 무리가 도려내는 괴로움을 받을 때라고 한 것은, 그 외 다른 지옥[餘趣]이 겪는 혹독한 괴로움과 구별한 것이다. 그러니 저 지옥 가운데서 겪는 공동의 괴로움은, 다 모두 똑같이 받는다. 그렇지만 저곳에서는 무거운 업의 무서운 광풍이 맹렬하게 휘몰아치니, 몸이 극심한 고통을 받지만, 어느 한 무간이라면 이 고통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저 많은 종류의 무간에서 겪는 모진 고통과 비교하여, 똑같이 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곧 결정하지 못함이 성립한다. 이 사실을 밝히기 위하여 저 옥졸을 제외 시켰으나, 모든 나락가(那落迦)는 이 차별이 없다. 저 지옥의 똑같은 고통을, 다 모두 받기 때문이다. 곧 성립시킨 종(宗)에는 다른 종(宗)의 경계[異宗處]가 없다. 구르고 변하여 생기는 도리인들, 어찌 결정하지 못함이 성립하겠는가. 그러나 하나의 무간에서는 똑같은 고통을 받기 때문이다.
어떤 외부인이 따져 말하기를 그 옥졸이 고통을 받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것은 바른 답이 아니니 결정하지 못함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고 해도 마땅히 이 결정적 판단을 내려서는 안 된다. 하나가 받는 고통을 보고, 그 외 다른 것도 또한 그렇게 되게 하려는 짓이다. 지금의 세상에서도 함께 이 사실을 직접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양이나 낙타가 전갈이나 도마뱀에게 물렸을 때, 드디어 문득 죽음에 이르면 새의 한 무리가 가져가서 먹는 것과 같다. 우선 짐승[傍生]에게 이 차이가 있음을 들어 보았다. 인간의 세상 가운데서도 또한 어느 하나는 고통을 받지 않은 경우를 본다. 예를 들면 속에 덩어리가 있는 환자를 상대로, 치료하는 사람이 드디어 문득 뜨거운 철을 밟고 나서, 이내 뜨거워진 발로 아픈 곳을 밟는다. 환자는 비록 극심한 고통을 받을지라도, 치료하는 사람의 발은 조금도 아픈 곳이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유정은 실제로 차별이 없다. 이 역시 그 나락가(洛迦)의 세상[趣]에서는, 선천적으로 자연히 생긴 괴로움의 법[俱生苦法]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결국 이를 나락가(那落迦)라고 이름하지 않는다. 도마뱀의 독 등으로 목숨이 끊어질 수 있음을 보인 것도, 이 또한 단지 널리 보이는 일을 드러냈을 뿐이다. 교묘하게 세속의 길을 아는 일이, 논하는 대상의 이치에 부합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만일 단지 세상의 서로 유사함만을 의지해서, 저 지옥 세상을 이 종의 자리에 거뒀을 뿐이라고 말한다면, 곧 저 지옥 세상 가운데서도. 저 지옥 세상의 고통을 받지 않은 일이 있음을 보리라.
남의 종에 결정하지 못하는 허물이 있다고 밝힌다면, 이 역시 아직 내가 성립시킨 뜻을 알지 못하였다. 그 지옥 세상이 겪는 결정된 고통을 저들이 모두가 함께 받지 않음은, 이 앞서의 작용을 주체적으로 세운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이나 축생이 아니면서 저 지옥 세상에 태어났다면, 저 지옥 세상의 법식에 따라서 반드시 결정된 고통을 받아야 한다. 이 고통을 받지 않는다면 말한 바 양 등이 전갈의 독에 쏘임을 당했을 때, 목숨이 끊어지는 고통이 있으며, 혹은 뜨거운 발에서 생기는 고통을 당하기도 하리라.
만일 전혀 저 세상의 고통을 받지 않기 때문에, 저 지옥의 성질이 아니라고 한다면, 당연히 이 허물이 있으리라.
또 다른 견해에 집착한 이가 말하기를 그러나 옥졸은 자기와 남의 업이 더욱 불어난 데서 생긴 대상이므로, 해침을 당하지 않기 때문에, 서로 서로가 심각한 괴로움을 그들은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내가 이제 그대에게 자기의 견해로 혼미한 마음을 즐긴다면, 가령 허공에 있을지라도, 걸음걸음에 발이 걸려서 넘어진다고 말하리라. 나락가파라(洛迦波羅)는 저들의 해치는 대상이 아니므로, 저들의 핍박에서 생기는 온갖 고통을 반드시 받지 않는다고 결정하리라.
이것을 인정하면서도, 집착해서 말하기를 저곳에서 형체의 해침을 당하지 않는다면, 누가 힘을 빌려 주겠는가라고 한다.
이를 더욱 따져 말하기를 비록 번갈아 서로 해치는 일이 있을지라도, 작용이 다르기 때문에 드디어 위치가 달라지게 되었다. 마치 묶인 자와 묶는 자의 달라짐과 같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되려 자기의 말을 가지고, 반대로 자기의 종을 무너뜨리는 격이다. 똑같은 시간에 묶는 자와 묶인 자가 번갈아 가며 묶기도 하고 묶이기도 하는 일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저 둘이 차례로 한다고 말한다면.
이 또한 이치에 맞지 않다. 묶임을 당해야만 묶인 자라고 이름하고, 상대를 묶어야만 묶는 자라고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둘이 비록 고통을 차례로 받게 될지라도, 나락가(那落迦)에서는 또한 성립될 수 없다. 만일 혹독하고 극심한 고통을 받을 때라면, 나락가(那落迦)가 아니요. 만일 남의 해침을 당해서 저 고통을 받을 때라면, 나락가(那落迦)이니, 마땅히 인정하지 못한다. 한 상속의 형체[一相續形]에 삶과 죽음이 있다면, 큰 잘못이 성립되기 때문이다. 똑같이 한 때에 있으면서 번갈아 서로 해친다는 사실을 성립시킴도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한번 이 옥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되돌려 이렇다고 헤아릴 수도 없기 때문이다.
만일 반대의 논리를 좀더 생각해서 전개한다면, 비록 동일한 지옥세계일지라도 작용이 다르기 때문에 이름과 호가 문득 달라지리라. 하나는 나락가(那落迦)라 이름하고, 하나는 옥졸로 부르리라.
마치 인간의 세상에 감옥의 담당자가 없는데도, 칼쓴 이가 있다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 이 또한 이치에 맞지 않다. 저[獄卒]를 의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용의 차별을 의탁하여 나락가(那落迦)를 설하지 않았기 때문에 묶인 자와 같다고 한다면, 이것은 단지 지옥이 원인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어떻게 옥졸을 버리겠는가. 그러므로 반드시 알아야 한다. 위치에 차별이 있음은 지옥세계가 똑같지 않으니, 이와 관련된 단서를 마련해야만 묶음과 묶임이 달라지고 작용이 별도로 행해지기 때문이다. 이치는 마땅히 저들을 따라서, 나뉜 자리가 정해져야만, 참으로 틀림이 없으리라. 만일 어느 때인가 순서의 자리[階位]가 다름을 인정하고 기뻐한다면, 마땅히 반드시 나락가(那落迦) 모두가 온통 옥졸이 아님을 함께 인정하리라. 내가 세운 종에서는 그렇게 요구할 뿐이다. 이로 인하여 앞에서 주체적으로 성립시킨 뜻과 잘 부합되어 순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실제로 나락가(那落迦)의 성질이 있음을 인정하고, 작용의 차별을근거로 때로는 지옥을 관장하는 자로 이름한다면, 때문에 이 집착한 견해가 지닌 순서의 자리[階位]는 문득 없어지는 실수를 범한다. 그렇다면 계급(階級)의 다른 길이 있음을 인정해야 하리라.
게송에서는 다음과 같이 읊었다.
성냄이 많아 참혹한 업을 불러오더니
죄악의 못된 일 행하기를 좋아하여
괴로운 일 보면서 마음속에 기뻐하면
당연히 염마왕의 옥졸로 태어나리라.
이 상(相: 階級의 다른 길)이 나락가(那落迦)에는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이 가타(伽他)6)가 참된 뜻이라면, 어찌하여 대뜸 이와 같이 그 옥졸(獄卒) 등이 유정의 무리[有情數]에 들지 않는다고 말하는가.
나락가(那落迦)가 보인 모양에 따라서, 이와 같이 말한들 이치에 또 무엇이 틀리겠는가. 가까이서 보는 이는 모두 다른 이가 거동하는 차별을 보면서 자세히 헤아리기 때문에 저의 마음을 추측하여 안다. 그렇지만 본래 식에 있는 종자(種子)가 성숙해졌을 때, 이와 같은 모양과 상태의 차별이 있음을 따라서 분별을 일으킨 것이다. 저들의 소견을 따라 부처님께서 파파(波跛)의 악한 업의 유정에게 죄의 견해를 끊어 없애려고, 나락가(洛迦)의 지극히 험악한 곳에서 악한 업으로 생긴 괴로움의 과보(果報)를 분명하게 밝혔노라고 말씀하셨다. 저들의 감각으로 받아들인 견해를 따라 그 식 이외에 좋지 못한 일이 있음을 말씀하셨으니, 확실한 논리의 참다운 이치가 다 안으로 유사한 모양을 인연하여 나타남은 진실로 어긋남이 없다.
다른 견해에 집착한 이가 말하기를 비록 또 서로 함께 괴롭히며 해칠지라도, 이 정도의 순서[階級]는 평범한 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 때에 그 결정된 자리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해침을 당하는 자를 나락가(那落迦)라 이름하고, 해치는 자를 파라(波羅:옥졸)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반드시 알아야 한다. 모든 나락가(那落迦)가 바로 해침을 당할 때에 문득 옥졸이 성립되는 잘못이 있을 리 없다.
이를 집착하여 헤아릴 때는 내가 성립시킨 옥졸의 일과 작용에 대해서는, 조금도 기꺼이 인정하여 좋아할 수 없겠는가.
어떤 이가 말하기를 이것은 업의 힘에 그 다른 상태가 있어서 유정을 따라 쫓기 때문에, 되려 일정한 표준이 아니다. 이에 따르면 먼저 이전에 번갈아 서로 괴롭히며 해쳤으니, 다시 지옥의 경계에서 함께 벌을 주며 죽이게 되었고, 이들과 저들이 핍박하고 해치면서 모든 고통을 받는다. 만일 어떤 생명이 자기의 힘도 없으면서 남을 해친다고 한다면, 단지 고통을 참을 줄만 알 뿐 다시 그 외 다른 틈이 없으리라. 저들 유정이 이전에 함께 원한이 맺혔기 때문에 지금에야 서로 번갈아 괴롭히고 해치게 되었으니, 저들은 다 이 나락가(那落迦)의 유정이다. 저들이 붙고 배반하면서 함께 서로 해치는 일은 다른 것이 인정할 대상이 아니다. 자기의 업(業)을 따라서 식이 서로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옥졸의 성질이 아니기 때문에 저들을 해치는 자가 아니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허물을 벗으려는 말이니, 전혀 뜻으로 비교할 것이 없다. 만일 피해자를 이 나락가(那落迦)로 인정한다면, 해치는 자는 이 고통을 받지 않는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동일한 지옥세계의 모든 옥졸의 무리에서도, 반드시 형상의 크기 등이 똑같기를 기대할 필요는 없으리라. 그렇지만 저들 옥졸과 함께 있으면, 혹독함이 두려울만하여 보기만 해도 문득 무서움이 생길 것이다. 높고 큰 형체는 대단히 위엄스럽고 장중하리라. 가령 형상의 크기가 서로 비슷함을 용납하더라도, 그러나 저 옥졸의 몸과 형상에는 독을 품고 있어서 그 무서움이 멸려차(蔑戾車)7)처럼 보기만 해도 문득 두려울 것이다. 이 해치는 자가, 설령 몸 모양이 난쟁이처럼 작을지라도, 그 품성이 사납고 날카롭기 때문에 비록 대적할 자의 형상이 무척 크더라도, 느낌부터 적수로 견줄 생각을 못하리니, 사세(事勢)는 지푸라기처럼 보잘것없으리라. 저 무리를 업신여기는 힘에는 여유만만한 태도가 서려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또한 아직 남의 취지가 심오한 뜻에는 익숙하지 못하다. 그렇지만 저의 서툰 실수는 내가 우선 용서하리라. 어떤 때는 비록 다음과 같이 모든 나락가(那落迦)는 번갈아 서로 해치니, 일 또한 다르지 않아서 형상의 크기와 힘 등이 반드시 서로 비슷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을지라도, 이 말의 형세를 틈타서, 드디어 곧 따져 말하기를 반드시 형상의 크기 등이 똑같을 필요가 없다고 하니, 이것은 누구와 더불어 반격하고 따지려는 짓인가.
모든 일에는 자기의 용기와 힘이 남을 상대로 결코 이긴다는 헤아림이 앞서 있어야만, 곧바로 두려운 마음이 없다. 이와 같이 인정할 때, 그로 인해서 혹독하게 해치고, 혹은 또 위엄 있는 자라고 하리라.
이것은 이에 참으로 뜻이 없는 말이다. 절박하게 억압하여 괴롭혀야만, 극심한 두려움을 내기 때문이다. 해치는 자가 성립되지 않았을 때, 그 극심한 두려움을 말한다면, 문득 성립시킨 잘못을 범한다. 방편으로 이 차별의 상(相)을 밝혔으나, 그대가 이제 다시 또 혹독한 해침과 위엄까지 성립시켰으니, 이것은 곧바로 크게 은혜를 베푸는 일이 성립된다. 충분히 훌륭한 벗이 되어, 나를 더욱 빛나게 하리라.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차별의 체(體)를 체득한다면, 지옥세계의 고통은 똑같이 받지 않는다. 혹은 온갖 사나운 불일지라도, 업력(業力)이 원인이기 때문에, 문득 불에 타는 고통이 없으리라.
이거야말로 스스로 훌륭한 벗이 아니라면, 누가 대뜸 이 말을 해줄 수 있겠는가. 보통 친밀한 벗으로서 성품이 선량한 사람이라야, 순조로운 경계[順境], 거스르는 경계[逆境]를 막론하고, 언제나 은혜로운 이익을 베풀어주는 법이다. 그 불에 타는 고통을 받지 않음을 밝히려고 일부러 이 말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때에 성립을 도와주는 뜻이 바로 훌륭한 벗의 뜻에서 뚜렷하게 나온 것이다. 저들의 고통을 받지 않기 때문에 나락가(那落迦)가 아님을 성립시키려고 하는데, 이제 또다시 말하기를 그 업의 힘 때문에, 큰불이 있다고 설하여, 불에 타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이거야말로 진정 유식(唯識)의 뜻을 성립시키리라. 실제의 불이 없기 때문이다. 단지 오직 업의 힘일 뿐이니, 자체의 성품[自性]을 무너뜨릴 수 있다. 이미 이러한 고통을 받지 않도록 결정되었으므로, 곧 이 불의 자체 성품도 원래부터 없다는 것이 성립한다. 그리고 진실한 성품이 있음을 이 종(宗)은 인정하였다. 만일 또 이 식이 나타낸 모양이라고 인정한다면, 일 자체도 원래부터 없다. 이것은 업의 힘을 따른다. 때문에 실제의 불이 없다. 이것이 알맞은 이치를 성립함은 그 이전의 업에 한정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이와 다르다면, 저들의 더욱 불어난 업으로 불러들인 과보(果報)가 이미 당장 저들에게 있는데도, 어째서 못 보는가. 마치 지혜 없는 자가 불을 끄려고 하면서 다시 또 우유[酥]를 퍼붓는 것처럼 유식종(唯識宗)으로 하여금 타오르는 빛이 더욱 밝아지게 할 뿐이다. 이 여러 가지 이치를 근거로, 이것이 나락가(那落迦)의 무리로 성립되지 않음을 증명하노라.
만일 그렇게 성립되지 않는다면, 나락가(那落迦)의 무리를 귀신이나 축생이라 한들, 또한 이치에 무엇이 손상되랴. 그러나 이미 나락가(那落迦)가 아니라면 어찌하여 험악한 곳에 태어나는가.
그 외 다른 세계의 무리가 나락가(洛迦)에 태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다면, 이미 저곳에 태어났으니, 반드시 마땅히 나락가(那落迦)와 똑같아야 하리라. 또다시 어째서 저곳에 태어나는 이치가 있을 수 있다고 인정하는가. 만일 저기에 태어난다면, 그 지옥세계와 똑같은 성분[同分]이니, 저들이 처음 태어날 때는 마땅히 똑같은 성분이 있지 않아야 한다. 유정의 무리[有情數]에 드는 성질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저 똑같은 지옥세계에서 유정은 결정되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이 견해에 집착하여 태어남이라고 이름한다면, 큰 위엄을 갖춘 온갖 신들도 또한 이 나락가(洛迦)의 경계에서 유정을 구제하는데, 구제에 따른 고통이 있다고 하리라. 이들이 비록 나락가의 무리는 아닐지라도 또한 거기에 있음을 보기 때문에 문득 불결정(不決定)이 성립된다. 곧 이 영원하다고 결정하는 견해를 근거로 이 말을 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의미는 오직 나쁜 지옥세계인 나락가(那落迦) 안에서만 볼 수 있는 일임을 논하려고 하였다.8)
이 때에 염마왕(琰摩王)9)의 모든 시종사자(侍從使者)는 만일 왕이 밖으로 나온다면, 반드시 따라다닌다. 이 때 왕과 아울러 시종은 그 세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만일 저 세계에 차별된 무리[差別類]가 없다면, 어찌 천상(天上)에 또한 방생(傍生)이 있겠는가.10)
마치 하늘의 코끼리 등이 하늘의 세계에 해당하지 않지만, 저기에 태어남과 같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염마왕 세계의 모든 옥졸 및 개, 까마귀 등이 저 지옥의 무리는 아니지만 그 가운데 태어난다.
이 도리에 따른다면, 나락가(那落迦)의 모든 옥졸 등도 똑같이 지옥에 태어날 때는 곧 저 지옥세계에 포함되리라. 왜냐 하면 같은 곳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 이치에 근거한다면, 결정이 성립될 수 있으니, 마땅히 저 고통을 받아야 하리라.
이 반대의 논리도 그렇지 않다. 비록 지옥에 태어났을지라도, 나락가(那落迦)가 아니다. 왜냐하면, 똑같이 고통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천상의 방생과 같이 지옥 안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온갖 존재의 방생과 모든 천상 등은, 경계에 차별이 없다. 마치 나락가(那落迦) 등처럼, 자기 업으로 감수(感受)한 차별과 똑같지 않다. 저들이 지은 업이 자기 업의 힘을 따라서, 저 고통을 받는다. 그러므로 반드시 알아야 한다. 천상의 방생은 반드시 천상의 즐거운 업을 감수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이에 하늘에 태어나서 똑같이 저 즐거움을 받는다. 즐거움을 받을 업[順樂業]으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집착한 바 방생과 귀신은 저 고통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온갖 존재의 방생과 아귀 등은 저 태어난 세계에서 가지가지 고통을 받는다.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저 옥졸 등이 저 고통을 받지 않는다고 하는가.
이를 근거로 분명히 알라. 나락가의 고통은 생을 받는 과보의 업에서 오지 않고, 지옥세계 자체에서 받는 것으로, 나랄타(那刺) 등과 같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다면, 업이 없는 자는 저기에 태어나지 않기 때문이리라.
이 또한 앞에서 이미 자세히 분별한 것과 같다. 만일 저 업의 힘이 받아들였다면, 지옥 안에 나타나리니, 이것은 똑같은 비유가 아니다. 그러니 저 세운 바 결정이 성립될 수 없으며, 내가 인정할 대상도 아니다. 그러나 지옥 안에서 철산(鐵山) 등이 갑자기 분리되었다가, 금방 합하는 동작이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어떤 다른 스승이 말하기를 저 옥졸 등도 또한 저 고통을 받는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말해야 할 근거와 비유[因喩]가 똑같지 않고, 앞뒤가 서로 어긋난다. 때문에 마땅히 다시 말하기를 의지하는 바가 다르고, 더욱 불어나서 크게 달라진 업력(業力) 때문에, 고통을 받지 않는다고 해야 하리라. 왜냐 하면 만일 고통을 받지 않음을 안다면, 이 말은 실수가 되기 때문이다.
어떤 다른 사람이 또 말하기를 마치 무색계(無色界)에서 괴로움과 즐거움을 받아들임[苦受樂受]에도, 또한 받아들일 곳이 있는 것과 같다. 그러니 저 받아들이는 자가 받아들일 대상이 있기 때문이니, 이 역시 이와 같으리라고 하였다.
이 견해 또한 이치에 맞지 않다. 그리고 무색계의 유정으로 태어났다면, 물질세간[器世間]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색계에는 처(處: 物質로 이뤄진 場所), 수(受: 物質境界를 感受하는 心的 作用), 행(行: 物質境界를 따라 옮겨 변하는 精神作用)이 없으니, 어떻게 물질세계[方界]에 저들을 포섭해 들이겠는가. 물질의 분량이 원인이 되리니, 물질의 분량이 있어야만, 그것으로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이 마땅히 알아야 한다. 실로 물질의 분량이 없다면, 단지 오직 욕계(欲界)와 색계(色界) 두 세계에만 태어날 뿐이다. 유정으로 태어나는 자는 원인을 쌓아 모음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욕계와 색계에 태어나려면 마땅히 물질의 분량이 있어야 한다. 마치 색계에 물질의 분량이 존재함과 마찬가지로 욕계 또한 그러하니, 저 세계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색(色)이 없으므로, 머물 곳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만일 그렇다면 마땅히 저 나락가(那落迦)의 업이 더욱 불어난 힘으로, 유별난 대종(大種: 四大)이 생겼음을 인정해야 하리라.12)
이 유정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흙 등 대종(大種)이 지옥 안에서 특별한 형상·빛깔·크기·힘의 차별을 일으킴이, 마치 유정의 형상에서 얼굴빛이 다르고, 손·발·몸, 크기·힘의 차별과 같아야 한다. 길고 짧고 크고 작음이, 거기에서 작용해야만 비로소 옥졸 등이라고 이름한다.
만일 유정이 아니라고 한다면, 어떻게 옥졸 등이 바깥 인연을 기다리지 않고, 손·발·몸의 구분 등 가지가지 작용으로 저들에게 큰 두려움이 생기게 하려고, 가지가지 더욱 뛰어난 위력을 나타내며, 손·발 등을 움직이는 것인가.
이것은 바람의 힘이, 손·발을 움직이게 하니, 가지가지 작용으로 따로 따로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저 바람의 힘은 마치 사람이 하고 싶은 대로, 생각을 따라서 일으키는 것과 같다. 모든 나락가도 역시 이와 같지만 겨우 이것을 보는 순간, 문득 두려움이 생긴다. 저 지옥 안의 나락가(那落迦) 등이 업력(業力)을 따르므로, 큰 두려움을 내는 것이다. 마치 나무로 만든 사람이 움직일 수 있어서 가지가지 작용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 대종(大種)의 화합과 같다. 비록 생각하는 감각이 없을지라도, 업력의 인연으로 결국 이렇게 손·발 등의 모양과 상태에 특이하게 나타내 보인 작용이 있음을 본다. 온갖 무정물(無情物) 등의 도리로서, 저들의 땅 경계가 성립되었음을 인정하리라. 모든 나락가(那落迦)는 업의 더욱 불어난 힘에서, 문득 저절로 숫염소처럼 생긴 산이 금방 왔다가 금방 가버림을 보게 된다. 이것은 유정이 아닌데도, 또한 있는 것으로 보았으니, 이거야말로 머무는 곳인 땅의 차별이다. 그리고 옥졸 등도 이 유정이 아니라는 이치가 성립될 수 있으리니, 수고롭게 의혹을 품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렇다면 인식 대상[所緣]이 없지 않으리라.
이 옥졸 등은 자신의 뜻으로 원하여 태어났기 때문에, 저 모든 옥졸 등과 땅 등의 처소(處所)가 똑같지 않은 형상(形相)을 가지고 나락가(那落迦) 등을 표시한다. 업의 힘이 지옥 안의 흙 등 대종(大種)에서 이 형색(形色)을 발생시킨 근거임을 인정하리라.
차별되게 변하고 달라진 손, 발이 움직임 등이 경계(處)와 대종(大種)이라면, 혹은 이것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리라. 온갖 얽어 묶음 등이 업의 힘이기 때문이다,
이치가 마땅히 성립되지 않는다. 무엇 때문에 인정하지 못하는가. 식(識)은 업의 힘을 근거로 다음과 같이 굴러 변한다. 마치 꿈에 보이는 대상은, 색(色) 등이 화합하여 밖에 그림자가 생겨서 가지가지 모습을 나타내는 것과 같다. 이치를 마땅히 함께 인정해야 하리라. 굴러 변하는 작용은 식이 업의 힘을 근거로 이렇게 굴러 변하면서 경계와 서로 어긋나는 것이다.
만일 업의 힘에 근거한다고 인정한다면, 어째서 특이한 대종[異大種]을 쓴다고 하는가.
모든 옥졸 등은 사대종(四大種)이 가지가지로 굴러 변함에 따라서, 손, 발이 움직이는 등 작용이 다르기 때문이다. 마치 꿈에 보이는 색(色) 등의 경계와 같기 때문이며, 저들의 형상(形狀)은 자체와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혹은 흙 등의 차별된 모양이 아니므로, 앞에서 말한 숫양처럼 생긴 산 등이 색의 모양이 변해진 것임을 그들은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변화 또한 그러니, 형상(形狀)이 달라짐은 그들의 힘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이것은 식이 변함에 따라서, 가지가지 다른 모습과 잇달아 변화한 형태[形儀]가 차별되어 똑같지 않으니, 식을 떠난 외에 다시 한 물건도 볼 수 있는 것이 없다.
이 가운데서 외부인이 따지기를 만일 단지 식만을 근거할 뿐이라면, 구르고 변하여 별도로 달라짐은 가지가지 형태이고, 옥졸 등의 생각은 자기의 식이 변했기 때문이다. 똑같은 괴로움의 원인이므로, 모든 나락가(那落迦)가 옥졸 등이 아니다. 이 옥졸은 사대종(四大種)이 더욱 불어난 결과를 따라서 똑같은 업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며, 저들이 고통을 받을 때, 똑같이 고통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꼭 사대종(四大種)을 설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말은 남의 종(宗)을 잘 알지 못한 데서 나왔다.
어째서 잘 알지 못한다고 하는가. 단지 유정이 자기의 식만이 변하여 나타날 뿐이라고 설한다면, 옥졸 등을 보고 혹독하다고 여길 수 있는 것도 자기의 식을 근거로 나타났으니, 각기 옥졸 등의 괴롭히고 해치는 온갖 기구(器具)를 봄도 서로 어긋나지 않으리라.
그렇다면 자기의 식이 괴롭히고 해치는 것 등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무리의 그림자가 나타나도 저 원인이 똑같기 때문에, 괴로움을 받는 작용도 함께 해야 하리라. 스승이 제자와 함께 하는 사업도, 똑같거나 똑같지 않다. 똑같지 않은 사업에 대해 억지로 똑같다고 한다면, 홀로 지옥만이 서로 본 일이 없으니, 고통이 똑같지 않다고 하는 격이다. 그러니 세운 바 대종(大種)은, 이치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설명하리라.13)
업은 다른 곳에서 훈습(薰習)한다라고 하였다.14)
이를 설명하면서, 어떤 이가 나락가(那落迦)는 자기 업의 힘으로 말미암아 차별의 원인이 생기니, 저 업의 훈습(薰習)은 이치가 마땅히 식의 상속(相續) 중에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저것은 업의 힘을 따랐으니, 다른 곳에서 쌓아 모은 힘이 아니므로 오직 땅 등의 경계만으로 업을 지을 때, 인과(因果)가 합할 뿐이기 때문이다라고 집착하였다.
이것은 이에 저들이 훈습(薰習)한 과보의 경계이다. 옥졸 등의 되 비친 모습[影像]은 식이 차별을 인연하고 화합해야만 가지가지 색(色)의 종류와 알맞은 분별이 생길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이 온갖 대종(大種)이 어울리고 합하여 쌓이고 모임은, 업의 힘이기 때문에 업의 상속(相續)을 근거로 차별된 과보를 성립시킨다. 다음과 같이 마땅히 알아야 한다. 자신의 상속(相續)이 결정된 과보를 얻기 때문이다. 훈습(薰習)으로 기억된 생각이 종자(種子)를 인연함도, 또한 특별하게 달라짐이 없다. 유정의 상속을 이와 같이 알고 나서야, 조금의 한 사람 정도를 가지고도, 취할 대상의 상속이 내부의 훈습임을 분명하게 보여 주기 때문이다. 심왕(心王)과 심소(心所)의 상(相)이 차이난 과보(果報)는, 5취(趣)에 포함된다. 자기 업의 훈습(薰習)에서 성립되었으므로, 마치 무색계(無色界)에서 훈습하는 과보가 심왕과 심소를 떠나서는 별도로 불상응행(不相應行)15)이 없는 것과 같다. 이 가운데서는 오직 명(名)16)과 언(言)17)의 차별을 설했을 뿐이지만, 체(體)18)와 사(事)19)가 달라지지 않는다. 때문에 비밀한 뜻이다.
혹은 심왕과 심소의 체(體)와 사(事)가 똑같지 않음을 벗어나지 않아서, 태어날 곳에 아직 욕(欲)을 떠나지 못했다면, 색(色)의 훈습이 자기의 힘을 따라야만 태어날 곳에 태어날 수 있다. 행(行)을 안전하게 세웠으므로 무색계(無色界)에서 훈습하는 업과 같다고도 한다.
혹은 심왕과 심소가 색(色)의 경계를 떠나지 않고, 대종(大種)에서 생긴 업의 힘과 화합해야만, 비로소 생길 수 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혹은 식의 상속(相續)은 훈습한 과보에 머물기 때문에, 마땅히 좋아하고 미워함 등을 생각함도 또한 이와 같다. 대종(大種)으로 조성된 색이니, 되 비친 형상의 식의 변화도 역시 식을 떠나지 않는다고도 한다.
저들이 형상을 차별하여 설한 대상이 그 외 다른 곳에 결과가 있고, 훈습된 식에 결과가 있다고 집착한다면, 저 훈습된 결과는 이것이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어떤 다른 스승이 설하기를 오직 자체의 힘만이 변하여 과보가 되었을 뿐이다. 욕계(欲界)와 색계(色界)에 태어남은, 업의 힘으로 훈습하면서 식이의지(依止)하기 때문에, 마치 무색계(無色界)와 같다. 쌓고 모아 생기는 업이 훈습의 대상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저 스승은 무기식(無記識)이 의지(依止)한 훈습과 그 외 다른 식의 모임이 함께 서로 응하는 과보를 말하였다. 이것은 마땅히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의지(依止)라고 말한다면, 일체 유정이 두루 포함되어야 하고, 혹은 힘을 들이지 않고도, 곧바로 마땅히 이를 얻어야 하리라.
또 어떤 다른 사람이 말하기를 자신의 업과(業果: 業의 果報)는, 일신상(一身上)에 인과(因果)가 있으므로, 마치 이숙식(異熟識)에 안치(安置)된 업과 같이 차별하기 때문이다. 몸의 대종(大種)이 따로 따로 안전하게 분포되었다고 말하리니, 과보는 마땅히 있지 않아야 한다고 하였다.
저가 만일 이와 같다면 그 외 다른 사람의 몸과 식이, 의지의 주체(能依)와 의지의 대상[所依]으로, 동일한 업을 짓는 것도 역시 차별이 없는 유정을 시설하게 된다. 때문에 동일하게 흘러 다니면서 이숙식(異熟識)도 함께 하리라. 그렇다면 옥졸 등의 상(想)이 차별대종(差別大種)으로 화합하여 지옥유정(地獄有情)이 건립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상속에는 그 차별이 있으리라. 그렇다면 어떤 때는 상속(相續)의 빈틈없는 식이, 더욱 불어나는 원인이기 때문에, 특별한 식의 가지가지 달라진 무리가 생길 수 있다. 이 때는 마땅히 상속(相續)에 특별히 달라짐이 있어서, 인과(因果)가 굴러 생기리라.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이것이 곧 원인의 차별이므로, 마치 마음의 상속(相續)과 같이 화합한 종자(種子)가 안전하게 건립한 원인이라고 말하려는가.
이 가운데 말한 것은 오직 원인만을 세웠을 뿐 식의 더욱 불어난 연(緣)이, 그 의지(依止)임을 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종자로부터 빈틈없이 상속하는 것은 식의 차별이니라.
그렇다면 종자의 자체가 서로 이어지기 때문에, 비로소 굴러 생길 수 있어서 더욱 불어난다고 말한다면, 저 땅 등처럼 오직 연(緣)이 될 뿐이니, 물질을 만드는 사대[能造四大] 또한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리라.
이 또한 그렇지 않다. 자체 종자로부터 생길 때, 오직 연(緣)뿐이라고 말함도 그렇지 않다. 식이 서로 이어짐에서 별도로 사대종자(四大種子)가 있음은 마치 무색계(無色界)의 생을 다하고, 색계(色界)에 태어날 때와 같다. 저더욱 불어난 과보는 이 이숙업(異熟業)에서 받아들여진다. 받아 쓰는 자구(資具)도, 마치 이숙과(異熟果)와 같이 좋아하는 만큼 자기 업의 상속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의 바른 이치는 아급마(阿笈摩)의 식이 변해진 결과를 따른다.
어떠한 근거로 인정하지 않는가라고 하였으니, 자기견해를 이치에 맞지 않게 치우쳐 집착하고, 억지생각으로 끼어 맞췄기 때문이다. 누가 대뜸 유식(唯識)의 결과를 설하여, 아급마를 어길 수 있으랴.20)
무엇을 근거로 그대는 인정하려는가. 아급마경(阿笈摩經)에는 유식(唯識)을 세우지 않았다. 유식을 떠난 외에 색 등이 없다면, 마땅히 별도로 12처(處: 6根과 6境)가 있다고 설하지 않았으리라.21)
비록 그렇더라도, 그 식과 아울러 12처(處)를 떠나지 않고, 선(善) 등의 법을 세웠다.
그러면 마땅히 색(色) 등의 경계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부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만일 색 등을 떠나서 세운 바가 성립되지 않는다면, 부처님의 말씀을 어기기 때문이다.
혹은 색 등의 경계는 자체가 실제로 있으므로, 오히려 의처(意處)22)와 같다. 이것은 부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식과 색 등도 또한 별도로 있지 않으니, 오히려 법처(法處)23)와 같다고도 하였다.
이 이치는 맞지 않다. 이 가운데 설한 내용은, 유식(唯識)을 부정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게송에서,
교화해야 할 중생을 의지하여, 세존이 비밀한 의미와 취지로,
색 등의 경계가 있다고 설하니, 마치 변화로 생긴 유정과 같다고 하였으며,
이를 논(論)에서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대로, 변화로 생긴 유정이 있다고 함은, 단지 오직 마음만을 의지하여, 서로 이어짐이 끊이지 않고, 다음 세상으로 갈 수 있을 뿐이라는 의미다. 이것은 그 비밀한 뜻이요. 실제로 변화하여 생긴 유정이 있음을 말씀하시지는 않았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한 비밀한 뜻을 설명한다면, 어떤 한 종류의 유정을 조화롭게 굴복시키려는 의도였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변화로 생긴 유정이 있다고 하심은, 이 비밀한 뜻의 말씀이다. 다시 말하면 단견(斷見)24)으로 해를 끼치는 유정이 자기의 쾌락만을 따라 즐기면서, 다음 세상도 없고 선악인과(善惡因果)도 없다고 하니, 이들의 잘못된 견해를 씻어 버리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마음이 끊임없이 서로 이어짐을 말씀하셨다. 마음이 끊임없이 이어짐이란 말은, 다음 세상에 태어남을 밝힌 것이므로, 여기서 죽고 저기에 태어남이, 오히려 이 이치와 같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서로 이어지는 데서 변화로 태어남이 있음을 설하셨으니, 이것이 비밀한 뜻이 되었다.
식을 떠난 외에 다시 별도로 ‘나’가 없다고 하였으니, 어떻게 그런 줄 아는가.
계경(契經)에서 ‘나’도 없고 중생도 없으며, 단지 법의 원인[法因]만 있을 뿐이다라고 설함과 같기 때문이다.
계경(契經)은 그렇지 않다. 저 경(經)에는 유정이 있다거나 없다라고 설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계경이 서로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이 서로 이어짐이란 말은, 그 끊어짐이 없이 다음 세상으로 갈 수 있음을 밝힌 것이다. 다음과 같이 마땅히 알아야 한다. 색 등의 경계는 성숙된 한 무리의 유정을 위하여, 이 비밀한 뜻으로 설하신 것과 같다. 그러므로 세운 대상도 또한 본래 교리에 서로 어긋나는 잘못이 없다.25)이와 같이 세운 대상은 원인 또한 결정되지 않는다. 왜냐 하면 세속의 도리에 의지하여, 부처님은 변화로 생긴 유정이 따로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요, 원래 또한 식온(識蘊)을 떠나고 나서 선함과 선하지 않음이 있다거나, 그리고 그 과보 등에 별도로 유정이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니, 이 원인은 결정되지 않는다.26)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은 단견(斷見)으로, 다음 세상이 없다는 주장을 없애기 위하여, 다음 세상의 마음이 서로 이어져 끊임이 없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다. 그 식온(識蘊)에 가정(假定)으로 유정을 세워서, 대강 밝힌 가운데 ‘있다’고 설했기 때문이다.
마음을 떠나서 경계가 없다는 데, 네 가지 뜻이 있다. 네 가지란 무엇인가, 첫째는 비밀한 뜻이요. 둘째는 경계요. 셋째는 과보를 밝힘이요. 넷째는 비밀한 뜻의 내용이다. 분별에 묶인 이러한 인연에서, 12처(處)를 설하고, 이것의 일체를 앞으로 마땅히 건립하여 차례로 드러내면서 이치에 맞도록 문답하리라.
어째서 비밀한 뜻으로 12처(處)를 설했는가.
중생에게 마음의 상속(相續)과 같이 상속하여 끊이지 않음이 있어서, 유정의 밝힐 주체와 밝힐 대상을 설하니, 마음에 안전하게 건립하고, 형상(形像)의 일에 집착한다. 이 가운데 이 색(色) 등과 같이 소리[聲]의 경계도 앞으로 마땅히 분별하리라.
식은 자체의 종자로부터 생겨나서,
경계의 모양과 유사하게 굴러 변하며.
안과 밖의 경계를 이루게 되었으니,
부처님은 그것들을 열이라고 설하셨다라고 하였다.
저 눈 등의 자리로부터 색 등의 경계가 생김을 이치에 맞도록 마땅히 알아야 한다. 저 두 곳에서 이 종자의 모양[種子相]과 저 식을 설하신 것이다.
세존께서 처(處) 등을 성립시키기 위하여, 모두가 인정하는 말[聲]로, 눈 등의 차별을 설한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이는 그 푸른 색깔 등이 분명하고 뚜렷하게 나타남을 설하여, 저 똑같은 종류의 색이 저 식으로부터 일어남을 성립시키려고 한 것이다. 아직 욕(欲)을 떠나지 못한 자도 식의 종자를 훌륭하게 잘 건립한다. 때문에 저들의 종자를 출생시킬 수 있는 것이다. 비록 우선 안전하게 건립되었다 하더라도, 과보는 아직 현재에 받지 않는다. 나아가 아직 서로 응하는 인연의 힘을 얻지 못하였지만, 끊임없이 생기고 사라지면서 찰나마다 서로 이어지는 가운데 미세한 자체 성질의 교묘함을 얻는다. 따로 구분지어 구르고 변해서 보다 뛰어남을 얻음은, 마치 곡식의 보리 등이 땅 등을 인연으로 화합하여 더욱 자라남과 같다. 자체의 성질이 똑같지 않지만, 잇달아 변화하면서 안전하게 건립되어 새싹 등이 출현하는 것이다. 이 법성(法性)의 외부 종자와 같이 내부도 또한 이와 같다. 이의 내부 마음이 서로 이어져 앞에 나타나서 끊임없이 마주 대하며, 찰나사이에 푸른 색깔 등 자체 성질의 차별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 종자를 안계(眼界)라고 한다. 차례대로 나타나서 저것들마다 결과의 성질이 된다. 심왕과 심소는 이 색(色)을 안전하게 건립하여 그 눈의 경계로 정하니, 저것 또한 이와 같다. 만일 이와 같은 색의 차별이 분명하게 드러나면, 식의 자체는 화합하여 푸른 색깔 등을 급히 깨달아 안다. 종자가 아뢰야식(阿賴耶識: 第八含藏識)27)에 있으면서 아직 드러나지 않았는데, 식이 급히 깨달을 수 있기 때문에 되 비친 형상은 변하고 달라져서 자체가 차별된다. 마치 파지가(頗迦),28) 유리(琉璃), 운모(雲母) 등을, 얇은 물체로 싸면, 그 본 빛깔을 따르는 것과 같이 되 비쳐 나타나는 식이 생긴다. 이것은 이에 세존께서 이치에 맞게 분석하여, 색의 경계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자기의 교리 가운데서 저 의식(意識)을 설하는데, 형상이 똑같지 않음은 이로움에 머물기 때문이다.
이 색을 색의 경계라고 설한 까닭이다. 이와 같이 딱딱한 성질, 습한 성질, 따뜻한 성질 등에 이르기까지, 식의 되 비친 형상이다. 의지의 대상[所依]과 인식의 대상[所緣]도 힘의 작용이 매우 뛰어남은, 이 이숙식(異熟識)이 일으키는 일이니, 종자의 모양과 상태가 출생하여 되 비춰 나타난다. 소리와 이름 등의 변하고 달라진 차별이 취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마땅히 색의 나뉜 단계와 공능(功能)이 똑같지 않음을, 안전하게 건립할 아뢰야식(阿賴耶識)을 성립시켜야 한다. 지혜 있는 자는 모두 차례로 자세히 깨달아 알고, 이를 분별하여 안과 밖의 경계를 설한다. 잘 분포된 차별은 비밀한 뜻이다. 계(界)29)를 안전하게 세우는 것과 같다. 여기 식계(識界)를 세움은 의계(意界)를 의지하고, 여섯에 의해 출생한다. 이와 같이 의계(意界)는 자체 성질이 서로 달라진다.
그러면 역시 저것을 18계(界)라고 말하는가.
마치 이숙식(異熟識)이 눈 등의 식과 더불어 차례로 종자가 되어, 눈 등의 경계라고 이름하며, 따로따로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과 같다.
무엇 때문에 종자라고 이름하는가.
새싹 등 여러 물상(物像)의 별도로 달라진 자체 성질을 출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물질을 만드는 4대(大)와 만들어진 물질[所造色]과 같다. 자체 종류의 새싹 등을 출생시켜 차별이 생김을 공동으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마치 ·보리 등 모든 종자를 세상이 공동으로 인정함과 같다. 저것의 자체성질이 달라진 종류는 하나가 아니니, 이에 눈 및 눈의 식을 출생시켜, 아울러 다음 찰나와 더불어 서로 응할 수 있다. 이 두 계(界)로부터 생겨서 저 연(緣)을 얻고, 세운 바 급히 깨닫는 성질[警覺之性]을 따른다. 하나의 일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시(一時)에 생길 수 있음은, 마치 하나의 심소(心所)가 따로따로 한량없는 색의 성질을 일으킬 수 있는 것과 같이, 이것 또한 이와같다.
이 이숙식(異熟識)이 눈 등의 경계에서, 혹은 똑같기도 하고 혹은 달라지기도 한다. 식이 생길 때에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리라. 이숙(異熟)의 식이, 눈 등의 경계가 되고 저 색은 미세하니, 눈 등의 온갖 기관은 식에서 생긴 가지가지 공능이 똑같지 않음을 극히 보기가 어렵기 때문이리라.
역시 이와 같지 않다. 다른 눈 등이 있어서, 때로는 색 등의 청정한 사대[淸淨四大]를 인연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다른 아급마(阿笈摩)에서 부처님께서는 육안(肉眼) 등의 경계는, 청정한 4대로 만들어진 색(色)으로서, 보이며 막히는 성질[有見有對]이다. 이와 같이 내지 신(身) 등도 또한 이와 같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그러한 이치가 아니다. 식의 되 비친 형상은 비밀한 뜻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4대는 식의 상분(相分)을 떠나지 않지만, 이것은 역시 푸른 색깔 등을 인연하는 식을 취하여 종자로 삼지도 않는다.
훈습한 식을 가지고 상(相)에 집착하였기 때문에, 식의 종자는 저 훈습으로 인해서 이 이숙식(異熟識)이 지니기 때문이리라.
이 역시 그렇지 않다.
청정한 색이 있다면, 보이고 막히는 성질[有見有對]이리라.
그렇지 않다. 만일 막히는 성질 등을 식의 뚜렷한 나타남이라면, 눈 등의 식이 훈습할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썩어 문드러진 종자가 인식의 대상[所緣]을 의지하리라.
안전한 건립의 표시도 또한 분명하게 알지 못한다.
아급마 가운데는 잘 펼쳐서 분석하였다. 이에 따르면, 아뢰야식(阿賴耶識)은 시작이 없는 때로부터 오는 동안, 인과(因果)가 연달아 반복하는 가운데, 한량없는 공력(功力)을 품어 갈무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따로따로 일어난다. 체(體)와 색(色)이 서로 마주 기대어 저들마다 계(界)와 처(處)의 생겨남 등이 다르게 나타나는데, 일체(一切)의 때가 아니라, 일시(一時)에 다 생긴다. 이와 같이 자세히 말한다면, 눈 등의 차별 내지 몸의 모양도 또한 이와 같으니, 저 식의 종자가 힘을 나타내는 자체의 성질이 매우 뛰어남을 보이려고 한 것이다.
이 계경(契經) 가운데서 부처님은 아타나식(阿那識)30)을 건립한다고 말씀하셨다. 곧 땅 등처럼 되 비친 형상의 나타난 바가, 연(緣) 등과 서로 응하니, 저 안전하게 세운 바 가지가지 싹의 성질은, 자체가 손실되거나 무너짐이 없다. 그런데 저 형상은 싹 등을 뚜렷하게 나타내어 화합하는 힘이기 때문에 딱딱함 등의 자체 성질은 인연을 따라서 곧바로 생긴다. 아뢰야식(阿賴耶識)이 소유한 인과(因果)가 색의 경계와 어울려 합했기 때문이다.
혹은 땅 등의 되 비쳐 나타남이 변하며 달라지기 때문에, 물질을 만드는 4대(大)가 색(色)의 경계에 있는 것과 똑같지 않다고도 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임시로 세운 말의 작용[語業]으로 밝힐 대상이다. 무색계(無色界)에 말의 작용이 전달되고 있을지라도,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저 세계 가운데에 색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혹은 색이 끊어졌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이 말은 하지 않아야 한다. 비록 색의 종자가 있을지라도, 눈에 보이는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요, 이 색의 종자는 되 비친 연(緣)의 힘이기 때문이며, 결과의 색을 건립하기 때문이다. 이 원인에 근거하므로 막히고 걸림이 성립되지 않는다. 눈의 기관에 비치는 기능이 손실된 자는 모두 취할 대상이 아니다. 종자가 깨끗해야만 비로소 그 작용을 감당한다. 이와 같이 내지 몸도 의지할 대상과 인식의 대상을 뒤섞어 어지럽히지 않는다. 그가 안전하게 건립한 대상은 마치 저 끊어져 무너졌거나 문드러진 성질 등과 같다. 저들의 세울 대상도 이치로는 마땅히 있어야만 타당하다. 그러므로 이 가운데 만일 색의 종류를 따라서 일일이 분별한다면, 연달아 변화하여 끝이 없으리라.31)
어떤 다른 사람이 또 말하기를 12처(處)를 말씀하신 것이 어떤 한 무리의유정을 성숙시키기 위함이라고 하나, 이 말은 힘도 없고 또한 뜻도 없기 때문이다라고 한다.32) ‘사람에게 나의 실재성이 없는 이치’33)는 극히 미묘하고 매우 깊다. 알기도 어렵고 들어가기도 어려우니, 모두가 깨달아 들어가게 하려고 이 부처님의 말씀을 근거로 유식의 뜻[唯識義]을 세웠다. 또 이와 같이 힘이 없는 사람도 또한 쉽게 들어가도록 한 것이다. 색의 경계에는 과실(過失)이 한량없이 많다. 그러므로 이 문[唯識]에서는 ‘나’에 집착한 자가 나를 버리고 여의게 하였음로, 괴로움의 도리[四諦]34)로, 몸의 괴로움을 설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처(處)35)와 색 등에 미처 날뛰면서, 더욱 불어난 애착에 머물러 있는 종자가 비밀한 뜻이라고 설하셨으니, 이를 근거로 과명(果名)36)을 세우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