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퇴전법륜경(不退轉法輪經) 제2권-2
“아난이여, 이것을 일컬어 여래ㆍ등정각께서 모든 보살마하살을 위하여 방편으로 사다함을 말씀하심이라 하느니라.”
아난이 여쭈었다.
“어떤 것이 여래ㆍ등정각께서 보살마하살들을 위하여 아나함(阿那舍)을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이 일체 세간의 행상을 뛰어나 부처의 행을 구경(究竟)되게 하되 마음은 행하는 곳이 없으며, 비록 가고 오는 것을 아나 가고 오는 모습을 취하지 않으며, 일체 법이 의지도 없고 머무름도 없음을 알아 또한 돌아오지 않으니, 왜냐하면 일체 법에서 감이 있다거나 감이 없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니라. 범부를 초월하여 범부의 생각을 제거하며, 부처라는 생각에 집착하지 않고 머무름이 없는 법에 이르나니, 왜냐하면 일체 적멸의 법계를 구경되게 하기 때문이며, 또한 부처와 범부의 차별된 상을 보지 않기 때문이니라. 나쁜 갈래를 멀리하여 탐욕을 제거하고 모든 맛에 집착하지 않아 4식(食)을 여의며, 지견(知見)을 열어 보이어 일체 사견, 즉 62견(見)을 취하지 않으며, 유상(有相)을 보지 않고 무상(無相)에 집착하지 않으니 실로 유무를 모두 여의며, 모든 가리움[蓋障]에서 열반의 모습을 지으며, 굴림[轉]도 없고 굴리지 않음도 없어서 나쁜 갈래의 때를 여의며, 뭇 마구니들을 무찌르고 어리석음을 멀리하며, 무명(無明)의 화살을 뽑아 그 종자를 고갈시켜 무명이라는 원수를 없애고 탐진(貪瞋)을 비추어 모든 번뇌[結使]를 끊고 제거하며, 모든 유(有)를 열어 보여 애욕의 화살을 뽑고 모든 교만을 제거하며, 가리는 모습[陰相]을 깨달아서 밝은 곳을 규명하며, 항상 불승(佛乘)과 부사의승(不思議乘)을 좋아하여 온갖 법의 실상에 이르나니, 보살마하살이 능히 이와 같이 진흙에서 벗어나 얽매임을 여의고 본원장(本願藏)을 얻는다면, 또한 과거 미래의 모든 부처님의 복장(伏藏)을 얻어 일체 복장 가운데 으뜸이 되리라.
또한 과거 모든 부처님께서 건립하신 바가 되니, 그 마음이 평등하여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으리니, 이러한 법[乘]을 얻으면 모든 중생계에서 가장 뛰어나고 제일이어서 그 위가 없으리라. 보살마하살이 불승(佛乘)을 구경되게 해 일체 법에서 모두 무상을 얻고, 보살마하살이 모든 법 가운데서 의심을 끊으면 불환과(不還果:阿那含)를 증득하리라.
또한 아난이여, 보살마하살은 사홍서원(四弘誓願)으로써 일체 중생을 거두며, 일체 중생을 안립시켜 모두 불승에 들어가 보살도에 머무르게 하느니라. 그렇다면 어떻게 보리에 머물게 하는가? 이른바 중생상(衆生相)이니, 여실히 깨달아서 중생계에 머무느니라. 왜냐하면 공계(空界)와 부사의계(不思議界)를 잘 알아 중생상을 여의기 때문이니라. 그것은 왜냐하면, 이 현성계(賢聖界)가 곧 중생계요, 부사의계가 곧 공의 모습인 까닭이니라. 또한 중생이 없으니 결박을 여의게 되는 것이니라. 마치 허공의 형상이 없는 것 같아서 존재하는 바가 없으며, 물듦도 없고 집착할 것도 없느니라. 일체 중생은 모두가 평등하여 벗어나지도 않고 빠지지도 않음을 알아 보리를 끝까지 밝히어 중생상(衆生相)을 여의느니라. 마치 허공계와 같이 깨달을 바가 없나니, 법은 가히 얻을 바 없는 바가 없기 때문이니라. 이와 같이 얻을 바 없음이 곧 일체 법의 모습이며 중생의 모습이니라. 마음으로 깨달은 바가 곧 깨달음이나니, 법은 가히 얻을 바가 없기 때문이니라. 이와 같이 얻음은 곧 증득할 바 없음이니, 그러므로 불환과를 얻었다 하느니라. 일체 중생과 일체 법과 불ㆍ법ㆍ승 등 이러한 모습들을 벗어남을 불환과라 부르느니라.”
그 때에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고
범부의 법을 소멸하여
세간의 행을 버리는 것을
아나함(阿那含)이라 부르네.
가고 오는 것도 없으며
머무름도 의지할 것도 없으며
처소도 없는 줄 아나니
그러므로 불래(不來)라네.
범부를 버리고
부처를 위해 구호하여
다시 오지 않는 이
이를 아나함이라 부른다네.
법은 가는 것이 없고
또한 오는 상도 없나니
가고 오는 것 없음을
아나함이라 부른다네.
모든 탐욕을 끊고
4식에 집착하지 않으며
도량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이를 아나함이라 부른다네.
62견을
모두 다 제거하고
게다가 가는 바 없는 것
이를 아나함이라 부른다네.
일체의 유(有)를 여의고
마음에 항상된 모습 없어서
여실히 요해하니
그러므로 불래라네.
열반은 적멸한 것이어서
모든 번뇌를 여의었나니
가고 오는 모습을 여의었기에
그러므로 불래라네.
모든 나쁜 갈래를 끊고
온갖 더러움을 여의어
열반을 증득하나니
그러므로 불래라네.
원수진 적군과
모든 마군(魔軍)의 우두머리를 무찔러
거짓된 이름을 초월하니
그러므로 불래라네.
무명의 화살을 뽑고
일체 애욕을 물리쳐
기쁨과 욕망을 버리니
그러므로 불래라네.
모든 번뇌를 소멸하고
가려진 모습 드러내며
결정된 지혜를 얻으니
아나함이라 부른다네.
근심의 가시[刺]를 뽑고
교만의 산을 깨뜨려
5음(陰)을 잘 이해하는 이
아나함이라 부른다네.
끝끝내 비추고 밝히어
불승을 장엄하여서
탐욕의 진흙을 벗어나는 이
아나함이라 부른다네.
빠짐없이 복장(伏藏)을 알아
모든 복장 위에
부처를 안치하니
그러므로 불래라네.
가장 뛰어난 불승의
위없는 데 머물러서
모든 번뇌를 끊는 이
아나함이라 부른다네.
사홍서원으로써
보리를 일으키고
보리에 머물렀나니
그러므로 불래라네.
모든 허공계가
사량할 수 없음을 알아
모든 망상 제거하니
그러므로 불래라네.
모든 중생에서
그리고 법계상(法界相)에서
얻는 바 없나니
그러므로 불래라네.
마음에 취할 바 없어
모습을 따르지 않고
보리에 안주(安住)하는 이
아나함이라 부른다네.
중생계는 공하여
가히 사량할 수 없으니
이러한 법을 아는 까닭에
그러므로 불래라 하네.
이렇듯 아난이여,
아나함의 여러 가지
장애 없는 모습 드러내어
불법을 안립하노라.
“아난이여,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여러 등정각은 모든 보살마하살들을 위하여 적절히 방편을 부려 아나함을 말하였노라.”
다시 부처님께서는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다시 보살마하살들에게 아라한(阿羅漢)을 말하여 주리라. 모든 행을 소멸하고 부처님께서 행하신 바를 닦으며, 모든 유위(有爲)를 버리되, 능히 일체 중생을 성숙시키며, 또한 일체 중생의 괴로움을 끊나니, 이를 아라한이라 하노라. 중생상을 얻지 않고 또한 고뇌(苦惱)의 상도 얻지 않으니, 이를 아라한이라 하느니라. 모든 취착을 소멸해 무상(無相)에 머물며, 모든 법이 공한 줄 알아 일체상을 여의고 모두가 없게 하며, 모든 중생의 온갖 망상과 전도된 어리석음을 없애고 공법(空法)의 부사의함을 요달하나니, 이러한 아라한은 부사의한 보리를 얻느니라. 이와 같은 법을 성취한 까닭에 아라한이라 부르느니라. 과거의 모든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것과 같이 미래와 현재의 모든 부처님도 또한 그와 같이 말씀하시리니, 희론 없고 청백(淸白)을 구족하여서 진실한 보리법을 연설함을 아라한이라 하며, 중생을 안립시켜 보리도에 머물게 하되 취착하는 바가 없음을 아라한이라 부르느니라. 마땅히 모든 바라밀의 자비를 행하고, 부처님의 큰 자비를 얻어 중생무상(衆生無相)의 자비를 만족히 하며, 또한 능히 일체 중생을 안립할지니, 이와 같이 자비를 닦되 분별하는 바가 없으며, 중생 및 자상(慈相)을 취하지 않음을 아라한이라 부르느니라. 일체 중생을 위하여 설법하되, 모든 법에 도무지 취하는 바가 없게 할지니, 만약에 능히 이처럼 할 수 있다면 아라한이라 하느니라. 근(根)과 힘[十力]과 각도(覺道)를 분별해 드러내어 모든 중생에게 물들지 않고 집착하지 않음을 아라한이라 하느니라. 모든 중생의 심행(心行)을 잘 알아 보리를 일으키니, 능히 이처럼 할 수 있다면 아라한이라 하느니라. 일체 유위의 모든 행을 연설하되 취착(取着)하지 않음을 아라한이라 하 느니라.
또한 다른 모든 중생을 위하여 집착이 없는 행과 취함이 없는 행을 말할지니, 이렇게 말하는 이를 아라한이라 하느니라. 모든 부처님의 국토에 노닐되 마음에 가는 모습이 없이 모두 부처님의 처소에 이르며, 무상지(無相智)로써 마치 부처님께서 보시듯이 보는 것이 아라한이니라. 만일 능히 이와 같이 부처님 국토를 성취하고 다시 모든 공덕을 성취하면 부사의하고 평등하고 티 없고 청정한 복전(福田)이라 하며, 공한 행의 복전, 아비발치(阿鞞跋致)의 복전, 제일 청정하여 여인이 없는 복전, 모든 번뇌와 탐욕을 떠난 복전, 부처님께서 증득하신 바와 같이 능히 모든 가림을 다하는 복전, 모든 마군의 번뇌를 일으키려는 노력[塵勞]을 무찌르는 복전, 외도의 사견을 빠짐없이 제패(制覇)하는 복전, 일체의 복전, 장엄 복전, 일체 두려움을 여의는 복전, 다툼이 없는 복전, 적멸의 복전, 신통의 복전, 가장 뛰어난 복전, 굴택(窟宅)이 없는 복전, 다함없는 복전, 보살의 행할 바를 구족한 복전, 부처님의 자재를 얻은 최상의 복전, 부처님께서 호지(護持)하시는 복전, 변화의 복전, 이러한 법인(法印)으로써 모든 중생을 인가하여 편안함을 얻게 하는 공교한 설법의 복전, 일체 영락(瓔珞)으로 부처님의 경계를 장엄하고 열반을 결정하는 적멸의 복전이라 하느니라. 또한 일체 복전 가운데 이러한 복전을 성취하여 능히 일체 법의 불생불멸을 아는 것을 이름하여 아라한이라 하느니라.
모든 물듦을 제거하여 성내는 이를 보아도 마음에 번거롭지 않으면 아라한이라 하며, 일체 법에서 그 모습을 취하지 않으면 아라한이라 하느니라. 습지(習智)를 제멸시키고 최상의 지혜를 닦아 신속히 증득함이 아라한이며, 이러한 위의로써 보리를 건립하니, 그 보리의 힘을 아라한이라 하느니라. 이러한 보리를 또한 부사의라고 하며, 부사의는 또한 부동(不動)이라 하나니, 이러한 부동은 능히 억만 종류의 헤아릴 수도 없는 중생으로 하여금 보리에 안립시키니, 취착하는 바가 없이 모두 평등에 머물러서 망가지는 모습과 같게 하며, 형상이 있지 않아서 일체 법이 모두 보리에 들어감을 알아 머무를 바 없는 데 머물게 하느니라.
아라한이 이렇게 알면 능히 중생을 위하여 이러한 법을 말하되 물들지 않으며, 비록 말이 있으나 또한 말하는 상이 없이 모든 중생을 제도하느니라.
또한 모든 중생이란 생각을 취하지 않으며, 단견과 상견 두 극단을 취하지도 않느니라. 몸은 흔들리지 않아 번뇌를 끊지 않고도 교만을 여의며, 일체 법에 대해 생김[生]이 없고 적멸하고 행이 없으며, 색상(色相)을 무너뜨리지 않고, 수ㆍ상ㆍ행ㆍ식 및 모든 범부의 법상을 무너뜨리지 않느니라. 그리고 마음은 흔들림이 없이 해탈을 구하여 불법에 안주하나 또한 안주하는 것도 아니니라. 수다원과상해탈(須陀洹果相解脫)과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과상해탈, 일체를 망령되게 보아 모든 뒤바뀜을 일으켜서 부처의 지혜를 취하는 해탈, 보리심을 망령되게 보고 취하는 해탈보리와 보시를 망령되게 보고 닦는 해탈, 보리와 계행을 망령되게 보고 닦는 해탈, 번뇌의 해(害)와 인욕을 망령되게 보는 해탈, 게으름과 정진을 망령되게 보는 해탈, 어지러운 생각과 선정을 망령되게 보는 해탈, 우치와 지혜를 망령되게 보는 해탈, 성문과 범부를 망령되게 보는 해탈, 부모나 처자, 남녀권속 등을 망령되게 보는 이와 같은 일체의 해탈은 탐욕을 망령되게 보고 욕망을 좋아해 한량없는 괴로움이 있게 되고 친애하는 마음을 내어 물들고 집착함을 일으키느니라. 곧 이러한 결박의 법이 곧 고뇌를 주고 해를 주는 곳이니, 이 법 가운데 두 가지 모습을 내는 것이니라.
망상을 제거하고 중생을 제도함을 아라한이라 이름하며, 이양(利養)ㆍ탐내고 구하는 망상 및 재가(在家)ㆍ출가의 망상을 제거하기 위하여 모든 비천한 법과 최승의 법을 모두 평등하게 보며, 또한 이 범부의 법으로 저 부처의 법을 보지 않나니, 이러한 망상과 뒤바뀜을 끊기 위하여 해탈법을 말하느니라.
만일 불국토를 청정하게 장엄하고 교화하여 성취하고자 한다면, 어떤 중생은 열반이라 부르기도 하고, 어떤 중생은 열반이라 부르지 않기도 하느니라. 또한 어떤 중생은 모든 존재를 낳기도 하고, 어떤 중생은 모든 존재를 낳지 않기도 하며, 어떤 중생은 보리를 행하기도 하고, 어떤 중생은 보리를 행하지 않기도 하며, 어떤 중생은 금계(禁戒)를 파괴하기도 하고, 어떤 중생은 금계를 지키기도 하며, 어떤 중생은 지혜가 있기도 하고, 어떤 중생은 지혜가 없기도 하느니라. 가령 어떤 중생이 두 마음을 일으켜서 망상을 내고 그를 위하여 이러한 망상을 제거해 주고자 함은 복전이 아니기도 하고 복전 아닌 것도 아니며, 어떤 중생은 부지런히 정진하기도 하고 어떤 중생은 부지런히 정진하지 않기도 하며, 이것은 어리석은 법이며, 이것은 지혜로운 이의 법이며, 이것은 여인의 법이며, 이것은 남자의 법이며, 이것은 성인의 법이며, 이것은 성인의 법이 아니라는 등 두 가지 망상을 일으키면, 이러한 두 가지 마음의 망상을 제거하기 위한 까닭에 보살은 물러나지 않는 보리에 머무르기도 하며, 또한 물러나지 않는 보리에 머무르지 않기도 하느니라. 또한 보리의 수기(授記)를 받기도 하고 보리의 수기를 받지 않기도 하며, 보리좌(菩提座)에 가까이하면서도 보리좌에 가까이하지 않기도 하는 것이니라.
이와 같은 두 가지 마음이 있으므로 허망한 생각을 일으키나니, 어떤 보살은 보리를 체득하기도 하고, 어떤 보살은 보리를 얻지 않기도 하는 것이니라.
요컨대 참된 해탈을 말하자면, 일체 법에 집착하는 것은 모두 망상이 되느니라. 그러므로 아난이여, 아라한은 일체 중생의 망상을 끊어 주어 해탈을 얻게 하려는 까닭에 이와 같은 무상법(無相法)을 말하나니, 이것을 일컬어 보살마하살의 아라한이라 하느니라.”
그 때에 세존께서 게송을 말씀하셨다.
모든 행을 없애고
생사의 행을 여의어
세간을 벗어난 이
아라한이라 부르리.
번뇌의 결박 없애고
일체의 번뇌로 괴로워하는
중생을 건지는 이
아라한이라 부르리.
중생들과 그리고 모든
결박을 얻지 않고
법에 대해 이익 없는 이
아라한이라 부르리.
망상을 소멸하여 없애고
망상 없는 데에 머물러
모든 법이 공한 줄을 아는 이
아라한이라 부르리.
공의 가장 뛰어남을 알고
게다가 무상(無相)을 얻어
일체의 상을 다하는 이
아라한이라 부르리.
모든 중생들의
온갖 악상(惡相)을 멸하고
일체의 상을 버리는 이
아라한이라 부르리.
모든 극단을 제거하고
망상 없는 법을 깨달아
스스로가 증득하는 이
아라한이라 부르리.
보리의 부사의함을
얻고자 하기에
뛰어난 정진을 일으키는 이
아라한이라 부르리.
만일 설법할 때에는
헐지도 않고 흐리지도 않게
보리에 안립하는 이
아라한이라 부르리.
청정한 복전이 되어서
중생들이 즐거움을 얻게 하되
중생을 얻지 않는 이
아라한이라 부르리.
만일에 모든 법을 말하되
일체를 취하지 않아서
법과 법 아닌 것 없는 이
아라한이라 부르리.
각도(覺道)와 근(根)과 힘[十力]을
대중을 위하여 보여 주고
제일의 과(果)를 얻게 하는 이
아라한이라 부르리.
중생을 잘 알아서
보리를 맑히기 위해
이러한 행상을 말하는 이
아라한이라 부르리.
세간에서 말하는
일체의 행마다
집착하지 않는 이
아라한이라 부르리.
용맹한 세존께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복전이시니
부처님 계시는 곳곳마다
남들에게 말씀해 주셨네.
만일에 부처를 보고자 하면
보거나 못 볼 것이 없나니
부처가 보듯이 하는 이
아라한이라 부르리.
이는 마땅히 복전이며
성현의 복전이니
위없이 정진하는 이
아라한이라 부르리.
애욕을 멀리하고
성 낼 일에 성내지 않고
또한 보리를 말하는 이
아라한이라 부르리.
일체 법을 보되
적멸하여 모습 없다 아나니
그러므로 보리를 일러
아라한이라 부르네.
일체의 중생계
어느 하나 동요시킴도 없이
무수억(無數億)의 보리에
편히 머물게 하니
중생과 보리가
모두 모습 없이 머물러서
저 평등한 줄을 아는 이
아라한이라 부르리.
무등등(無等等)을 얻어
일체 법이 같아졌나니
그리하여 모습 없는
평등 보리를 알게 되리라.
능히 이렇게 아는 이
아라한이라 부르거니와
이같은 법을 알아서
청정하여 흐림이 없네.
무리를 위하여 설법하되
말하는 바가 없나니
한량없는 중생을 건져도
또한 동요 없으리라.
중생들의 단견과 상견의
모든 극단[邊]를 얻지 못하나
중생들 모두가 괴로움에서
해탈하는 것을 보았네.
모든 법을 끝까지 규명하니
나고 죽음이 없어졌네.
그리하여 방편으로써
중생을 건져 준다네.
색을 깨뜨리지 않고
수ㆍ상ㆍ행ㆍ식도
또한 그와 같으니
해탈이라 이름하리라.
모든 범부들에게
동요하는 상이 없이
불법을 세워 주어
해탈에 안주시킨다네.
능히 중생으로 하여금
과보를 생각지 않게 하고
부처님의 해탈한 상호를
남을 위해 설법한다네.
허망하게 보리를 취하여
보시를 닦아 행하고
계를 지니고 인욕하기 위해
망상을 없애려 하거나
게으르고 태만한 이가
모양을 취하여 정진하면
해탈상을 제거하는 일이라고
나한(羅漢)이 말하는 바일세.
선정상(禪定想)을 내거나
어리석어 지혜가 없어도
저들을 해탈케 하려는 이
아라한이라 말하네.
형상 없는 이 법은
능히 허망을 제거하리라.
이와 같이 법을 설하는 이
아라한이라 부르리.
중생은 허망하여서
성문의 망상을 취하거니와
해탈상은 없다.
나한의 법을 설하네.
부모와 처자를
어리석게도 집착하면
보리가 아니어서
생사에 물들리라.
형과 아우와 누이와 동생에
허망하게 친애하는 마음 내거니와
적멸해탈하는 이
아라한이라 부르리.
모든 행업(行業)을 짓고
탐착하고 친애하여
보는 대로 정분[戀]을 내되
본래부터 나와 친하였다 하며
다시 서로가 물들어서
서로서로 친하고 사랑하다가
이별이 있을 줄 알지 못하니
마군을 날뛰게 하네.
세간을 여의지 못하는 것
극히 악한 일이라 하리니
이와 같은 허물은
나한이 말하는 바이네.
모든 결박을
모두 깨달으면
두 가지가 다 허망한 줄은
나한이 말하는 바이네.
많은 사람을 이롭게 하려면
희론 없이 행할지니
이러한 해탈은
나한이 말하는 바이네.
집에 있거나 집을 떠났거나
내는 망상 많으니
어리석은 이는 집착하나
나한은 해탈한다네.
세속[家]의 얽매임을 보고
널리 바른 법을 나타내나니
어리석은 이들은 망상하나
나한은 해탈한다네.
범부를 버림은
불법에 이익됨이 없음이나
이롭고 이롭지 못함을 모두 버려야
아라한이라 부르리.
높고 낮은 것을 보아
약간의 종류가 있다 하면
중생은 집착해 망상하나
나한은 해탈한다네.
취상(取相)을 성취하여서
많이 닦으려 하나니
이러한 집착의 모습을
능히 잘 벗어났다네.
부처님의 복전을 얻어
끝끝내 진실히 할 것이니
허망하게 이 복전을 취하는 일
나한은 해탈하였네.
멸과 멸 아님이 없으며
물건과 물건 아님도 없으니
비록 보리를 닦으나
보리를 얻지 않으리.
계를 지니거나 계를 헐거나
지혜가 있거나 지혜가 없거나
중생은 유치하여서
두 가지 망상을 일으킨다네.
많이도 사람들이 집착하여서
약간의 종류가 있다 하나니
이러한 망상을 해탈하는 일
아라한이 말하는 바일세.
복전이란 망상을 짓고
복전이 아니란 망상도 지어
무지하고 어리석은 이
가지가지 망상을 일으킨다네.
모든 여인들과
그리고 남자들과
성인과 성인 아닌 법에
두 가지 마음을 짓네.
이러한 중생들은
어리석고 지혜가 없어
두 가지 망상에 집착하나
나한은 해탈했다네.
물러가고 물러가지 않는 법과
수기가 있고 수기가 없음과
보리좌에 가까이 앉거나
보리를 취하지 않거나
보리를 얻고는
필경에 적멸하여
영원히 생사를 여의고
열반의 생각을 취하네.
중생의 속박을 여의고
일체의 형상을 멸하니
그러므로 아라한을
해탈이라 부른다네.
보살의 법 그러하니
지금 아라한이 되어
법인(法忍)을 일으키지 않으면
나한의 지혜라 하리.
이러한 나한을
보살이 나무라지 않나니
마음을 언제나
가장 높은 보리에 두었네.
그 때 세존께서는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대여,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이것이 여래ㆍ등정각께서 보살마하살들을 위하여 방편으로 아라한을 말씀하신 것이니라.”
아난이 여쭈었다.
“어떤 것이 여래 등정각께서 보살마하살들을 위하여 성문이라 하시는 것이옵니까?” “아난이여, 보살이 능히 무량 아승기의 중생으로 하여금 불법의 소리를 모두 듣게 하나니, 그러므로 성문이라 하느니라. 또한 부사의한 소리를 듣게 하나니, 부사의한 소리를 듣고는 보리에 대하여 희론하는 일 없이 청정한 음성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듣게 하므로 또한 성문이라 하느니라. 또한 그들로 하여금 오직 열반의 즐거움만을 듣게 하고 다시는 나머지 즐거움이 없게 하나니, 이러한 소리를 들음을 또한 성문이라 하느니라. 또한 근(根)ㆍ힘[十力]ㆍ각도(覺道)ㆍ선정ㆍ해탈ㆍ삼매 등과 염처(念處:四念住)ㆍ정근(正勤)을 남음이 없이 증득하게 하나니, 이러한 법을 무수한 중생이 모두 듣게 하면 또한 성문이라 하느니라. 이 몸은 괴롭고 공하고 무아(無我)이어서 음상(陰相)을 모두 얻을 수 없거늘, 범부는 어리석어서 이 몸을 분별하여 허망하게 집착을 일으키느니라. 이러한 소리를 들으면 또한 성문이라 하느니라. 또 안계(眼界)가 거짓되어 실답지 못함을 얻고, 내지 불안(佛眼)이라도 모두 안계와 같아서 부사의하니, 능히 중생으로 하여금 이같이 보아 일체 법에 성취하는 상이 없으면, 성취안(成就眼)이라 하느니라. 이러한 법상을 중생들로 하여금 듣게 하는 것이 성문이라 하느니라. 부르는 소리가 울리듯이 중생들로 하여금 듣게 하는 것을 성문이라 하느니라. 마땅히 소리를 허망하게 집착하지 말라. 소리의 모습은 없으며 또한 얻을 바도 없나니, 이와 같이 소리를 듣는 것을 성문이라 하느니라. 마땅히 향기에 대해 향기라는 상을 취하지 말지니, 또한 얻을 바 없느니라.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꿈속에서 향에 대해 듣는 것과 같으니라. 곧 향기가 없거늘 향기가 없는 가운데 허망하게 향기라는 생각을 일으키니, 다만 이는 뒤바뀐 것이라 스스로가 분별을 내어 향의 모습을 취하는 것이니라. 어리석은 이가 믿어 지니어 이러한 소리를 들음을 성문이라 하느니라. 설입(舌入)의 모습이 공하니 마치 고깃덩이[肉段]가 맛을 알지 못함과 같으며, 또한 거품과 같아서 비유할 수 없느니라. 비유를 초월한 까닭에 맛이 아니며, 구족한 맛[具昧]이 아니니라. 맛의 모습을 분별하건대 얻을 바가 없느니라. 이와 같이 미계(味界)와 부사의계가 평등하여 둘이 없으니 마음을 여의면 생각도 없고, 또한 사유할 것도 없어서 실로 심상(心想)이 존재하지 않게 되느니라. 이와 같은 소리를 듣는 것을 성문이라 하느니라. 이미 아는 법을 모두 남들에게 듣게 하는 것이 성문이니라. 만일 몸을 듣고는 몸의 모습을 분별한다면 몸의 모습은 체성(體性)이 본래 공하여 나지도 않고 나지 않는 것도 아니어서 이를 보리(菩提)라 하느니라. 한량없는 중생으로 하여금 이 소리를 듣게 하는 것을 성문이라 하느니라. 심성(心性)은 체가 없어서 실로 있는 곳이 없으니, 모두 요술로 변한 것 같아서 생멸하지 않느니라. 능히 중생으로 하여금 모두 듣게 하면 성문이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는 아난에게 계속 말씀하셨다.
“성문의 법 보시[法施]는 부사의하니 이 도를 증득하기에 부사의라 하느니라. 이 부사의한 법 보시로써 능히 보리를 일으키나니, 종자상(種子相)이 서로 닮아 나기[似生] 때문이니라. 과보 없는 것으로 과보를 삼나니, 재물의 보시로 얻을 바 아니요, 들음으로써 믿고 알기에 성문이라 하느니라. 재물의 보시는 미미하고 작으나 법 보시는 위가 되나니, 이러한 법 보시는 남을 미워하지 않고 또한 보시하는 모습도 없으며, 이 보시에 집착하지도 않느니라.
비유컨대 요술로 변한 것이 분별 없음과 같나니, 원하고 구하는 마음을 내지 않으며, 베푸는 생각을 취하지 않으니, 원하고 구하는 마음이 없느니라. 때문에 아난이여,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이렇게 보시하는 이는 보리를 성취하며, 듣고 믿고 아는 것을 성문이라 하느니라. 일체 상을 다하고 모든 결박을 여의며, 성문들이 모든 승가를 뛰어나 큰 소리를 내어 불법을 연설할지니, 구족한 소리를 얻어 일체 음성을 초월한 까닭이니라. 이 소리를 내고는 불법을 듣게 하여 모든 상이 하나가 아니며 다르지 않은 줄 알아서 바른 믿음을 성취할지니라. 설법은 둘이 아니며 또한 둘이 아닌 것도 아니니, 이러한 법을 듣는 것을 이름하여 성문이라 하느니라.”
그 때에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한량없는 중생이 듣도록
불법의 부사의를 말하는
보살의 광대한 변재(辯才)는
이를 성문이라 하느니라.
이미 들어서 보리를 믿되
흐림 없고 희론 없어서
일체로 하여금 듣게 하는 이
이를 성문이라 하느니라.
열반의 즐거움을 듣고
이 즐거움이 제일이라 하여
널리 적멸을 듣게 하면
이를 성문이라 하느니라.
모든 힘[十力]과 각도(覺道)와
염처(念處)와 그리고 근(根)에서
속히 구경을 얻으면
이를 성문이라 하리라.
이 몸은 괴롭고 공하여
견실한 모습이 없다 하여도
탐ㆍ진ㆍ치에 침노된 바이기에
그러므로 이 몸을 분별한다네.
또한 안입(眼入)을 들으면
실답지 않은 것을 실답게 보니
중생은 어리석음이 많고
범부는 눈이 멀어 지혜가 없네.
만일에 불안(佛眼)을 얻으면
정견(正見)은 부사의하나니
이러한 눈을 얻으면
다시는 어리석음 없으리.
모든 법은 성취함이 없다고
일체 중생이 듣게 하는 이
이런 인연으로써
또한 성문이라 하느니라.
일체 법의 모습은
부르는 소리의 메아리 같아
이에는 듣는 이도 없고
또한 말하는 이도 없다네.
무수한 대중을 듣게 하는 것
이것을 성문이라 부르거니와
이에는 들을 바도 없고
물들고 집착할 이 또한 없다네.
비유컨대 어떤 사람 꿈 가운데
여러 가지 향내음을 맡았지만
하나도 성취할 것 없듯이
이처럼 향의 본체 알아보아라.
일체의 때를 여의면
또한 향내음 맡을 이도 없으리.
보살의 해탈은
뒤바뀐 많은 중생들이
맛을 보되 육단(肉段)에 의하나니
능히 맛을 알지 못하리라.
육단이 맛을 안다면
또한 평등도 알아야 하리.
이러한 모습을 분별함에는
맛을 탐하는 게 가장 나쁘리.
이 경계는 부사의하니
이를 맛을 안다 하리라.
결정코 맛을 안다면
보살은 집착하는 바 없나니
대중을 결정코 듣게 함이
이를 성문이라 하리라.
몸의 분별상을 보니
본성이 공하여 나지 않나니
만일에 진실을 알면
날 것도 없고 낼 이도 없으리.
보리의 이러한 모습도
날 것도 없고 낼 이도 없으니
널리 중생을 듣게 하는 이
이를 성문이라 하리.
의(意)도 또한 그렇게 알라.
체성이 없는 것이니
공하여 체성이 없기에
능히 일체를 듣게 한다네.
물법(物法)이 무생(無生)이듯이
멸하지 않는 것 또한 그러니
모습 없고 보는 바 없으면
이를 성문이라 하리.
모두 그의 보시를 듣게 하면
법시(法施)는 부사의하나니
수행하여 도량에 나아가
보리를 성취하리라.
비유컨대 종자를 심어
각각 같은 열매를 얻나니
보시의 부사의를 닦아서
얻는 과보도 그러하리라.
모든 재물을 모두 베푸나
법시가 최승(最勝)하나니
버리는 마음에 탐질(貪嫉) 없으면
이것을 보리도라 한다네.
마음은 언제나 취착치 않고
비록 베풀어도 바라지 말지니
이렇게 보시하는 사람은
속히 보리를 깨치리.
능히 일체상을 여의고
모든 번뇌를 다하여
온갖 물듦이 없으면
이를 성문이라 하리라.
이 소리가 심히 미묘하여
모든 소리에서 최상이거니
이 소리를 멀리서 듣게 하면
불법은 부사의하리라.
능히 모든 이를 알도록 하되
모든 소리는 의지할 바 없어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으니
이를 성문이라고 이름한다네.
모든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를
일체로 하여금 듣게 하고자
법다운 소리를 들을 적마다
모두 다 보리심을 내게 한다네.
듣건대 모든 복전에서
부처님 복전(福田)이 최승이라니
부처님 계신 곳을 따라
구세존(救世尊)을 가까이 섬기라.
삼천세계에 들리게 하고
허공에 편안히 머물렀으니
중생도 그러하여서
모두가 열반상이니라.
말한 바 4대(大)의 경계는
분별로 중생을 위함이니
혀공의 모습과 같아
부사의와 같아진다네.
모든 경계의 이러한 모습
또한 알 수가 없으나
이 가운데 생사 없으며
번뇌 없고 열반 없다네.
모든 법은 진실이 없고
중생들도 모두 그러하네.
이것을 적멸의 세계라 하니
어떻게 나는 것을 보리.
한량없는 중생을 위해
밤낮으로 들어 아나니
자기의 명리에 집착치 않고
중생을 위해서만 설법한다네.
마땅히 알라. 이 성문들은
일체 중생을 듣게 하고자
실제로는 성문이 아니건만
다만 성문으로 나타났을 뿐일세.
세웅(世雄)은 가명(假名) 설하시니
설법 가운데 가장 높으시네.
때문에 중생은 일체가 여여한 모습임을 아니
이것을 일러 성문이라 한다네.
무루결박을 제하고
일체의 결박을 해탈하고는
중생을 위하여 말해 주고
드러내 주어 결박을 여의게 하네.
청정하여 장난과 희롱 없으며
보고 나서는 남에게 말해 주고
불법은 모두가 그러하니
오래지 않아서 보게 되리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과 같이
보살이 닦고 행하는 바
법에 대해 물들지 않음이니
이것을 성문이라 부르네.
속박 없고 청정하며
모두로 하여금 듣게 하여
들은 대로 수행케 하니
아난아, 그대는 알지니라.
내가 방편으로써 말했으니
이와 같이 성문은 알아야 하니
보살에게는 의지처 없다네.
“아난이여, 마땅히 알아야 하니, 이것이 여래ㆍ등정각께서 모든 보살마하살을 위하여 방편으로 성문의 이름을 말한 것이니라.”
아난이 여쭈었다.
“어떤 것이 여래ㆍ등정각께서 다시 모든 보살마하살을 위하여 벽지불을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이여, 보살은 현전의 일체 법을 보느니라. 그렇다면 어떻게 현전에 보는가? 이른바 모든 법은 다툼이 없음을 알며, 모두가 거짓 이름으로 법성을 그르치지 않고 능히 법을 보아 증득하나니, 이를 벽지불이라 부르느니라. 부처님은 부사의하시니, 일체 법과 모든 중생에 있어서 열반상(涅槃相)과 같아서 차별 없고 형상 없고 모습 없으며, 청정적멸한 실제(實際)이고 중생제(衆生際)이고 열반제(涅槃際)이며, 마치 환영과 같으니라. 분제(分齊)가 없고 존재하는 바가 없으며, 이 모든 분제는 또한 분제의 모습이 없느니라. 말이 아니고 말할 수 없고 의지할 바가 없으며 또한 말할 바가 없으니, 왜냐하면 아공(我空)과 같아서 생도 없고 멸도 없는 때문이니라. 중생의 경계[衆生際]를 알면 곧 법의 경계[法際]를 아나니, 생사의 경계[生死際]가 곧 부처의 경계[佛際]이니라. 이와 같은 분제를 알면 벽지불이라 부르느니라.
현전의 색을 아니, 색은 곧 색음(色陰)을 이름하느니라. 색음이 다하면 다만 말만이 있을 뿐이요, 나[我] 및 내 것[我所]은 존재하지 않느니라. 그것은 왜냐하면, 색음을 말하는 것과 같이 다만 말이 있을 뿐이어서 이는 공이고 무생이고 무멸이기 때문이니라. 말하되 말의 모습이 없으니, 어찌하여 말로써 이 색음을 말하며, 또한 수ㆍ상ㆍ행ㆍ식을 현전에 보며, 나아가 식음(識陰)을 말하겠느냐. 거짓된 이름인 식음 등을 알되 다만 말만이 있을 뿐이니라. 말이란 모두가 공하여 생함이 없고 멸함이 없고 실한 것도 아니고 허한 것도 아니니라. 말조차 없거늘 하물며 음의 모습이겠느냐. 이러한 5음은가명에서 일어나니, 이를 벽지불이라 하느니라. 그것은 왜냐하면, 명자(名字)로 인하여 언설하기를 색이 되기 때문이니라. 색은 다만 가명이어서 원인과 원인 아닌 것이 없느니라. 설하여 인(因)이라 부름은 이 음의 인연을 말하니, 모습을 말할 수는 없느니라. 일체 법은 의지함도 없고 반연함도 없으니, 이렇게 깨달아 아는 것을 벽지불이라 하느니라.”
그 때에 세존께서는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현전에 일체 법을 보니
모두가 다툼이 없음을 아노라.
나지 않고 망가지지 않아
탁하고 어지러운 모습 없도다.
일체 법을 눈앞에 보니
본성이 모두가 공적하네.
체상이 이와 같다면
결정된 것이 있지 않네.
궁극의 경지를 눈앞에 보니
일체 법도 또한 그러해
이것이 바른 지혜라 하는
연각(緣覺)의 부사의니라.
중생에서 열반에 이르는
앞 갈피[前際]를 얻을 수 없고
현재의 갈피는 나지 않으며
부처님께서는 또한 부사의하시니라.
중생의 열반과 같이
남도 없고 출처도 없나니
만일에 법에 나는 모습 없으면
이를 열반이라 이름하리.
중생과 그리고 열반은
모두 물속의 그림자이니
상(像)은 있되 중생은 없는 것
이것을 열반이라 하리.
중생과 그리고 열반은
일체가 가명을 설함이니
나는 것 없고 멸하는 것도 없이
다만 거짓된 명자만 있네.
이러한 말의 모습으로
중생이 없는 줄 알지니
이 뜻을 마땅히 알라.
중생이 곧 열반이니라.
모든 말은 공한 것이니
마음도 없고 법도 없어라.
언설이란 말이 아니기에
결정코 지자(智者)는 없네.
언어의 갈피가 아니며 의지처 없으며
언설(言說)도 머무는 곳이 없나니
이러한 언설의 모습을
중생은 생각할 수 없으리.
중생과 그리고 열반은
실제이면서 실제가 아니니
벗어나서 안온을 얻고
길이 적멸의 집으로 나아가리라.
일체 중생의 갈피
마치 그림자 같고 메아리 같아
인(因)도 없고 연(緣)도 없나니
실제는 사량할 수 없네.
일체 법의 근본은
다만 가명으로 말하였나니
이 갈피는 있는 곳 없으며
명자의 모습도 얻을 수 없네.
실제는 언설이 없고
능히 알 이도 없으니
공하여 실제가 없는 까닭에
중생은 생각할 수 없으리.
실제는 언설이 없으므로
언설로는 이룰 바 없네.
진실된 모습은 여여하여
중생도 또한 갈피가 없어라.
언설의 모습은 스스로가 공한 것
언설을 쓴다고 해도 알 바가 아니니
그대가 말하는 바와 같이
중생은 생각할 수 없네.
이처럼 실제의 모습은
생각한다고 알 것이 아니니
이를 정각의 말이라 하며
벽지불은 헤아리기 어렵네.
현전의 색음을 보건대
거짓된 명자만 있나니
이러한 음상(陰相)의 성품은
항상 언설을 여의었네.
진실한 모습이 없는 것
출세(出世)라 이름하나니
이렇게 모든 음을 알면
본성은 머무는 곳 없으리.
이 색은 있는 바가 없어
거짓 이름으로 음을 삼으니
다만 빈 명자만 있어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니
언설과 그리고 모든 법은
결정된 처소가 없나니
만일 언설이 없어지면
이것을 이름하여 색음이라 하네.
현전[現]에 통음(痛陰)을 보건대
상(想)ㆍ행(行)도 또한 그러하며
나아가 식음 등도
다만 거짓된 말뿐이네.
음을 보건대 말할 수 없나니
모든 모습을 여의었네.
본성이 있는 바 없어
나지도 않고 머물지도 않으니
말한 바 진실과 같이
일체의 법을 멀리했나니
이렇게 모든 상을 알면
체성은 머무는 곳이 없다네.
거짓된 이름으로 말한 바는
음(陰)을 말하되 또한 공하니
언설이 공한 줄 안 뒤에는
나는 것 없고 멸하는 것 없네.
언설과 모든 법은
결정된 곳이 없나니
만일에 언설이 없어지면
이를 식음이라 하리.
이 음은 언설을 여의었나니
한량을 살필 수 없어라.
나거나 멸하는 모습 없으며
의지하는 처소 또한 없네.
모든 번뇌를 해탈하는 것
업도 아니요 과보도 아니며
깨달음도 아니요 음도 아니며
언어도 아니요 열반도 아니어라.
이 망상은 결정된 것 없으며
또한 지혜도 없나니
안팎에서 얻을 수 없으며
게으름과 부지런함도 없네.
희롱함도 없고 의혹도 없으며
성취할 것도 있지 않으니
놀랍지 않고 두렵지 않아
일체 색이 없어라.
공한 줄을 보지 않으며
모습이 없음도 또한 그래서
하나이거나 다른 모습 없으며
속박도 아니며 해탈도 아니네.
온갖 말소리도
이 소리에는 들어갈 곳 없어
이것을 율타(律陀)라 하니
말로는 미치지 못하네.
눈앞에 봄을 끝내 이루고
다함이 없는 법을 설명했나니
이러한 삼매를 얻은 뒤에는
언설에 집착하지 않을지니라.
이 지혜 나타나기만 하면
아나율타(阿那律陀:無滅)와 같다 하리니
율타의 여러 법과 마찬가지로
잠잠히 연설하네.
여기에서 현전에 보아
다른 인연을 쫓지 않으면
이것을 정각이라 하나니
연각의 부사의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