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설해의보살소문정인법문경(佛說海意菩薩所問淨印法門經) 제03권

불설해의보살소문정인법문경(佛說海意菩薩所問淨印法門經) 제03권

“다시 해의여, 이른바 보살이 몸에 대한 그 꺾이고 눌림을 참아 견딤이란 어떤 것이냐 하면, 만약 보살의 몸이 동강나고 무너지려는 때를 당하더라도 보살로서 응당 법에 의지하여 모든 중생을 관찰해야 하며, 또 훌륭한 방편을 갖춘 보살이라면 보다 더 원만한 여섯 바라밀을 수행해야 하리라.

훌륭한 방편을 갖춘 보살로서 원만한 여섯 바라밀을 수행하는 그 모습이란 어떤 것인가? 이른바 보살은 자신의 몸이 동강나고 무너지려는 때를 당하더라도 그 몸을 아끼지 않음은 물론 몸을 버림에 있어서도 애락(愛樂)하지 않는 그것이 곧 보시바라밀을 수행함이요, 또 몸이 무너지려는 때를 당하더라도 모든 중생에게 대비심을 일으켜 그들을 버리지 않는 그것이 곧 계율 바라밀을 수행함이다.

또 몸이 무너지려는 때를 당하더라도 보살이 모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설사 몸이 동강나고 무너지는 경우에 있어 그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채 참아 견디고 받아들이어 인내의 힘을 나타내는 그것이 곧 인욕바라밀을 수행함이요, 또 몸이 무너지려는 때를 당하더라도 온갖 지혜의 마음을 버리지 않고 정진하는 큰 용기 있는 힘을 내어서 중생을 생사 가운데 섭수(攝受)하여 모든 선근을 일으키게 하는 그것이 곧 정진 바라밀을 수행함이다. 또 몸이 무너지려는 때를 당하더라도 그 온갖 지혜를 내는 마음의 보배를 버리지 않고 큰 보리심을 발휘하여 안팎을 관찰하여 적정(寂靜)한 것이 곧 선정바라밀을 수행함이요, 또 몸이 무너지려는 때를 당하더라도 보살이 그 몸을 관찰하되 마치 풀·나무와 흙·돌처럼 생각하고 환영처럼 진실이 아님을 깨닫는 한편, 그 제행무상(諸行無常)과 제행시고(諸行是苦), 제법무아(諸法無我)와 열반적정(涅槃寂靜)의 진실의 이치에 따라 그대로 자신의 몸을 관찰하는 그것이 곧 지혜 바라밀을 수행함이다.

이러한 방편을 행하는 모습이 바로 보살로서 원만한 여섯 바라밀을 수행하여 대승의 법에 물러나지 않는 것이므로, 이를 이르되 보살이 몸에 대한 꺾이고 눌림을 참아 견딤이라 하느니라.

다시 해의여, 이른바 보살이 말에 대한 그 꺾이고 눌림을 참아 견딤이란 어떤 것인가? 만약 보살에게 어떤 사람이 와서 그 사정의 허와 진실을 막론하고 함부로 나쁜 말을 퍼부으면서 비웃고 헐뜯고 성내고 꾸짖고 욕되게 하더라도 그 때 보살이 참아 견디고 받아들일 뿐 성내거나 미워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그에 대한 원망을 끊어야 하며, 또 보다 더 훌륭한 방편을 갖춘 보살이라면 어떤 사람이 와서 비웃고 헐뜯고 꾸짖고 욕되게 하며 갖가지 나쁜 말을 할 때에라도 보살이 그것을 듣고는 으레 원만한 여섯 바라밀을 수행해야 하느니라.

이른바 훌륭한 방편을 갖추고 원만한 여섯 바라밀을 수행하는 그 보살의 모습이란 어떤 것인가? 만약 보살에게 어떤 사람이 와서 비웃고 헐뜯고 꾸짖고 욕되는 나쁜 말을 할 때에 보살이 그것을 듣고 나서 ‘이 사람이 과거세에 간탐하는 인연을 지었기에 그 인연을 말미암아 이제 더러운 간탐을 그대로 나타내고 또 일찍이 착한 벗을 가까이 하지 않았기에 성냄을 버리지 못하지만, 나는 이제 그를 위해 성냄을 끊는 법을 말해 주리라. 왜냐 하면 나는 보시하는 법을 깨달아 간탐하지 않고 또 일찍이 착한 벗을 가까이 하였으므로, 나 이제 그의 나쁜 말을 이해하여 진심을 버리게 하리라’ 하고 생각하는 것이 곧 보시바라밀을 수행하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이 와서 비웃고 헐뜯고 꾸짖고 욕된 나쁜 말을 할 때에 ‘이 사람이 일찍이 파계하였기 때문에 그 나쁜 업을 나타내기 위해 일부러 나에게 와서 성내고 꾸짖고 욕되게 하지만 나는 이제 청정한 계율을 닦았으므로 업보를 생각하여 그에게 성내는 마음을 내지 않고 다시 보리심을 수호하리라’ 하고 생각하는 것이 곧 계율바라밀을 수행함이요, 또 어떤 사람이 와서 비웃고 헐뜯고 꾸짖고 욕된 말을 할 때에 보살이 그것을 듣고 나서 ‘이 사람이 과거세에 거칠고 사나운 허물을 저질러서 진심이 많았기 때문에 일부러 나에게 와서 비웃고 헐뜯고 꾸짖고 욕되게 하지만 나는 이제 그 인욕의 힘을 갖추고 인자한 행을 널리 닦기 때문에 조금도 그에게 진심을 내지 않으리라’ 하고 생각하는 것이 곧 인욕바라밀을 수행함이다.

또 어떤 사람이 와서 비웃고 헐뜯고 꾸짖고 욕된 말을 할 때에 보살이 그것을 듣고 나서 ‘이 사람이 게을러서 선법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에 나에게 와서 성내고 미워하고 꾸짖고 욕되게 하지만 이제 나는 광대한 정진을 일으켜 부지런히 선근을 수행하되 조금도 만족스럽게 여기지 않으므로 나는 이 사람을 먼저 보리의 도량에 앉게 한 연후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리라’ 하고 생각하고서 정진의 갑옷[鎧]을 입는 것이 곧 정진바라밀을 수행함이다. 또 어떤 사람이 와서 비웃고 헐뜯고 꾸짖고 욕된 말을 할 때에 보살이 그것을 듣고 나서 ‘이 사람이 올바른 생각을 잃어버리고 또 번뇌를 제거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에게 와서 성내고 미워하고 꾸짖고 욕되게 하지만, 나는 이제 번뇌를 제거시켜 올바른 생각과 올바른 지혜로 한 경계에 전일하게 머물고 다시 큰 보리심을 잊어버리지 않았으니, 나 이제 조복되지 못하고 고요하지 못하며 모든 근기를 옹호하여 번뇌를 쉬지 못하는 중생들로 하여금 이익을 얻게 하기 위해 대승의 갑옷을 입으리라’고 이렇게 생각하여 그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 곧 선정바라밀을 수행함이다.

또 어떤 사람이 와서 비웃고 헐뜯고 꾸짖고 욕된 말을 할 때에 보살이 그것을 듣고 나서, ‘이 사람이 아상(我相)에 집착하여 그 정견(情見)으로 경계를 대하기 때문에 나에게 와서 비웃고 헐뜯고 꾸짖고 욕되게 하지만, 나는 이제 법에 의지하여 어떤 이가 나에게 진심을 내거나 진심을 내지 않거나 간에 그 두 가지를 사실 그대로 관찰하되 성내는 자와 성내는 법을 다 초월하여 이치에 따라 추구(推求)하고 나 자신과 다른 사람을 멀리 벗어나 볼 수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참아 견디리라’ 하고 생각하는 것이 곧 지혜바라밀을 수행함이라.

해의여, 이와 같이 수행하는 모습이 바로 훌륭한 방편을 갖추고 원만한 여섯 바라밀을 수행하는 보살로서 대승의 법에 퇴전하지 않음이니, 이것을 이르되 보살이 말에 대한 그 꺾이고 눌림을 참아 견딤이라 하느니라.

다시 해의여, 이른바 보살이 마음에 대한 그 꺾이고 눌림을 참아 견딤이란 어떤 것인가? 만약 보살에게 뭇 마군이 와서 서로 흔들고 파괴하더라도 보살이 그럴 때에 큰 보리심을 굳게 하여 움직이지 않아야 하며 또 일체의 삿된 말로써 이익이 있을 것으로 유인하고, 갖은 모양으로 변화해 와서 유인하더라도 보살이 또한 여실하게 안으로 마음을 안정함과 동시에 온갖 지혜의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아야 하리니, 왜냐 하면 저 마군은 큰 위력(威力)이 있으므로 내지 최후에 가서는 부처님의 형상으로 변화하여 너희들 앞에 나타나 말하기를, ‘그대들 대승의 법에 무슨 능력이 있겠느냐? 그대는 그러한 무거운 부담을 버리고 애써 정진하는 그 소행을 그칠지어다. 보리와 불법을 얻기 어려워 생사 가운데 온갖 많은 괴로움만 겪게 되노라. 이제 대사들이 만약 그 괴로움을 벗어나려면 빨리 성문의 열반을 증득해야 하리라’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보살이 만약 저 마군이 이러한 모습으로 요란스럽게 하고 파괴하려는 때를 당하더라도 앞서 말한 것처럼 그 견고한 갑옷을 입어 보리심을 버리지 않고 또 안으로 마음을 움직이지 않아야 하리니, 만약 이렇게 수행한다면 그의 견줄 데 없는 평등한[無等等] 이 마음을 누구도 감하거나 없앨 수 없으리라.

그리고 보살이 그럴 때 생각하기를 ‘나 결정코 보리장(菩提場)에 나아가서 그 큰 지혜의 힘으로 마군을 부순 연후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과(果)를 증득하리며, 또 결정코 미묘한 법 바퀴를 굴리고 널리 삼천대천세계에 광대한 법을 연설하여 모든 중생을 맞이하되 법의 보시를 두루 베풀어 모두 만족케 함으로써 일체 부처님들께서 남의 마음을 아는 지혜[他心智]로 나에게 비추어 주시고 일체 성현들도 나의 이 보리심을 증명하시리니, 그러므로 나 이 모든 꺾이고 눌림을 진실히 참아 견디어 모든 부처님과 성현과 중생들을 허망하게 속이지 않고 내지 자신을 위해서도 허망하게 속이는 사람이 되지 않으리라’고 이렇게 생각해야 하리라.

해의여, 만약 보살이 이와 같이 수행한다면 그는 곧 마음에 대한 꺾이고 눌림을 충분히 참아 견디어 대승의 법에 퇴전하지 않으리니, 이러한 수행의 모습이 바로 이른바 보살이 그 온갖 지혜를 내는 마음의 보배를 잘 다루는것이다. 이같이 인욕바라밀에 있어서 견고한 갑옷을 입는다면 정진바라밀에 있어서도 게으르거나 물러나지 않을 것이며, 또 이 두 가지 바라밀을 원만히 갖춤으로써 보살이 그 온갖 지혜의 마음 보배를 충분히 다루게 되리라.

그 때 세존께서 거듭 게송을 읊어 말씀하셨다.

큰 보리심을 헐지 않고 
대비심을 헐지도 않고 
3보를 잘 보호해 받들어 
쌓고 모은 불법을 잃지도 않고 

다시 32표상과 80종호와 
10력(力)의 장엄한 몸매를 갖추려면 
갖은 복덕의 원만한 지혜를 닦아야만 
그 마음 보배를 다룸에 물러나지 않으며 

한량없는 공덕의 불토를 
나의 원력으로 다 청정케 하고 
더 없는 불법의 수승한 문(門)을 
나의 견고한 원력으로 항상 수호하고 

끝없는 백천의 중생을 
나의 원력으로 다 도달케 하려면 
안으로 견고한 마음을 헐지 않아야만 
그 마음 보배를 충분히 다루게 되리라.



그러므로 시방세계는 물론 
내지 끝없는 중생계에 
그 많은 일체의 중생들이 
제각기 무기를 잡고 와서 괴롭히고 

공포를 만들고 성내며 
때리고 던지고 위협하여도 
보살은 그들 위해 공덕을 닦되 
용감하고 수승한 마음으로 참아 견디어 
그지없는 백천 겁을 겪도록 
그 생사의 모든 경계를 다 초월하고 

또 중생이 나쁜 말로 꾸짖고 욕할 때에도 
보살은 마음에 고뇌와 침해 없이 
큰 지혜를 위해 참아 견디되 
성내지도 않고 미워하지도 않아 
이같이 마음 보배를 다루어야만 
곧 그 인욕으로 청정을 얻게 되며 

다시 온 세계에 두루한 중생들이 
제각기 무기를 갖고 와서 침해하여 
나의 몸이 모두 분리되어 
내지 갈래갈래 찢겨지더라도 

보살은 그럴 때 마음이 흔들리지 않아 
조금도 성내는 마음을 내지 않고 
큰 보리심을 굳게 지녀야만 
그 마음 보배를 다루어 청정케 하리라.



그리고 보살이 다니고 머물고 
앉고 눕는 모든 처소에 따라 
그 중에 어떤 이가 큰 보리심 내어 
그 마음을 버리지 않는 자 있거나 
혹은 보시·지계의 바라밀을 행하거나 
선심을 내는 자 있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몸이 끊기고 해를 입어 
설사 온 몸이 갈래갈래 찢겨지더라도 
보살은 그럴 때마다 참아 견딤은 물론 
나아가선 기쁜 마음 내어 생각하기를 

나 끝없는 백천 겁에 걸쳐 
지옥·아귀·축생계를 다 겪어 왔고 
이젠 사람세계에 태어났으니 
비록 이 몸이 남김없이 찢겨져도 
부처님 지혜 구하기 위해서는 이 몸 버리리.



또 이제 사람 몸 얻고 나서는 
무수한 고통에 항상 시달리더라도 
저 아비지옥에 비교한다면 
백천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므로 

나 차라리 저 지옥 속에서 
백겁 동안 그 고통을 참아 받을지언정 
부처님과 바른 법과 중생 
이 세 가지만은 끝내 버리지 않으리라.



나 이 몸을 무상한 존재로 관찰하건대 
환영처럼 찰나에 사라지고 
네 원소를 빌려 합성된 이 몸을 
부처님도 네 마리 독사(毒蛇)같다고 말씀하셨으니 

나 만약 이 몸을 버린다면 
빨리 몸 속의 모든 독해를 벗어나고 
저 번뇌의 독기까지 소멸하기 위해선 
스스로가 부처님의 자연스런 지혜를 이룩해야 할 것이며 

나의 이 몸 세간에 처해서는 
그 많은 공포에 둘러싸여 허덕이고 
음식 따위의 모든 욕심을 말미암아 
몸에 대한 안락의 인연만을 구하니 

나 만약 이 몸을 버린다면 
모든 인연을 벗어나 공포를 여의고 
또 이러한 생각을 깨달아 수행하기 위해선 
모든 꺾이고 눌림을 참아 견뎌야 할 것이며 

세간의 그 많은 백천 중생은 
항상 불선한 법을 운영하여 돕고 
이 선한 법 가운데 수순하여 
부지런히 운영하여 돕는 자 적으므로 

나 모든 그 불선한 법은 
이제부터 다시 돕지 않는 반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인욕에 따라 
인욕의 문을 돕고 또 닦으리니 

그렇게 함으로써 시방 부처님들께서 
낱낱이 다 나를 증명해 주시고 
나 또한 결정된 마음 그대로 
부처님의 법을 길이 헐지 않을 것이며 

저 위력(威力)을 지닌 성현들도 
나의 참아 견디는 마음을 증명하고 
나 또한 꺾이고 눌림을 참아 견디어 
모든 과실(過失)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며 

또 부처님의 말씀하는 몸·입·뜻의 
세 가지에 대한 갖가지 꺾이고 눌림을 
용맹스런 마음으로 다 참아 견디되 
앞서 말한 것처럼 헐지 않으리라고 

이렇게 생각하곤 그 몸에 대한 
갖가지 고통과 낱낱 끝없는 고통과 
꺾이고 눌림을 다 참아 견뎌야만 
비로소 마음 보배의 청정을 얻으리라.



다시 이 몸 고통받아 흩어지되 
갈래갈래 찢어져 무너질 때라도 
저 훌륭한 방편과 큰 지혜의 덕으로 
여섯 바라밀을 원만히 성취해야 하나니 

이른바 보시·지계와 
인욕·정진·선정과 
수승한 지혜를 함께 닦아 
모두 원만히 섭수(攝受)함이 그것이라.



그러므로 언제 몸을 버릴지라도 
집착과 애석함을 벗어나기 위해선 
그 때마다 이 보시바라밀을 
항상 원만히 수행하는 한편 
중생들에 널리 자비를 행하기 위해 
곧 청정한 계율바라밀을 헐지 않고 

그 몸이 설혹 끊어지려 할 때에도 
더욱 인욕의 힘을 견고히 하여 
애써 행하는 그 참음의 힘으로 
인욕바라밀을 원만히 수행하고 

무거운 부담에도 지침 없이 정진하되 
안으로 싫어하는 마음 없이 
몸이 무너져도 힘껏 굳게 지녀 
정진바라밀을 원만히 수행하고 

그 몸이 설혹 끊어지려 할 때에도 
보리심을 버리지 않기 위해선 
모든 번뇌를 다 소멸하는 한편 
선정을 닦아 해탈의 힘을 이루고 
차라리 자기 몸은 파괴되더라도 
중생을 번뇌에서 구제하기 위해 
선정바라밀을 원만히 수행하고 

이 몸이 실제로 무아이며 
환영과 같고 번개와 같고 
조작하는 이와 받는 이가 다 없고 
그 중에 조그마한 법도 없음을 관찰하여 

자신의 몸은 온갖 괴로움에 얽매일지라도 
저 중생을 제도하여 해탈시키기 위해 
스스로가 수승한 피안(彼岸)에 이르러 
지혜바라밀을 원만히 수행해야 하리니 
만약에 이러한 깊고 굳은 법을 
방편으로 생각해 항상 잘 수행한다면 
그는 꺾이고 눌리는 몸을 참아 견디어 
모든 과실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며 

또 어느 때 누구에게 나쁜 말을 듣거나 
비웃음과 헐뜯음과 멸시를 당하여도 
그에게 아무런 진심을 내지 않고 
인자한 마음으로 잘 조복할 것이며 

나아가선 성냄과 모든 과실을 버림으로써 
보시바라밀을 청정케 하고 
인자한 마음을 널리 실천 운행함으로써 
지계바라밀을 청정케 하고 

참는 힘을 나타내 대치(對治)함으로써 
인욕바라밀을 청정케 하고 
자주 정진하여 부처님의 지혜를 구함으로써 
정진바라밀을 청정케 하고 

어떤 경계에서도 마음을 안정함으로써 
선정바라밀을 청정케 하고 
모든 음성을 요달함으로써 
지혜바라밀을 청정케 하리라.



또 보살은 어떠한 나쁜 말을 듣고서도 
응당 깊은 법을 생각하여 
그 꺾이고 눌림을 참아 견딤으로써 
모든 과실에 물들지 않으며 
가령 백천의 모든 마군들과 
삿된 외도들이 모여 와서 
보리의 얻기 어려움을 설명하여 
그의 수행하는 방편을 버리게끔 권하여도 

보살은 그 때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힘을 더해 수행함으로써 
그 꺾이고 눌림을 참아 견디어 
아무런 파괴도 손실도 없으리니 

그러므로 인욕과 정진 이 두 가지 행을 
잘 닦아 산왕(山王)처럼 편히 머문다면 
모든 중생과 그 용맹을 같이 하여 
어떠한 꺾이고 눌림도 참아 견디고 

마침내 마음의 보배를 닦아 다룸으로써 
10력(力)을 갖춘 여래께 친근하여 
그 존귀한 보리를 증득함과 동시에 
다시 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으리라.

“다시 해의여, 이른바 보살의 그 온갖 지혜를 내는 마음 보배란 아무리 뚫어도 파괴되지 않나니, 왜냐 하면 보살의 그 온갖 지혜 내는 마음은 거두어들이는 것이 없고 기대어 집착하는 것이 없고 머묾도 없고 드나듦도 없으며 희론(戱論)이 없고 분별이 없는가 하면, 모든 분별을 깨뜨려 안립(安立)함도 없이 다만 바른 지혜로써 깊고 깊은 법을 사실 그대로 관찰하기 때문이라.

어떤 것이 그 깊고 깊은 법인가? 이른바 인연 따라 생기는 법에 수순하여 진여를 깨닫되 인(因)에 대한 연(緣)과 단(斷)에 대한 상(常)의 그 모든 치우친 소견을 초월하여 나라는 자성(自性)이 없음이니, 나라는 자성이 없기 때문에 일체의 법도 자성이 없고, 모든 법이 본래 생멸이 없기 때문에 공(空)을 깨닫고, 상(相) 없음과 원(願) 없음과 구할 것이 없음을 믿어 그 진실한 지혜를 바탕 삼아 아무런 조작이 없고 필경 일정함이 없으며, 물질〔色〕은 물거품 같고, 느낌〔受〕은 물방울 같고, 생각〔想〕은 아지랑이 같고, 지어감〔行〕은 파초(芭蕉) 같고, 의식〔意〕은 환영과 같고, 모든 경계는 움직임이 없고, 모든 감관은 서로 생기고 마음은 머묾이 없고 뜻을 조작하지 않으며, 증상(增上)하는 일은 증상하는 것이 아니고 평등한 법은 사실 그대로를 깨달으므로 갖가지 지어감[行]의 모습이 다름없는 동일한 맛[味]이어서 일승(一乘)의 도에 머물되 도를 닦고 지혜를 행함에는 수승한 이치에 의지하며, 그 지혜로 이치를 요달하되 집착함이 없고, 저 일체의 음성에 있어서도 올바른 음성과 그릇된 음성을 깨달아 그 모든 음성을 요달함이라.

이와 같이 앞뒤의 경계를 끊으므로 문자(文字)와 이치가 두 가지 종류이기는 하지만, 그 지혜로 둘이 아님에 들어가 말할 수 없는 제법의 뜻을 증명해 나타낸다. 말하자면 무아(無我)의 이치란 고(苦)에 대한 지혜이고 필경(畢竟)의 이치란 집(集)에 대한 지혜이며, 화합하지 않는 이치란 멸(滅)에 대한 지혜이고 유위(有爲)와 무위(無爲)를 평등하게 깨달아 들어감은 도(道) 대한 지혜이다. 전후제(前後際)를 여읨은 신념처(身念處)이고 생멸에 집착하지 않음은 수념처(受念處)이며, 마음으로 인식하는 대상이 없음을 관찰함은 심념처(心念處)이고 법계와 법계 아닌 것을 다 평등한 이치로 관찰함은 법념처(法念處)이다.

자재한 마음으로 이치에 따름은 4정근(正勤)이고 모든 장애를 여읨은 4신족(神足)이며, 바른 이치에 환희심을 냄은 신근(信根)이고 무념(無念)은 정진근(精進根)이며, 마음에 조작함이 없음은 염근(念根)이고 희론(戱論)을 초월함은 정근(定根)이고 다른 믿음이 없음은 혜근(慧根)이다. 마음으로 인식하는 대상에 장애가 없음은 신력(信力)이고 모든 힘을 통달함은 정진력(精進力)이며, 마음에 집착을 그침은 염력(念力)이고 흔들리거나 물러남이 없음은 정력(定力)이며, 모든 생각을 생각하는 그대로 수순함은 지혜의 힘[慧力]이다.

일체의 법에 평등하게 상응함은 염각분(念覺分)이고 내지도 않고 들이지도 않음은 택법각분(擇法覺分)이요, 나와 내 것이 없음은 정진각분(精進覺分)이고 몸과 마음이 편히 머묾은 희각분(喜覺分)이며, 모든 평등함을 깨달음은 제각분(除覺分)이고 법이 둘이라는 것을 여읨은 정각분(定覺分)이고 모든 견(見)을 멀리 여윔은 사각분(捨覺分)이다. 일체 분별과 무분별 가운데 그 모든 치우친 소견을 여읨은 정견(正見)이고 일체의 음성에 들어가 평등함을 깨달음은 정사유(正思惟)이며,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법을 여읨은 정어(正語)이고 모든 하는 일을 다 경안(輕安)하게 함은 정업(正業)이며, 높거나 낮음이 없음은 정명(正命)이고 선하거나 불선(不善)하거나 그 시설(施設)에 따라 평등하게 머묾은 바른 노력(正勤)이며, 마음으로 인식하는 대상이 평등함을 깨달아 들어감이 정념(正念)이고 적정(寂靜)하여 묘한 삼매에 머묾은 정정(正定)이다.

모든 견(見)을 청정케 하여 생멸 없음을 관찰함은 무상(無常)의 이치이고 본래 그 생멸에 집착하지 않음은 고(苦)의 이치이며, 지어감이 없음은 무아(無我)의 이치이고 고요히 지식(止息)함은 적멸(寂滅)의 이치이다. 마음을 잘 조복함은 보시의 이치이고 청량(淸凉)한 성품에 머묾은 지계의 이치이며, 수순하는 법을 앎은 인욕의 이치이고 모든 법을 잘 선택하여 결정함은 정진의 이치이며, 안으로 마음을 쉼은 선정(禪定)의 이치이고 모든 존재가 상(相) 이 없음을 사실 그대로 깨달음은 수승한 지혜의 이치이다. 일체 중생이 본래 다 청정하다고 관찰함은 자비함 [慈〕의 이치이고, 허공처럼 평등하게 생각함은 가엾이 여기는 마음〔悲〕의 이치이며, 소득을 바라지 않고 중생을 다 즐겁게 함은 기뻐하는 마음〔喜〕의 이치이고 중생을 위해 모든 것을 끝까지 다 행함은 버리는 마음[捨〕의 이치이며, 일체의 법이 과거부터 3륜〔三輪: 전법륜(轉法輪)·조법륜(照法輪)·지법륜(持法輪)〕이 다 청정함은 공(空)의 이치이고, 미래가 청정함은 이(離)의 이치이고 현재가 청정함은 무아(無我)의 이치이니라.

해의여, 만약에 보살이 이러한 모든 깊고 깊은 법에 그 기멸(起滅)이 없음을 깨달아 일체의 문자(文字)를 떠남으로써 마치 허공처럼 평등한 지혜에 들어가거나 또는 이러한 생각으로 사실 그대로를 관찰하여 행한다면 그 보살은 곧 온갖 지혜를 내는 마음의 보배를 뚫어도 헐지 않을 것이며, 다시 그 온갖 지혜의 마음 보배를 뚫으면서도 뚫는다는 느낌을 갖지 않은 채 곧 모든 법의자재로운 이치를 현전에 증득하게 되리라.

해의여, 마치 해와 달[日月]이 각각 제 궁(宮)에 있으면서 남섬부주 4대주(大洲)의 주변을 널리 비추되 그 일월천(日月天)의 천자들은 도무지 비춰 준다는 느낌을 갖지 않을 뿐더러, 또 ‘내가 그 모든 곳을 가서 비춰 줄 수 있지만 어떤 곳은 가서 비춰 주지 않으리라’고 그러한 생각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살이 다만 일체 중생의 복된 과보(果報)를 위해 그것을 말미암아 광명을 비춰 줌도 그러하다. 해의여, 그 선법을 결정 선택하는 지혜를 갖춘 보살도 그와 마찬가지로 한량없는 불찰에 걸쳐 널리 중생을 위해 큰 이익을 일으키되 도무지 그 이익을 일으킨다는 느낌을 갖지 않고, 또 미리 그 하는 일에 대해 일부러 자주 생각하지 않아도 응해지는 그대로 하는 일을 다 나타내느니라.

다시 해의여, 의심을 결단하여 이치를 분별하는 지혜를 갖춘 보살이라면 응당 선정바라밀과 지혜바라밀을 닦아 그 모든 이치에 따라 관찰해야 하리니, 왜냐 하면 선정에만 집착하는 보살은 관법(觀法)을 닦지 못하고 관법을 수행하는 보살은 선정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라. 만약 관법을 닦는다면 곧 지혜가 있을 것이며, 지혜로 말미암아 잘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을 관찰하는 것인가? 이른바 제법(諸法)의 실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제법의 실상은 무엇인가? 모든 상에 지어감이 없음이요, 지어감이 없는 그것이 바로 제법의 실상이다. 무엇이 제법의 상(相)인가? 이른바 존재가 드러난 것이 곧 제법의 상이요, 이와 같이 드러난 가운데의 여실한 모습을 제법의 실상이라고 한다. 일체를 이처럼 깨달아 안다면 그는 곧 상없음〔無相〕과 상없음도 없음〔無無相〕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것이 상이고 어떤 것이 상없음인가? 상이란 곧 생기는 것이고 상없음이란 사라지는 것이다. 상없음과 상없음도 없다면 곧 생기는 것도 없고 사라지는 것도 없는 것이다. 만약 법이 생김도 없고 멸함도 없다면 제법의 성품은 본래 항상 법계에 머물러 파괴되지 않고, 진여는 부동하며 실제(實際)는 변화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법의 성품에 따라 연기로 생기는 법을 여실하게 이해하여 깨닫는다고 하며, 또 모든 법의 진실한 모습을 깨닫는다고 하며, 실제는 둘이 아닌 진리임을 현전에 증득한다고 하니, 해의여, 이와 같은 지혜를 나타내는 이를 이르되 결정 선택의 지혜를 갖춘 보살마하살이라 하느니라.”

세존께서 이와 같이 그 마음의 보배를 갈고 다룸에 있어서 꺾이고 눌림을 참아 견디어 뚫어도 파괴되지 않는 법을 말씀하시자, 그 때 모임에 있던 한량없는 하늘사람들은 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고 1만 6000의 보살들은 무생법인(無生法忍)의 지혜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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