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소저의 기도

임소저의 기도

「내가 왜 이래.」

임소저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밤새도록 이불을 휘감고 이리뒹굴 저리뒹굴 잠 한숨자지 못한 채 방안에서 훌쩍 일어서며 되뇌였다.

때는 고려 왕실의 외척 이자겸(李資謙)이 횡포를 한창 부리던 인종(仁宗) 3년 3월 이었다.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 임자겸(任資謙)의 딸 임소저는 그의 상관 평장사(平章事) 김인규(金仁揆)의 아들 김지효(金之孝)와 약혼하여 결혼 날이 며칠 남지 않았는데도 마음에 안정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이유인즉 김인규는 두 딸을 임금님에게 한꺼번에 바친 이자겸의 부하로써 천하의 권리를 자기 손아귀에 넣고 마음대로 해보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오죽이나 좋은가! 임금님 처남의 부인이 되는데 무엇이 부러울 것이 있겠는가? 허나 임소저는 영리한 사람이었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 라는데‥‥‥」

무너진 권세 집안의 꼴은 너무나도 허무한 것임을 예견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께 간청 하였다.

「어머님, 부처님께 기도드리고 싶습니다. 」

「혼인이 임박한 아녀자가 어디를 간단 말이냐?」

「거룩하신 부처님의 따뜻한 빛을 뵙고 싶습니다. 」

「정히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몸종들을 시켜서 조심스럽게 사람들 눈에 뜨이지 않게 다녀오도록 부탁했다.

그래서 그들은 일부러 낮을 피해서 밤길을 나섰다.

법장사(法藏寺)의 장등은 유난히도 밝았다.

법당에 들어서자마자 소저는 조용히 향불을 올리고 절을 했다.

「부처님 저의 소망이 헛되지 않게 하옵소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날 줄도 모르고 계속해서 염주를 굴렸다. 삼경이 훨씬 넘어서야 조심스럽게 일어나 나왔다. 2일후 대례를 치르기 위해서 몸단장을 하는데 갑자기 배가 아팠다.

처음에는 조금씩 아프던 배가 나중에는 아주 통증이 짙어져 견딜 수가 없었다. 곧 의사를 불러왔으나 가망이 없다는 말이었다.

신랑은 일찍부터 와서 서성거리다가 오후 늦게서야 의사의 이야기를 듣고 사실인가 확인하고자 신부 방에 들렀다. 하얗게 질린 입술, 쑥 들어간 눈을 하고 있는 여인의 몰골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오자마자 장인을 찾아뵙고 파혼하자 하였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집안은 이미 망신살이 뻗쳤다.

그러나 애초부터 억지로 매파를 보내 성립된 결혼이므로 오히려 잘 되었다는 생각에서 쾌히 승낙하였다.

신랑이 파혼을 하고 길을 떠나고 나니 얼마 있다가 부시시 눈을 부비고 일어난 소저는 다행이라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지효는 두 달이 채 못 되어 호화로운 재상의 딸과 결혼을 하였다.

그런데 그해 2월부터 5월 사이에 세상인심이 뒤숭숭해졌다.

김인규의 세도를 싫어하던 김찬(金粲), 안보린(安甫麟), 최탁(催卓), 고석(高碩) 등이 외척 이자겸을 죽이고 나라 살림을 바로 잡아보겠다고 할 때 이자겸 장군이 척준경에게 피살되었기 때문이다.

그 척준경이 이자겸을 배반하고 군기소감 최사전(崔思全)과 함께 자겸과 그 일파 백 여 명을 모조리 잡아 청소하였다.

이러고 보니 엊그제 장가를 들었던 지효야 자기 아버지를 따라서 전라도로 유배가게 되고 그의 누님 두 분도 한꺼번에 폐비되어 쫓겨났다.

만일 그 사람과 결혼했더라면 어떻게 될 뻔하였는가. 임소저는 다시 한번 큰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부처님을 향해 감사하였다.

「부처님. 부처님께서는 저의 소망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

라고 예배 하였다. 그 후 궁중이 평정을 얻고 세상이 평온해졌다. 두 왕후가 폐비되어 임금의 주위가 쓸쓸해지자 다시 왕비를 고르고자 고심하고 있을 때였다. 하룻 저녁에는 임금님께서 꿈을 꾸시었는데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에게서 참깨 5되와 아욱씨 3되를 얻는 꿈이었다.

임금님은 이상히 여겨서 대신들을 불러 놓고 꿈을 해석해보라 하였다. 새로 대신이 된 최사전과 척준경이 말했다.

「깨는 임자(荏子)이니 임자(荏子)는 임(任)으로 통합니다. 임씨 왕비께서 왕자 다섯을 둘 꿈인가 합니다. 또 아욱은 황규(黃葵)로서 황규(皇揆)는 황규(黃葵)와 통하므로 황제의 도가 이 다섯 아들 가운데 세 아들을 의지해서 발전할 것 같습니다. 」

이리하여 천하에 임씨성 가진 왕후를 찾는데 나이와 품도가 임소저를 능가할 사람이 없어서 결국 임소저가 임금의 계비(繼妃)로 들어갔다. 그는 입궐하자마자 한 탯줄에서 다섯 왕자를 낳으니 장자 현(晛) 대령후 경(大零候 景) 왕자 충회(沖曦) 왕자 호(晧), 왕자 탁(晫)이 그들이다.

장자 현은 뒤에 의종(毅宗)임금님이 되고 왕자 호는 명종(明宗)이 되었으며 왕자 탁은 신종(神宗)이 되었다. 그런데 이 가운데 큰아들 의종이 지나치게 불사에 몰두하여 정치를 잘 살피지 않고 극심한 고통을 하였다.

왕이 되자마자 불사를 핑계하고 이궁(離宮)과 정자를 짓고 인조산을 만들고 연못을 파서 백성들의 노력과 고혈을 빼앗았다. 남편의 점심밥을 해대기 위해 머리털을 깎았던 중미정(衆美亭)의 애화며, 그 찬란한 집을 덮기 위해 정성들여 만든 기와 가운데는 국보급의 청기와가 모두 그때에 쏟아져 나왔다.

한편 이러한 궁전을 짓고 연희를 베풀 때마다 수 많은 기녀와 가무가 연속되는 가운데에 자연 발생적으로 동동곡(動動曲) 같은 노래가 생기게 되었고 제석원에서 시월 한 달 동안 불공을 드릴 때는 삼 만 승려의 반승이 이루어졌고 정월 이월에 나례 연등 시회 등을 할 때에는 평균 일만의 승려를 공양하였다.

어머니 임씨도 독실한 불자이기는 하지만 그 신행의차원이 아들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이었다. 왕 24년 8월 왕이 보현원에 이르렀을 때 정중부(鄭仲夫) 난이 일어난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어머니 왕후는 간곡히 타일렀다.

「불교는 중생을 위해서 존재하지 절이나 스님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훌륭한 스님을 공경하는 것은 우리가 하지 못한 일을 그분들이 다니시며 하시기 때문인데 매일같이 불사를 핑계하고 유흥에 힘쓴다면 이제 그 화가 임금과 부처님께 몰려 들것입니다. 」

그래도 임금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다. 오늘은 제석원에 나가고 내일은 명인전에서하고 모래는 영통사(靈通寺), 봉은사(奉恩寺), 법왕사(法王寺) 등으로 계속해서 유전하여 다니며 유흥연회를 쉴틈 없이 하였다.

한때 왕후는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정습명(鄭襲明)과 의논하여 폐위할 것도 의논하여 보았다. 그러나 전래로 병신이 되지 않고 망사(亡事)를 실천하지 않는 이상에야 그럴 수까지는 없어 마지막 충간(忠諫)을 하였다.

왕후 늘 목욕 재계하고 부처님께 발원한 뒤에 부처님께 커다란 영험을 보여 주실 것을 간원하였다 그리고 나와서 안들 앞으로 나갔다.

「상감, 그만 불사를 삼가시오. 토목불사 끝에는 반드시 유흥과 연회가 따르니 성덕을 손상할 염려가 있습니다. 」

「어머니께서도 불사를 좋아하시지 않습니까?」

「불사는 조용히 마음과 마음으로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

임금님은 벌컥 화를 내면서,

「그래서 태후께서는 나를 폐하려고까지 하신 것입니까? 그렇다면 나는 이 자리를 물려주고 멀리 절로 떠나겠소.」

「상감 삼가시오. 불사를 아주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연회불사와 토목불사는 오히려 백성들의 짐을 무겁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그런데도 왕은 용포를 벗어던지고 단 아래로 내려갔다. 임소저는 뛰어 내려가 그의 앞에 무릎을 끊고 하늘을 우러르며 간고하였다.

「제천신명과 선왕의 영혼이시여, 이 일을 증명하소서. 신첩은 불행하여 미망인으로서 다만 아들들의 여택을 입어서 여생을 보존코자 할 따름이온데 임금께서 모후의 마음을 아직까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괴롭습니다. 」

하고 눈물을 비오듯 흘리며 통곡하였다. 추밀원 정습명이 임금께 여쭈었다.

「상감, 태후를 부축하십시오. 임금님도 사람의 아들임에는 틀림없습니다. 」

임금은 어쩔 수 없이 어머님 앞에 나아가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손을 잡으려 하였다.

그때 갑자기,「우르릉 퉁탕」하고 천둥소리가 울리더니,

「와지 끈 뚝딱」벼락이 내리쳤다. 옆에 섰던 천년 고목이 그대로 부러져 내려앉았다.

임금님은 놀라 전각으로 들어갔다가 비로소 정신을 차려다시 어머니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고 빌었다.

「어머님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형식적인불사를 삼가하며 부처님의 깊은 뜻에 입각한 그러한 불사로써 중생을 이롭게 하겠습니다. 」

말이 끝나자 곧 비가 멎고 청천백일이 되었다.

다 이는 부처님의 신력으로 임소저의 원력에 감응한 바라고 사람들은 칭찬하였고 그의 품행을 사모하였다.

<高麗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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