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건너 국선을 구한 관세음보살

바다건너 국선을 구한 관세음보살

신라 서울 계림(鷄林, 지금의 경주)의 북악(北岳)을 금강령(金剛嶺)이라고 하는데, 이 산의 남쪽에 백율사(橋栗寺)가 있다.

이 백율사에 괸세음보살상이 모셔져 있는데,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매우 영이(靈異)함이 많았다.

혹은 중국의 신장(神匠)이 중생사의 관음상을 조성할 때 함께 조성하였다고도 전한다.

이 절의 법당 앞뜰의 돌 위에는 지금도 발자국이 남아 있는데, 전설로는 관음보살이 도리천에 올라갔다가 돌아와 법당으로 들어가면서 밟은 자국이라고도 하고, 또는 국선(國仙) 부례랑(夫禮郎)을 구해서 돌아올 때 밟은 자국이라고도 전해진다.

이 백율사의 관세음보살님이 신라의 국선(國仙) 부례랑(夫禮朗)을 멀리 오랑캐 땅에서 구해온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신라 효소왕(孝昭王)은 그 원년(692) 9월 7일에 대현(大玄) 살찬(벼슬이름)의 아들 부례왕을 받들어서 국선(國仙,화랑의 최고 우두머리)으로 삼았다.

국선 부례랑에게는 그 단원(郎徒)이 천명이나 되었으며. 그 중에서 안상(安常)이라는 스님 낭도가 언제나 국선을 가까이서 보살폈다.

그 이듬해(孝昭王 2년) 봄(3월)에 국선은 단원들을 거느리고 금란(金蘭, 금강산)으로 놀이를 갔다.

그들이 북명의 경제에 이르렀을 때, 북쪽 오랑캐들이 몰려와서 국선 부례랑을 납치하여 가버렸다.

이를 본 안상스님이 혼자서 국선을 구하고자 뒤쫓아 갔을 뿐 천명이나 되는 단원들은 모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만 동동 구르다가 되돌아왔다. 그때가 3월 열하루였다. 효소왕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며 말하였다.

「우리 아버님(神文王)께서 신령스러운 만파식적(萬液息笛)을 얻으셔서 나에게 전해주셨는데, 지금 거문고와 함께 내고(內庫)에 간직되어 있다. 나라 안의 모든 재앙을 없게 한다는 신령스러운 보물이 있는데도 어찌하여 국선이 갑자기 납치되는 불상사가 생기는가?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꼬.」

그 때, 마침 천존고(天尊庫, 즉 內庫)에 상서로운 구름이 덮혔다.

대왕이 또한 놀라서 알아보게 하였더니, 천존고 안에 있던 거문고와 만파식적의 두 보물이 없어진 것이었다. 효소왕의 놀라움은 더욱더 컸다.

어제는 국선을 잃었는데 이제 와서 또 거문고와 만파식적이 없어졌으니 기가 막힐 노릇 이였다.

왕은 곧 천존고를 지키는 관리(司庫史)다섯 사람을 옥에 가두었다.

다음달(4월)에는 전국에 널리 알려진 거문고와 만파식적 찾아주는 사람에게는 1년의 조세(租稅)해당되는 상을 내리겠다고 하였다.

그만큼 국가적으로 매우 심각한 사태였던 것이다.

그러한 비상사태 속에서도 국선의 소식과 거문고 및 만파식적의 행방은 알 길이 없었다.

그 때 국선 부례랑의 부모는 영험이 많다는 백율사의 관세음보살상 앞에서 정성스럽게 기원하고 있었다.

아들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여러 날 째 빌고 있었던 것이다.

대비 관세음보살의 신통력은 드디어 그 간절한 부모의 기원 앞에 기적처럼 나타났다.

5월 보름날 그 날 저녁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국선의 두 부모는 대비상 앞에서 정성스럽게 기원의 절을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탁자 위에서 무슨 물건이 놓여지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무심결에 그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들어 쳐다보았다.

그 향탁 위에는 거문고와 만파식적의 두 보물이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임금님이 현상금까지 내걸고 그토록 찾던 신령스러운 나라의 보물이 관세음보살상 앞의 향탁에 놓여져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눈을 의심하듯 크게 뜨고 한편 놀라면서 그 앞으로 가까이 다가서려고 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발걸음을 떼어 놓지 못하였고, 또 감탄으로 벌렸던 입을 다물지도 못하였다.

그 찰나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관음보살상의 뒤로부터 썩 나타났기 때문이다.

깜짝 놀란 두 사람 앞에 두 그림자가 다가섰다.

한 사람은 아들 부례랑이고 , 또 한 사람은 안상스님이었다.

그들의 반가움과 감격을 어찌 글과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있겠는가.

「얘야, 도대체 어찌 된 일이냐? 그동안어디에 있다가 어떻게 해서 여기에 와 있는 것이냐?」

반가운 마음으로 아들을 부둥켜안고 울며 뛰며 기뻐하였던 상봉의 흥분이 가라앉자, 자리에 앉으면서 부모가 아들에게 한 말이었다.

국선 부례랑이 그 부모에게 들려준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그날 오랑캐들에게 잡혀간 부례랑은 그 나라의 세력 있는 어느 부잣집의 목동이 되어, 대오라니(大烏羅尼)라고 하는 들판에서 가축을 치는 일을 하게 되었다.

어느 날 소 떼를 돌보고 있는 그의 앞에 한 스님이 나타났다.

어디서 왔는지 갑자기 그의 앞에 나타난 스님은 용모와 의표가 매우 단정하였다.

거문고와 젓대(笛)를 손에 든 그 스님은 부례랑을 위로하면서 물었다.

「고향이 그립지 많은가? 」

「왜 그립지 않겠습니까? 임금님과 부모님을 뵙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

간절한 눈으로 낮선 스님을 쳐다보면서 매달리자, 스님도 거절하지 못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그럼 나를 따라오게.」

그 스님의 말소리는 무례랑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는 듯했다.

그는 목동인 자신의 처지를 모두 팽개쳐 버리고 홀린 듯이 스님의 뒤를 따랐다.

바람처럼 날랜 발걸음으로 놓치지 않으려고 바싹 따라 걸었다.

드디어 어느 바닷가에 이르렀다.

거기에서 만상스님을 만났다.

두 사람이 반가워서 와락 끌어안고 기뻐할 겨를도 없었다.

「자. 빨리 바다를 건너야지! 」

그 스님은 갖고 있던 젓대를 두 쪽으로 나누어 부례랑과 안상을 각각 타게 하고는 자신은 거문고에 올라탔다.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바다를 건너고 또 이곳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그 스님은 바로 백율사의 관세음보살이었던 것이다.

부례랑과 안상을 구해 오기 위하여, 신비로운 나라 보물인 거문고와 만파식적을 잠깐 빌려서 가져갔던 것으로 볼 수가 있었다.

백율사에서는 급히 대궐에 사람들이 기쁜 사실을 임금님께 알렸다.

국선과 안상, 그리고 만파식적과 거문고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왕의 기쁨은 이루 형연할 수가 없었다.

곧 백율사에 사람을 보내어 국선 일행을 대궐로 맞이하여 오게 하였다.

거문고와 만파식적이 다시 천존고(天尊庫)의 제자리로 돌아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효소왕은 나라 안의 큰 경사로 삼았다.

그리하여 금과 은으로 쉰냥 무게의 그릇 다섯 가지 두벌과 장삼 가사 다섯 벌과 비단삼천 필과, 전당 일만경(頃)을 백율사에 헌납하여 관세음보살의 자비은덕에 보답하였다.

그리고는 나라 안에 크게 사면령을 내렸으며, 벼슬아치에게는 작의를 세급씩 올리고 백성들에게 3년의 조세를 탕감해 주었다.

백율사의 주지는 큰 절인 봉성사(奉聖寺)의 주지로 영전하게 하고, 부례랑을 대각간(大角干)으로 삼고 그 아버지는 태대각간으로 봉하였으며, 그 어머니는 사량부(沙梁部)의 경정궁주(鏡井宮主)로 봉하였다. 또 안상스님을 대통(大統)으로 삼았으며, 앞서 옥에 가두었던 고지기(司庫史) 다섯 사람을 사면해준 것은 물론이고 각기 작위를 5급씩 올려 주었다.

관세음보살님의 자비로운 신통한 묘력에 의하여 나라 안은 그와 같이 경사스러워졌고, 신라는 다시금 태평하게 되었다.

<三國遺事 卷3 塔像 4, 栢栗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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