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설아유월치차경(佛說阿惟越致遮經) 02. 상권-2
3. 봉법품(奉法品)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여래ㆍ지진(至眞)ㆍ등정각(等正覺)께서는 무슨 까닭에 보살이 법을 받들어 지니는 것을 찬탄하셨겠느냐? 보살은 불도(佛道)에 뜻을 두어 끝내 물러나지 않는 까닭에 각궤(覺軌:佛法)를 굳게 지니고 또렷이 분별해 알아서 법계(法界)를 벗어나지 않으며, 불가사의 한 경적(經籍)을 체득(逮得)하였고 총지(摠持)를 얻었으므로 늘 처하는 곳마다 동요함이 없으며, 법구(法句)를 따라서 일체의 의문을 물었느니라.
모든 법은 자연 그대로임을 깨달아 집착하지 않고 총지를 지니되 의지하지 않으며, 총지만을 따르거나 경본(經本)만 주장하거나 하지 않고 마음 속으로 항상 성인을 흠모하고 좋아하며, 도(道)를 공경하고 일체의 법에 대하여 받아들이는 바도 없고 법을 받아들여 행하지도 않기 때문에 곧 올바른 법을 연설하느니라.
마음을 잘 조복하여 행동거지가 안온하며 적연하고도 바른 법을 강설하며, 이렇게 법을 지니지만 의지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느니라.
모든 것은 자연 그대로여서 그 자체가 거룩한 도[聖道]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나니, 이런 이치를 획득하면 아예 잃어버리지도 않고 몸소 수행하며 몸이 항상 견고하게 머물러 세속은 머무를 곳이 아님을 아느니라.
무엇을 보살이 항상 관찰한다고 말하느냐 하면, 일찍이 이러한 것을 보지 않고 몸이 진리에 편안하게 머물며, 스스로 바른 법을 따르고 모든 경계는 평등한 것이어서 가고 옴이 없는 것이라는 이러한 견해를 내나니, 이것이 모든 불ㆍ보살께서 설법하신 것이니라. 이러한 진리를 체득하여 청정하고 때 없으면 일체법(一切法)은 합해지는 것도 없고 흩어지는 것도 아니라고 보리니, 모든 경전을 관찰해 보아도 홀연히 나타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니라.
그런 까닭에 이런 견해를 내지 않나니, 모든 법은 작용이나 조작이 없으므로 그러한 견해를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모든 법을 실체로 보지 않으면 가질 것도 없으며 법계는 허공과 같다는 이치를 깨달아 경적(經籍)을 연설하며, 모든 물질의 모양9)은 그대로여서 조롱하거나 희롱할 대상도 없고 아무런 형상도 없는 것이요 마음을 여의었으므로 마음도 없으며, 그 마음 역시 얻을 수도 없다고 아느니라.
가량 마음을 얻을 수 없다면 그것은 곧 도심(道心)으로서 오고 감이 없을 것이요 적연(寂然)한 마음으로 수행할 것을 강설하지만, 그 말 자체도 없는 것이어서 흠모하여 구할 바가 아니니라. 모든 법에 대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여 의지 할 대상이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에 기대지도 않고 법의 모양을 일으키지도 않느니라. 항상 경전(經典)만을 따르는 것이 곧 보살법으로 집착할 것도 없으며, 열반도 또한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에 그가 이런 이치를 설하여 밝게 나타내었느니라.
종성(種姓)이란 사모할 대상도 아니라는 이러한 견해를 내어 모든 종성을 버리며, 보살행을 체득했다지만 그 또한 얻을 법이 없으며 저 오고 가는 모든 것에 대하여 오고 감이 없다고 생각하고, 모든 지혜는 과거도 미래도 현재도 없는 것이라고 굳게 믿어서 동(動)하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으며, 물러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으며, 모든 법을 받들어 지니지만 급하게도 하지 않고 느리게도 하지 않는 이러한 것을 법을 지녀 보살도를 증득하였다고 말하느니라.
이미 성인의 수행법을 증득하였으나 그 또한 얻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면 이와 같은 보살대사가 되나니, 그것을 이름하여 법을 받든다고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곧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모든 부처님 법은
일찍이 물러난 적이 없나니
경(經)을 이와 같이 받들어 지니면
이것을 곧 법을 지녔다고 말하느니라.
모든 부처와 불법에 대해 강설하되
자연의 모습이 아니라는 생각 내지 말고
매우 깊어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
이것을 곧 법을 지녔다고 말하느니라.
일찍이 모든 세계를 헐뜯지 않고
불가사의한 법계에 대해
그 이치를 증득하여 이룩하면
그것이 곧 법을 지니는 것이니라.
법을 받들어 은근히 보호하고
모든 부처님께서 행하신 바에 대해
마음 속에 집착함 없으면
그것이 곧 법을 지니는 것이니라.
고집하여 나아가거나 후퇴함 없으면
모든 법은 자연 그대로이니
그 모든 경전에 집착하지 않으면
그것이 곧 법을 지니는 것이니라.
적멸(寂滅)에 머물지 않고
받들어 지녀 큰 자취 실천하며
저 경전을 따라서 순응하면
그것이 곧 법을 지니는 것이니라.
항상한 도로써 법신(法身)을 삼고
미묘한 말씀 흠모하여 구하며
게으른 마음 멀리 버리면
이것이 곧 법을 지니는 것이니라.
경을 들으면 받아 지녀
배우기를 생각하고 열심히 익히며
성품 어질고 편안한 경지에 노닐면
이것이 곧 법을 지니는 것이니라.
항상 담박하고 편안한 이치 강설하고
경을 지니되 집착하지 않으며
무상행(無想行)을 증득하여 이룩하면
이것이 곧 법을 지니는 것이니라.
견고한 마음으로 도에 머무르고
밝은 지혜로 머무름 없음을 수행하며
몸에 대하여 몸은 없는 것이라고 아나니
그의 견해 깊이가 이와 같다네.
이 몸은 공(空)한 것으로서
법계와 평등한 것임을 알아
감도 없고 옴도 없으면
몸의 모든 모양10) 분별한 것이니라.
모든 부처님과 보살께서
강설하신 법
이러한 경전(經典:法) 널리 체득하면
이것이 곧 법을 지니는 것이니라.
모든 법 작용함 없고
저 세계도 매우 청정하니
이러한 경전 받들게 되면
이것이 곧 법을 지니는 것이니라.
모든 경전 자세히 살펴보면
보이던 것이라 하는 것도 볼 수 없나니
만약 모든 법 볼 수 없다면
저것은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니라.
이 모든 법계는 모두 공(空)한 것
곧 법계에 대해 강설하나니
스스로 모든 모양 여의면
형상도 없어지고 조롱하거나 희롱할 대상도 없으리라.
마음에 모든 존재 버리면
뜻에도 얻을 것이 없나니
가령 마음에 체득할 것 없으면
이런 생각 가장 훌륭하니라.
뜻하는 바에 마음 두지 않고
법의 조용하고 고요한 이치 강설하지만
그 말은 없는 것이라서 집착 않아야
이 마음 진정 존귀하리라.
능히 이런 법 받들고
일어나는 바에 집착 없으며
모든 세계에 의지하지 않으면
이것이 곧 법을 지니는 것이니라.
보살이 받드는 법
이와 같아서 경적(經籍)과 상응하나니
거론할 대상 없는 것에 의지하지 않고
작용 없음을 나타내 보이네.
이와 같이 훌륭한 가르침 행하고
저 모든 종성(種姓)을 따르며
이런 이치 증득하였기 때문에
그 종성을 찬양하였느니라.
이러한 종성으로 태어나면
보살이 될 수 있다 말하리니
능히 이 총지(摠持)를 따르면
그것은 곧 법을 지니는 것이니라.
깨달아 모든 법 보지 않으면
모두가 나아갈 곳 없으리니
만약 마음 치달려 이르게 되면
이것은 올바른 법 되지 못하리.
작용하는 법에 이르러도 나아가지 않고
모든 법 깨달아 알며
총지(摠持)를 분별하여 깨달으면
조작도 없고 동요하지도 않으리라.
따르지 않아야 할 법을 버리지 못하면
그것은 곧 법을 만드는 것이라네.
늘어남도 없고 줄어듦도 없는
총지(摠持)법에 대해 즐거워해야 하리.
아난아, 나는 그런 까닭에
보살행(菩薩行)을 연설하여
미묘한 도 체득하게 하나니
이것이 곧 모든 경을 찬양함이니라.
아난아, 나는 그런 까닭에
법 받드는 이를 노래로 칭송하나니
중생들로 하여금 현묘한 도 생각게 하여
이러한 무리들을 개도(開導)하느니라.
이렇게 무수한 법 항복 받음은
보살이 찬탄하는 바로서
훌륭한 방편으로 영원히 안온하게 하므로
이 경을 찬탄하는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이런 까닭에 여래(如來)ㆍ지진(至眞)ㆍ등정각(等正覺)께서 보살의 총지법(摠持法)을 찬양하는 것이니, 이렇게 이치를 나타내 보이는 것도 또한 훌륭한 방편이 되느니라.”
4. 팔등품(八等品)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여래ㆍ지진ㆍ등정각께서는 무슨 까닭에 보살의 8등(等:八正道)법을 찬양하는가?
이 보살은 여덟 가지 삿된 것을 멀리하고 여덟 가지 해탈(解脫)법을 닦아 성취하지만 집착하는 것이 없고, 여덟 가지 정도[八正道]에 의지하지도 않느니라. 범부법(凡夫法)을 초월하여 도의(道義)에 머무르며, 중정(中正)을 이룩하여 범속(凡俗)을 초월하며, 도혜(道惠)에 머물기를 원하여 다른 길을 보지 않으며, 삿된 길을 벗어나고 항상 바른 견해에 머무르며, 평등한 자취[平等跡:平等道]14)를 증득하고 몸에 탐착하는 것을 여의었으며, 도의(道義:菩提)에 머물러 부처님의 몸을 성취하기를 원하며, 중생이라는 생각을 제거하고 초월하여 언제나 부처님 모습만을 생각하느니라.
마음 속으로 일체 법은 평등하다고 생각하고 중생이라고 집착하는 것을 멀리 하며, 항상 치우침이 없는 데 머물러서 모든 법을 다 끊어버리나니, 왜냐 하면 어떠한 법도 얻을 수 없으므로 몸이 숭상할 만한 힘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니라.
세속의 서적을 여의고 출세간의 경전[度世典]을 사모하며, 법계(法界)를 증득하거나 도법(道法)을 체득하거나 하지도 않고, 또한 세속을 여의지도 않으며, 있다 없다 하는 이치를 놓아버리고 평이법(平夷法:平等法)을 따라 닦으며, 모양15)에 집착하는 것을 버리고 끊으며, 과거ㆍ미래ㆍ현재에 대해서도 마음으로 다름이 없다고 생각하며, 도의(道意:求無上之道)에 대해서도 얻을 수 없는 것이라고 여기나니, 왜냐 하면 이미 일체의 법은 평등한 것이라고 알아서 두루한 지혜[普惠]를 따르고 닦기 때문이니라.독한 불길이나 칼ㆍ몽둥이로도 몸을 위태롭게 할 수 없느니라.
모든 세계를 다 버리고 항상 불국토에 태어나며, 여러 갈래의 길을 여의지는 못했으나 오고 감이 없는 데에 머무르며, 여러 갈래의 길에 오고 가더라도 아주 편안한 까닭에 보살도(菩薩道)에 머무르지도 않나니, 왜냐하면 부처님의 도는 공(空)하기 때문이니라.
그런 까닭에 머무를 곳이라는 것조차 없어 머무르지도 않기에, 칼날이 몸을 향해 찌르지도 못하고 또한 해칠 수도 없으니, 그러한 것을 편안한 경지를 획득하였다고 말하느니라.
이러한 수행법을 체득하면 무학(無學)이나 불학(不學)도 구할 바가 아니며, 성현(聖賢)의 경지를 얻지 못했다 하더라도 아예 마음으로 사모하지도 않나니, 이런 까닭에 칼로도 몸을 해칠 수 없고 조그만 동요도 없느니라.
일체의 도(道)는 공한 것이라는 공혜(空惠)를 분별하여 알기 때문에 칼로도 해치지 못하느니라.
넓고 큰 자비로써 중생들에게 베풀어 적정(寂定)한 경계를 얻고 담박하고 편안한 경계에 이르게 하며, 널리 불쌍히 여기고 자비16)를 베풀어 진에(瞋恚)를 버리게 하나니, 그렇게 자비를 베푸는 것은 밝은 지혜를 일으키게 하고 자비로써 세상을 교화하여 큰 자비를 성취하게 하려는 것이니, 중생의 처소는 얻을 수 없고 자비를 원만하게 갖추기 때문에 칼로도 상해할 수 없느니라.
욕계(欲界)ㆍ색계(色界)ㆍ무색계(無色界)를 평등하다고 알고 법계(法界)도 평등하다고 알며, 모든 세계는 평등하고 도(道)에도 약간의 그 무엇이 없다는 이치를 알면, 식념(識念)을 일으키지 않고 진에(瞋恚)도 내지 않으며, 희롱함을 여의고 적연하여 음성이 없으리라.
법계는 이와 같아서 모든 존재를 초월하나니, 보살이 이러한 수행으로써 전심전력한다면 일체의 음성이 이르는 곳마다 모든 일에 집착하는 바가 없어서 처음과 끝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느니라.
중생들이 나아간다[趣]고 하는 것은 다만 음성(音聲)에 불과할 뿐이니,이러한 것들을 분명히 깨달아 법을 강성하여 중생을 교화하는 이는 있다 없다 하는 말과 생각으로 그 말을 일으키지 않고 나라는 생각을 버리며 모든 음성을 초월하되 초월했다는 생각까지도 없느니라.
이러한 가르침을 체득하여 일체법(一切法)을 이해하면 다만 음성에 불과할 뿐이므로 또한 법을 얻을 수도 없고 해탈함도 없으리니, 이런 것을 여덟 가지 평등이라고 말하는데 과거에 모든 음성에 대하여 흠모하거나 집착하지 않았느니라.”
부처님께서 그때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여덟 가지 평등에 머물고
여덟 가지 해탈을 체득하되
그 여덟 가지에 집착하지 않으면
이것을 여덟 가지 평등이라 하느니라.
여덟 가지 범부행(凡夫行)을 초월하고
바른 도리[正義]17)에 머물렀으나
중간혜(中間慧)를 보지 않으면
이것을 여덟 가지 평등이라 하느니라.
세속 범부의 행[俗夫行]을 초월하고
불도(佛道)에 머물렀으나
여기에 얻을 것이 없음을 깨달으면
이것을 여덟 가지 평등이라고 하느니라.
수많은 사견(邪見) 멀리 여의고
바른 견해를 따라 수행하여
평등도(平等道)를 성취하면
이것을 여덟 가지 평등이라 하느니라.
자신의 몸 탐냄을 없애고
바르고 거룩한 도에 머물러
부처님의 몸 성취하여 증득하면
이것을 여덟 가지 평등이라 하느니라.
중생이라는 생각 버리고
항상 부처님의 수행법만을 닦아
나니 남이니 하는 마음 평등해지면
이것을 여덟 가지 평등이라 하느니라.
중생이라는 생각을 초월하고
무소처(無所處:涅槃)에 머물며
모든 법에서 벗어나면
이것을 여덟 가지 평등이라고 하느니라.
세간법[俗法]을 멀리 여의고
성인의 바른 가르침을 받들어 닦으며
적연(寂然)한 이치를 성취하면
이것을 여덟 가지 평등이라고 하느니라.
세속의 법을 버려야 하고
부처님의 도도 또한 이와 같이 해야 하되
이 법에도 얻을 바가 없으면
이것을 여덟 가지 평등이라고 하느니라.
근본은 하나뿐이라고 말하고
두개의 근본이 없다 말하는
이와 같은 생각을 떨쳐버리면
이것을 여덟 가지 평등이라고 하느니라.
중간에도 처하지 아니하고
단착(斷着:斷常)의 견해도 버려
도해(道慧)가 평등하게 되면
이것을 여덟 가지 평등이라고 하느니라.
과거의 마음을 얻지도 않고
미래도 또한 이와 같으며
현재에 대해서도 평등하면
이것을 여덟 가지 평등이라고 하느니라.
애초에 마음이 비롯되는 바가 없기 때문에
도의(道意:菩提心)을 낸다고 말하지만
이 마음은 얻을 수도 없는 것이니
무슨 인연으로 도를 성취할 수 있으리.
집착할 것이 없는 데로 들어가지만
성의의 경지는 획득할 수 없으니
이 때문에 칼과 독으로도
해칠 수 없다고 말하느니라.
다섯 갈래의 길에서
수많은 모양 비롯됨을 해탈하고
가고 옴을 원만하게 갖추면
이런 까닭에 속임이 없다 말하느니라.
도를 버리고 주선(周旋)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건 음성일 뿐이니
모든 음성에 대한 집착 다 버리면
이런 까닭에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다 하네.
비롯되는 바를 얻지 않고
따라 오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
가고 옴은 오직 음성[音身]일 뿐18)이라고
배우는 이에게만 권유하였네.
교화하여 안온하게 한다고 말하지만
그 편안하다는 것도 또한 공(空)한 것이니
마땅히 이와 같이 배우면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보살이 수행하고 익히는
이와 같은 지혜를 배우면서
이 모든 것 끊지 않으면
이것을 스스로 속이지 않는다고 말하느니라.
자기 자신에 대하여 집착하지 않으면
가령 예리한 칼날이라 하더라도
몸을 가해할 수 없으리니
동요할 필요가 없느니라.
모든 중생에게 널리 자비 베풀고
큰 슬픔으로 도 닦기를 바라며
성내고 해치려는 마음 없애면
예리한 칼로도 가해할 수 없느니라.
가령 해치려는 자가 있을지라도
제 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공하여 없는 것
불도를 닦아 증득하면
칼이라 한들 어찌 상해할 수 있으랴.
담연(澹然)이란 글귀의 이치를 체득하고
모든 악한 세계 버리면
일체의 재앙 다 소멸되리니
칼로도 능히 해칠 수 없으리라.
밝은 지혜 성취하고
성인의 경지 통달하여 부족함이 없으며
불도를 체득하여 밝게 드날리면
그 때문에 칼로도 해치지 못하리라.
욕계와 색계
무색계를 3계라 하거니와
이 3계를 동등하게 생각하면
이런 까닭에 스스로를 속이지 않느니라.
평등한 종성으로 정각 이루고
이름을 다르다고 보지 않으면
쌓임[陰] 없거늘 어찌 다투랴.
청정하여 조롱과 희롱 멀리 여의리라.
이렇게 평등한 자취에 들었으므로
보살이라 말하네.
만약 음성에 집착하는 이라면
다섯 갈래 세계를 여읠 수 없네.
비록 지극한 법계를 말하고
갈 곳도 없다고 강설하더라도
머무르지 않는 법인(法忍)을 체득해야
여덟 가지 평등이라 하느니라.
여러 가지 소리를 분별하여 알고
조용하고 고요한 법 강설하며
이름을 있지 않다는 것까지 기억하지 않으면
이것을 여덟 가지 평등이라 하느니라.
일체의 음성 제거해 버리고
음성 없는 세계를 증득하여
모든 소리에 집착하지 않으면
이것을 여덟 가지 평등이라 하느니라.
소리로 인하여 모든 법 깨닫고
일체법은 자연 그대로라고 알면
모든 법엔 이름 없으니
해탈 있음도 볼 수 없으리라.
아난아, 나는 이런 까닭에
여덟 가지 바르고 평등함을 찬양하나니
이 말을 듣고 그런 경지에 다다를지라도
그 또한 얻을 것이 없느니라.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여래ㆍ지진ㆍ등정각께서는 보살이 여덟 가지 평등에 대하여 연설하는 것을 찬탄하고 아름답게 여기나니, 이런 설법을 듣고 나아가게 하는 것도 훌륭한 방편이 되느니라.”
5. 도적품(道跡品)
부처님께서 다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여래께서는 무엇 때문에 보살에게 도적(道跡:須陀洹)을 말씀하셨는가?
궤적(軌跡)이 흘러 통해서 불심(佛心)에 이르나니, 보살이 이에 머물러서 마음을 일으키지만 영원히 머무는 곳도 없고 나아가지도 게으르지도 않으며, 모든 법을 초월하여 부처의 흐름[佛流:佛海]에 이르며, 인혜(仁慧)에 집착하지 않고 법에 의지하지 않으며, 집착함이 없는 수행을 하되 머무는 처소도 없어서 미요한 행[妙行]을 원만하게 구족하고 성인의 발자취를 획득하느니라.
보살은 정진하여 그 힘이 견고하고 강해지며, 마음은 자비롭고 인욕을 행하며 일찍이 게으르지 않느니라.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미묘한 도를 흠모하여 구하며,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법을 따르되 성인의 행적에 집착하지 않고 또한 머무르는 곳도 없느니라.
이 도에 뜻을 두고 모든 법을 구하지만 그 찾는 것을 영원히 얻을 수 없고 일찍이 동요함도 없느니라. 비록 도(道)에 머물러서 성인의 생사(生死)를 헤아려보지만, 부처님의 지혜는 평등하여 갖가지 즐거움을 버리면 모든 음개(陰蓋)도 평등해지느니라.
일체의 몸에 대한 욕탐과 사견(邪見)을 제거하여 없애고 부처님을 관찰하여 부지런히 수행하면 그러한 정진을 살펴서 성인의 법을 보느니라. 여러 가지 생각을 모두 제거하고 나라는 집착에서 벗어나는 이러한 것을 도적(道跡:須陀洹)이라고 하느니라.
부처님의 길에서 무위(無爲)의 깨달음을 획득하더라도 집착하지 않고, 성인의 지혜와 부처님의 금계(禁戒)를 의심하지 않으며, 세속에 기대지 않고 그 계(戒)를 보지 않나니, 볼 수가 없으므로 계를 구하지도 않느니라.
특별히 흠모함이 없고 세 가지 번뇌[三結]를 제거하여 없애며, 바로 3계에 머물지만 마침내 크게 편안함을 얻으며, 중생의 생각을 보호하되 기대지도 않고 따르지도 않느니라. 일체의 집착을 버리고 마침내 부처님의 도를 얻으며, 조용하고 고요한 자취를 이루고 신명(身命)에 집착하지 않으며,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보시하면서도 아끼지 않으며, 여러 감각기관[諸根]이 항상 기뻐하여 성내는 기색이 없어지고 성인의 수행을 따르고 닦으며, 비록 은혜를 베풀되 조금도 아끼지 않고 보시하여 중생들을 장애에서 구원하며, 이미 해탈을 하였으면서도 무위(無爲)에 머물지 않고 일체의 생각을 초월하느니라.
무념법(無念法)을 일으켜 중생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지혜를 체득하며, 갖가지 모임[會]을 보고도 두려워하지 않고 적멸을 논하여 청정한 불도(佛道)를 이룩하며, 여러 가지 어려움을 초월하고 생사(生死)를 두려워하지 않느니라.
왜냐 하면 담박하고 편안한 법[澹然法]을 체득하여 더러운 티가 없고 성인의 교화로써 미묘하고 안락한 데 머물러 오고 감이 없음을 알고 중생의 생각을 없애며, 다만 바른 도를 밝히고 청정한 수행에만 마음을 두느니라.”
저 도적(道跡)에 대하여 강설하시니
부처와 같이 거룩하고 부사의(不思議)하네.
갖가지를 헤아려 머무는 이는
곧 도를 지닐 수 있으리라.
성인의 지혜 가장 편안하여
갖가지 생각의 그물에 의지하지 않고
공적(空寂)하여 머무름 없으나
거기에서도 얻을 것은 없다네.
이 도를 증득한 이
보살의 뜻 굳고 강하여
오직 이 성인의 가르침에만 나아가니
세상에서 존경받는 최상의 경지라네.
도에 뜻을 두어 탐냄 없고
마음엔 항상 큰 지혜만 구하나니
이런 까닭에 도적(道跡)을 성취하여
기대지도 않고 집착하는 것도 없느니라.
이른바 생사(生死)의 생각이란
부처님의 생각과 다름 없으니
바르고 평등함을 원만히 갖추면
이것을 도적을 이루었다 말하리라.
모든 음개(陰蓋)는 없는 것이라
도법(道法)에 대해 연설하면
이런 까닭으로 일체를 제거하게 되나니
이를 깨달으면 도적이라 하네.
중생은 모든 몸에 의지하나
마음을 일으켜 불도(佛道)를 관찰하면
그 의지(意志)로 살피는 것은
항상 성인의 길을 보려함일세.
몸은 본시 번뇌[結]을 일으키고
내가 있다는 흉하고 위험한 생각을 일으키나니
그런 까닭에 진애(塵埃) 없애고
부처님 도에 집착하지 않아야 하리.
처음 발심할 때 의심을 품어
부처의 경지 증득 못하지나 않을까 했을지라도
이런 의심 풀어버리고
부처님 도에 바르게 머물러야 하네.
가령 계(戒)에 대해서나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금계에 대해 알고 있을지라도
모든 계율에 대한 생각 떨쳐버려야 하고
금계를 따르고 따르지 않음도 없어야 하리.
세 가지 번뇌[結] 뛰어넘고
3계(界)에 평등하게 머물러
부처님의 도 성취하고
중생의 생각 분별해 알아야 하네.
공(空)을 닦아 궤적(軌跡) 밝히고
큰 지혜 구하기 원하며
성인의 조용하고 고요한 경지 생각하면서도
부처님 도에 집착하지 않아야 하네.
항상 버릴 마음으로 보시를 하고
전에의 마음 없으면
이런 까닭에 신명(身命)을 아끼지 않고
도에 뜻을 두어 방일(放逸)하지 않네.
일체를 즐거워하며 성내지 않고
수많은 번뇌와 근심에서 중생 구제하면
이런 까닭에 도적(道跡)이라 말하나니
최상의 길에 처하여 머무르리라.
일찍이 모든 생각 일으키지 않고
마땅히 집착 없음을 익혀야 하나니
이런 수행 마치면 두려움도 없고
금지함이 없는 계율에 노닐지 않네.
만약 모든 경적(經籍) 익히고
훌륭한 방편으로 모든 구하는 이에게 보시하며
갖가지 음향(音響) 깨달아 알면
세상에 처해서도 두려울 게 없느니라.
가령 대중이 모인 곳에 이르러서도
모든 어려움 없으며
문득 담연법(澹然法)을 제창하고
성인의 도를 청정하게 하네.
잠시 중생이란 생각 일으켰더라도
자연행(自然行)을 깨달으면
억지로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수많은 어려움과 두려움을 버릴 수 있으리라.
만약 온갖 근심과 해로움 모두 버리고
문득 처음부터 끝까지 두려움 없으며
청정 그대로의 도 체득하면
번뇌 여의고 최상의 경지에 안주(安住)하리라.
악한 세계 깨달아 쉬어버리면
이런 까닭에 두려움 없나니
평등하게 성인의 경지에 올라
도의 은혜 여의지 않으리.
이것은 곧 보살법으로서
도적(道跡)의 일 나타내 보이나니
게으르고 하열한 사람들 때문에
그들을 이롭게 인도하기 위해 설하였노라.
미묘하고 훌륭한 방편으로
불성(佛聖)의 도를 강론하노니
보살의 경지에 들어가려는 이를 위하여
이 법을 설하여 인도하노라.
도사(導師)께서 연설하신 법
언제나 훌륭한 방편에 부합되네.
본행(本行) 또한 이와 같아서
불도를 생각하고 흠모한다네.
아난아, 나는 이런 까닭에
도적에 대하여 분별하여 설하였으니
어둡고 뜻이 막힌 이들은
깊이 생각하여 이와 같이 구하라.
말해 주어도 알지 못하고
어리석고 둔하여 마음이 어두운 중생
지혜와 정진을 비방하나니
깊고 중요한 이치 들을지어다.
아난아, 나는 이런 까닭에
도적을 찬탄하고 아름답게 여기나니
가령 보살까지도 없는 것이라는 이치를 깨달으면
이런 무리는 능히 지혜를 증득하리라.
무수한 백천 가지 경전으로
도적법 가르쳐 교화하나니
법을 실천하는 음성으로
부처님의 도 밝게 나타내리라.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여래ㆍ지진(至眞)ㆍ등정각께서 밝게 빛나는 보살을 위하여 도적(道跡)에 대하여 말씀하셨으니, 마땅히 이 이치를 알면 그것이 훌륭한 방편이 되느니라.”
6. 왕래품(往來品)
부처님께서 다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무슨 까닭에 여래께서는 보살을 왕래(往來:斯陀含)라고 말씀하셨는가?
이에 보살은 불도에 들어가되 부처님의 지혜는 불가사의하므로 마음 속으로 성각(聖覺)의 한량없는 인연을 구하느니라.
여러 가지 시끄러움을 조작해내지 않고 큰 도를 성취하여, 그 지혜로써 모든 인연을 끊고 부처님의 밝은 지혜를 흠모하여 찾느니라. 일체의 선정을 초월한 어지럽지 않은 선정[不亂禪:金剛三昧]을 구하고 모든 진애(塵埃:煩惱)를 버리며 나아가 모든 법은 부처님의 경전과 평등하다는 이치를 체득하며 일체의 경에 대해 깨닫고 오직 이 이치만을 구하되, 여래께서 획득하신 도덕의 밝음과 같아서 중생들을 일찍이 동요하게 하거나 바뀌어 변하게 하지도 않으며, 중생들이 마음이 닫히고 뜻이 막혀서 갖가지 괴로움과 걱정을 만나 법계의 경전에 대해 깨닫지 못함을 염려하여 그들로 하여금 불도를 흠모하고 구하여 이 지혜에 머무르게 하느니라.
대명(大明)ㆍ근(根)ㆍ역(力)ㆍ각의(覺意)ㆍ해탈문(解脫門)ㆍ정수(正受:三昧)에 뜻을 두어 이러한 이치를 분별해 알고 난 뒤에, 내 이 몸을 어떻게 해야 중생들을 개화(開化)시켜 그들로 하여금 불도를 흠모하게 할까하고 생각하느니라.
언제나 이러한 밝음으로써 도량(道場)을 권유하고 교화하여 불안(佛眼)을 구하고 마음을 가린 음개(陰蓋)를 없애나니, 만약 바른 관찰에 들어가서 세간을 인도하여 이롭게 하면 뜻한 바 이러한 지혜의 원인은 모든 성인들 중에서도 최상이 될 것이니라.
그런데 이러한 지혜를 깨달아 알려고 하지 않음은, 모든 법이 돌아갈 바인 그 지혜는 얻을 수 없는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이니, 이러한 까닭에 성인은 중생들로 하여금 모든 법 가운데 머무르기를 구하게 하지도 않고 이 모든 지혜에 대해서도 온갖 법은 머무르는 곳이 없음을 깨닫게 하느니라.
그러므로 미래에 중생계가 최상의 경지를 구하되 생각 없음을 흠모하는 것을 보고, 저 세계는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오고 가는 것도 아니니 중생이 성취한다 하더라도 가는 것이기도 하고 또한 가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아느니라.
중생을 인도하여 교화하되 중생의 처소를 깨달아 알아서 중생들로 하여금 이러한 이치를 분별하여 알게 하며, 그 가르침을 따라 이 모든 법을 깨닫게 하거니와 이러한 일체 중생은 모두 법계에 머무르지만 살펴보면 공한 것이어서 볼 수 없느니라.
법계를 평등하게 받아들이면 모든 경전(經典)도 평등하다고 깨닫게 되어 큰 도를 관찰하되 부처님의 거룩한 지혜로써 중생은 얻을 수도 없는 것이요 중생의 도를 깨달아 알 수도 없다는 이와 같은 모습을 구하느니라.
얻을 수 없는 지혜란 때[垢]와 먼지를 여의기 때문에 그 지혜는 처하지 않는 곳이 없느니라. 저 머무는 바 없는 지혜로써 크고 밝은 법을 구하지만 성인을 볼 수 없으니, 이 지혜 가운데 크고 밝은 지혜라고 하며, 보살은 수행하여 이런 것을 얻어 오기[來]를 구하기 때문에 이것을 왕래(往來:斯陀含)라고 하느니라.”
이때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이 지혜는 오고 감이 있는 것으로
부처님의 지혜는 헤아리기 어려워
이런 까닭에 왕래(往來)라고 말하나니
마음 속으로 부처님의 도를 구하느니라.
인연(因緣) 많은 중생을 인도하고 교화하여
부처님의 길[佛路:菩提道] 성취했더라도
이 일은 지혜에 순응하는 것이니
흠모하여 구하며 다시는 돌아가지 말아야 하네.
일체의 선(禪) 의지하지 않고도
모든 번뇌[塵埈]를 소멸시킨다는
이러한 중생들 구제하기 위하여
왕래(往來)의 과업 원만히 성취했네.
불경(佛經)은 평등한 법
중생의 모습 없음을 분별해 알고
여여하여 본래 없는 것임을 밝게 깨달으니
그런 까닭에 왕반(往返:斯陀含)이라 말하네.
부처님 법 획득한 이는
일체혜(一切慧:一切智)를 통달해 깨달으니
나 또한 이 법을 획득하기 위해
머무를 곳 구하고자 하네.
일찍이 중생의 세계와
모든 법계에 대해 집착하고 동요함이 없었으니
그런 까닭에 왕래라고 말하지만
돌아가 머무를 곳도 가까이하지 않네.
무수히 많은 중생들이
지혜가 적어 이미 환난 만날까 염려하기에
이 지혜에 편안하게 머물러서
부처님의 큰 도를 구하게 하려 하네.
근(根)과 역(力)과 각의(覺意)와
세 가지 해탈과 삼매를 강설하여
이 이치를 분별해 밝힌 후에
부처님의 거룩한 도를 구하네.
도량(道場:菩提道)을 흠모하는 것은
과거의 모든 부처님께서도 행하신 것이니
그런 까닭에 왕래를 성취하여
큰 성인의 경지에 머무셨네.
자비와 연민의 눈[慈愍眼]을 흠모하고 즐거워하니
부처님 지혜의 눈은 부사의한 것
그런 까닭에 왕래과(往來果) 성취하고
부처님 큰 도를 흠모한다네.
모든 부처님의 거룩한 구함
세존의 미묘한 이치라서
스스로 이 심오한 지혜에 마음 두나니
일체지(一切智)는 참으로 최고의 경지라네.
밝은 지혜로 깨닫는 것이고
일체의 법이 돌아갈 곳이지만
그 지혜는 얻을 수도 없고
또한 그것으로 도를 구할 수도 없느니라.
수없이 많은 중생을 제도하여
최상의 지혜에 머물게 하나니
이런 까닭에 왕래(往來:斯陀含)가 되어
와서 구하는 것이 있느니라.
와서 부처님 세계 자세히 보건대
중생의 세계는 부사의하니
그런 까닭에 왕래의 과업 이루어
저기에서 중생 구원한다네.
중생의 세계 자세히 살펴보면
구하여도 얻을 수 없는 것
그런 까닭에 왕래의 과업 이루어
마음 속으로 법계를 흠모한다네.
나아갈 바 없는 중생과
모든 중생의 세계
만약 저곳에 대해 밝게 깨달아 알면
노니는 바에 따라 분별하여 알 수 있으리.
모든 법을 자세히 관찰하면
그 법은 보려 해도 나타나지 않네.
항상 일심으로 선정에 들어
불대성(佛大聖)의 도를 구하네.
이와 같은 미묘한 지혜는
때 없이 청정한 것으로
분별해야 할 바를 밝게 알지만
그 지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니라.
보살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
중생을 인도하고 교화함이니
저렇게 밝은 지혜 얻었으면서
무슨 인연으로 여기에 왔는가.
아난아, 나는 이런 까닭에
왕래(往來)에 대하여 강론했지만
지혜가 적은 중생들은
망상으로 이를 보는구나.
아난아, 나는 이런 까닭에
왕래에 대하여 강설하여
정진할 마음 가진 중생들로 하여금
곧 이 법을 밝게 깨닫게 하느니라.
덕이 있는 사람은 분별력 있어서
심오하고 미묘한 이치 아나니
이러한 덕을 획득할 수만 있으면
속히 대도(大道)를 성취할 수 있으리라.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