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설마하연보엄경(佛說摩訶衍寶嚴經)

불설마하연보엄경(佛說摩訶衍寶嚴經)

실역인명(失譯人名)변각성 번역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 때에 부처님이 라아자그리하성[王舍城] 그리드라쿠아타[耆闍崛]산중에 노시는데 위대한 비구 대중 8천 사람과 함께 하셨다. 봘 6천 사람도 여러 부처님 국토로부터 와서 이곳에 모이였으니, 모두 위 없는 바르고 참된 도에 뜻을 둔 이들이었다.

그 때에 부처님은 존자(尊者) 대가섭(大迦葉)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이 네 가지 법이 있어서 반야바라밀을 잃나니 무엇이 넷이 되느냐. 첫째는 법을 존중하지 않고 법사(法師)를 공경하지 아니함이요, 둘째는 법사가 된 자로서 법을 아끼고 인색함이요, 셋째는 법을 얻고 싶어하는 자에게 법에 장애를 만들어서 꾸짖고 업신여겨 설법해 주지 아니함이요, 넷째는 거만하고 높은 체하여 스스로 위대하다 칭찬하고 남을 헐뜯음이니, 가섭아, 이것이 보살의 네 가지 법이 있어 반야바라밀을 잃는 것이니라.

다시 가섭아, 보살이 네 가지 법이 있어 반야바라밀을 얻나니 무엇이 네 가지냐. 첫째는 법을 존중히 하고 법사를 공경함이요, 둘째는 법을 듣는대로 널리 남을 위하여 말해주되 마음에 애착이 없고 또 구하는 바도 얻으며 반야바라밀을 위해서는 일체 재물을 버리며, 많은 학문을 구하되 머리에 불타는 것을 끄는 것 같이함이요, 셋째는 듣고서 받아 지님이요, 넷째는 법을 행하고 말에 집착하지 않음이니, 가섭아, 이것이 보살의 네 가지 법이 있어 반야바라밀을 얻는 것이니라.

다시 가섭아, 보살이 네 가지 법을 성취하면 보살의 마음을 망실하리니, 무엇이 넷이 되느냐. 첫째는 스승과 좋은 이와 장로(長老)를 속임이요, 둘째는 남이 나쁜 일이 없는데도 범한바 있다고 말함이요, 셋째는 대승 법을 헐뜯고 비방함이요, 넷째는 아첨과 허위인 마음에서 지극한 정성이 없음이니, 가섭아, 이것이 보살의 네 가지 법을 성취하면 보살의 마음을 망실함인 것이니라.

다시 가섭아, 보살이 네 가지 법을 성취하면 일체 처음 나서부터 도량에 이르기까지 보살의 마음이 항상 앞에 나타나 있어서 마침내 망실하지 않으리니 무엇이 넷이 되느냐. 첫째는 차라리 죽을지언정 마침내 거짓말 하지 않음이요, 둘째는 일체 보살에게 세존(世尊)같은 생각을 하여 4방에서 칭찬하고 말함이요, 셋째는 아첨과 허위가 없고 그 마음이 지극히 진실함이요, 넷째는 소승(小乘)을 좋아하지 않음이니, 가섭아, 이것이 보살의 네 가지 법을 성취하면 일체 처음 나서부터 도량에 이르기까지 보살의 마음이 항상 앞에 나타나 있어서 마침내 망실(忘失)하지 않는 것이니라.

다시 가섭아, 보살이 네 가지 법을 성취하면 생긴 선법(善法)이 곧 없어져서 선법이 중장하지 못하리니 무엇이 넷이 되느냐. 첫째는 높은 체하고 교만하여 세속 경전을 배움이요, 둘째는 재물을 탐하여 자주 왕궁에 출입함이요, 셋째는 질투하고 비방함이요, 넷째는 일찍이 듣지 못한 경을 들으면 비방함이니 가섭아, 이것이 보살의 네 가지 법을 성취하면 생긴 선법이 곧 없어지고 선법이 증장하지 못한 것이니라.

다시 가섭아, 보살이 네 가지 법을 성취하면 선법이 쇠퇴하지 않고 선법이 증장하리니, 무엇이 넷이 되느냐. 첫째는 선법 듣기를 좋아하고 선법 아닌 것은 듣기를 좋아하지 않으며 6도(度)가 다함 없는 보살장(藏)을 좋아함이요, 둘째는 하심하여 중생에게 거만하지 아니함이요, 셋째는 법으로써 만족을 알고 사뙴과 아만을 버리며 남의 범한 것이거나 범하지 아니한 것인 그 허물을 말하지 않고 남의 과오와 실수의 단점을 보지 않음이요, 넷째는 아지 못한 법에 시비를 말하지 않고 여래의 증득하신 한량 없는 경계로서 중생의 근기를 따르며, ‘부처님의 말씀하신 법을 나는 통달하지 못했다’함이니 가섭아, 이것이 보살의 네 가지 법을 성취하면 선법이 쇠퇴하지 않고 선법이 증장한 것이니라.

다시 가섭아, 마음이 네 가지 굽은 것이 있음에 보살이 응당 제거할 것이니, 무엇이 네 가지가 되느냐. 첫째는 불법(佛法)에 유예하여 의심함이요, 둘째는 교만하여 말하지 않고 중생에게 성냄이요, 셋째는 남이 얻은 이익을 마음에 질투를 냄이요, 넷째는 헐뜯고 비방하여 보살을 칭찬하지 않음이니, 가섭아, 이것이 마음에 있는 네 가지 굽은 것을 보살이 응당 제거함이니라.

다시 가섭아, 보살이 네 가지 순한 모양이 있나니, 무엇이 넷이 되느냐. 첫째는 계를 범한바가 있으면 발로하고 숨키지 아니하여 마음이 얽매임과 때[垢]가 없음이요, 둘째는 참된 말엔 죽음에 당하여도 마침내 참됨을 어기지 아니함이요, 셋째는 남의 말을 꺾으려 하지 않고, 일체 침해함과 기만함과 가책(呵責)함과 업신여김과 구타함과 박해하는 것이 있음에는 모두가 이 나의 숙명으로 된 것이라 생각하고 남에게 성내지 않으며 사(使)와 전(纏)을 내지 않음이요, 넷째는 굳게 안주(安住)하여 남의 말을 믿지 않으며, 불법을 믿는 것에도 또한 믿지 않음이 이 속 마음이 청정했기 때문이다. 가섭아, 이것이 보살의 네 가지 순한 모양이 있는 것이니라.

다시 가섭아, 보살이 네 가지 악(惡)이 있으니 무엇이 넷이 되느냐. 첫째는 학문이 많으나 벗어나서 되지 않은 법을 행하고 가르침과 훈계를 따르지 않음이요, 둘째는 바른 법을 떠나서 스승과 어른을 공경하지 않고 시주의 은혜[施恩]을 녹히지 못함이요, 셋째는 계정혜(戒定慧)를 잃어 시은을 받을 수 없음이요, 넷째는 지혜로 조어(調御)된 보살을 보아도 공경하지 않고 자신이 높은 체하여 업신여김이니 가섭아 이것이 보살의 네 가지 악이 있음이니라.

다시 가섭아 보살이 네 가지 지혜가 있으니 첫째는 듣지 못한 것을 듣고 법대로 행함이요, 둘째는 뜻에 의하고 글로 꾸미지 않음이요, 셋째는 가르침과 훈계와 좋은 말을 따르며 하는 짓은 모두 착하고 스승과 어른을 공경하며 계(戒)ㆍ정(定)ㆍ혜(慧)를 얻어서 시은을 먹을 수 있음이요, 넷째는 지혜로 조어된 보살을 보면 공경하는 마음을 냄이니 가섭아, 이것이 보살의 네 가지 지혜인 것이니라.

다시 가섭아, 보살이 네 가지 어긋남이 있나니 무엇이 넷이 되느냐. 첫째는 잘 알지 못한 중생을 문득 친하다고 말함이니 보살의 어긋남이요, 둘째는 중생이 미묘한 불법을 감당하여 받지 못할데에 의하여 설법에 줌이니 보살의 어긋남이요, 셋째는 최상 미묘한 법을 좋아하는 데에 최하의 법을 말해 줌이니 보살의 어긋남이요, 넷째는 중생이 바로 행하여 모두 미묘한 법으 얻을 것임에도 서로 위반하게 함이니 보살의 어긋남이다. 가섭아, 이것이 보살의 네 가지 어긋남인 것이니라.

다시 가섭아, 보살이 네 가지 도(道)가 있나니, 무엇이 넷이 되느냐, 첫째는 평등한 마음으로 일체 중생을 위함이요, 둘째는 일체 중생을 권유하여 부처님의 지혜를 배우게 함이요, 셋째는 일체 중생을 위하여 바른 법을 말해줌이요, 넷째는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바른 행(行)에 순종하게 함이니 가섭아, 이것이 보살의 네 가지 도인 것이니라.

다시 가섭아, 보살이 네 가지 나쁜 지식[惡知識]이 있나니 무엇이 넷이 되느냐. 첫째는 성문(聲聞)이니 다만 자기만이 이익함이요, 둘째는 연각(緣覺)이니 의(義)와 사(事)가 적음이요, 셋째는 세속 스승과 경전이니 오로지 언변(言辯)에만 있음이요, 넷째는 저것을 익힘이니 다만 세속 법만 얻고 바른 법을 얻지 못함이다. 가섭아, 이것이 네 가지 악지식이니라.

다시 가섭아, 보살이 네 가지 선지식이 있나니, 무엇이 넷이 되느냐. 첫째는 와서 구걸하는 자가 이 보살의 선지식이니 도(道)를 자라게 하는 까닭이요, 둘째는 법사(法師)된 자가 이 보살의 선지식이냐 많이 들어서 반야바라밀을 장양하게 하는 까닭이요, 셋째는 출가하여 도 배우기를 권하는 자가 이 보살의 선지식이니 일체 선근(善根)을 장양하게 하는 까닭이요, 넷째는 부처님 세존이 이 보살의 선지식이니 일체 불법을 자라나게 하는 까닭이다. 가섭아, 이것이 보살의 네 가지 선지식이니라.

다시 가섭아, 네 가지 모양의 보살이 있나니, 무엇이 넷이 되느냐. 첫째는 재리(財利)를 탐내고 공덕을 구하지 아니함이요, 둘째는 다만 자기만의 안락을 구하고 중생을 위하지 않음이요, 셋째는 다만 자기만의 고통을 없애고 중생을 위하지 아니함이요, 넷째는 권속을 얻고 싶어하고 멀리하기를 좋아하지 않음이니 가섭아, 이것이 네 가지 모양의 보살인 것이니라.

다시 가섭아, 보살이 네 가지 참된 공덕이 있나니, 무엇이 넷이 되느냐.

첫째는 공(空)을 알았으나 행보(行報)를 믿음이요, 둘째는 나[我] 없음을 알았으나 중생을 크게 사랑함이요, 셋째는 비록 열반을 좋아하나 나고 죽음을 버리지 않음이요, 넷째는 보시(布施)를 행하고 중생을 교화하되 그 갚음을 바라지 않음이니 가섭아, 이것이 보살의 네 가지 참된 공덕이니라.

다시 가섭아, 보살 마하살(摩訶薩)이 네 가지 큰 장(藏)이 있나니, 무엇이 넷이 되느냐. 첫째는 부처님의 세상에 출현하심을 만남이요, 둘째는 6도(度)가 다함 없다 말함을 들음이요, 셋째는 법사(法師)를 보고 마음속에 걸림 없음이요, 넷째는 방일(放逸)하지 않고 산에 머무르기를 좋아함이니 가섭아, 이것이보살의 네 가지 큰 장이니라.

다시 가섭아, 보살이 네 가지 법으로 뭇 마군을 벗어남이 있나니, 무엇이 넷이 되느냐. 첫째는 보살 마음을 버리지 않음이요, 둘째는 마음이 일체 중생에게 걸리지 않음이요, 셋째는 일체 모든 소견에 물들고 집착되지 않음이요, 넷째는 일체 중생을 업신여기지 아니함이니 가섭아, 이것이 보살의 네 가지 법으로 뭇 마군(魔群)을 벗어남이니라.

다시 가섭아, 보살 마하살이 네 가지 법이 있어 일체 선법(善法)을 섭수하나니, 무엇이 넷이 되느냐. 첫째는 항상 산에 머무르고 마음이 속임과 간사함이 없음이요, 둘째는 은혜가 있거나 없거나 간에 마음은 항상 인욕함이요, 셋째는 4은(恩) 갚기를 생각하여 몸과 목숨을 버리고라도 중생을 위함이요, 넷째는 법을 구하는 데에 싫어함 없이 하나니 일체 선근(善根)을 갖추기 위한 까닭이다. 가섭아, 이것이 보살 마하살의 네 가지 법으로 일체 선법을 섭수함이니라.

다시 가섭아, 보살 마하살이 네 가지 한량없는 복행(福行)이 있나니, 무엇이 넷이 되느냐. 첫째는 법으로 보시하되 마음에 바라는 것이 없음이요, 둘째는 계에 범함이 있는 자를 보면 대비(大悲) 마음을 일으킴이요, 셋째는 일체 중생이 보살 마음 좋아하기를 원함이요, 넷째는 파리하고 하열함이 있는 자를 보면 욕되는 것 참는 것을 버리려 아니함이니 가섭아, 이것이 보살의 네 가지 한량 없는 복행이니라.

다시 가섭아, 보살이란 명칭을 쓰지 않으므로 보살이라 칭함이니 법의 행[法行] 평등한 행[等行]과 선(禪)인 분별을 행하기 때문에 이에 보살이라 칭한 것이다.

다시 가섭아, 보살 마하살이 32법을 성취하여야 보살이라 칭할 수 있나니, 무엇이 32가 되느냐, 첫째는 지극한 마음으로 중생을 이익케 함이요, 둘째는 살반야(薩般若)지혜를 세우고자 함이요, 셋째는 스스로 겸양하여 남의 지혜를 헐뜯지 아니함이요, 넷째는 일체 중생에게 교만하지 아니함이요, 다섯째는 일체 중생에게 신심(信心)껏 함이요, 여섯째는 일체 중생을 사랑하고 생각함이요, 일곱째는 지극히 중생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김[慈愍]이요, 여덟째는 원수와 친한이에게 마음이 평등함이요, 아홉째는 중생에 열반을 구하면 한량 없는 복으로써 이익케 함이요, 열째는 중생을 보면 기뻐하여 같이 말해줌이요, 열 한째는 이미 허락했으면 후회하지 않음이요, 열두째는 큰 자비로 일체 중생을 널리 감싸줌이요, 열 셋째는 법을 구하며 많이 듣기를 싫어함이 없이 함이요, 열 넷째는 자기가 범한 것에 허물인 것임을 알음이요, 열 다섯째는 남이 범한 것을 보면 간하고 성내지 아니함이요, 열 여섯째는 일체 위의와 예절을 닦아 행함이요, 열 일곱 째는 보시하되 과보를 바라지 않음이요, 열 여덟째는 이윽함이 걸림 없음이요, 열 아홉째는 정진하여 일체 선근을 구함이요, 스무째는 선정(禪定)을 닦아 익혀서 무색(無色)을 지나섬이요, 스물 한째는 방편으로 지혜를 섭수함이요, 스물 둘째는 4은(恩)으로 방편을 섭수함이요, 스물 셋째는 계(戒)가 있거나 계가 없거나 간에 평등하게 자비한 마음으로 대함이요, 스물 넷째는 지극한 마음으로 법을 들음이요, 스물 다섯째는 오로지 산에 있음이요, 스물 여섯째는 세속 영화를 좋아하지 않음이요, 스물 일곱째는 소승을 좋아하지 않고 대승(大乘)의 공덕을 좋아함이요, 스물 여덟째는 악지식을 멀리하고 선지식을 친근함이요, 스물 아홉째는 4범거지(四梵居止)를 성취함이요, 서른째는 지혜에 의지함이요, 서른 한째는 중생이 행(行)이 있거나 행(行)이 없거나간에 마침내 버리지 아니함이요, 서른 둘째는 말한 바가 둘이 없고 참된 말을 공경하고 존중히 여겨 보살 마음이 가장 앞에 있게 됨이니, 가섭아, 이것이 보살마하살의 32법을 성취하여 보살이라 칭할 수 있음이니라.

다시 가섭아, 내 곧 너를 위하여 비유로 말하리니 지혜 있는 자는 비유로써 보살의 공덕을 알게 되리라. 비유컨대 땅이 일체 중생을 위함에 달리함이있지 아니함과 같나니, 이와 같도다. 가섭아, 보살이 처음 발심하여 도량(道場)에 이르기까지 일체 중생을 위하여 또한 달리 함이 있지 않다. 비유컨대 물이 온갖 곡식과 온갖 약초와 초목을 발생함과 같나니, 이와 같도다. 가섭아, 보살 이 지성스럽고 청정한 자심(慈心)으로 일체를 감싸주고 기르며 모든 중생을 위하여 청정한 결백한 덕을 일으키니라. 비유컨대 불(태양계)이 온갖 곡식과 모든 약초와 초목을 성숙하게 함과 같나니, 이와 같도다. 가섭아, 보살이 반야바라밀로 일체 중생을 성숙하게 하느니라. 비유컨대 풍륜계(風輪界)가 일체 불국토를 장엄함과 같나니, 이와 같도다. 가섭아, 보살이 좋은 방편으로 일체 불국토를 장엄하느니라. 비유컨대 달이 초생엔 나날이 더욱 사람과 같나니, 이와 같도다. 가섭아, 보살이 지성과 청정으로 일체 깨끗하고 청정한 법을 증장하느니라. 비유컨대 해가 떠올라서 모든 중생을 비춤과 같나니, 이와 같도다. 가섭아, 보살이 한 반야바라밀로서 일체 중생을 비춰 주느니라. 비유컨대 사자의 뒤를 따라가는 사슴은 일체 공포가 없는 것과 같나니, 이와 같도다. 가섭아, 보살이 계(戒) 공덕에 머물러 그를 따라 행하는 바에는 일체 공포가 있지 않느니라. 비유컨대 코끼리가 무거운 짐을 감당하고 마침내 지치지 않는 것과 같나니 이와 같도다. 가섭아, 보살이 마음을 잘 조어(調御)하고 일체 중생을 위하여 무거운 책임을 감당하고 싫어하거나 게을리 아니하느니라.

비유컨대 연꽃이 진흙에서 나와 있으나 물이 붙지 않는 것과 같나니, 이와 같도다. 보살이 세간에 나와 있으나 세속 법에 집착하지 않느니라. 비유컨대 나무를 베는데 그 가지를 비록 베였더라도 뿌리를 베지 않으면 전과 같이 또 생기는 것과 같나니 이와 같도다. 가섭아, 보살이 선권이 마음으로 비록 결박을 끊었으나 오히려 3계(界)에 태어나느니라. 비유컨대 여러 곳의 강물이 큰 바다에 들어가면 모두 한 맛이 되고만 것과 같나니 이와 같도다. 가섭아 보살이 약간 종류의 착한 서원과 공덕을 지으나 장래 불도를 짓는데엔 모두 한 맛이 되느니라. 비유컨대 4천왕(天王)과 33천(天)이 수미(須彌)산에 있는 것과 같나니 이와 같도다. 가섭아, 보살의 마음속에 선근(善根)이 있느니라. 비유컨대 국왕을 대신이 돕기에 이에 나라의 온갖 일을 이루는 것과 같나니 이와 같도다. 가섭아, 보살이 반야바라밀 선근의 돕는 것으로서 이에일체 불사(佛事)를 이루느니라. 비유컨대 하늘에 구름이 없으면 비를 얻을 수 없는 것과 같나니 이와 같도다. 가섭아, 보살이 많이 듣지 못하면 법비[法雨]를 얻을 수 없느니라. 비유컨대 하늘에 구름이 있으면 비를 얻을 수 있는 것과 같나니, 이와 같도다. 가섭아, 보살이 큰 자비의 구름이 있으면 법비를 잘 내리느니라. 비유컨대 전륜성왕이 출현한다면 7보(寶)를 얻을 수 있는 것과 같나니 이와 같도다, 가섭아, 보살이 출현하면 37품(品) 도보(道寶)를 얻을 수 있느니라. 비유컨대 마니 구슬 그것에는 한량 없는 백천 가지 구슬을 모두 다 얻을 수 있는 것과 같나니 이와 같도다.가섭아, 보살마음이 있는 그 속에는 한량 없는 백천 성문 연각의 법을 모두 다 얻을 수 있느니라.

비유컨대 33천이 뭇 동산 누대에서 노닐 적엔 일체 오락의 기구가 모두 다 동등함과 같나니 이와 같도다. 가섭아, 보살이 지성(至誠)과 청정으로 일체 중생을 위하는 방편이 동등하여 모두 차등이 없느니라. 비유컨대 독약이 주문의 힘 때문에 능히 해롭게 하지 못함과 같나니 이와 같도다. 가섭아, 보살에겐 결박의 독이 지혜약의 힘 때문에 능히 해롭게 하지 못하느니라. 비유컨대 성읍에 모든 거름이 있어 밭을 비옥하게 함과 같나니 이와 같도다. 가섭아, 보살이 결박으로 인하여 살바야를 배우게 되느니라. 그러므로 가섭아, 보살이 이 보엄경을 배우려고 하면 마땅히 모든 법을 바르게 관찰해야 한다. 어떤 것이 바르게 관찰함이냐. 모든 법을 진실히 관찰함이다. 어떤 것이 모든 법을 진실히 관찰함이냐. 아(我) 인(人) 수명(壽命)을 관찰하지 아니함이니 이를 중도(中道) 진실인 관법(觀法)이라 이르느니라.

다시 가섭아, 진실이 관찰함이란 색(色)이 유상(有常)이다 무상(無常 )이다 관찰하지 아니함이며 또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이 유상이다 무상이다 관찰하지 아니함이니, 이를 중도 진실관법이라 이르느니라.

다시 가섭아, 어떤 것이 모든 법을 진실히 관찰함이냐. 땅을 유상(有常)하다 무상(無常)하다 관찰하지 아니함이며, 또 물과 바람을 유상하다 무상하다 관찰하지 아니함이니, 이를 중도 진실관법이라 이르느니라.

다시 가섭아, 유상(有常)이다 하면 이 한 치우침이 되고 무상(無常)이다 하면 이 두 치우침이 되나니 이 두 중간엔 색(色)이 없어서 볼 수도 없고 또 얻을 수도 없다. 이를 중도 진실관법이라 이르느니라. 아(我)가 있다 하면이 한 치우침이 되고 아가 없다 하면 두 치우침이 되나니, 이 두 중간엔 색이 없어서 볼 수도 없고 또 얻을 수도 없다. 이를 중도 진실관법이라 이르느니라. 진실한 마음이 있다 하면 이 한 치우침이요, 진실한 마음이 없다하면 이 두 치우침이 되나니 이 두 중간엔 마음도 생각[思]도 뜻[意]도 식(識)도 없다 이를 중도 진실관법이라 이르느니라.

이와 같은 좋지 못한 법[不善法]과 세간법(世間法)과, 다툼 없는 법[有諍法]과, 샘이 있는 법[有漏法]과, 함이 있는 법[有爲法]과, 더러움이 있는 법은 이 한 치우침이요, 이와 같은 착한 법[善法]과, 출세간 법(出世間法)과, 다툼 없는 법[無諍法]과, 샘이 없는 법[無漏法]과, 함이 없는 법(無爲法)과, 깨끗함(白淨)인 법은 이 두 치우침이 되나니 이 두 중간엔 있는 바 없고 또 얻을 수도 없다. 이를 중도 진실관법이라 이르느니라. 있다는 것은 이 한 치우침이요, 없다는 것은 두 치우침이 되나니, 이 두 중간엔 있는 바 없고 또 얻을 수도 없다. 이를 중도 진실관법이라 이르느니라.

다시 가섭아, 내 너를 위하여 말하리라. 무명(無明)이 행(行)을 반연하고, 행이 식(識)을 반연하고, 식이 명색(名色)을 반연하고, 명색이 6입(入)을 반연하고, 6입이 촉(觸)을 반연하고, 촉이 수(受)를 반연하고, 수가 애(愛)를 반여하고, 애가 취(取)를 반연하고, 취가 유(有 )를 반연하고, 유가 생(生)을 반연하고, 생이 노(老)ㆍ사(死)ㆍ고뇌ㆍ우비(憂悲)ㆍ울음을 반연하여 이와 같이 하여 큰 괴로움인 음(陰)이 생기느니라. 무명이 이미 없어지면 행이 없어지고, 행이 없어지면 식이 없어지고, 식이 없어지면 명색이 없어지고, 명색이 없어지면 6입이 없어지고, 6입이 없어지면 촉이 없어지고, 촉이 없어지면 수가 없어지고, 수가 업어지면 애가 없어지고, 애가 없어지면 취가 없어지고, 취가 없어지며 취가 없어지고, 유가 없어지면 생이 없어지고, 생이 없어지면 노사ㆍ고뇌ㆍ우비가 모두 없어져서 이와 같이하여 큰 괴로움인 음이 없어지나니 이 둘이 이지 않고, 또 두 행(行)이 없으며, 중간은 알 수 있으리니 이를 중도 진실관법이라 이른다. 이와 같이 무명과 행이 없어지매 식과 명색과, 6입과, 촉과, 수와, 애와, 취와, 유와, 생과, 노사가 없어지는 이 둘이 있지 않고, 또 두 행(行)도 없으며, 중간은 알 수 있으리니, 이와 같도다. 가섭아, 이를 중도 진실관법이라 이르느니라.

다시 가섭아, 중도 진실관법이란 공삼매(空三昧)로써 모든 법이 공하다고 관찰함이 아니요, 모든 법이 스스로 공한 것이며, 무상(無想)삼매로써 모든 법이 생각함 없다고 관찰함이 아니요, 모든 법이 스스로 생각함이 없는 것이며, 무원(無願)삼매로써 모든 법이 원함이 없다고 관찰함이 아니요, 모든 법이 스스로 원함 없는 것이며, 무행(無行)으로써 모든 법이 행(行)이 없다고 관찰함이 아니요, 모든 법이 스스로 행이 없는 것이며, 무기(無起)로써 모든 법이 일어남 없다고 관찰함이 아니요, 모든 법이 스스로 일어남이 없는 것이며, 무생(無生)으로써 모든 법이 생김 없다고 관찰함이 아니요, 모든 법이 스스로 생김이 없는 것이며 여(如)로써 모든 법이 평등하다고 관찰함이 아니요, 모든 법이 스스로 평등한 것이니, 이를 중도 진실관법이라 이르느니라.

무인(無人)으로써 모든 법이 공했다고 관찰함이 아니요 모든 법이 스스로 공한 것이며, 이와 같이 근본이 공하고 말이 공하고 현재 세상이 공했나니 응당 공에 의지하게 하고 인(人)에 의지하지 말지어다. 만일 공에 의지함이 있어 이 공에 의지한다면 나는 말하되 ‘이 사람은 이 법을 멀리 떠남이라’ 하리라. 이와 같도다 가섭아, 차라리 아견(我見)에 의하여 수미산과 같이 쌓을지언정 교만하지 아니할 것이며, 또 많이 듣지 않고서 공(空)의 소견에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니, 나는 다스리지 못할 바니라. 비유컨대 어진 의원이 병을 따라 약을 주어 병이 없어졌는데 약이 그대로 있다면 가섭아, 뜻에 어떻다 하느냐. 이 사람의 아픔이 없어졌겠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이냐 하오면 약이 몸에 있기 때문이옵니다.” “이와 같도다. 가섭아, 공(空)은 일체 소견이 끊어졌다 하여 만일 공의 소견에 의지함이 있다면 나는 다스리지 못할 바도 또한 다시 이와 같느니라.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허공을 무서워하여 울면서 말하되, ‘지금 나를 위하여 이 허공을 없애라고’ 한다면, 가섭아, 뜻에 어떻다 하느냐. 능히 없앨 수 있으랴.”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도다. 가섭아, 만일 허공을 무서워한다면 나는 말하기를 ‘이 사람은 아주 미쳤다’하리니, 무슨 까닭이냐. 중생이 허공을 만들고서 그는 무서워 한 것이니라. 비유컨대 그림 그리는 사람이 귀신 모양을 만들어 놓고 곧 스스로 두려워 함과 같다. 이와 같도다. 가섭아, 모든 범부 어리석은 사람들이 스스로 색(色)과, 소리와, 맛과 닿임의 법을 마들어 놓고 나고 죽음에 윤전(輪轉)하여 이 법을 아지 못함도 또한 다시 이와 같느니라. 비유컨대요, 술장이가 변화로 만든 허깨비 사람이 요술쟁이를 먹음은 진실이 아님과 같나니 이와 같도다. 가섭아, 수행하는 비구의 생각하는 바를 따라 일체가 허위이며 진실이 아니고 견고함이 있지 아니함도 또한 이와 같느니라. 비유컨대 두 나무가 서로 마찰하여 불을 내고 그 나무를 태우는 것과 같나니 이와 같도다. 가섭아, 진실한 관으로 인하여 샘이 없는[無漏] 지혜의 뿌리를 내고 그가 곧 진실관을 불태움도 또한 다시 이와 같느니라. 비유컨대 ‘등불을 밝히면 모든 어둠이 모두 없어지나니 이 어둠은 온 것도 없고 또 이르는 바도 없으며 동방 남방 서방 북방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며 또 그곳에 이르는 것도 아님과’ 같나니, 이와 같도다. 가섭아, 지혜가 이미 생기면 무지(無智)는 곧 없어지나니, 이 무지는 소종래도 없고 또 이르는 바도 없느니라. 이와 같도다. 가섭아, 등불은 이러한 생각을 하되, ‘내가 곧 어둠을 없애리라’함이 없다. 그러나 등불을 밝히면 모든 어둠은 곧 없어지고 등불과 어둠이 둘다 공하여 지닐 수 없고 조작함도 없는 것이 또한 다시 이와 같느니라. 가섭아, 비유컨대 백년동안 어둔 방에 만일 등불을 밝힌다면 저 어둠이 자못 이런 생각을 하되, ‘나는 마땅히 이곳에 있어 가지 않겠다고’ 하겠느냐.”

대답하였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이 어둠은 반드시 없어진 것입니다.” “이와 같도다. 가섭아, 만일 어떤 중생이 백천겁(劫) 동안에 지은 행업(行業)을 한 정관(正觀)인 무루지혜 등불로써 하면 그 곧 없어짐도 또한 다시 이와 같느니라.

비유컨대 공중에는 5곡(穀)이 생기지 않는 것과 같아서 보살도 이와 같아서 무위(無爲)에는 불법(佛法)이 나지 않느니라. 비유컨대 큰 땅의 뭇 더러움이 섞인데서 5곡이 생기듯이 보살도 이와 같아서 세속의 섞이고 얽힌 결박 속에서 이에 불법이 나느니라. 비유컨대 육지에는 연꽃이 나지 않듯이 보살도 이와 같아서 무위에서 불법이 출생하지 않느니라. 비유컨대 진흙의 물에서 연꽃이 나듯이, 보살도 이와 같아서 사뙨 중생의 결박 속에서 이에 불법이 나느니라. 비유컨대 제호(醍醐)가 4해(海)에 가득하듯이, 보살의 지은 선근(善根)도 또한 다시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하느니라. 비유컨대 한 터럭을 쪼개어 백분으로 만든 1분의 털로 4대해(大海)의 한 방울 물을 취함과 같아서 성문(聲聞)의 지은 선근도 또한 다시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하느니라. 가섭아, 비유컨대 개자(芥子)속 허공과 같아서 성문의 지은 선근도 또한 다시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하느니라. 비유컨대 10방의 허공과 같아서 보살의 지은 선근도 또한 다시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하느니라. 비유컨대 찰리(刹利) 정생(頂生)의 황후가 천한 사람과 간통하여 그 후 만일 아들을 낳았다면 뜻에 어떻다 하느냐. 이 아들을 왕의 아들이라 말하겠느냐.”

대답하엿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도다. 가섭아, 이 모든 성문은 나의 법으로부터 나왔으나 그러나 그들 일체는 세조의 아들이 아니니라. 비유컨대 ‘찰리 정생 대왕(大王)이 천한 여인과 간통하여 그후 만일 아들을 낳았다면 뜻에 어떻다 하느냐. 천한 사람의 소생이니 이 아들을 왕자가 아니라’고 말하겠느냐.”

대답하였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이는 왕의 아들이옵니다.” “이와 같도다. 가섭아, 비록 천한 사람에게 낳았으나 이는 왕의 아들이니라. 보살도 이와 같아서 처음 도의 마음을 발하여 나고 죽음에 머무르면서 중생을 교화하나니 그들이 모두 여래의 아들이니라. 비유컨대 전륜성왕에게 비록 1천 아들이 있더라도 성왕의모양이 없으면 전륜성왕의 뜻에는 아들이 없다고 생각함과 같나이다. 이와 같도다. 가섭아, 여래에게 비록 백천 성문 제자의 무리가 있으나 보살이 없다면 여래의 뜻에는 아들이 없다고 생각하느니라.

가섭아, 비유컨대 성왕의 황후가 7일 재계를 가지고서 성왕의 모양을 구족한 한 동자를 탄생하거든 33천(天)이 모두 함께 찬탄하고 그 외의 장성한 왕자를 칭찬하여 말하지 않나니, 무슨 까닭이냐. 동자는 비록 작으나 성왕의 종자를 끊치 않기 때문인 것과 같나니 보살도 이와 같아서 도의 마음을 처음 발하였음에 모든 감관[根]이 구족하지 못했으나, 저 모든 하늘 대중으로서 일찍이 부처님을 본 자들은 모두 함께 찬탄하고 8해탈을 구족한 여러 아라한(阿羅漢)을 칭찬하여 말하지 않나니, 무슨 까닭이냐. 비록 보살 마음을 처음 발하여 모든 감관이 구족하지 못했으나 부처님 여해의 종자를 끊치 않기 때문이니라. 비유컨대 작은 마니 진주가 수미산 같은 수정보다 나은 것과 같나니 보살도 이와 같아서 도의 마음을 처음 말했으나 일체 성문보다 뛰어나느니라.

가섭아, 비유컨대 성왕의 황후가 동자를 처음 탄생하매 일체 신하 무리들이 모두 예경함과 같나니, 보살도 이와 같아서 도의 마음을 처음 발하매 일체 하늘 사람이 모두 예경하느니라. 비유컨대 수미산에서 좋은 약들이 나와서 일체 사람을 위하여 병고를 치료하되 한다, 하지 않는다는 것이 없는 것과 같나니, 보살도 이와 같아서 지혜약을 배워 일체 사람을 위하여 나고 죽는 고통을 치료하되 또한 한다, 하지 않는다는 것이 없느니라. 비유컨대 초생 달에 예경하고 그후 성만한 달에는 아니함과 같나니, 이와 같다. 가섭아, 뜻을 처음 발한 보살에게 예경한 것이 수승하고 여래 지진(至眞) 등정각(等正覺)에게 예경함이 수승한 것이 아니다. 무슨 까닭이냐. 부처님 여래는 보살로부터 탄생되었기 때문이다. 가섭아. 비유컨대 달을 놓아두고 별들에게 예경하는 자가 있지 않는 것과 같나니, 이와 같아서 계덕(戒德)과 지혜를 구족한 보살을 놓아두고 성문에게 예경하는 자가 있지 않느니라. 가섭아, 비유컨대 일체 하늘 사람이 수정으로써 마니 진주를 만들 수 없듯이, 성문도 이와 같아서 일체 계(戒)와 청정한 행을 성취하여 능히 보리수밑에 앉아서 위 없는 정신(正眞)의 도를 이루지 못하느니라. 비유컨대 마니 진주를 얻은 자는 그 외 한량 없는 백천 재보(財寶)를 얻듯이, 보살도 이와 같아서 세상에 출현하면 곧 한량 없는 성문 연각의 세상에 출현함이 있느니라.”

이에 세존은 존자 대가섭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이 일체 중생을 위하여 모든 선근(善根)을 구하여 닦고 뭇 지혜약을 갖추고서 4방에 두루 가서 병에 적응함을 따라 여실(如實)히 치료하느니라. 가섭아, 어떤 것이 여실히 치료함이냐. 말하자면 오로(惡露)는 부정하다는 것으로 음욕을 치료하고 자비한 마음으로 성냄을 치료하고 연기(緣起)로서 어리석음을 치료하고, 공(空)으로서 일체 소견을 치료하고, 무상(無相)으로 일체 4상(相)을 치료하고, 무원(無願)으로 일체 욕계(欲界)ㆍ색계(色界)ㆍ무색계(無色界)를 치료하고, 4비전도(非顚倒)로 4전도를 치료하고, 무상(無常)으로써 비상(非常)인데도 유상(有常)이라 생각하는 것을 치료하고, 일체행(行)이 고(苦)라 함으로써 고인데도 낙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치료하고, 무아(無我)로써 아(我)가 없는데도 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치료하고, 부정상(不淨想)으로써 깨끗하지 않은데도 깨끗함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치료하고, 4의지(意正)로써 신(身)ㆍ고(苦)ㆍ심(心)ㆍ법(法)에 집착 두는 것을 치료하나니, 신관(身觀)으로는 몸을 관(觀)하여 ‘내가 괴롭다는 것을 보았노라’하는 것을 일으키지 아니하며, 고관(苦觀)으로는 고를 관하여 ‘내가 마음을 보았노라’하는 것을 일으키지 아니하며, 심관(心觀)으로는 마음을 관하여 ‘내가 법을 보았노라’ 하는 것을 일으키지 아니하며, 법관(法觀)으로는 법을 관하여 ‘내가 몸을 보았노라’ 하는 것을 일으키지 아니한다. 4선법을 익히며, 4신족(神足)으로는 몸과 마음이 참이다 하는 생각을 버리며, 5근(根) 5력(力)으로는 믿지 않음과 게으름과 산란한 생각과 무지(無智)를 치료하고 7각(覺)으로는 모든 법에 지혜 없음을 치료하고 8성도(聖道)인 이 지혜로는 일체 사도(邪道)를 치료하나니, 가섭아, 이를 병에 적응할 바를 따라 여실히 치료함이라 이르느니라. 가섭아, 이와 같이 보살은 마땅히 이를 배울 것이니라.

다시 가섭아, 설령 3천 대천(大千)국토에 유식한 자가 있으되 모두 기바(耆婆) 의왕(醫王)과 같더라도 어떤 사람이 묻기를 ‘어떤 방약(方藥)으로써 저 병을 치료할 것이냐’ 하면 마침내 능히 대답 못하거니와, 오직 보살만은 능히 모두 대답하리라. 그러므로 가섭아, 보살은 마땅히 이러한 생각을 할 것이니 ‘나는 응당 세간의 약을 구하지 않고 마땅히 출세간의 약을 구하여 일체 선근을 닦고 이 뭇 지혜의 약으로 4방에 두루 가서 중생의 병을 따라 여실히 치료하리라’고 해야 하느니라.

다시 가섭아, 어떤 것이 출세간 지혜의 약이냐. 인연지(因緣智)와 아(我)ㆍ인(人)ㆍ수명(壽命)이 없는 지혜니라. 일체 모든 법이 공함을 알아서 공포가 없는 마음으로 그는 이런 관찰을 짓되, ‘어떤 것이 마음에 탐욕이며, 어떤 것이 성냄과 어리석음이며, 과거가 되느냐. 미래ㆍ현재가 되느냐. 만일 과거일진대 과거 마음은 이미 없어졌고, 만일 미래일진대 미래 마음은 일어나지 아니했고, 만일 현재일진대 현재 마음은 머무르질 아니한다’. 이와 같도다. 가섭아, 마음은 미래에도 안에 있지 않고 또 밖에 있지도 않고, 또 두 중간에 있지도 않다. 마음이란 색(色)이 아니어서 볼 수도 없고, 또 대(對)함도 없고, 봄[見]도 없고, 앎도 없고, 머무름도 없고, 의지함도 없느니라.

가섭아, 마음이란 일체 부처님도 과거에 보지 못하며 당래에 보지 못하며, 현재에도 보지 못한다. 어찌하여 행하는 바 있음을 아느냐. 다만 전도(顚倒)된 생각 때문에 모든 법의 행(行)이 있는 것이니, 모든 법은 환화(幻化)와 같은 법이어서 가지가지 발생함을 받는 것이다. 이 마음은 멀리 가는 바람과 같아서 잡을 수 없는 것이요, 마음은 흐르는 물과 같아서 머무르지 못하는 것이요, 마음은 등불의 불꽃과 같아서 인연으로 계속되는 것이요, 마음은 번개불빛과 가아서 때로 머무르지 못하는 것이요, 마음은 안개와 가아서 바깥일에 더럽히는 것이요, 마음은 원숭이와 같아서 일체 경계에 탐착하는 것이요, 마음은 그림 그리는 사람과 같아서 가지가지 행(行)을 조작하는 것이요, 마음은 머무르지 않고 뭇 결박을 따르는 것이요, 마음은 홀로 짝이 없이 항상 달려 달아나는 것이요, 마음은 왕과 같아서 일체 법의 우두머리인 것이요, 마음은 어머니와 같아서 일체 괴로움을 내는 것이요, 마음은 불꽃과 같아서 일체 선근(善根)을 모았다가 흩으는 것이요, 마음은 물고기와 같아서 고통에 걸리고도 낙이라는 생각을 두는 것이요, 마음은 꿈과 같아서 아(我)가 없는 데에 아가 있다는 생각을 두는 것이요, 마음은 파리와 같아서 깨끗지 못한 것에 깨끗하다는 생각을 두는 것이요, 마음은 원수집과 같아서 짓는 바가 옳지 못하는 것이요, 마음은 나찰(羅刹)과 같아서 항상 기회 노리기를 좋아하는 것이요, 마음은 증오와 질투와 같아서 항상 허물을 찾는 것이요, 마음은 사랑할 수 없어서 은애(恩愛)에 어리석은 것이요, 마음은 도적과 같아서 일체 선근을 끊는 것이요, 마음은 색(色)에 집착함이 나비가 불에 투신함과 같은 것이요, 마음은 소리를 좋아하는 것이 군악과 싸움터의 북소리와 같은 것이요, 마음은 냄새를 좋아하는 것이 돼지가 더러운 냄새를 좋아하는것과 같은 것이요, 마음은 맛을 탐착함이 천한 사람이 먹다 남은 밥을 즐기는 것과 같은 것이요, 마음은 사랑하고 다시 즐겨함이 파리가 노린내를 즐기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마음은 찾아보아도 있지 않고 또 얻을 수도 없다. 설령 없어서 얻을 수 없다면 곧 과거ㆍ미래ㆍ현재가 없을 것이요, 설령 과거ㆍ미래ㆍ현재가 없다면 3세(世)를 벗어났음이요, 설령 3세를 벗어났다면 이는 곧 있지도 않고 또 없지도 않을 것이요, 만일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안을 진대 이는 생김이 아닐 것이요, 만일 생김이 아닐진대 이는 성(性)없음이 될 것이요, 만일 성 없음이라면 이는 일어남 없음이 될 것이요, 만일 일어남이 아니라면 이는 또한 멸(滅)함이 아니요, 만일 멸함이 아니라면 곧 무너짐이 없음이요, 만일 무너짐이 엇으면 오고 감도 없음이요, 만일 오고 감이 없으면 나고 죽음이 있지 않음이요, 만일 오고 감이 없고 나고 죽음이 없다면 이는 곧 행(行)이 없음이요, 만일 행이 없으면 이는 무위(無爲)이요, 만일 무위라면 이는 성현(聖賢)의 성(性)이요, 만일 성현의 성이라면 계(戒)와 계 아님이 없음이요, 만일 계와 계 아님이 없다면 위의행(威儀行)이 없고 또 위의 아님도 없음이요, 만일 행도 없고 위의와 위의 아님도 없다면 이는 곧 심(心도 없고 심수(心數)도 없음이요, 만일 심과 심수법이 없다면 업(業)도 보(報)도 없음이요,만일 보가 없다면 고(苦)도 낙도 엇음이요, 만일 고락이 없다면 이는 성현의 성이요, 만일 성현의 성(性)에는 짓는 신업(身業)이 업고 또 짓는 구업(口業)과 의업(意業)이 없다. 이 성은 평등하여 상ㆍ중ㆍ하가 없고 또 차별이 없다니, 일체 모든 법이 모두 평등하기 때문이니라.

이와 같도다. 가섭아, 이 성(性)은 몸과 입을 멀리 떠난 것이며, 이 성은 무위(無爲)이어서 여반에 수응한 것이며, 이 성은 청정하여 일체 모든 결박의 때[垢]를 여읜 것이며, 이 성은 아(我)가 없어서 아(我)에서 짓는 것을 떠난 것이며, 이 성은 평등하여 허실(虛實)을 떠난 것이며, 이 성은 참으로 벗어나는 요법(要法)이어서 제일의(第一義)인 것이며, 이 성은 모두 이르지 아니한 데가 없으나 마침내 일으키지 않고 항상 진여(如)법인 것이며, 이 성은 무위를 좋아하여 모두 동등한 것이며, 이 성은 청결함이 지극하여 마침내 때[垢]가 없는 것이며, 이 성은 아(我)가 아니어서 아를 찾아보아도 얻을 수 없는 것이며, 이 성은 결백함이 지극하여 마침내 청정한 것이니라.

가섭아, 너희들은 응당 안에서 구하고 밖에서 구하기도 할 것이며, 당래 세상에는 응당 비구가 있어 달려 달아나는 것이 개[犬]와 같으리라. 어떤 것이 비구가 달려 달아나는 것이 개와 같은 것이느냐. 비유컨대 개에게 무엇을 던져 그로 하여금 공포하게 하거든, 개는 도리어 그것을 쫓아가고 던진 사람에게 향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니라. 이와 같도다. 가섭아, 응당 사문 바라문이 있어 색(色)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닿임과, 법을 두려워하면서도 도리어 그 속에서 즐기고 속마음을 관찰하지 아니하여 어떻게 하여야 색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닿임과 법을 떠나게 됨을 알지 못하고, 부지 불각중에 드디어 인간에 들어가고 다시 색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닿임과 법이 그 기회를 얻게 된다. 그가 산에 있어서 목숨을 마친 자는 세속계(戒)를 지킴으로 인하여 하늘에 태어남을 얻고 다시 색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닿임과 법이 기회를 얻게 되나니, 몸이 죽어 목숨을 마치면 넷 악취(惡趣)에 태어나느니라. 무엇이 넷이 되느냐. 지옥과 축생(畜生)과 아귀(餓鬼)와 아수라(阿修羅)니라. 가섭아, 이것을 비구가 달려 달아나는 것이 또한 개와 같은 것이라 이르느니라.

어떤 것이 비구가 달아나는 것이 개와 같지 않는 것이냐. 만일 사람이 구타하며 꾸짖더라도 잠자코 받고서 갚지 않으며, 꾸짖고 성내더라도 비구는 성냄으로 보복하지 아니하고 다만 속 몸을 관(觀)하되, 꾸짖는 것이 무엇이며, 구타하는 것이 무엇이며, 누가 성냄과 꾸짖음을 받는 것이냐’고 할 것이니, 가섭아, 이를 이 같은 비구는 달아남이 개과 같지 않다고 이르느니라. 비유컨대 잘 어거하는 자로서 말이 만일 방일(放逸)하면 곧 능히 제거함과 같나니 수행하는 비구도 또한 다시 이와 같아서 마음이 만일 달아나고 흩어지면 즉시 제지하여 산란하지 않게 하느니라. 비유컨대 사람을 목메어 조이면 그 목숨이 반드시 끊어짐과 같나니 이와 같도다. 가섭아, 일체 모든 소견으로 아(我)를 계교함이 있으면 혜명(慧命)이 반드시 끊어지리라.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그 결박된 바를 모두 풀어 주듯이 비구도 이와 같아서 마음의 결박된 바를 따라 마땅히 곧 제거할 것이니라. 이와 같도다. 가섭아, 출가하여 도를 배우는데 두 가지 결박이 있나니, 무엇이 둘이 되느냐. 첫째는 세속 경전을 배움이요, 둘째는 가사와 바리를 가지고도 정진하지 아니함이니라.

다시 가섭아, 출가하여 도를 배우는데 두 가지 견고한 결박이 있나니, 무엇이 둘이 되느냐. 첫째 소견의 결박이요, 둘째는 재물과 명예를 탐하여 결박된 바이니라. 다시 가섭아, 출가하여 도를 배우는데 두 가지 법의 장애가 있나니 무엇이 둘이 되느냐. 첫째는 속인을 친근히 함이요, 둘째는 스승과 벗을 미워하고 질투함이니라. 출가하여 도를 배우는데 또 두 가지 때[垢]가 있나니 무엇이 둘이 되느냐. 첫째는 마음껏 2결(結)을 취함이요, 둘째는 아는 벗의 집에 찾아가서 걸식함이니라.

다시 가섭아, 출가하여 도를 배우는 데 두 가지 퍼붓는 우박과 비가 있나니, 무엇이 둘이 되느냐. 첫째는 정법(正法)을 비방함이요, 둘째는 계(戒)에 범하고 신시(信施=신심 있는 시주물)를 먹음이니라. 출가하여 도를 배우는데 두 가지 종기가 있나니 무엇이 둘이 되느냐. 첫째는 남의 단점을 보는 것이요, 둘째는 스스로 자기 잘못을 숨기는 것이니라.

다시 가섭아, 출가(出家)하여 도를 배우는데 두 가지 법열이 있나니 무엇이 둘이 되느냐. 첫째는 더러움을 감추고 가사를 지님이요, 둘째는 계행이 있는 자로 하여금 자기를 순종하게 함이니라. 출가하여 도를 배우는데 또 두 가지 병이 있나니 무엇이 둘이 되느냐. 첫째는 교만하고 그 마음을 관(觀)하지 아니함이요, 둘째는 대승 배우는 자를 헐뜯고 꾸짖는 것이니라.

다시 가섭아, 사문(沙門)이 사문이라고 말하나니 어지 사문이 사문이라고 말하리요, 네 가지 사문이 있다. 무엇이 넷이 되느냐. 첫째는 모양만의 사문이요, 둘째는 거짓 위의(威儀)를 갖춘 사문이요, 셋째는 명예 사문이요, 넷째는 진실 사문이니라. 어떤 것이 모양만 사문이냐 만일 사문이 있어 색상을 성취하되 수염과 털을 깎고 법복을 입으며 손에는 발우를 가졌으나 그는 몸으로 악행(惡行)을 하고 입과 뜻으로 악행을 범하고 조복함을 익히지 않으며 또 수호하지도 않고 계에 범하고 나쁜짓을 저지르고 간탐하여 정진하지 아니 하나니 가섭아, 이를 모양만의 사문이라 이르느니라. 어떤 것이 거짓 위의 갖춘 사문이냐. 만일 사문이 있어 예절을 성취하고 바른 지혜에 노닐고 음식에도 만족함을 알고 4성종(聖種)을 행하여 뭇 사람이 모인 승속의 모임도 좋아하지 아니하고 말을 적게 하고 잠을 적게 잔다. 그러나 그는 위의가 거짓이고 진실이 아니며, 청정한 마음을 가지지 않고 지관(止觀)을 익히지않으며 소견과 사상이 있고 공(空)에는 문득 구덩이와 같은 생각을 일으키며, 만일 공을 수행하는 비구가 있으면 원수집과 같은 생각을 하나니, 가섭아, 이를 거짓 위의를 갖춘 사문이라 이르느니라. 어떤 것을 명예 사문이라 하느냐. 만일 사문이 있어 금계(禁戒를 받들어 가지면서 남들로 하여금 금계를 받들어 가지는 것을 알게 하고 싶어 하며 정진하며 학문을 닦으면서 남들로 하여금 정진함과 학문 하는 것은 알게 하고 싶어하며, 산중에 있으면서 남들로 하여금 산중에 있는 것을 알게 하고 싶어하며, 욕심이 적고 만족함을 알며 정근(精勤)하고 홀로 있으면서 남들로 하여금 자기의 하는 그것을 알게 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나고 죽는 것을 싫어하지 않고 영원히 애욕을 떠나지 않고 모두 다 지식함을 좋아하지 않고 도를 구하려고 하지 아니하며, 마음만 쉬고 범행(梵行)만 가지며, 열반을 닦지 아니하나니, 가섭아, 이를 명예 사문이라 이르느니라. 어떤 것이 진실 사문이냐. 만일 사문이 있으되, 몸과 목숨도 위하지 않거든 하물며 재물을 탐하고 명예에 집착하랴. 공(空) 무상(無相) 무원(無願)의 법을 듣기를 좋아하고 들으면 곧 기뻐하고 법과 같이 수행한다. 열반을 위하여 범행을 닦지 않거든 하물면 3계(界)를 위하랴. 공(空)의 소견도 두지 않거든 하물며 아(我) 인(人) 수명(壽命)의 소견이 있으랴. 법에 의하여 도를 구하고 결박을 벗어 해탈하며 외도(外道)를 구하지 않으며, ‘모든 법의 성(性)은 모두 다 구경(究竟)이며 청정하며 더러움이 없는 것임’을 관찰하여 스스로 비추어 관찰하고 타에 의하지 아니한다. 법과 같은 자는 여래를 보지도 않거든, 하물며 색신(色身)이 있다하랴. 애욕이 없는 법도 보지 않거든 하물며 문채로 꾸밈이 있으랴. 무위(無爲)도 생각하지 않거든 하물며 뭇 덕이 있으랴. 단법(斷法)을 익히지 않고 수법(修法)을 배우지 않고 나도 죽음에 머무르지 않고 열반을 좋아하지 않고 해탈을 구하지 않고 또 속박도 구하지 않으며 일체 법이 구경이며 청정하며 생하지도 멸하지도 않은 것임을 아나니,가섭아, 이를 진실 사문이라 이르느니라. 그러므로 가섭아, 마땅히 진실 사문을 배우고 명예 사무을 배우지 말 것이니라.

“비유컨대 가난한 사람이 밖으로 부자라는 이름이 있다면 뜻에 어떻다 하느냐. 저 이름이 실지가 있다 하겠느냐.”

대답하였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도다. 가섭아, 사문의 이름만 있지 사문의 덕이 없나니 나는 말하기를 ‘이 사람은 극히 가난하다’ 하리라.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큰 물에 떠나려간바 되면서 목마라 죽음과 같다. 이와 같도다. 가섭아, 사문 범지(梵志)가 있어 많은 법을 익히고 배우면서도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인 갈증을 능히 제거하지 못하면 그는 법의 물에 떠나려가는 바가 도어 갈증에 맺혀 죽고 악취(惡趣)에 태어남도 또한 다시 이와 같느니라. 비유컨대 의사가 가지가지 약을 가지고 남의 병은 치료하면서도 자기는 치료하지 못함과 같다. 이와 같도다. 가섭아, 사문 범지가 있어 법을 많이 외우면서도 자기의 음욕ㆍ성냄ㆍ어리석음인 병을 제거하지 못함도 또한 다시 이와 같으니라. 비유컨대 병든 사람이 왕의 좋은 약을 먹고 스스로 지탱하지 못하고 마침내 죽음과 같나니 이와 같도다. 가섭아. 사문 범지가 많이 있어 그론 법을 행하고 모든 결박의 병을 일으켜 마침내 악취(惡趣)에 태어남도 또한 다시 이와 같으니라. 비유컨대 마니 구슬을 깨끗하지 못한 속에 떨어뜨리면 다시 만날 수 없는 것과 같나니 이와 같도다. 가섭아, 사문 바라문이 많이 있어 재리를 탐착함도 또한 마니 구슬을 깨끗지 못한 속에 떨어뜨리면 다시 만날 수 없는 것과 같은 줄 알아야 하느니라. 비유컨대 죽은 사람에게 금화만(金華鬘)을 붙임과 같나니 이와 같도다. 가섭아, 사람이 게를 지키지 않고 가사를 입는 것도 또한 다시 이와 같느니라. 비유컨대 장자의 아들이 깨끗하게 스스로 씻고 목욕하고서 깨끗한 새 옷을 입고 담복(薝蔔)화만을 붙임과 같나니 이와 같도다. 가섭아, 많이 들고 계를 지키며 가사를 입는 것도 또한 다시 이와 같느니라.

다시 가섭아, 계를 지니지 아니하나 계를 지니는 것과 같은 네 가지가 있나니, 무엇이 넷이 되느냐. 만일 비구가 있어 금계(禁戒)를 호지(護持)하고 위의를 성취하며 작은 일에도 꼭 근신하고 비구의 깨끗한 계를 지니고 위의(威儀)와 예절을 성취하고 몸과, 입과, 뜻으로 행함이 정직하고 청정하게 하나, 그러나 나(我)라고 계교하나니 가섭아, 이를 계 지니지 아니하나 계를 지니는 것과 같은 한가지인 것이니라.

다시 비구가 계율을 외워 밝게 통하고 율법을 잘 지키나 신견(身見0df 끊니 못하나니 가섭아, 이를 계 지니지 아니하나 계를 지니는 것과 같은 두 가지인 것이니라.

다시 비구가 중생에게 자비를 행하나 ‘모든 법은 생기지도 멸하지도 않는다고 말함을’ 들으면 공포심을 품나니 가섭아, 이를 계 지니지 아니하나 계를 지니는 것과 같은 세 가지인 것이니라.

다시 비구가 열 두 가지 법 깨끗한 공덕행(功德行)을 행하나 그러나 아(我)의 소견을 일으켜서 아소(我所)가 있나니 가섭아, 이를 계 지니지 아니하나 계를 지니는 것과 같은 네 가지인 것이니라.

이와 같도다. 가섭아, 계(戒)를 계라고 칭한 것은 말하자면 아(我)가 없으며, 또 아소(我所)가 없으며, 지음[作]과 지음 아닌 것이 없으며, 사(事)와 사 아닌 것이 없으며 또 위의도 없고 행(行)과 행 아님도 없으며 명색상(名色相)이 없으며, 또 상(相)아님도 없으며, 쉼[息]과 쉼 아닌 것이 없으며, 취함도 없고 버림도 없으며 취할 자도 없으며, 또 버리지 않을 수도 없으며, 중생에게 시설하지 않으며, 또 시설 아니하고 중생도 없으며, 입의 행(行)이 있지아니하며, 입[口]의 행 아님도 없으며 심(心)과, 심 아님도 업으며, 기댐과 기댐 아님도 없으며, 계와 계 아님도 없나니 가섭아, 이를 샘이 없는[無漏] 성계(聖戒)라 이르나니 떨어지는 바 없고 3계(界)를 벗어나며 일체 기댐[倚]을 떠났느니라.”

이에 세존은 이런 게송을 말씀하셨다.

계를 지님 있지 않고 때[垢]없으며
계를 지님 교만 없고 기댐아니요
계를 지님 어둠 없고 속박 없으며
계를 지님 티끌과 더러움 없다네

가장 지식함이나 지식(止息)함 없으며
생각과 생각 아님 없고 더러움 아니요
모든 고통 뭇 집착 모두 끊어졌나니
가섭이여, 이것이 부처님 계 지님이라네
몸과 입과 생명에 집착 아니하며
일체를 탐해 나고 죽음 받지 않고
바르게 오고 가 정도에 머무르면
가섭이여, 이것이 부처님 계 지님이라네

세간에 집착 않고 세속을 벗어나
밝음 얻고 어둠과 있는 것 사라지며
자기와 남이라는 생각 없어지고
일체 생각 끊어서 청정하여지네

이쪽과 피안(彼岸)과 중간이 없어서
이쪽과 피안에도 집착 아니하고
속박과 허위와 모든 샘[漏]이 없어지면
가섭이여, 이것이 부처님 계 지님이라네

명자와 색상에 마음이 집착 않고
선정(禪定)과 바른 생각으로 마음 조복하여
아(我)와 아소(我所)있지 아니하면
가섭이여, 이것을 계에 머무름이라 하네

금계에 의하지 않고 해탈 얻으며
계 지닌다 하여 기뻐하지도 않고
이 위에서 8정도(正道) 구하다면
이를 계 지니는 청정이라 하네

계 지님과 정(定)닦음에 의지하여
이를 닦아 지혜 얻는다 아니하고
있는 것도 얻는 것도 없는 이 성성(聖性)인
청정 성계(聖戒)를 부처님이 칭찬하네
자기라는 신견(身見)마음에 해탈하며
아견(我見)과 아소 일으키지 않고
마음에 공(空)함 알음이 불(佛)의 경계니
이렇게 계 지님 가장 수승하다네

깨끗한 계에 머물러 선정 얻으며
선정 얻고서 지혜를 닦고
지혜 닦아 문득 해탈 얻으면
해탈인 평등계 얻음이라네

이 게송을 말씀하시니, 8백 비구는 샘[漏]이 다함을 얻었으며, 3만 2천 사람은 티끌을 멀리하고 때[垢]를 떠나 법안(法眼)이 생겼었었다. 5백 비구는 옛적에 이미 정(定)을 얻었으나, 부처님의 이 매우 깊은 법을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능히 알지 못하고 자리에게 물러갔다.

이에 대가섭은 부처님께 아뢰었다.

“이 5백 비구는 옛적에 이미 정을 얻었음에도 이 깊은 법을 듣고 능히 알지 못하고서 곧 물러갔습니다.”

부처님은 대가섭에게 말씀하셨다.

“이 5백 비구는 높은 체하여 교만하기 때문에 이 샘이 업는 청정계를 능히 알지 못한 것이다. 이 말한바 법은 매우 깊고 미묘하여 여러 부처님의 도에서도 가장 깊고 미묘하나니 선근(善根)을 심지 못한 이와 악지식(惡知識)과 함께 서로 따르는 자의 능히 알바가 아니다. 이 5백 비구는 옛적 가섭(迦葉)여래가 세상에 출현하실 때에 모두 이학(異學)의 제자가 되었더니 가섭 여래의 설법하심을 들을 적에 계교와 집착이 있었기 때문에 한번 설법을 듣고 마음에 환희함을 얻었었다. 이 인연으로 죽어 목숨을 마치고 도리천상에 태어났으며 그곳에서 목숨을 마치고는 도로 인간에 태어나서 나의 법에 출가하여 도를 배운 것이다. 이 여러 비구는 소견에 장애가 되어 이 깊은 법을 들어도 능히 알지 못하였지만 지금에 처음 인연을 지었으므로 다시는 악취에는 나지 않을 것이요, 이 몸을 마치고는 응당 멸도(滅度)를 얻으리라.”

이에 부처님께서 존자 수보리(須菩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가서 저 5백 비구를 교화하라.”

수보리는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 5백 비구는 부처님의 교화도 받지 아니하거니 어찌 하물며 저희들이겠습니까.”

이에 부처님은 비구를 변화로 만들어 저 도중에 있게 하였었다.

5백 비구는 보고서 화현한 비구 처소에 나아가서 화현한 비구에게 물었다.

“현자(賢者)는 어느 곳으로 가고자 하나이까.”

화현한 비구는 대답하였다.

“산에 가서 편히 쉬고자 합니다. 무슨 까닭이냐 하면 아까 세존의 말씀한바 설법을 듣고 내 능히 알지 못한 때문입니다.”

말하였다.

“현자여, 우리들도 또한 세존의 설법을 듣고 능히 알지 못하고 공포가 있기에 산에 가 편히 쉬고자 합니다.”

화현한 비구는 말하였다.

“현자여, 이리 와서 같이 의논합시다. 다툼이 있어서는 아니됩니다. 사문의 법이 아닙니다. 현자들이여, 열반이라 칭함은 어떤 법을 열반이라 합니까. 이 몸에서 어떤 것이 중생이여, 어떤 것이 아(我)ㆍ인(人)ㆍ수명이며, 열반이며 어떤 법이 없어지면 문득 열반을 얻게 됩니까.”

5백 비구는 말하였다.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없어지면 문득 열반을 얻습니다.”

화현한 비구는 물었다.

“여러 현자여,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없어졌습니까. 이것이 없어지면 문득 열반을 얻는다고 말씀하는구려.”

5백 비구는 대답하였다.

“현자여, 음욕ㆍ성냄ㆍ어리석음이란 안에 있지도 않고 밖에 있지도 않고, 또 두 중간에 있지도 않으며, 또 생각함이 없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화현한 비구는 말하였다.

“그러므로 여러 현자는 응당 생각하지도 말며 또 돌이켜 생각하지도 말 것이니, 만일 생가하지도 아니하고 돌이켜 생각하지도 않는다면 물듦과 물듦 아닌 것이 없으리라. 만이 물듦과 물듦 아닌 것이 없으면 이를 쉬여 고요함이라 말하리라. 여러 현자여, 있는바 계(戒)의 몸도 또한 생김이 아니요, 또 열반이 아니며, 정(定)과, 지혜와, 해탈과, 지견(知見)의 몸도 또한 생함이 아니요, 또 열반이 아니니라. 여러 현자여, 이 5분(分) 법신(法身)으로 인하여 열반이라 말한다면 이 법은 멀리 떠난 것이어서 공하여 있는바 없고 취함도 끊음도 없느니라. 이와 같도다. 여러 현자여, 어찌 열반을 생각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 현자는 생각[想] 있음을 생각하지도 말고 생각 없는 것도 생각하지 말며, 또 끊는 생각과 없다는 생각도 하지 말 것이다. 만일 끊는 생각과 없다는 생각을 한다면, 이는 큰 반연이 됩니다. 여러 현자여, 만일 생각으로 아는 멸진정(滅盡定)에 든다면 이엔 짓는바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 법을 말할 때에 5백 비구가 모든 샘이 영원히 다하여 마음이 해탈함을 얻고 즉시 부처님 처소에 나아가서 머리를 부처님의 발에 조아리고 한 쪽에 물러가 앉았었다.

이에 존자 수보리는 여러 비구에게 물었다.

“여러 현자여, 아까는 어디에 갔으며 지금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여러 비구는 말하였다.

“존자 수보리여, 부처님의 말씀하신바 법은 가고 오는 것이 없습니다.”

수보리는 다시 물었다.

“여러 현자여, 스승은 누구입니까.”

여러 비구는 말하였다.

“생기지도 멸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수보리는 또 물었다.

“어떻게 법을 압니까.”

대답하였다.

“속박도 없고 해탈도 없습니다.”

수보리는 또 물었다.

“여러 현자여, 어떻게 해탈합니까.”

대답하였다.

“무명(無明)이 없어지면 밝음이 생깁니다.”

수보리는 또 물었다.

“여러 현자여, 누구의 제자입니까.”

대답하였다.

“말하자면 이와 같이 이와 같은 바른 지혜를 얻었습니다.”

수보리는 다시 물었다.

“여러 현자여, 어느 때에 멸도(滅度)하겠습니까.”

대답하였다.

“여래의 교화할 바가 열반이옵니다.”

수보리는 또 물었다.

“여러 현자여, 할 일을 이미 이루었습니까.”

대답하였다.

“나의 할바라는 것을 이미 모두 다 끊었습니다.”

수보리는 또 물었다.

“여러 현자여, 누구와 같이 범행을 닦습니까.”

대답하였다.

“3계(界)에 행하지 않습니다.”

수보리는 또 물었다.

“여러 현자여, 결박을 이미 없앴습니까.”

대답하였다.

“모든 법은 마침내 없어집니다.”

수보리는 또 물었다.

“여러 현자여, 마군을 항복했습니까.”

대답하였다.

“모든 음(陰)을 얻을 수 없습니다.”

수보리는 또 물었다.

“여러 현자여, 높은 교훈을 순종합니까.”

대답하였다.

“몸과 입과 뜻이 없습니다.”

수보리는 또 물었다.

“여러 현자여, 청정한 복전(福田)입니까.”

대답하였다.

“받음도 없고 또 받을 바도 없습니다.”

수보리는 또 물었다.

“여러 현자여, 나고 죽음을 벗었습니까.”

대답하였다.

“상견(常見)도 없고, 단견(斷見)도 없습니다.”

수보리는 또 물었다.

“여러 현자여, 복전(福田)의 땅에 향합니까.”

대답하였다.

“일체 모든 집착을 모두 이미 해탈했습니다.”

수보리는 또 물었다.

“여러 현자여, 어느 곳을 향해 갑니까.”

대답하였다.

“여래의 교화하시는 바를 딸습니다.”

이와 같이 존자 수보리가 묻고 5백 비구가 대답했다.

때에 저 대중이 듣고서 8백 비구는 모두 샘이 영원히 다하여 마음이 해탈함을 얻었으며, 3만 2천 사람은 티끌을 멀리하고 때[垢]를 떠나 법안(法眼)이 생기었었다.

이에 존자 수보리는 부처님께 아뢰었다.

“심히 기특하나이다, 심히 기특하나이다. 이 보엄경은 대승에 취향하는 모든 선남자(善男子)와 선여인(善女人)을 이익케 하고 발기하도록 하나이다.”

수보리는 다시 물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선남자와 선여인이 이 보엄경(寶嚴經)을 설한다면 얼마만한 복을 얻나이까.”

세존은 대답하셨다.

“만일 착한 남자나 착한 여인이 이 보엄경을 연설하여 남을 가르쳐 주거나경책을 서사하여 둔 곳에는 이것이 천상 천하에 가장 미묘한 탑과 절이 된 것이다. 만일 법사(法師)로부터 듣고 받아 지니며 독송하며 경책을 서사하는 자는 마땅히 법사 공경하기를 부처님과 같이 해야 한다. 만일 법사를 공경하며 공양하고 받들어 가지는 자라면 나는 그 사람을 수기하되 ‘반드시 위 없는 정진(正眞)의 도를 얻을 것이요, 목숨을 마칠 때에는 꼭 여래를 볼 것이며, 이 사람은 마땅히 열 가지의 몸이 청정함을 얻으리라’고 하노라. 무엇이 열이 되느냐. 첫째는 죽을 때에 기뻐하여 싫어함이 없음이요, 둘째는 눈에 보이는 것이 어지럽지 아니함이요, 셋째는 손이 떨리지 아니함이요, 넷째는 마음이 요란하지 아니함이요, 다섯째는 몸이 번요하지 아니함이요, 여섯째는 깨끗하지 못한 대소변을 실수하지 아니함이요, 일곱째는 마음이 더럽히지 아니함이요, 여덟째는 마음이 착란치 아니함이요, 아홉째는 손으로 허공을 잡지 아니함이요, 열째는 그 앉은 대로 목숨을 마침이니, 이를 열 가지 몸이 청정함이라 이르느니라.”

다시 가섭아, 마땅히 열 가지의 입이 청정함을 얻으리니, 무엇이 열이 되느냐. 첫째는 좋은 음성이요, 둘째는 부드러운 음성이요, 셋째는 즐거운 음성이요, 넷째는 사랑스런 음성이요, 다섯째는 부드럽고 평화한 음성이요, 여섯째는 걸림이 없는 음성이요, 일곱째는 존경스러운 음성이요, 여덟째는 받아지는 음성이요, 아홉째는 하늘이 받는 음성이요, 열째는 부처님이 받는 음성이니, 이를 열 가지의 입이 청정함이라 이르느니라.

다시 가섭아, 응당 열 가지의 뜻이 청정함을 얻으리니, 무엇이 열이 되느냐. 첫째는 성냄이 없어 남에게 성내지 아니함이요, 둘째는 원망하여 말 아니함이 없음이요, 셋째는 단점을 보지 아니함이요, 넷째는 결박됨이 없음이요, 다섯째는 전도(顚倒)한 생각이 없음이요, 여섯째는 마음에 게으름이 없음이요, 일곱째는 경계하고 방일하지 아니함이요, 여덟째는 뜻에 보시하기를 좋아하고 기쁘게 받음이요, 아홉째는 높은 체하여 교만하지 아니함이요, 열째는 감매정(定)을 얻어 일체 불법을 얻음이니, 이것이 열 가지의 뜻이 청정함이라 이르느니라.

다시 가섭아, 만일 항하(恒河) 모랫수의 국토에 가득찬 7보(寶)를 가지고 항하 모랫수와 같은 여러 부처님 여래 등정각(等正覺)과 및 제자들에게 공양하되 항하 모랫수와 같은 겁 동안 모든 것으로 보시하고 모시며, 열반하신 후에는 7보 탑을 세우더라도 이 선남자 선여인이 이 보엄경을 듣고 받아 지니며 외우고 남을 위하여 말해주고 비방하지 아니함만 같지 못하느니라. 만일 여인이 있어 이 경을 설한다면 마침내 악취(惡趣)에 떨어지지 않고 또 여자의 몸을 받지 아니하리라.

다시 가섭아, 만일 선남자 선여인이 있어 일체 보배로움과 미묘한 것으로써 이 경전에 공양하고자 하는 자는 마땅히 받아 지니고 독송하여 경책을 서사하고 남을 위하여 말해 줄 것이니, 이것이 이 경전에 공양함이 된다. 만일 받아 지니고 독송하며 서사하고 남을 위하여 말해 준다면 여러 부처님 여래께 공양함이 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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