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각자성반야바라밀다경(開覺自性般若波羅蜜多經) 제1권

개각자성반야바라밀다경(開覺自性般若波羅蜜多經)

개각자성반야바라밀다경(開覺自性般若波羅蜜多經) 제1권

역경(譯經)삼장 조산대부(朝散大夫) 시홍려경(試鴻臚卿)광범(光梵)대사 사자(賜紫)사문 신(臣) 유정(惟淨) 등 한역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왕사성 취봉산(鷲峰山)에서 대필추(大苾芻)들과 보살마하살들과 함께 계셨다.

이 때 부처님께서 존자 수보리(須菩提)에게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색(色)은 무성(無性)ㆍ가성(假性)ㆍ실성(實性)이고,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도 무성ㆍ가성ㆍ실성이다.

수보리야, 이와 같이 나아가 안색(眼色)과 안식(眼識), 이성(耳聲)과 이식(耳識), 비향(鼻香)과 비식(鼻識), 설미(舌味)와 설식(舌識), 신촉(身觸)과 신식(身識), 의법(意法)과 의식(意識)도 무성ㆍ가성ㆍ실성이다.

다시 수보리야, 색은 이 같은 세 가지 성품 속에서 어리석음을 전변하는데, 이와 같이 행하는 바를 마땅히 아는 것이 바로 보살의 올바른 행이다. 이와 같이 행하는 것이 보살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의 과(果)를 신속히 증득하는 것이다.

수보리야, 수ㆍ상ㆍ행ㆍ식도 이와 마찬가지다. 만약 보살마하살이 모든 식(識)의 무상법(無相法)을 이해하면, 고통이 저절로 그치면서 온갖 모습이 적정해지니, 이와 같이 행하는 바를 마땅히 아는 것이 바로 보살의 올바른 행이다. 이와 같이 행하는 것이 바로 보살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과(果)를 신속히 증득하는 것이다.”

이 때 세존께서 거듭 게송을 설하셨다.

만약 무상법(無相法)을 이해한다면,
온갖 고통이 저절로 그치고
온갖 상(相)도 모두 적정해지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행하는 것이다.

“다시 수보리야, 모든 색 속에서는 어둠과 밝음이 평등하게 의지(依止)하는데, 보살이 만약 실답게 요달해서 이것을 능히 이해해 들어갈 수 있다면, 모든 법도 이와 마찬가지다. 이것이 보살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과(果)를 신속히 증득하는 것이다.

수보리야, 수ㆍ상ㆍ행ㆍ식도 이와 마찬가지다. 모든 식 속에서 어둠과 밝음은 평등하게 의지하는데, 보살이 만약 실답게 요달해서 이것을 능히 이해해 들어갈 수 있다면 모든 법도 이와 마찬가지다. 이것이 보살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과를 신속히 증득하는 것이다.”

이 때 세존께서 거듭 게송을 설하셨다.

만약 법의 어둠과 밝음이
이와 같이 평등한 성품이라면,
의지하고 이해해 들어가서
자기를 알아서 보리를 얻으리라.

“다시 수보리야, 가령 보살마하살이 모든 색에서, 그리고 수ㆍ상ㆍ행ㆍ식에서 세 가지 성품으로 전변함을, 만약 지혜로운 자가 실답게 요달하여 식(識)에 대해서 집착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또한 전변을 나타내지 않아서 그 마음이 지혜[明]를 연다. 저 식에 대해서 집착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지혜를 열고 나면, 이는 곧 대승법(大乘法) 속에서 능히 출리(出離)한 것이니, 어찌 성문승(聲聞乘)과 연각승(緣覺乘)에 비하겠는가? 또 이처럼 집착을 일으키지 않아서 마음이 지혜를 연 것이기 때문에 지옥ㆍ축생ㆍ아귀ㆍ인(人)ㆍ천(天)의 모든 취(趣)의 오랜 생사의 고통을 받지 않는 것이다.

다시 수보리야, 색은 생(生)하는 것인가, 멸(滅)하는 것인가? 만약 색을 생함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 색은 곧 생함이 없는 것이고, 만약 색을 생함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 색은 곧 생함이 없는 자성[無生自性]이다. 만약 다시 보살이 저 색이 생함이 없는 자성이라는 걸 실답게 요달한다면, 이 때문에 색은 있다고 할 만한[可有] 생함이 없다.

수보리야, 수ㆍ상ㆍ행ㆍ식도 이와 마찬가지다. 식(識)은 생하는 것인가, 멸하는 것인가? 만약 식을 생함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 식은 곧 생함이 없는 것이고, 만약 식을 생함이 없는 것이라 말한다면 그 식은 곧 생함이 없는 자성일 뿐이다. 만약 다시 보살이 저 식이 생함이 없는 자성이라는 것을 실답게 요달한다면, 이 때문에 식은 있다고 할 만한 생함이 없다.

다시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색이 바로 나[我]이고 바로 내 것[我所]이라고 말한다면, 나는 이런 말을 하는 사람에게 바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나서 어리석은 범부나 이생(異生)의 삿된 견해의 분위(分位)1)라고 말하겠다.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수ㆍ상ㆍ행ㆍ식을 바로 나이고 바로 내 것이라고 말한다면, 나는 이런 말을 하는 사람에게 바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나서 어리석은 범부나 이생(異生)의 삿된 견해의 분위(分位)라고 말하겠다.

다시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색을 바로 선세(先世)의 인(因)으로 지어진 것이라 하거나, 혹은 대자재천(大自在天)의 화인(化因)으로 지어진 것이라 하거나, 혹은 인연이 없는 것[無因緣]이라 말한다면, 나는 이런 말을 하는 사람에게 바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나서 어리석은 범부나 이생의 삿된 견해의 분위라고 말하겠다.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수ㆍ상ㆍ행ㆍ식을 바로 선세(先世)의 인(因)으로 지어진 것이라 하거나, 혹은 대자재천의 화인(化因)으로 지어진 것이라 하거나, 혹은 인연이 없는 것이라 말한다면, 나는 이런 말을 하는 사람에게 바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나서 어리석은 범부나 이생의 삿된 견해의 분위라고 말하겠다.

다시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색은 색상(色像)을 특징[相]으로 하고, 수(受)는 받아들이는 것[領納]을 특징으로 하고, 상(想)은 두루 아는 것[遍知]을 특징으로 하고, 행(行)은 짓는 것[造作]을 특징으로 하고, 식(識)은 요별(了別)을 특징으로 한다고 이와 같이 말한다면, 나는 이런 말을 하는 사람에게 바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나서 어리석은 범부나 이생의 삿된 견해의 분위라고 말하겠다.

다시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고통은 적정(寂靜)이 아니니, 만일 저 색을 멸해야 이 즐거움이 적정하다고 말한다면, 나는 이런 말을 하는 사람에게 바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나서 어리석은 범부나 이생의 삿된 견해의 분위라고 말하겠다.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수ㆍ상ㆍ행ㆍ식도 마찬가지이며, 이 고통은 적정이 아니니, 만일 저 식(識)이 멸해야 이 즐거움이 적정하다고 말한다면, 나는 이런 말을 하는 사람에게 바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나서 어리석은 범부나 이생의 삿된 견해의 분위라고 말하겠다.

다시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저 색은 무(無)이고, 수ㆍ상ㆍ행ㆍ식도 모두 무(無)라고 말한다면, 나는 이런 말을 하는 사람에게 바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나서 어리석은 범부나 이생의 삿된 견해의 분위라고 말하겠다.

다시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부처님께서 설하셨듯이 색은 자성(自性)이 없어서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不生不滅], 본래부터 적정한 자성의 열반[本來寂靜自性涅槃]이다’라고 말한다면, 이런 말을 하는 자는 저 일체 법에서 화합도 없고 낙욕(樂欲)도 없다는 그 말에 따라 지해(知解)를 지은 것이다. 나는 바로 이런 사람에게 벗어나도 한참 벗어나서 어리석은 범부나 이생의 삿된 견해의 분위라고 말하겠다.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수ㆍ상ㆍ행ㆍ식도 마찬가지라고 하면서 ‘부처님께서 설하셨듯이 모두 자성이 없어서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본래부터 적정한 자성의 열반이다’라고 말한다면, 이런 말을 하는 자는 저 일체 법에서 화합도 없고 낙욕(樂欲)도 없다는 그 말에 따라 지해(知解)를 지은 것이다. 나는 이런 사람에게 바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나서 어리석은 범부나 이생의 삿된 견해의 분위라고 말하겠다.

다시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색을 있다[有]고 헤아리면, 색에 대해 집착해서 생기하는 바가 있는 것이라서 언설에 따른 전변[轉]이다. 또다시 색을 있다고 헤아리면, 곧 저 잡염(雜染)의 색에 대해 의지하는 것이라서 유상(有相)에 따른 전변이다. 다시 색을 있다고 헤아리면, 곧 저 청정한 법을 닦은 색에 대해 따라서 전변함[隨轉]을 성립시키는 것이다.

수보리야, 수ㆍ상ㆍ행ㆍ식도 이와 마찬가지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식(識)을 있다고 헤아리면, 일어남이 있는 식에 집착하는 것이니, 언설에 따른 전변이다. 또다시 식을 있다고 헤아리면, 곧 잡염의 저 식에 대해 의지하는 것이라서 유상(有相)에 따른 전변이다. 또다시 식을 있다고 헤아리면, 곧 청정한 법을 닦은 식에 대해 따라서 전변함을 성립시키는 것이다.

다시 수보리야, 만약 모든 보살이 색을 있다고 헤아리면, 저 색에 대해서 끊음도 있고 앎도 있어서 대락(大樂)의 행에서 언설이 갖추어지므로유(有)에 따라 전변하게 된다. 또 모든 보살이 색을 있다고 헤아리면, 저 색에 대해서 끊음도 있고 앎도 있어서 표시도 하고 이루기도 하므로 유(有)에 따라 전변하게 된다.

또 모든 보살이 색을 있다고 헤아리면, 저 색에 대해서 능히 요달해 앎으로써 백법(白法)이 구족된다. 이른바 모든 법에 대해 자재로움을 얻어서 대락(大樂)의 행으로써 능히 따라서 전변하는 것이다.

수보리야, 수ㆍ상ㆍ행ㆍ식도 이와 마찬가지다. 만약 모든 보살이 수ㆍ상ㆍ행ㆍ식을 있다고 헤아리면, 저 식에 대해서 끊음도 있고 앎도 있어서 대락의 행에서 언설이 갖추어지므로 유(有)에 따라 전변하게 된다. 또 모든 보살이 식을 있다고 헤아리면, 저 식 안에서 끊음도 있고 앎도 있어서 표시도 하고 이루기도 하므로 유(有)에 따라 전변하게 된다. 또 모든 보살이 식을 있다고 헤아리면, 저 식에 대해서 능히 요달해 앎으로써 백법(白法)이 구족된다. 이른바 모든 법에 대해 자재로움을 얻는 것이니, 대락(大樂)의 행으로써 능히 따라서 전변하는 것이다.

다시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색 속에서 색의 모든 분량(分量)과 고(苦) 속에서 고(苦)의 모든 분량을 실답고 평등하게 관(觀)하지 못하면, 곧 색에 대해서 내가 얻는 바가 있는 것이다. 만약 색에 대해서 내가 얻는 바가 있다면 곧 색에 대해서 나의 견해가 얻는 바가 있는 것이며, 만약 색에 대한 나의 견해가 얻는 바가 있다면 곧 색에 대해서 중생의 견해[衆生見]가 얻는 바가 있는 것이며, 만약 색에 대한 중생의 견해가 얻는 바가 있다면 곧 색에 대한 저 중생의 견해라서 얻는 바가 없는 것이며, 만약 색에 대해서 저 중생의 견해가 얻는 바가 없을 때는 곧 저 중생도 역시 얻는 바가 없는 것이다. 만약 혹시 법에 얻는 바의 상(相)이 성립할 수 있다면 곧 얻는 바의 상(相)이 있고 의지함이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저 성문승과 연각승으로는 능히 출리(出離)할 수 없는 것이니, 어찌 대승과 비견하겠는가?

수보리야, 수ㆍ상ㆍ행ㆍ식도 이와 마찬가지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식(識) 속에서 식의 모든 분량과 고(苦) 속에서 고(苦)의 모든 분량을 능히 실답고 평등하게 관하지 못하면, 곧 식에서 내가 얻는 바가 있는 것이다. 만약 식에서 내가 얻는 바가 있다면 곧 식에서 나의 견해가 얻는 바가 있는 것이며, 만약 식에서 나의 견해가 얻는 바가 있다면 곧 식에서 중생의 견해가 얻는 바가 있는 것이며, 만약 식에서 중생의 견해가 얻는 바가 있다면 곧 식에서 저 중생의 견해라서 얻는 바가 없으며, 만약 식에서 저 중생의 견해가 얻는 바가 없을 때는 곧 저 중생도 얻는 바가 없다. 만약 혹시 법에 얻는 바의 상(相)이 성립할 수 있다면 곧 얻는 바의 상(相)이 있고 의지함이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저 성문승과 연각승으로는 능히 출리(出離)할 수 없는 것이니, 어찌 대승과 비견하겠는가?

다시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색 속에서 색의 모든 분량과 고(苦) 속에서 고(苦)의 모든 분량을 능히 실답고 평등하게 관할 수 있다면, 곧 색에서 내가 얻는 바가 없는 것이다. 만약 색에서 내가 얻는 바가 없다면 곧 색에서 나의 견해가 얻는 바가 없는 것이며, 만약 색에서 나의 견해가 얻는 바가 없다면 곧 색에서 중생의 견해가 얻는 바가 없는 것이며, 만약 색에서 중생의 견해가 얻는 바가 없다면 곧 색에서 저 중생의 견해라서 얻는 바가 있는 것이며, 만약 색에서 저 중생의 견해가 얻는 바가 있을 때는 곧 저 중생도 얻는 바가 있는 것이다. 만약 혹시 법에 얻는 바의 상(相)이 성립할 수 있으면, 곧 얻는 바의 상이 있고 의지함이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저 성문승과 연각승으로는 능히 출리할 수 없는 것이니, 어찌 대승과 비견하겠는가?

수보리야, 수ㆍ상ㆍ행ㆍ식도 이와 마찬가지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식 속에서 식의 모든 분량과 고(苦) 속에서 고(苦)의 모든 분량을 능히 실답고 평등하게 관할 수 있다면, 곧 식에서 내가 얻는 바가 없는 것이다. 만약 식에서 내가 얻는 바가 없다면 곧 식에서 나의 견해가 얻는 바가 없는 것이며, 만약 식에서 나의 견해가 얻는 바가 없다면 곧 식에서 중생의 견해가 얻는 바가 없는 것이며, 만약 식에서 중생의 견해가 얻는 바가 없다면 곧 식에서 저 중생의 견해라서 얻는 바가 있는 것이며, 만약 식에서 저 중생의 견해가 얻는 바가 있을 때는 곧 저 중생도 얻는 바가 있는 것이다. 만약 혹시 법에 얻는 바의 상이 있어서 성립할 수 있다면, 곧 얻는 바의 상도 있고 의지함도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저 성문승과 연각승으로는 출리할 수 없는 것이니, 어찌 대승과 비견하겠는가?

다시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색에서 능히 실답고 평등하게 관찰할 수 없다면, 분별의 분량과 의동(疑動)의 분량이 실답지 않기 때문에 색 안에서는 색으로 얻는 바가 있다. 만약 색에서 색으로 얻는 바가 있다면 곧 색에서 색견(色見)으로 얻는 바가 있는 것이며, 만약 색에서 색견으로 얻는 바가 있다면 곧 색에서 중생이 얻는 바가 있는 것이며, 만약 색에서 중생이 얻는 바가 있다면 곧 색에서 일체가 얻는 바가 있는 것이며, 만약 일체가 얻는 바가 있을 때는 곧 일체가 얻는 바가 없는 것이다. 만약 혹시 법에 얻는 바의 상이 있어서 성립할 수 있다면, 곧 얻는 바의 상이 있고 의지함이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저 성문승과 연각승으로는 출리할 수 없는 것이니, 어찌 대승과 비견하겠는가?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수ㆍ상ㆍ행ㆍ식 안에서 실답고 평등하게 관찰할 수 없다면, 분별의 분량과 의동(疑動)의 분량이 실답지 않기 때문에 식에서 식으로서 얻는 바가 있다. 만약 식에서 식으로 얻는 바가 있다면 곧 식에서 식견(識見)으로 얻는 바가 있는 것이며, 만약 식에서 식견으로 얻는 바가 있다면 곧 식에서 중생이 얻는 바가 있는 것이며, 만약 식에서 중생이 얻는 바가 있다면 곧 식에서 일체가 얻는 바가 있는 것이며, 만약 식에서 일체가 얻는 바가 있을 때라면 곧 일체가 얻는 바가 없는 것이다. 만약 혹시 법에 얻는 바의 상이 있어서 성립할 수 있다면, 곧 얻는 바의 상도 있고 의지함도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저 성문승과 연각승으로는 출리할 수 없는 것이니, 어찌 대승과 비견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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