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전 제06권
2. 의해 ③
01) 석혜원(釋慧遠)
혜원의 성은 가(賈)씨이며 안문(雁門)의 누번(婁煩)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하고, 주옥같은 문장 솜씨가 뛰어났다. 열세 살에 외삼촌인 영호(令狐)씨를 따라 허·락(許洛: 許昌과 洛陽)에 유학하였다. 그러므로 어려서부터 여러 서생들을 위하여 널리 6경(經)을 종합해 연구하였다. 게다가 『노자』와 『장자』에도 빼어났다.
성품과 도량이 넓으며 기풍과 조감(照鑑)이 밝고 빼어났다. 비록 오래 공부한 선비로서 뛰어난 이라 할지라도, 그의 깊은 조예에 감복하지 않음이 없었다.
스물한 살에 강남을 건너 범선자(范宣子)에게 나아가, 함께 세상을 피해 숨자고 약속하려 하였다. 마침 석호(石虎)는 이미 죽었고 중원은 난리가 일어나, 남쪽 길이 막혀서 뜻을 이룰 수 없었다.
당시에 사문 도안(道安)이 태행산맥의 항산(恒山)에 절을 세웠다. 불법을 널리 찬양하여 명성이 매우 뚜렷하게 알려졌다. 혜원은 마침내 그를 찾아가 귀의하였다. 한번 만나자마자 공경을 다하여 진정한 나의 스승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후 도안의 『반야경』 강의를 듣고 툭 트이면서 깨달아 곧 탄식하였다.
“유학이나 도가 등의 구류(九流)는 모두가 쌀겨와 술지게미에 지나지 않는다.”
곧 아우인 혜지(慧持)와 함께 비녀[簪: 선비의 상투에 꽂는 비녀]를 팽개치고, 머리를 깎고서 목숨을 바쳐 수업하였다. 이미 불도의 문에 들어와서는 우뚝 드러나 무리에서 벗어났다. 항상 불법의 벼리를 모두 거둬들이고자 대법(大法: 대승법)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정밀하게 생각하고, 외우며 간직하기를 밤으로 낮을 이었다.
가난한 나그네라 자본이 없어 늘 따뜻한 비단옷을 입지 못하였다. 그러나 혜원과 혜지, 두 형제가 삼가하고 공손하여 시종 게으르지 않았다. 사문 담익(曇翼)이 늘 등불과 촛불의 비용을 공급해 주었다. 도안이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면서 말하였다.
“담익도사는 참으로 사람을 알아보는 인물이다.”
혜원은 지혜가 전생의 인연에 바탕을 두었고, 수승한 마음을 오랜 세월[曠劫]토록 일으켰다. 그러므로 정신이 빼어나게 뛰어넘고, 근기의 조감(照鑑)은 멀고도 깊었다. 도안은 항상 그를 찬탄하였다.
“우리 동쪽 중국에 도를 유통하게 하는 것은 아마도 혜원에게 달려 있을 것이다.”
나이 스물네 살에 곧 강설의 자리에 나아갔다. 어느 날 어떤 손님이 강론을 듣다가 실상(實相)의 뜻을 질의하여, 혜원과 문답을 주거니 받거니 하였다. 그 손님은 시간이 지날수록 의문 나고 어두운 부분이 더욱 많아졌다. 혜원이 곧 『장자(莊子)』의 내용을 인용하여 비슷하게 연계시켰다. 이에 의혹을 품던 이가 환하게 깨달았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도안은 세속의 책을 덮어두지 않았으면 하는 혜원의 바람을 특별히 들어주었다.
도안의 제자에 법우(法遇)·담휘(曇徽)가 있었다. 모두 풍채와 재주가 환하게 빛나고, 지조와 업이 맑고 민첩하였다. 둘 다 혜원을 추대하고 감복하였다.
그 후 도안을 따라 남쪽 번면(樊沔)지방을 떠돌아다녔다.
위진(僞秦, 符堅이 세운 나라)의 건원(建元) 9년(373)에 진(秦)의 장군 부비(符丕)가 양양(襄陽)을 침략하여 합병하였다. 도안은 주서(朱序)에게 끌려가서 길을 떠날 수 없었다.
이에 마침내 대중을 나누어 각기 갈 곳을 따라 떠났다. 떠나는 길에 임하여 모든 장로대덕[長德]들은 도안으로부터 가르침과 약속을 받았다. 그러나 혜원은 한 마디의 가르침도 받지 못하였다. 이에 꿇어앉아 말씀드렸다.
“저에게만 홀로 훈계와 도움의 말씀이 없으십니다. 저는 사람의 예가 아닌 성싶어 두렵습니다.”
도안은 말하였다.
“그대와 같은 사람에게 어찌 다시 근심할 일이 있겠는가?”
혜원은 이에 제자 수십 명과 함께 남쪽 형주(荊州)로 가서 상명사(上明寺)에 머물렀다.
그 후 나부산(羅浮山)으로 가고자 심양(?陽)에 이르렀다. 여산(廬山)의 봉우리가 맑고 고요해 마음을 쉴 만하다 싶어서, 비로소 용천정사(龍泉精舍)에 머물렀다. 이 곳은 물과의 거리가 크게 멀었다. 혜원이 곧 지팡이로 땅을 두드리며 말하였다.
“만약 이 곳이 우리가 깃들어 머물 만한 곳이라면, 곧 썩은 땅에서라도 샘물을 뽑아 주십시오.”
말이 끝나자 맑은 물이 솟아 나와 금방 개울을 이루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심양 땅에 큰 가뭄이 들었다. 그가 멀리 못 옆으로 가서 『해룡왕경(海龍王經)』을 읽었다. 그러자 갑자기 거대한 뱀이 못에서 공중으로 올라갔다. 잠시 후 큰 비가 내렸다. 그 해는 풍년이 들었다. 그러므로 그대로 거처하던 곳의 호로 삼아 ‘용천정사(龍泉精舍)’라 하였다.
당시 사문 혜영(慧永)이 서림(西林)에 자리 잡았다. 혜원과는 동문제자로 예전부터 친한 사이였다. 그가 혜원에게 요청하여 마침내 함께 머물렀다. 이때 혜영은 자사(刺史) 환이(桓伊)에게 말하였다.
“혜원은 바야흐로 불도를 널리 펼칠 만한 인물입니다. 지금 문도의 권속들이 이미 광범해지고, 찾아오는 사람도 바야흐로 많습니다. 그러나 빈도가 깃들어 있는 곳은 비좁아서 서로 거처할 만한 곳이 못됩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에 환이는 곧 혜원을 위하여 다시 여산(廬山)의 동쪽에 승방과 불전을
건립하였다. 동림사(東林寺: 여산의 東南方에 있는 大刹·淨土宗의 本據地)가 그 곳이다.
혜원이 처음 정사를 조성할 때 산수의 아름다움을 훤히 다하였다. 뒤로는 향로봉(香爐峯)을 등에 업고, 옆으로는 폭포가 떨어지는 구렁을 끼었다. 바위에 의지하여 기단을 쌓고, 소나무로 집을 마름하고 얽었다. 맑은 개울물이 섬돌을 에워싸고, 흰 구름이 방에 가득하였다.
다시 절 안에 따로 선림(禪林)을 설치하였다. 빽빽한 숲에는 아지랑이가 엉키고, 널찍한 바위자리에는 이끼가 꼈다. 보고 밟는 모든 사람들은 다 정신이 맑아지고 기분이 엄숙해졌다.
혜원이 듣기에 천축국에 부처님의 영상(影像)이 있다고 하였다. 이는 부처님께서 예전에 독룡(毒龍)을 교화하실 때 남기신 영상이다. 북천축국(北天竺國) 월지국(月氏國) 나갈가성(那竭呵城)의 남쪽 옛 신선의 석실 속에 있으며, 지나는 길은 고비 사막에서 서쪽 15,850리에 있다. 매양 기쁜 감회가 가슴에 교차하여, 뜻을 세워 우러러 그 영상을 늘 한번 보고자 하였다. 때마침 서역의 도사가 있어 그 빛나는 모습을 말해 주었다.
혜원은 이에 산을 등지고 물을 마주한 곳에 감실(龕室)을 만들어 지었다. 미묘한 솜씨를 지닌 그림쟁이를 시켜 담담한 채색으로 그림을 그렸다. 빛깔이 허공을 쌓은 듯하고, 바라보면 연가나 안개와도 같았다. 빛나는 형상이 밝고 아름다워, 숨어 있는가 하면 뚜렷이 나타났다. 혜원이 이에 곧 명(銘)을 지었다.
[하나]
넓고도 크도다. 부처님이여,
진리는 현묘하나 이름이 없어라.
신이 되어 변화하시어
그림자 떨어져 몸을 떠났네.
층층바위에 빛으로 돌아와
빈 정자에 그림자로 엉킨다.
그늘졌어도 어둡지 않고
어둘수록 더욱 밝아져
하늘하늘 허물 벗은
모든 신령의 조종이라
감응 같지 않아
자취 아득하게 끊어졌네.
廓矣大像 理玄無名
體神入化 落影離形
廻暉層巖 凝映虛亭
在陰不昧 處闇逾明
婉步蟬? 朝宗百靈
應不同方 迹絶杳冥
[둘]
아득하게 빈 우주에
권하거나 장려하지도 않아
맑고 빈 듯한 모습 그려내어
허공을 쓸어 모습을 전하네.
상호 갖추어지고 몸은 미묘하여
치솟는 자태 스스로 밝다.
흰 터럭은 빛을 토해
어두운 밤중에도 상쾌하다.
정성이 사무치면 곧 응하고
정성으로 두드리면 메아리 일으키네.
남기신 음성 산굴에 머물러 있어
깨달음의 나루에서 남몰래 완상하네.
만남의 기약이야 있다지만
전생에는 이루어지지 않는 공덕이런가.
茫茫荒宇 靡勸靡?
淡虛寫容 拂空傳像
相具體微 ?姿自朗
白毫吐曜 昏夜中爽
感徹乃應 ?誠發響
留音停岫 津悟冥賞
撫之有會 功不由?
[셋]
발꿈치 돌려 공경함을 잊고
생각하거나 의식하지 않아
해와 달과 별은 빛을 감추어
온갖 모습들 한 빛깔이라네.
뜰과 집에는 어둠이 자욱하여
돌아갈 길 헤아릴 수 없어라.
텅 비움으로 이를 깨닫고
힘으로 이를 열어
지혜의 바람 비록 멀어도
티끌 번뇌 쉬게 하니
성인의 그윽한 살핌이
누가 그 극치로 부채질하나
旋踵忘敬 罔慮罔識
三光掩暉 萬像一色
庭宇幽? 歸途莫測
悟之以靖 開之以力
慧風雖遠 維塵攸息
匪聖玄覽 孰扇其極
[넷]
희유한 음성 멀리 흘러와
마침내 동방을 돌아보시니
기풍을 기뻐하고 도를 사모하여
우러러 현도를 모범으로 삼는다.
붓끝의 오묘함 다하여
흰 비단에 미묘하게 운용하고
텅 비운 경지 기탁하니
하늘의 안개처럼 어리어리.
자취는 참모습을 본떴으니
진리는 그럴수록 깊어간다.
기묘한 흥취에 옷깃을 열고
상서로운 바람 길을 인도하네.
맑은 기운 마루처마를 돌고
어둠이 교차한 아직 먼 새벽
흡사 신묘한 용모를 빼닮으니
공경한 만남을 방불케 하네.
希音遠流 乃眷東顧
欣風慕道 仰規玄度
妙盡毫端 運微輕素
託綵虛凝 殆映?霧
迹以像眞 理深其趣
奇興開衿 祥風引路
淸氣廻軒 昏交未曙
??神容 依稀欽遇
[다섯]
이에 명하고 이를 그려서
무얼 영위하고 무얼 구하겠냐만
신께서 들어주시어
그대 닦음 비추어
이 티끌세상의 자욱에다
저 그윽한 흐름 비추기를 바라노라.
맑고 신령한 못에서 양치질하고
화기를 마셔 부드러움에 이르리.
허공을 비추고 가려 감응하여
지혜 내리시어 마침내 두루하리.
깊은 그리움 남몰래 전하며
신의 노님 그윽이 상상하여
목숨 다하도록 뵐 수만 있다면
온갖 근심 길이 떠날 터인데.
銘之圖之 曷營曷求
神之聽之 鑒爾所修
庶玆塵軌 映彼玄流
漱淸靈沼 飮和至柔
照虛應簡 智落乃周
深懷冥託 宵想神遊
畢命一對 長謝百憂
또한 예전에 심양의 도간(陶侃: 東晋의 名將)이 광주(廣州)에 주둔하러 지나갈 때의 일이다. 어떤 어부가 바다 가운데서 저녁마다 신비한 광명이 아름답게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열흘이 지나자 더욱 그 광명이 크게 일어났다. 이상하게 생각하여 도간에게 아뢰니, 도간이 그곳에 가서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것은 바로 아육왕(阿育王)이 조성한 불상에서 일어나는 광명이었다.
이에 그는 이 불상을 영접해 돌아와서 무창(武昌)의 한계사(寒溪寺)로 보냈다. 한계사의 주지인 승진(僧珍)이 어느 날 하구(夏口)에 갔다가 밤에 꿈을 꾸니, 절이 화재를 만났다. 이 불상을 모신 집만 홀로 용신(龍神)이 에워쌌다.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승진이 달려서 절로 돌아와 보니, 절은 이미 모두 불타버리고, 오직 이 불상을 모신 집만 남았다.
그 후 도간이 주둔지를 다른 곳으로 옮길 때에, 이 불상에 위엄스러운 영험이 있다고 하여 사자를 보내어 영접하였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불상을 들어 강가에 이르러 배에 올려놓자, 배가 거푸 뒤집혀 침몰하였다.
이에 사자는 무섭고 두려워 돌아왔고, 끝내 불상을 싣고 오지 못했다. 도간은 어려서부터 씩씩한 무인의 기질이 뛰어났으나, 평소에 신심이란 거의 없었다. 그런 까닭에 형주와 초나라 일대에서 이를 빗대어 노래가 불려졌다.
도간은 오직 검의 영웅
불상은 신령함을 드러내네.
구름이 진흙땅 위로 날아가니
아득함이 어찌 그리도 멀고 멀까?
정성으로는 이룰 수 있어도
힘으로 부르기는 어렵다네!
陶惟劍雄 像以神標)
雲翔泥宿 邈何遙遙
可以誠致 難以力招
그 후 혜원이 절을 창건하여 이미 이루어지자, 마음으로 받들고자 기원하며 청하였다. 곧 바람에 날리듯 불상이 저절로 가벼워져서, 가고 오는데 지장이 없었다. 이에 사람들은 비로소 혜원에게 신령한 감응이 있음을 알았다. 그러니 그 증거가 민간을 떠도는 노래에 남은 것이다.
이에 대중들을 거느리고 밤에서 새벽까지 끊임없이 불도에 정진하였다. 그리하여 석가모니부처님이 남기신 교화가 여기에서 다시 일어났다.
이윽고 부지런히 계율을 지키며 번뇌의 마음을 쉬려는 선비와, 티끌세상을 끊고 맑은 믿음을 지닌 손님들이 모두 기약 없이 찾아왔다. 멀리서도 도풍을 바라보고 모여들었다.
팽성(彭城)의 유유민(劉遺民)·예장(豫章)의 뇌차종(雷次宗)·안문(雁門)의 주속지(周續之)·신채(新蔡)의 필영지(畢穎之)·남양(南陽)의 종병(宗炳)·장래민(張萊民)·장계석(張季碩) 등도 모두 세속과 영화를 버리고, 혜원에 귀의하여 노닐었다.
이에 혜원은 곧 정사의 아미타불앞에 재(齋)를 건립하였다. 서원을 세워 함께 서방정토에 태어나기를 빌었다. 그리고는 유유민(劉遺民)에게 그 글을 짓게 하였다.
“유세(維歲) 섭제격(攝提格: 古甲子의 寅年) 칠월(七月) 무진삭(戊辰朔: 초하루날의 日辰) 28일 을미(乙未)일에, 법사 석혜원은 곧은 감흥이 그윽하고 멀게, 묵은 심회가 특별히 일어났습니다.
마침내 목숨을 이으려는 동지와 번뇌를 쉬게 한, 곧은 신심의 선비 123명과 여산의 북쪽 반야대정사(般若臺精舍) 아미타불 불상 앞에 모였습니다. 다 함께 향화를 올리면서 공경히 서원하옵니다. 오직 이 한 모임의 대중들이 무릇 시주하는 이치가 밝다면, 삼세(三世)의 이어짐이 드러날 것입니다. 감응을 옮길 수 있는 운수와 부합한다면, 선악의 보응도 반드시 일어날 것입니다.
공경히 손을 잡고 숨겨져 가라앉은 이치를 미루어, 무상(無常)의 시기가
절박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삼보(三報)의 서로 무너짐을 살펴, 험한 세계에서 몸을 뽑아내기 어려움을 알았습니다. 이곳의 여러 뜻을 같이하는 현인들은 그런 까닭에 저녁에는 두려워하고, 아침에는 부지런히 하여, 우러러 제도할 것을 생각하나이다.
무릇 신(神)이라는 것은 감응으로는 교섭할 수 있어도, 자취로는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이에 감응하는 사물이 있으면 어두운 길도 지척입니다. 그렇지만 만약 이를 찾더라도 주체가 없다면, 멀고 아득한 황하의 나루가 될 것입니다.
지금 다행히 도모하지 않았는데도, 모든 사람이 마음을 서방정토에 두었습니다. 책을 두드리고 믿음을 열어서, 밝은 마음이 천연적으로 일어났습니다. 마침내 기연의 모습은 꿈에 그리던 것에 통하고, 흐뭇한 기쁨은 집 나간 아들이 찾아온 것보다 백 배나 더 합니다.
이에 신령한 그림은 빛을 드러내고, 그림자는 신의 조화와 짝을 이루었습니다. 공덕은 진리로 말미암아 함께 하였습니다. 이 일은 사람이 운용한 것이 아닙니다. 진실로 하늘이 그 정성을 열어서 보이지 않는 운이 모인 것입니다. 그러니 사사로운 마음을 이겨내어 정밀하게 생각하기를 거듭하여, 그러한 생각들을 모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의 크고 빛나는 업적은 들쑥날쑥하며 공덕은 한결같지 않습니다. 비록 새벽의 기원은 같았다 하더라도, 저녁에 돌아가는 곳은 현격한 거리가 있습니다. 이것이 곧 우리의 스승과 벗들이 돌아보아 참으로 슬퍼할 만한 일이니, 이 때문에 강개함에 젖습니다.
운명을 기다리며 법당에서 옷깃을 바로잡고, 다같이 한 마음을 베풉니다. 그윽함의 극치에 회포를 머물고서, 이 동지들이 멀리 떨어진 세계에서 함께 노닐기를 맹세하옵니다.
놀랍게도 무리에서 뛰어난 사람이 나와 가장 먼저 신령한 세계에 오를 수 있습니다. 그럴 경우 구름 위 높은 산에서 홀로 거룩하여, 그윽한 골짜기에서 함께 보전하자는 맹세를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앞서 나아간 이들이라면, 뒤에 오는 이들과 더불어 힘써 채찍질하여 나아가는 도리를 생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미묘하게 부처님의 자태를 관하여, 마음을 열어 곧게 비출 수 있습니다. 그런다면 깨달음으로 알음알이가 새로워지고, 교화로 말미암아 몸이 바뀔 것입니다. 연꽃을 흐르는 물 속에 깔개로 삼거나, 옥구슬 나뭇가지 그늘에서 시를 읊으며, 구름옷을 팔방에 표표히 나부끼거나, 향기로운 바람에 떠다니면서 삶을 다 미칠 것입니다.
몸은 편안함을 잊되 더욱 편안하고, 마음은 즐거움을 뛰어넘되 저절로 기쁠 것입니다. 3도(途)에 다다르더라도 멀리 그곳을 떠나고, 하늘 궁전에서 오만하게 속세와는 길이 이별할 것입니다. 뭇 신령의 뒤를 따라, 그 법도를 이어 태식(太息: 궁극의 休息)을 지향하기를 기약할 것입니다. 이 도리를 궁구하는 일이 어찌 크지 않겠습니까?”
혜원은 고상한 풍모에다 엄숙하고 행동거지가 방정하고 곧았다. 바라보는 이들 누구나 마음과 몸이 떨려 두려워하지 않음이 없었다.
한번은 어느 사문이 대나무로 만든 여의(如意: 講說에 쓰는 僧具)를 가지고, 그것을 혜원에게 바치고자 산에 들어와 이틀 밤을 묵었다. 그러나 끝내 말을 하지 못하였다. 가만히 구석자리에 머물다가 말없이 그곳을 떠났다.
혜의(慧義)란 법사는 강직하고 올바른 이로서 두려워하는 일이 적었다. 산에 찾아가면서 혜원의 제자인 혜보에게 말하였다.
“여러분은 범용한 재주를 지닌 사람이라서, 혜원의 풍모만 바라보고도 추대하여 복종한다. 이제 시험 삼아 내가 어떻게 하는지 한번 보라!”
산에 이르러 혜원이 『법화경』을 강의하는 때를 만나, 늘 어려운 질문을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때마다 마음이 떨리고 땀이 흘러내렸다. 끝내 감히 말하지 못했다. 산에서 나와 혜보에게 말하였다.
“정녕코 놀라운 분일세.”
그가 남들을 굴복하고 대중을 덮는 것이 이와 같았다.
은중감(殷仲堪)이 형주로 가는 길에 이 산을 지나다가 공경을 표시하였다. 혜원과 더불어 북쪽 개울에서 『주역』의 바탕을 논하였다. 해가 저물도록 싫증내지 않았다. 이에 찬탄하였다.
“식견이 진정 깊고도 밝구나. 참으로 그와 같이 되기란 거의 어려운 일이다.”
사도(司徒) 왕밀(王謐)과 호군(護軍) 왕묵(王?) 등도 모두 그의 풍모와 덕을 공경하고 사모하여, 멀리서 스승으로 공경하는 예를 보내었다. 왕밀은 편지를 보냈다.
“나이는 이제 막 40줄에 접어들었지만, 노쇠하기는 60세 노인과 같습니다.”
혜원이 회답하였다.
“옛사람들은 사방 한자나 되는 구슬을 아끼지 않고, 극히 짧은 순간 순간을 무겁게 여겼습니다. 그대가 품고 계신 바를 살피건대, 나이 들도록 살지 못할까 염려하는 것 같군요. 시주께서 순리를 밟아 본성에 노닐거나, 부처의 이법을 타고 마음을 부려서, 이와 같이 하기를 미루어 간다면, 다시 어찌 나이가 더하기를 부러워하겠소이까? 애오라지 이러한 이치를 생각하기를 오래하노라면, 어느새 깨달음을 터득할 것입니다. 부쳐 오신 소식에 답장 드릴 뿐입니다.”
노순(盧循)이 처음 남쪽으로 내려와 강주성에 있을 때, 산에 들어와 혜원을 찾았다. 혜원은 어릴 때 노순의 부친인 노하(盧瑕)와 함께 서생으로 지냈다. 그리하여 노순을 만나자 기뻐하면서 옛 이야기를 나눴다. 이로 인하여 아침저녁으로 소식을 주고받았다. 이에 어떤 승려가 혜원에게 간하였다.
“노순은 나라의 외적입니다. 그와 교분을 두터이 나누시면 의혹을 사지 않겠습니까?”
혜원이 말하였다.
“우리 불법에는 감정으로 취하고 버리는 법이 없다. 어찌 알 만한 이들이 살피지 못하겠는가? 이는 두려워할 만한 것이 못 된다.”
그 후 송의 무제(宋武帝, 420~422)가 노수를 토벌하고자 뒤쫓아 와서, 상미(桑尾)에 장막을 설치하였다. 측근들이 말하였다.
“혜원은 평소 여산의 주인인데, 노순과 교유가 두터웠습니다.”
송의 무제가 말하였다.
“혜원은 세상 밖의 사람이다. 반드시 나와 남이란 차별은 없는 이이다.”
곧 사신을 파견하여 편지를 보내 공경의 뜻을 표시하였다. 아울러 돈과 쌀을 보냈다. 이에 멀고 가까운 곳에서 비로소 그의 밝은 견해에 굴복하였다.
처음 경전이 강동 지방에 전해질 때에는 대부분 미비한 점이 많았다. 선법(禪法)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었다. 또 율장은 듬성듬성 빠져 온전하지 못한 상태였다. 혜원은 불교의 도에 결함이 있는 것을 개탄하였다. 마침내 제자인 법정(法淨)·법령(法領) 등을 시켜 멀리 여러 경전을 찾았다. 그들은 사막과 설산을 넘어, 오랜 세월 후에 비로소 돌아왔다. 모두가 범어(梵語) 원본을 가져 왔으므로 번역할 수 있었다.
예전에 도안 법사가 관중(關中)에 있을 때, 담마난제(曇摩難提)를 초청해서 『아비담심론(阿毘曇心論)』을 세상에 내놓았다. 중국말에 빼어나지 못하여 자못 의심나고 막힌 곳이 많았다. 그 후 계빈국(?賓國) 사문 승가제바(僧伽提婆)가 여러 경전에 박식하였는데, 진(晋) 태원(太元) 16년(391)에 심양(?陽)을 찾아왔다. 혜원은 그를 초청하여 다시 『아비담심론』과 『삼법도론(三法度論)』을 번역하였다. 이에 두 가지 배움이 곧 일어났다. 아울러 서문을 짓고 종지를 드러내어 학자들에게 남겼다.
부지런히 도를 위하고 불법을 펴기에 힘썼다. 그러므로 매양 서역에서 오는 손님을 만나기만 하면, 간곡하게 정성을 다하여 묻고자 방문하였다. 구마라집(鳩摩羅什)이 관중에 들어왔다는 말을 들었다. 곧 편지를 보내 인사[通好]하였다.
“저 혜원은 머리 조아려 아룁니다. 지난해 요좌군(姚左軍)의 편지를 받고, 자세히 덕스런 분의 물음에 받들어 봅니다. 어진 분께서는 전에 다른 지역에 계셔서 왕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외국의 경계선을 넘어 오셨습니다. 이때는 통역[音譯]을 주고받을 형편이 못되었지만, 소식을 듣고 기뻐하였습니다. 다만 강호가 어렵고 어두워 형세가 어그러진 것을 한탄할 따름이었습니다.
요즘 크게 막힌 것을 회통하려는 모임을 이르시려, 보배를 품고 이곳에 오시어 머물고 계신 것을 압니다. 질문이 있으면 하루에 아홉 번 달려간다 하니, 문도들은 마음으로 아름다운 맛을 흐뭇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모두가 찾아갈 길이 없으니, 눈을 들어 멀리 길을 바라보면서 우두커니 바라보는 고단함만 더할 따름입니다.
저는 늘 불법이 베풀어지고 유포되어, 3방(方)이 함께 만나게 된 것을 기뻐합니다. 비록 시운은 말세에 모여 있다 하더라도 불법의 종취는 옛날과 마
찬가지로 고르다 하겠습니다. 참으로 아직 깨달음의 나루터를 미묘한 문에서 두드려, 부처님께서 남기신 신령함과 사무치게 교감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가슴을 비우고 기약을 남기기에 이르러서는, 하루도 그 생각을 품지 않은 날이 없습니다.
무릇 전단(?檀)을 옮겨 심으면, 다른 물건도 함께 향기가 몸에 배입니다. 마니보주(摩尼寶珠)가 빛남을 토해내면, 뭇 보배들이 스스로 쌓여집니다. 이것이 오직 가르침에 들어맞는 도리라서, 마치 빈손으로 갔다가 가득 채워 돌아오는 것과 같습니다. 하물며 가르침의 근본은 하나의 형상도 없는데다, 응험은 정으로써 하지 않는 데에 있어서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불법을 짊어진 사람은 반드시 보답을 바라지 않는 것으로 마음을 삼습니다. 어진 마음으로 벗을 사귀는 사람은 공덕을 자기 것으로 내세우지 않습니다. 만약에 법륜이 8정도(正道)에서 수레바퀴를 멈추지 않고, 삼보가 세상이 다하는 시기에도 소리를 멈추지 않는다면, 만원(滿願: 부루나존자)이 시대를 뛰어넘는 아름다움을 독차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용수(龍樹)보살이 어찌 전시대의 발자취에서 유독 홀로 거룩하겠습니까?
지금 어림짐작해서 마름한 옷을 보내니, 높은 자리에 오르실 때 이를 입기 원합니다. 아울러 빗물을 여과(濾過)시키는 그릇은 이미 법물(法物)입니다. 이것으로 애오라지 나의 마음을 표시합니다.”
구마라집이 회답하였다.
“구마라집은 공경하게 절하옵니다. 아직 만나서 말한 일도 없습니다. 또한 글과 문장도 지나치게 막혀서 인도하는 마음을 통할 길이 없거니와, 뜻을 얻을 인연도 무너져 끊겼습니다. 역마(驛馬)로 전해온 정황으로, 거칠게나마 덕스런 풍모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요즘은 또 어떻게 지내십니까?
하나를 들으면 반드시 백 가지를 덮을 수 있는 재능을 갖추셨다고 들었습니다. 불경에 ‘말세에 동방에 반드시 호법보살이 있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빛나도다! 어진 분이시여! 그대는 훌륭히 그 일을 넓히셨습니다.
무릇 재물을 얻으려면 다섯 가지 갖추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복, 계율, 너른 견문, 말솜씨, 깊은 지혜[福·戒·博聞·辯才·深智]입니다. 이것을 겸비한 이라야 도를 융성하게 하지만, 갖추지 못한 사람은 의심으로 막힙니다. 어진 분이시여, 그대는 이것을 갖추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마음을 기탁하여 우호를 교통하고, 통역을 통해[因譯] 뜻을 전하였습니다. 제가 어찌 그 뜻을 다할 수 있겠습니까만, 거칠게나마 보내오신 뜻에 보답할 따름입니다.
짐작하여 마름하신 옷을, 조금 손보아 법좌에 오를 때 입고자 합니다. 이것이 보내오신 뜻에 맞을 것입니다. 다만 사람이 물건에 맞지 않는 것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이제 전에 늘 사용하던 놋그릇으로 만든 쌍구조관(雙口?灌: 入口가 둘인 세숫대야)을 보내오니, 법물의 수에 갖추셨으면 합니다.”
아울러 한 수의 게송을 지어 보냈다.
이미 더럽게 물든 즐거움을 버린다면
마음을 훌륭히 거두지 않겠는가?
만약 치달려 흩어지지 않음을 얻는다면
깊이 진실한 모습에 들어서지 않겠는가.
필경공의 상 가운데서는
그 마음 즐거워할 곳 없어라.
만약 선의 지혜 즐긴다면
이는 법성이라서 비출 곳조차 없으려니
허망한 거짓 등은 참이 아니라서
또한 마음을 머물 곳이 아닐러라.
어진 분께서 터득한 법
그 요체를 보여 주기 바란다오.
旣已捨染樂 心得善攝不
若得不馳散 深入實相不
畢竟空相中 其心無所樂
若悅禪智慧 是法性無照
虛?等無實 亦非停心處
仁者所得法 幸願示其要
혜원은 다시 구마라집에게 편지를 보냈다.
“나날이 서늘한데 요즘은 또 어떻게 지내십니까? 지난달 법식(法識)도인이 이곳에 와서 그대가 본국으로 돌아가고자 한다는 소식을 전하길래 마음이 서글퍼집니다.
앞서 듣기로는 그대가 바야흐로 크게 여러 경전을 번역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오시면 서로 묻고 구하고자 하였습니다. 만약 지금 전하는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수많은 한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문득 수십 조의 일을 묻사오니, 여가가 있으면 한두 가지라도 풀어주기 바랍니다. 이것은 비록 경전 가운데 나오는 큰 문제점은 아니지만, 그대의 결정을 취하고자 할 따름입니다.”
아울러 한 수의 게송을 지어 구마라집의 게송에 회답하였다.
근본과 말단은 필경 무엇으로부터
일어남과 스러짐이 있음과 없음의 즈음이라
한 티끌이라도 흔들리는 경계를 건넌다면
이것은 산을 무너뜨리는 기세를 이루리.
미혹된 생각이 거듭 서로를 탄다면
부딪치는 이치마다 절로 막힘이 생겨나리.
인연에는 비록 주체가 없다지만
길을 여는 것은 한 세간만으로는 안 되어라.
때마다 깨달은 종사 없다면
누가 장차 그윽한 만남을 쥘 수 있으리.
찾아가 묻을 것 아직도 아득하오니
남은 생을 서로 더불길 기약했으면.
本端竟何從 起滅有無際
一微涉動境 成此頹山勢
惑想更相乘 觸理自生滯
因緣雖無主 開途非一世
時無悟宗匠 誰將握玄契
來問尙悠悠 相與期暮歲
그 후 불야다라(弗若多羅)가 중국에 건너와 관중(關中)으로 가서는 『십송률(十誦律)』의 범본을 외웠다. 구마라집이 이것을 중국어로 번역하여 3분의 2를 마쳤다. 바로 그 때 불야다라가 세상을 떠났다.
혜원은 항상 그것이 미비한 것을 개탄하였다. 그 후 담마류지(曇摩流支)가 진(秦)나라로 들어와, 다시 이 부(部)를 훌륭히 외운다는 말을 들었다. 곧 편지를 써서 제자인 담옹(曇邕)으로 하여금 요청하여, 관중(關中)에서 다시 남은 부분을 번역하게 하였다. 그런 까닭에 『십송률』의 전부가 갖추어져 빠진 것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진(晋)나라 땅에서 얻은 원본은 지금까지 서로 전수한다. 파미르 고원의 현묘한 경전이 관중에서 빼어나게 번역하여, 남쪽의 이 땅까지 오게 된 것은, 혜원의 힘 덕분이다.
외국의 승려들이 모두 중국 땅에 대승 도사가 있다 칭송하였다. 매양 향 피워 예배할 때마다, 곧 동방을 향해 머리를 조아려서 마음을 여산의 묏부리에 바치기에 이르렀다. 그의 신령한 이법의 자취는 그러므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이에 앞서 중국 땅에는 아직도 ‘열반상주(涅槃常住)’의 학설이 없었다. 다만 수명이 길다는 말만 있을 따름이었다. 이에 혜원은 마침내 탄식하였다.
“부처란 지극함이다. 지극하면 변화가 없다. 변화가 없는 이법에 어찌 다함이 있겠느냐?”
이로 인하여 『법성론(法性論)』을 지었다.
“지극함은 변함 없음을 본성으로 삼는다. 본성을 얻음은 지극함을 이룸으로써 근본을 삼는다.”
구마라집이 논을 보고 찬탄하였다.
변두리나라 사람들이라 아직 경전을 지니지도 못했거늘
문득 모르는 사이에 이 법과 합치하니
어찌 절묘하지 않은가.
邊國人未有經 便闇與理合
豈不妙哉
후진(後秦)의 주인인 요흥(姚興)은 덕과 명성을 흠모하고, 그의 재치 있는 생각을 찬탄하였다. 정중한 편지를 보내고, 믿음의 선물이 연이어졌다. 구자국(龜玆國)의 가는 실을 섞어 짠 변상(變像)을 증정하여, 그것으로 자기의 간곡한 마음을 표시하였다. 또 요숭(姚嵩)을 시켜 구슬로 만든 불상을 바쳤다.
『석론(釋論)』을 처음 번역하자, 요흥은 이 논을 보내고 아울러 편지를 보냈다.
“『대지도론(大智度論)』의 새로운 번역을 마쳤다. 이는 이미 용수보살이 지은 것이며, 또한 대승 경전의 지귀(旨歸)이다. 그러니 한편의 서문을 지어서 지은이의 뜻을 펴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이곳의 여러 도사들은 모두 서로 다른 사람을 추천하고 사양하여 감히 손을 움직이는 사람이 없다. 법사가 이를 위하여 서문을 지어, 후세의 배우는 이들에게 남겨주는 것이 좋겠다.”
이에 혜원은 회답편지를 썼다.
“저에게 『대지도론』의 서문을 짓게 하여 지은이의 뜻을 펴게 하시려 합니다. 그러나 빈도가 듣기에 큰 것을 품으려면 작은 솜옷으로는 싸안기조차 할 수 없고, 깊은 샘물을 길으려면 짧은 두레박줄로는 어림조차 할 수 없다고 합니다. 내리신 글을 펴보던 날, 높은 명령에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또한 몸이 약하고 병이 많아 부딪치는 일마다 그만두어, 다시 뜻을 내지 못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내려 보내 알리시는 인연의 중함으로, 대략 품은 생각만을 엮을 따름입니다. 연구의 아름다움에 이르려면, 마땅히 다시 여러 눈 밝은 대덕들에게 기대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의 명성이 높고도 멀리 알려진 것이 본래 이와 같았다.
혜원은 항상 『대지도론』이 문구가 번다하고 광범위하여, 처음 배우는 사람들은 뜻을 찾기 어렵다고 생각하였다. 곧 그 요점만을 초록하여 20권의 책을 썼다. 차례대로 드러낸 이치는 깊고 청아하여, 무릇 배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공들이는 일을 절반이 넘게 쉴 수 있게 하였다.
그 후 환현(桓玄)이 은중감(殷仲堪)을 정벌하였다. 군사가 여산을 지나가면서 혜원에게 호계(虎溪) 밖으로 나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혜원은 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았다. 이에 환현이 스스로 산에 들어왔다. 측근들이 환현에게 말하였다.
“예전에 은중감이 산에 들어가 혜원에게 예를 갖추었습니다. 공은 그를 공경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환현이 대답하였다.
“어찌 그런 이치가 있을 수 있겠는가? 은중감은 근본부터가 죽은 사람일 뿐이다.”
산에 이르러 혜원을 보자 모르는 사이에 공경을 표시하였다. 환현이 물었다.
“부모에게서 받은 몸은 함부로 헐거나 다칠 수 없다. 그렇거늘 어찌하여 수염을 깎고 머리를 잘랐는가?”
혜원이 대답하였다.
“몸을 세워 도를 행하기 위해서입니다.”
환현이 훌륭하게 여겨, 품었던 어려운 질문을 감히 다시 묻지 못하였다. 이어 은중감을 토벌하는 뜻을 설명하였다. 그러자 혜원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환현이 물었다.
“어떡하기를 바라십니까?”
혜원이 말하였다.
“나의 소원은 시주께서도 안온하시고 그[은중감]도 다른 탈이 없는 것입니다.”
환현이 산에서 나와 측근들에게 말하였다.
“참으로 태어나서 아직 보지 못한 인물이다.”
환현은 그 후 임금을 두려워 떨게 하는 위엄으로써 모시려고 애썼다. 초청 하는 편지를 보내어 벼슬에 오르도록 하였다. 그러나 혜원의 대답이 견고하고 바르며 확고부동하여, 그 지조가 단석(丹石)보다 굳어 끝내 되돌릴 수 없었다.
그 후 환현은 승려들을 숙청하고자 관료붙이들에게 명령하였다.
“경전의 가르침을 펴서 진술하고 의리를 유창하게 설법할 수 있거나, 혹 계율의 행실[禁行: 戒行]을 반듯하게 닦아 큰 교화의 베풂에 기여할 수 있는 사문들이 있다. 여기에서 어긋나는 자들은 그만두게 하여 돌려보내라. 오직 여산만은 도덕이 있는 사문이 머무르는 곳이다. 수사 간택의 예에 두지 말라.”
혜원은 환현에게 편지를 보냈다.
“불교가 허물어지고 더럽게 뒤섞여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런 것이 하나하나 찾아질 때마다, 분개하는 마음이 가슴에 가득하였습니다. 항상 뜻하지 않은 운수가 나타나서 불교가 가라앉는 일이 닥칠까 두려웠습니다.
가만히 보건대, 청정한 여러 도인들의 가르침은 진실로 그들의 본심과 호응합니다. 무릇 경수(涇水)와 위수(渭水)가 갈라지면, 맑은 물과 탁한 물의 형세가 달라집니다. 굽은 마음을 곧은 마음으로 바로잡으면, 어질지 않은 것은 스스로 멀어집니다. 이 명령이 행해지면 반드시 한결같은 이치를 여기서 얻을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야 거짓으로 꾸민 사람에게서는 거짓으로 통하던 길이 끊어질 것입니다. 진실한 생각을 품은 사람에게서는 세속의 기대를 저버리는 혐의가 없어져, 도인과 세속이 번갈아 일어나서 삼보가 다시 융성할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널리 승단의 조례와 규제를 세우자, 환현은 그의 말에 따랐다.
예전에 진(晋)나라 성제(成帝, 326~334)가 어렸을 때 유빙(庾氷)이 정치를 보좌하였다. 그는 ‘사문들이 마땅히 왕자를 공경해야 한다’고 여겼다. 이때 상서령(尙書令) 하충(何充)과 복야(僕射) 저욱(?昱)·제갈회(諸葛恢) 등이 아뢰어, ‘사문은 왕자에 경례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였다. 관리들의 논의도 모두 이와 같았다.
그러나 하충의 문하생들이 유빙의 뜻을 받들어 반박하였다. 같거나 다른 의견이 어지럽게 일어나서 끝내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그 후 환현이 고숙
(姑熟)에 있을 때 공경을 다하고자, 곧 혜원에게 편지를 보냈다.
“사문이 왕자를 공경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감정에 충실하지 않으며, 이치에 있어서도 밝지 않다. 한 시대의 국가 대사란 그 바탕을 진실하게끔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근간 여덟 사문에게 편지를 띄웠고, 이제 그대에게도 부친다. 그대는 왕자를 공경하지 않는 입장에 대해 진술하도록 하라. 이것은 곧바로 실행해야만 할 일이니, 낱낱이 생각하는 바를 자세하게 진술하여, 반드시 그에 대한 의심을 풀어주었으면 한다.”
혜원이 답장을 썼다.
“무릇 사문이라 칭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두운 세속의 캄캄함을 열어주고, 세상을 교화하는 그윽한 길을 트여주어, 바야흐로 나와 남을 잊는 겸망(兼忘)의 도로써, 천하와 더불어 같이 갈 수 있는 존재를 일컫는 것입니다. 높은 경지를 희구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유풍에 고개 숙이게 합니다. 개울물에서 양치질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남은 진액을 맛보게 합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비록 나라의 큰 일이 아직 자리 잡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그 초연한 발걸음의 자취를 볼 것입니다. 깨달은 것도 진실로 이미 넓어질 것입니다. 또한 가사(袈裟)는 조정과 종묘에서 입는 옷이 아닙니다. 발우(鉢盂)는 낭묘(廊廟)에서 쓰는 그릇이 아닙니다. 사문은 티끌세상 밖의 사람입니다. 그러니 마땅히 왕자에게 공경하지 않아야 합니다.”
환현은 비록 구차하게 앞서의 자기 뜻을 고집하고, 곧바로 남을 따르기를 부끄럽게 생각하였지만, 혜원의 말뜻을 직접 보고는 주저하며,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얼마 안 되어 환현이 제왕의 자리를 찬탈하자, 곧 교서를 내렸다.
“불법은 크고 위대하여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상의 마음을 미루어 받들었으므로 공경심을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일이 이미 내 자신에게 달려 있으니, 마땅히 겸양하는 빛을 다하겠다. 그러므로 모든 도인들은 다시 왕자에게 예를 올리지 말도록 하라.”
혜원은 이에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을 지었다. 모두 다섯 편이다.
첫 번째 편은 재가(在家)이다. 그 내용은 이렇다.
‘집안에 있으면서 법을 받드는 사람은 임금의 교화에 순종하는 백성이다. 그들의 심정은 아직 속인에서 변하지 않는 사람이라서, 그들의 자취는 사방테두리 안의 사람들과 같다. 그런 까닭에 천륜에 대한 애정[天屬之愛]과 주상을 받드는 예절[奉主之禮]이 있어야 한다. 이 예법과 공경에는 근본이 있기에, 마침내 이것에 인연하여 가르침을 이룬다.’
두 번째 편은 출가(出家)이다. 그 내용은 이렇다.
‘출가라 하는 것은 세속을 등짐으로써 자기 뜻을 구하고, 속인에서 변하여 그 도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풍속이 변하면 복장도 세상의 전례(典禮)와 같은 예법을 지킬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을 등지면 마땅히 그 자취를 고상하게 하여야 한다. 대덕은 그런 까닭에 번뇌 빠진 속인들을 번뇌의 흐름 속에서 구제할 수 있으며, 거듭되는 겁(劫)에서 어두운 근기를 뽑아 올릴 수 있다. 멀리는 삼승의 나루와 통하고 가깝게는 인천세계의 길을 열어준다.
그의 도가 육친(六親)에 젖어들고, 그 은택이 천하에 흐른다. 비록 왕후(王侯)의 자리에 처하지 않더라도, 본래부터 이미 천자의 도리와 일치하여 생민을 너그럽게 용서할 것이다. 그런 까닭에 안으로는 천륜(天倫)의 무거운 의리와 어긋나지만, 그 효도에 역행하는 것이 아니다. 밖으로는 임금을 받드는 공손함이 없지만, 그 공경심을 잃은 것이 아니다.’
세 번째 편은 구종불순화(求宗不順化)이다. 그 내용은 이렇다.
‘근본으로 돌아가 가르침을 구하는 이는 삶 때문에 정신이 괴롭지 않다. 속세의 경계를 초월한 이는 마음 때문에 삶을 괴롭히지 않는다. 마음 때문에 삶을 괴롭히지 않는다면 그 삶을 멸할 수 있다. 삶 때문에 정신이 괴롭지 않다면 그 정신이 명합할 수 있다.
정신과 명합하면 경계가 끊어지는 까닭에 이를 열반이라 한다. 그런 까닭에 사문은 비록 만승(萬乘) 천자에게 절하는 것을 반대하지만 그 일을 높이 숭상한다. 왕후(王侯)의 벼슬을 하지 않지만 그 혜택에 젖는다.’
네 번째 편은 체극불겸응(體極不兼應)이다. 그 내용은 이렇다.
‘부처님과 주공(周公)·공자는 비록 출발점은 다르지만, 보이지 않는 가운데 서로 영향을 미친다. 출처(出處: 세상에 나가는 것이 出이고, 가만히 들어앉아 있는 것이 處이다.)는 모두 다르나, 마지막 기필코 하려 한 곳은 같다.
그런 까닭에 비록 길이 다르다고 말하지만 돌아가는 곳은 같다. 불겸응(不兼應)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불교와 유교를 겸하여 받아드릴 수 없음을 말한다.’
다섯 번째 편은 형진신불멸(形盡神不滅)이다. 그 내용은 ‘인식작용과 정신작용이 치달리면, 이를 따라 우리 몸도 동이니 서로 치달린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논의 대략적인 내용이다. 이때부터 사문들은 세상 밖에서의 자취를 온전히 할 수 있었다.
환현이 서쪽으로 달아나자, 진(晋)의 안제(安帝)가 강릉(江陵)에서 서울로 돌아왔다. 보국대부(輔國大夫) 하무기(何無忌)는 이때 혜원에게 권유하여 황제를 뵈옵고, 문후를 드리라고 하였다. 그러자 혜원은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다. 황제가 사신을 파견하여 위로하고 안부를 물었다. 혜원은 편지를 썼다.
“저 혜원은 머리 조아려 아뢰옵나이다. 화창하고 따뜻한 봄날[陽月和暖], 수라가 입맛에 잘 맞기를 비옵니다. 빈도는 전에 무거운 병에 걸렸습니다. 나이가 들자 쇠약해져 병이 심해졌습니다. 분수에 넘치게 자비하신 조서(詔書)를 받아보았습니다. 곡진하게 영광스러운 위문을 드리우셔서, 온갖 두려움의 깊음이 실로 가슴에 백 배나 더합니다. 요행히 경사스러운 모임을 만났으나 몸을 스스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 마음과 감개를 자못 그 무엇으로도 비유할 수가 없사옵니다.”
황제는 조서로 회답하였다.
“봄기운을 느끼면서도[陽中感懷] 그대가 앓는 병이 아직 좋아지지 않았음을 알고는 마음에 어리어서 잊을 수가 없다. 지난달에 강릉을 떠났지만, 도중에 온갖 좋지 않은 일이 많아 더디기가 보통 때보다 두 배나 더하였다[遲兼常]. 본래는 그곳을 지나다가 서로 만나기를 바랐다. 그대가 이미 산림에서 원기를 보양하는 터이고, 게다가 앓는 병이 아직 낫지 않았으니, 아득히 다시는 인연이 없을 듯하여 한탄함만 더할 뿐이다.”
진군(陳郡)의 사령운(謝靈運)은 재주를 믿고 세상에서 멋대로 굴어서, 추앙하거나 숭배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한번 만나자 숙연히 마음으로 감복하였다.
혜원은 안으로는 불교의 이치에 뛰어나고, 밖으로는 뭇 서적에 빼어났다.
무릇 그의 문하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가 의지하고 모방하지 않음이 없었다.
당시 혜원은 『상복경(喪服經)』을 강의하였다. 뇌차종(雷次宗)·종병(宗炳) 등이 모두 책을 잡고 그의 취지를 이었다. 그 후 뇌차종은 따로 『상복경의소(喪服經義疏)』를 지어 책머리에서 뇌씨(雷氏)를 일컬었다. 이에 종병이 이를 조롱하는 편지를 보냈다.
“예전에 그대와 함께 스님 스승[釋和尙: 혜원을 가리킴] 사이에서 얼굴을 마주하여 이 내용의 강의를 받았었지. 그렇거늘 어찌하여 지금 곧 책머리에다 뇌씨(雷氏)를 일컫는다 말인가?”
그의 교화가 도인과 속인에 아울러 행해진 이러한 사례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혜원이 여산의 언덕에 자리잡고부터, 30여 년 동안 그의 그림자가 산 밖을 나가지 않았다. 그의 발자국을 세속으로 들여 밀지 않았다. 매양 손님을 보내거나 노닐고 밟는 땅은 호계(虎溪)로 한계를 삼았다.
진(晋) 의희(義熙) 12년(416) 8월초에 움직임이 흐트러졌다. 6일째가 되자 괴로움이 더욱 심했다. 이에 대덕과 나이 많은 노승들이 모두 이마를 조아리며 된장을 넣은 술을 마시기를 권하였다. 그러나 허락하지 않았다. 쌀즙이라도 마시기를 청하였으나 그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다시 꿀물을 타서 장(漿)을 만들어 먹으라고 하니, 곧 율사(律師)에게 명해 책을 펼쳐 글에서 마셔도 되는지를 찾게 하였다. 책의 절반도 넘기지 않아서 세상을 마쳤다. 이때 나이는 83세이다.
문도들이 통곡하니 마치 부모를 잃은 것 같았다. 도인과 속인들이 달려오고, 수레바퀴가 이어져서, 어깨와 어깨가 서로를 뒤따랐다.
혜원은 범부들의 정을 자르기 어렵다고 여겨 7일장으로 치르게 했다. 그의 유언에 따라 시신을 소나무 밑에 드러내어 놓았다. 얼마 있다가 제자들이 시신을 거두어 묻었다.
심양태수(?陽太守) 완보(阮保)는 여산의 서쪽 마루를 뚫어, 굴을 만들어 묘로 통하는 길을 열었다. 사령운(謝靈運)이 그를 위하여 비문을 지어, 남긴 덕을 새겼다. 남양(南陽)의 종병(宗炳)도 절 산문에 비를 세웠다.
본래 혜원은 문장을 잘 지어 글 분위기가 맑고 우아하였다. 법석에서의 담 론은 내용이 정밀하고 간결하게 요점을 잘 취하였다. 이에 더하여 기동이 깔끔하고 조용하며 풍채가 속된 기가 없이 깨끗하였다. 그런 까닭에 그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서 절에 걸어놓으니, 멀고 가까운 곳의 사람들이 우러러보았다.
지은 논·서(序)·명(銘)·찬(贊)·시(詩)·편지 등을 모아서, 열 권 오십여 편의 문집을 만들었다. 세상에서 중히 여겼다.
02) 석혜지(釋慧持)
혜지는 혜원의 아우다. 성품이 텅 비어 조용하며, 원대한 도량이 있었다. 열네 살 때 책 읽기를 배웠다. 하루에 얻은 것이 다른 사람이 열흘에 얻은 것과 맞먹었다. 문장과 역사에 빼어나고, 재치 있게 글을 짓는 솜씨가 있었다. 열여덟 살에 출가하여 형과 함께 도안 법사를 섬겼다. 두루 수많은 경전을 배워 삼장의 분석을 마음대로 구사하였다.
도안이 양양(襄陽)에 있으면서 혜원을 동쪽으로 내려가게 할 때 혜지도 함께 갔다. 처음 형주(荊州) 상명사(上明寺)에서 쉬었다. 후에 여산으로 가서 모두 혜원을 따라 함께 머물렀다.
혜지는 키가 8척이나 되었다. 풍채가 빼어나고 시원하였다. 항상 가죽신을 신고 정강이 절반쯤 오는 옷을 입었다. 여산의 문도 권속들은 영명하고 빼어나지 않은 이가 없었다. 드나드는 3천 명이 혜지를 우두머리로 쳤다.
혜지에게는 고모가 있었다. 비구니가 되어 도의(道儀)라 이름하였다. 강하(江夏)에 머물다가 서울에 불법이 성하다는 말을 듣고는, 서울로 내려가 교화를 구경하고자 하였다. 이에 혜지는 곧 고모를 전송하여, 서울에 이르러 동안사(東安寺)에 머물렀다.
진(晋)의 위군(衛軍)인 낭야왕(瑯?王) 사마순(司馬珣)과 깊이 서로의 기량을 존중하였다. 당시 서역 사문 승가라차(僧伽羅叉)가 훌륭히 네 부의 『아함경』을 외웠다. 사마순이 요청해서 『중아함경(中阿含經)』을 번역했다. 혜지는 곧 그 글과 말을 교열하고 다듬어서, 소상하게 경문을 정하였다.
그 후 여산으로 돌아왔다. 얼마 되지 않아 예장(豫章) 태수 범영(范寧)이 초청해서 『법화경』과 『아비담(阿毘曇)』을 강론하였다. 이에 사방에서 구름같
이 모여들고, 천리 밖 멀리에서도 찾아와 모였다.
낭야왕 사마순이 범영에게 편지를 보냈다.
“혜원과 혜지 가운데 누가 더 나은가?”
범영이 회답하였다.
“참으로 현명한 형제입니다.”
사마순은 거듭 편지를 보냈다.
“다만 형과 같은 이만 하더라도 참으로 쉽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거늘 하물며 다시 아우까지 현명할 수 있는가?”
연주자사(?州刺史) 낭야왕 사마공(司馬恭)은 사문 승검(僧檢)에게 편지를 보냈다.
“혜원·혜지 형제의 지극한 덕은 어떠한가?”
승검이 회답하였다.
“혜원·혜지 형제는 여유작작하여 참으로 도풍이 있습니다.”
구마라집이 관중에 있을 때 멀리서 서로 흠모하고 존경하여, 편지를 보내 좋은 관계를 맺어 훌륭한 벗이 되었다.
그 후 혜지는 성도(成都)가 땅이 비옥하고 백성들이 풍족하다는 말을 듣고는 가서 교화할 뜻을 세웠다. 아울러 아미산(峨嵋山)을 구경하려고, 지팡이를 떨치며 민수(岷岫: 蜀山)로 가려 하였다. 이에 진(晋) 융안(隆安) 3년(399)에 혜원의 곁을 떠나 촉(蜀)으로 들어갔다. 혜원이 간절하게 만류하였다. 그러나 멈추지 않으니 혜원이 탄식하였다.
“사람은 태어나면 모이는 것을 사랑하는 법이다. 그런데도 너는 헤어지는 것을 즐거워하는구나. 어찌된 일인가?”
혜지도 역시 슬퍼하였다.
“만약 정에 막혀 모이는 것을 사랑한다면, 본래 출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은 욕망을 잘라버리고 도를 구하고자 하니, 바로 서방으로 가는 것을 바랄 따름입니다.”
이에 형제는 눈물을 거두고 말없이 안타까워하며 이별하였다.
길을 떠나 형주(荊州)에 도달하였다. 형주자사 은중감(殷仲堪)이 기뻐하고 존중하며 예우하였다. 당시 환현(桓玄)도 그곳에 있었다. 환현은 비록 학문에 관련된 공부는 소홀하였지만, 그런 한편으로 신출귀몰한 재주가 있었다. 혜지를 만나보니, 거의 인근에서 찾아볼 수 없는 홀로 뛰어난 인물이었다. 고금에 비교할 만한 인물이 없다고 더욱 감탄하여, 크게 기쁜 관계를 맺고자 하였다.
혜지는 이미 그 사람됨을 의심하였다. 그러기에 마침내 그의 요청을 버리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은중감과 환현 두 사람은 간절히 그를 만류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럴수록 혜지는 더욱 그곳에 머물 뜻이 없었다. 형주를 떠날 즈음하여 환현에게 글을 보내었다.
“본래 병든 몸을 아미산 묏부리에 깃들여, 고비 사막 밖의 교화를 구경하려고 하였습니다. 처음 떠날 때의 생각을 버릴 수 없어, 곧 행장을 꾸려 그쪽으로 머리를 돌립니다.”
환현은 이 편지를 받고 슬퍼하며, 그를 머물게 할 수 없음을 알았다. 혜지는 마침내 촉(蜀)에 이르러 용연정사(龍淵精舍)에 머물렀다. 거기에서 불법을 크게 홍포하였다. 정낙(井絡: 四川省)의 사방에서 그의 덕을 사모하는 이들이 무리를 이루었다. 자사(刺史)·모거(毛?)가 평소 덕을 숭상하여 공경했다.
혜암(慧巖)·승공(僧恭)
당시에 사문 혜암과 승공이 먼저 촉나라에 와서 사람들과 서로 정답게 지내고 있었다. 혜지가 그곳에 와서 머물자, 둘 다 멀리서 그의 풍모를 듣고는 추대하고 감복하였다. 그러니 모두들 혜지의 승당에 오른 이들을 등용문(登龍門)이라고 불렀다.
승공은 어릴 때부터 재치 있는 생각이 있었다. 촉군(蜀郡: 成都)의 승정(僧正)이 되었다. 혜암은 내외의 경전에 아는 것이 많았으므로, 평소부터 모거가 존중하였다.
그 후 촉나라 사람 초종(?縱)이 전쟁의 기회를 틈타 모거를 공격하여 죽였다. 촉나라 땅을 나누어 갖고서, 스스로 성도왕(成都王)이라 이름하였다. 곧 승려들을 모아 법회를 마련하고, 혜암을 핍박하여 요청하였다. 혜암은 마지못해 그곳을 찾아갔다.
이미 예전부터의 시주인 모거가 하루아침에 상하고 파멸되었기에, 이 일을 눈으로 보자 더욱 슬퍼하여 가슴아파하는 것이 얼굴빛에 나타났다. 마침내 초종이 그를 싫어하여 살해하였다. 그러자 온 고을이 어지러워져서, 도인과 속인들이 위태로워하고 두려워하였다. 혜지는 난을 피하여, 비현(?縣) 가운데 있는 어느 절에 머물렀다.
초종의 조카 도복(道福)은 흉악함과 사나움이 매우 심하였다. 군병들을 거느리고 비현으로 가서 토벌하여 살육한 적이 있었다. 돌아가는 길에 지나가다가 절에 들어왔다. 사람과 말들이 피로 목욕한 것 같았다. 대중승려들이 크게 무서워하여 한꺼번에 놀라 달아났다.
혜지는 승방 앞에서 세수를 하면서도, 얼굴빛에 불쾌한 기색이 없었다. 도복이 곧바로 혜지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혜지는 손가락을 튀기며 물을 걸러내면서, 담담히 태연자약하였다. 도복이 부끄러워 후회하면서 땀을 흘리며 절문을 나왔다. 측근에게 말하였다.
“대인(大人)이라. 대중과는 다르더라.”
그 후 촉나라 경내가 맑고 편안해졌다. 다시 용연사로 돌아와 머물면서 강설하였다. 재(齋)를 지내며 예참(禮懺)하였다. 늙어갈수록 더욱 독실하였다.
그는 진(晋)·의희(義熙) 8년(412) 절 안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76세이다.
임종에 명을 남겨, 계율 있는 거동을 힘쓰도록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경에 이르기를 ‘계율은 평평한 땅과 같아서, 모든 착한 것이 이로 말미암아 생긴다’라고 하였다. 너희들은 행주좌와(行住坐臥)하는 일상생활에 마땅히 삼가야 하느니라.”
도홍(道泓)·담란(曇蘭)
우리 동방 중국에서 발간된 경전들은 제자인 도홍에게 부촉하고, 중국 서쪽나라에 있던 경전들은 제자인 담란에게 부촉하였다.
도홍은 일하는 행실이 맑고 민첩하였다. 담란은 정신의 깨달음이 천성적으로 뛰어났다. 이들은 모두 스승의 발자취를 이어받아, 그것을 법도로 삼았다.
03) 석혜영(釋慧永)
혜영의 성은 반(潘)씨이며 하내(河內) 사람이다. 열두 살에 출가하여 사문 축담현(竺曇現)을 섬겼다. 후에 다시 도안(道安) 법사를 엎드려 받들었다.
평소 혜원과 함께 나부산(羅浮山) 굴에 집을 지어 살기를 기약하였다. 혜원이 도안의 만류를 받자, 혜영은 먼저 오령(五嶺)을 넘으려 하였다. 길을 떠나 심양(?陽)을 지날 때에, 고을사람 도범(陶範)이 간절하게 그곳에 머물기를 요청하였다. 이에 잠시 여산(廬山)의 서림사(西林寺)에 머물렀다. 그곳의 문도들이 조금씩 많아졌다. 게다가 혜원이 같은 산에 절을 짓자, 마침내 그곳에서 세상을 마칠 생각을 가졌다.
혜영은 곧고 검소하며 자연스러워, 마음이 맑아 욕망을 잘 이겨냈다. 말할 때는 항상 웃음을 머금어, 말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하지 않았다. 경전을 매우 좋아하여 경전에 푹 빠지고, 강설을 잘하였다. 푸성귀와 거친 베옷으로 거의 일생을 마쳤다.
또 따로 한간의 초가집을 산마루 위에 세웠다. 선정(禪定)에 들고자 생각할 때마다, 문득 그곳에 가서 지냈다. 당시 그의 방에 찾아오는 사람들은 모두가 특수한 향내를 맡았다.
혜영의 집안에는 항상 호랑이 한 마리가 있었다. 사람들이 혹 두려워하면, 곧 몰아내어 산에 올라가게 하였다. 사람이 돌아간 뒤에는 다시 되돌아와서, 길들인 것 같이 조아렸다.
어느 날 혜영이 고을로 나갔다. 해가 거의 저물 무렵에 산으로 돌아와 오교(烏橋)에 이르렀다. 오교의 영주(營主: 軍營의 首領)가 술에 취하여 말을 타고 길을 막아서, 혜영의 갈 길을 가로막고 보내주지 않았다. 날이 이미 너무 늦어져서 혜영이 지팡이로 멀리 말을 가리켰다. 말이 놀라 달아나서 영주는 땅에 넘어졌다. 혜영은 그를 두 손으로 일으켜서 위로하고 영으로 돌려보내니, 이로 인하여 병이 들었다. 다음날 새벽에 절을 찾아가 뉘우치고 사과하였다. 혜영이 말하였다.
“빈도가 본래 뜻한 것이 아니었소. 그러니 아마도 경계하라고 신께서 하셨을 것이오.”
이 일을 도인과 속인들이 들어 알고는 마음으로 귀의한 사람이 많았다.
그 후 진남장군(鎭南將軍) 하무기(何無忌)가 심양에 주둔하였다. 호계(虎溪)에 모여서 혜영과 혜원을 초청하였다. 당시 혜원은 이미 오랫동안 명망을 떨쳤다. 또한 평소부터 재주와 능력도 풍족하였다. 그리하여 따르는 사람 백여 명이 모두 거동이 깔끔하고 조용하며 풍모에 질서가 있었다. 고상한 말과 아름다운 논리를 펼치면, 거동들이 볼 만하였다.
혜영은 조용히 홀로 가서 갑작스레 거의 마지막에 이르렀다. 누더기 옷에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잡고 발우(鉢盂)를 지녔다. 그러나 정신과 기력은 자연스러워, 맑은 기운을 흩뿌리며 자랑하는 빛이 없었다. 대중이 모두 그의 곧고 검소함을 존중하여, 도리어 다시 그를 아름답게 여겼다.
혜원은 어려서부터 그를 선배로 추앙하였다. 그러기에 스스로가 혜영의 뛰어난 행실에 고개 숙이고, 낮고 공손한 몸가짐으로 그의 은근한 복을 빌었다. 혜영은 정밀하고 엄격하게 고행하면서 서방정토에 태어나기를 소원하였다. 진(晋)의 의희(義熙) 10년(414)에 병에 걸려 오랫동안 위독했다. 오로지 계율로 몸을 삼가하여, 지조를 지키기를 더욱 부지런히 하였다.
비록 병상에 누워 고통을 품었으나, 얼굴빛은 느긋하고 기뻐하였다. 죽기 얼마 전에 갑자기 옷을 여미고 합장하며, 신발을 찾아 일어나려 하면서 마치 무엇인가 보는 듯하였다. 대중들이 모두 놀라서 물어보니 대답하였다.
“부처님이 오셨다.”
말을 마치자 돌아가셨다. 그 때 나이는 83세이다. 산에 있던 도인과 속인들이 모두 기이한 향기가 감도는 것을 맡았다. 7일이 되어서야 향기가 멎었다.
승융(僧融)
당시 여산의 승융 역시 굳은 절개로 신령함과 통하여 귀신들을 항복시킬 수 있다고 한다.
04) 석승제(釋僧濟)
승제는 어디 사람인지 확실하지 않다. 진(晋)의 태원(太元) 연간(376~396)에 여산에 들어와서 혜원에게 수학하였다. 대승·소승의 여러 경전과 세속의 경전·수학·서법에 모두 마음으로 연마하고 노닐며, 그 깊은 요체를 꿰뚫었다. 30세가 넘자, 비로소 고을에 나가 개강하여 으뜸가는 강사의 자리를 맡았다. 혜원은 늘 그를 보고 말하였다.
“나와 함께 불법을 크게 퍼뜨릴 사람은 네가 그 사람일 것이다.”
그 후 잠시 여산에 머물다가 갑자기 병이 위독함을 느꼈다. 이에 서방 정토에 정성을 다하여 아미타불을 상상하였다. 이때 혜원은 하나의 촛불을 보내서 말하였다.
“너는 안양정토에 마음을 기울이는 일에 모든 시간을 다투도록 하여라.”
승제는 촛불을 잡고 책상에 기대어, 생각을 멈추고 어지럽지 않게 하였다. 다시 대중 승려들이 밤에 모여, 그를 위하여 『무량수경』을 돌려 읽게 청하였다. 5경(更)에 이르자 승제는 촛불을 동학에게 주어, 승려들 가운데로 걸어가게 하고는 잠시 누웠다.
꿈에 자신이 촛불을 잡고 허공을 타고 갔다. 무량수불을 직접 만나 손바닥 위에 영접하여 얹어놓고, 두루 시방세계에 이르렀다가 모르는 사이에 갑자기 깨어났다. 이 사실을 모두 자세히 병을 간호하는 사람에게 설명하고는, 한편 슬퍼하고 한편으로 위안 받았다. 스스로 돌아보아도 몸[四大]에는 아무런 병의 고통이 없었다.
다음날 저녁이 되자 갑자기 신발을 찾아 일어났다. 눈으로 허공을 거슬러서 마치 무엇인가 보는 듯하였다. 잠시 후 다시 누웠다. 얼굴은 더욱 즐거운 빛이었다. 이어 옆 사람에게 말하였다.
“나는 떠난다.”
이에 몸을 돌려 오른쪽 겨드랑이 쪽으로 굽히고는 말과 기력이 다하였다. 그 때 나이는 45세이다.
05) 석법안(釋法安)
법안은 일명 자흠(慈欽)이라 한다. 어디 사람인지 확실하지 않다. 혜원의 제자로서 계율을 훌륭히 수행하고 많은 경전을 강설하였다. 아울러 선업(禪業)을 닦았다. 어리석고 몽매한 사람들을 잘 교화하고 개도(開導)하여, 사악한 것을 뽑아내어 바른 길로 돌아가게 하였다.
진(晋)의 의희(義熙) 연간(405~417) 신양현(新陽縣)에 호랑이로 인한 재앙이 있었다. 현에 큰 사당 나무가 있고, 나무 밑에는 신묘(神廟)가 있었다. 그 좌우에 사는 백성이 백 명을 헤아렸다. 호랑이를 만나 죽는 사람이 하루저녁에 한두 사람씩 있었다.
법안은 일찍이 그 현을 돌아다닌 일이 있었다. 해가 저물어 그 마을에 묵었다. 마을사람들은 호랑이가 두려워 일찍 문을 닫아버렸다. 법안은 곧바로 나무 아래로 가서 밤새도록 좌선을 하였다.
새벽 무렵 호랑이가 사람을 업고 와서, 나무의 북쪽에 집어던지는 소리를 들었다. 법안을 보더니 기뻐하는 것 같기도 하고 놀라는 것 같기도 하였다. 펄쩍 뛰어 법안 앞에 엎드렸다. 법안은 호랑이를 위하여 설법하고 계를 내려 주었다. 호랑이는 땅에 꿇어앉아 움직이지 않다가 얼마 후에 떠났다. 아침에 마을사람들이 호랑이를 뒤쫓아 나무 밑에 이르렀다. 법안을 보고 크게 놀라고는 신인(神人)이라 생각하였다.
드디어 이 말이 온 현에 전해지니, 선비와 서민들이 종사로 받들었다. 호랑이의 재앙은 이로 말미암아 종식되었다. 이로 인하여 신묘를 고쳐 절을 세워 법안을 머물게 하였다. 좌우의 발과 정원을 모두 희사하여 대중의 복전으로 삼았다.
그 후 탱화와 불상을 만들고자 하여 구리의 녹[銅靑]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살림이 힘들어서 얻을 수가 없었다. 밤 꿈에 한 사람이 나타나, 그의 탁상 앞을 빙 돌면서 말하였다.
“이 밑에 동종(銅鍾)이 있습니다.”
꿈에서 깨어나 곧 그곳을 파보았다. 과연 두 구의 동종을 얻어, 그 동종의 녹으로 불상을 이루었다. 그 후 구리는 혜원이 불상을 주조할 때에 도움을 주고, 나머지 하나의 종은 무창태수(武昌太守) 웅무환(熊無患)이 빌려 보다가, 마침내 그곳에 머물러 두었다. 그 후 법안이 세상을 마친 곳은 모른다.
06) 석담옹(釋曇邕)
담옹의 성은 양(楊)씨이며 관중(關中) 사람이다. 젊어서 위진(僞秦)에서 벼슬하여 위장군(衛將軍)에 이르렀다. 키가 8척이고 씩씩함과 강함이 보통사람을 뛰어넘었다. 태원(太元) 8년(383) 부견(符堅)을 따라 남방을 정벌하였다. 진(晋)나라 군대에게 패배하여 다시 장안으로 돌아와서, 도안을 좇아 출가하였다.
도안이 저 세상으로 가자, 마침내 남쪽 여산에 몸을 던져, 혜원을 섬겨 스승으로 삼았다. 내외의 경서를 대부분 두루 섭렵하였다. 뜻이 법을 펴기를 숭상하여, 피로하고 괴로운 것을 꺼리지 않았다.
그 후 혜원을 위하여 관중으로 들어가 구마라집(鳩摩羅什)에게 혜원의 편지를 드렸다. 심부름을 한 것이 거의 십여 년이다. 풍류를 고양시켜 격발하여 산봉우리를 흔들 만큼[搖動峰岫] 강하고 굳세며 과감하였다. 구마라집과 단독으로 마주하여서도 스승인 혜원을 욕보이지 않았다[專對不辱].
서울 도량사(道場寺)의 승감(僧鑒)이 그의 덕과 이해력에 고개 숙여, 양주(楊州)로 돌아오기를 요청하였다. 담옹은 혜원의 나이보다 많다 하여 마침내 과감하게 떠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당시 혜원의 문하에는 베개를 높이 베고 마음 편하게 자는 부류가 적지 않았다. 혹 훗날 추대하여 사양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작은 인연을 빙자해서 담옹을 문하에서 쫓아냈다. 담옹은 명을 받들고 산에서 나왔으나, 얼굴에서 원망하거나 불쾌한 기색이 없었다. 곧 산의 서남쪽에 초가집을 세워 제자인 담과(曇果)와 맑게 선문(禪門)을 생각하였다.
어느 날 담과의 꿈에 산신(山神)이 나타나 5계(戒)를 받게 해달라고 요구하였다. 담과가 말하였다.
“스승께서 이곳에 계시니 가서 물어보고 계를 받는 것이 좋을 것이오.”
얼마 뒤 담옹은 단의(單衣)를 입고 모자를 쓴 어떤 사람을 보았다. 풍채와 모습이 단아하였다. 종자(從者)는 스무 사람 가량 되었다. 그가 5계 받기를 요청하였다. 담옹은 담과가 앞서 꿈꾼 일로 해서, 이 사람이 산신령임을 알고는 곧 설법하고 계를 내려 주었다. 산신은 외국의 숟가락과 젓가락을 선물로 주었다. 예배를 드리고는 인사하고 헤어지자마자, 문득 보이지 않았다.
혜원이 죽던 날, 달려가 발을 동동거리며 통곡하여 그 아픔이 부자 사이보다 더 깊었다.
그 후 형주(荊州)로 가서 죽림사(竹林寺)에서 세상을 마쳤다.
07) 석도조(釋道祖)
도조는 오(吳)나라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대사(臺寺)의 지법재(支法濟)의 제자가 되었다. 어릴 때부터 재치 있는 생각이 있어 정성껏 부지런히 배움에 힘썼다. 후에 동지인 승천(僧遷)·도류(道流) 등과 함께 여산에 들어갔다. 7년 만에 모두 산중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각기 익힌 것에 따라 날로 새로움이 있었다. 혜원은 늘 말하였다.
“도조 등은 쉽게 깨닫는다. 모두가 이들 같다면, 다시는 윤회하여 뒷날 다시 태어날 것을 근심하지 않으리라.”
승천과 도류는 모두 나이 스물여덟 살에 세상을 떠났다. 이에 혜원이 한탄하였다.
“이들은 모두 재주와 의리가 빼어나게 무성하여, 맑은 깨달음이 날로 새로웠다. 이러한 재능을 품고서도 길이 저 세상으로 갔으니, 하나같이 어쩌면 이다지도 가슴 아프단 말인가?”
도류는 모든 경전의 목록을 짓다가 마치지 못하고 죽어, 도조가 완성하였다. 지금 세상에 행한다.
그 후 도조는 서울의 와관사(瓦官寺)로 돌아가 강설에 종사하였다. 환현이 늘 그의 강설을 듣고는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도조는 늦게 발심했지만 혜원보다 더 낫다. 다만 유교(儒敎)에 대한 해박함이 혜원에 미치지 못할 따름이다.”
그 후 환현(桓玄)이 정사를 돕는 자리에 올라, 사문(沙門)들로 하여금 왕자를 공경하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도조는 곧 그곳을 떠나 오나라의 대사(臺寺)로 돌아갔다.
얼마 뒤 환현이 제왕의 자리를 찬탈하자, 고을에 명령하여 도조를 서울로 나오게 하였다. 도조는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다.
이에 인간세계의 일에서 자취를 끊고 하루 종일 도를 강론하였다. 진(晋)의 원희(元熙) 1년(419)에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72세이다.
혜요(慧要)
혜원의 제자인 혜요도 경전과 율법을 터득하였다. 교묘한 사고력은 더욱 뛰어났다. 산중에는 시각을 알리는 물시계[刻漏]가 없었다. 이에 개울 가운데 열두 잎의 연꽃을 세워, 흐르는 물결의 바뀜에 따라 열두 시각을 정하도록 하였다. 해시계[晷景]와 차이가 나지 않았다. 또한 나무로 만든 연[木鳶]을 만들었다. 수백 걸음의 거리를 날아갔다.
담순(曇順)·담선(曇詵)
혜원에게는 또 담순·담선이라는 제자가 있었다. 모두 교리 이해[義學]로 명성을 날렸다.
담순은 본래 황룡(黃龍) 사람이다. 어려서 구마라집에게서 수업하였다. 후에 돌아와 혜원에게 사사하였다. 푸성귀를 먹고 덕스런 행실이 있었다. 남만교위(南蠻校尉)·유준(劉遵)이 강릉에 죽림사(竹林寺)를 세우려고 일을 시작해 주기를 청하였다. 혜원은 담순을 그곳에 파견하였다.
담선은 또한 맑고 고상하며 모범적인 풍모가 있었다. 『유마경』에 주석을 달았다. 또한 『궁통론(窮通論)』 등을 지었다.
법유(法幽)·도항(道恒)·도수(道授)
이밖에 법유·도항·도수 등 백여 명의 제자가 있었다. 혹은 논리 이해에 깊고 밝으며, 혹은 중생의 일을 바로잡고 구제한 사람도 있고, 혹은 계행이 청정하여 드높은 사람도 있고, 혹은 선정(禪定)에 깊이 들어간 사람도 있다. 모두가 당시 세상에 이름을 떨쳐서, 지금까지 그 일이 전한다.
08) 석승략(釋僧?)
승략의 성은 부(傅)씨이며 북쪽땅 이양(泥陽) 사람이다. 진(晋)나라 때 하간(河間)의 낭중령(郞中令)을 지낸 부하(傅遐)의 맏아들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장안의 대사(大寺)에 머물면서, 홍각 법사(弘覺法師)의 제자가 되었다.
홍각 법사 역시 한 시대의 빼어난 사문이다. 승략은 처음 그를 따라 수업하다가, 후에 청사(靑司)·번(樊)·면(沔) 지방으로 노닐었다. 육경과 삼장에 통달하였다. 율행을 맑게 삼가하여 불법을 바로잡고 떨칠 수 있었다.
요장(姚?)·요흥(姚興)은 일찍부터 그의 이름난 풍모에 고개 숙여 평소 알고 존중하였다. 그들이 황제를 참칭하여 관중을 소유하자, 깊이 서로 머리숙여 공경하였다. 요흥이 삼보를 받들어 드높게 믿자, 불법의 교화가 널리 성대하였다.
그 후 동수(童壽, 鳩摩羅什)가 관중으로 들어오면서부터 먼 곳의 승려들이 다시 모여들었다. 비구와 비구니가 많아지자 허물과 과실이 간혹 있었다. 요흥이 말하였다.
“범부가 승가를 배우더라도 괴로움을 참는 단계에 이르지 못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찌 허물이 없을 수 있겠느냐? 허물이 있어도 이를 삼가지 않으므로, 마침내 허물이 많아지는 것이다. 마땅히 승려의 우두머리[僧主]를 세워, 불법의 크나큰 바람을 맑게 하리라.”
이어 조서를 내렸다.
“불법이 동방으로 옮겨와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크게 성해져 비구와 비구니가 너무 많아졌다. 마땅히 여기에는 기강이 필요하다. 원대한 규칙을 내려 무너진 실마리를 구제하는 것이 좋겠다. 승략 법사는 젊을 때부터 배움이 넉넉하였다. 늙어서는 덕이 꽃다우니 나라 안의 승주(僧主)로 삼을 만하다. 승천(僧遷) 법사는 선정(禪定)과 지혜를 아울러 닦아서 곧 대중들을 기쁘게 하였다. 그러니 법흠(法欽)과 혜빈(慧斌)과 함께 승록(僧錄)을 관장하라.”
수레와 가마와 관리를 공급하였다. 승략은 시중(侍中)의 자리에 준하여 조서를 전해 받아, 양이 모는 수레에다 각각 두 사람을 거느렸다. 승천 등에게도 모두 후하게 공급하였다. 이들은 함께 일하면서 순수하고 검소하여, 넉넉히 당시의 여망에 들어맞았다. 오부대중이 엄숙하고 맑아져서 어느 때 할 것 없이 게으름이 없었다.
홍시(弘始) 7년(405)에 이르러 칙명으로 친히 믿음을 더하여, 몸을 부축하고 말씀을 알리는 종자(從者)를 각각 30명씩 두게 하였다. 승정(僧正)이란 제도가 생긴 것은 승략에게서 비롯한 것이다.
승략은 몸소 걸어 다니고, 수레와 가마는 늙고 병든 승려들에게 공급하였다. 얻은 공양과 구휼품은 대중의 용도에 충당하였다. 비록 늙은 나이였지만, 경전과 계율을 강설하여 대중을 돕는 일에 게으르지 않았다.
홍시(弘始, 399~416) 말년에 장안의 대사(大寺)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70세이다.
09) 석도용(釋道融)
도융은 급군(汲郡) 임려(林慮) 사람이다. 열두 살에 출가하였다. 그의 스승은 그의 정신과 풍채를 사랑하여, 먼저 불전 밖의 전적을 배우게 하였다. 마을에 가서 『논어』를 빌렸다. 끝내 가지고 돌아오지 않고, 그곳에서 이미 다 외어버렸다. 스승이 다시 책을 빌려와서 다시 외우게 하였다.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다 외우니, 감탄하면서 특이하게 생각하였다. 이에 그의 마음대로 유학하게 하였다.
나이 서른 살에 이르러서는, 재주와 슬기로운 이해력이 뛰어나 내외의 경서를 마음속에서 노닐었다. 구마라집이 관중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짐짓 그를 찾아가 묻고 가르침을 받았다. 구마라집이 그를 기특하게 생각하여 요흥(姚興)에게 말하였다.
“지난 번 도융을 만났습니다. 기특하고도 총명한 승려입니다.”
요흥이 불러서 보고는 감탄하고 중히 여겼다. 칙명으로 소요원(消遙園)에 들어가 경전을 바로잡고 상세하게 번역하게 하였다. 그러고는 구마라집에게 보살계의 원본을 번역하기를 청하였다. 지금 세상에서 행한다.
그 후 『중론(中論)』을 번역하여 비로소 두 권을 얻었다. 도융은 곧 강원에 나아가 경문의 글과 말을 분석하여, 맨 먼저 처음부터 끝까지 그 뜻을 꿰뚫었다. 구마라집은 다시 도융에게 명하여 『법화경』을 강의하게 하였다. 구마라집이 직접 이 강의를 듣고 곧 찬탄하였다.
“불법을 일으킬 사람은 도융이 바로 그 사람이다.”
갑자기 사자국(師子國)의 한 바라문(婆羅門)이 나타났다. 총명하고 말재주가 있고 많이 배워서, 서역의 속서(俗書) 치고 펼쳐 외지 못하는 것이 거의 없는 외도의 종사였다. 구마라집이 관중에서 불법을 크게 일으켰다는 말을 듣고는, 곧 그 문도들에게 말하였다.
“어찌 석씨(釋氏)의 도풍만을 홀로 중국 땅에 전해, 우리들의 바른 교화가 동쪽나라에 젖어들지 못하게 할 수 있겠느냐?”
마침내 낙타를 타고 책을 등에 지고 장안에 들어왔다. 요흥이 그를 만나보았다. 입과 눈으로 비위를 맞춰 알랑거려[口眼偏僻] 자못 매혹되었다. 바라문이 곧 요흥에게 말하였다.
“지극한 도에는 일정한 방향이 없습니다[至道無方]. 각각 자신들이 일삼는 것을 존중하기 마련입니다. 지금 중국 땅이 승려들과 변론을 겨루어 보기를 청합니다. 우월함이 드러나는 바를 따라서 교화를 전하게 해주십시오.”
요흥은 곧 허락하였다.
당시 관중의 대중승려들은 서로의 부족함을 쳐다보기만 하고 감당할 사람이 없었다. 구마라집이 도융에게 말하였다.
“이 외도는 총명하기가 보통사람과 다르다. 말씨름을 하면 반드시 이긴다. 위없이 큰 도가 우리 승도들에게 있건만, 그에게 굴복한다면 자못 슬픈 일이다. 만약 외도로 하여금 뜻을 얻게 한다면 법륜의 바퀴축이 꺾어진다. 어찌 그래서야 되겠느냐? 내가 본 바에 의하면 그대 한 사람만이 그를 상대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에 도융은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아도 재주와 힘이 그에게 뒤지지 않았다. 그러나 외도의 책을 다 펴서 읽어보지는 못하였다. 곧 비밀히 사람을 시켜 바라문이 읽는 경전의 제목을 베껴오게 하였다. 한번 펴보고서 곧바로 외웠다.
그 후 날을 정하여 논리를 토론하였다. 요흥이 몸소 그 자리에 나오고, 공경대부(公卿大夫)들이 모두 대궐 아래에 모였다. 관중의 대중 승려들도 모두 사방 먼 곳에서 모여들었다.
도융은 바라문과 서로 견주어 항변을 주고받았다. 칼날 같은 언변으로 현묘한 기풍을 날리니, 그가 미칠 수 없는 경계였다. 바라문은 스스로 말과 이론으로는 이미 꺾였음을 알았다. 그러나 아직도 널리 많은 책을 읽은 것으로 과시하려 하였다. 이에 도융은 곧 그가 읽은 책과 중국 땅의 경전과 역사책의 이름과 제목을 나열하였다. 그 책의 권수와 부수가 바라문보다 세 배나 더 많았다. 이에 구마라집이 그를 조롱하였다.
“그대는 중국의 넓은 학문[大秦廣學]을 듣지 못하였는가? 어찌하여 홀연히 경솔하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가?”
바라문교도는 마음으로 부끄러워하고 참회하였다. 도융의 발 아래에 머리가 땅에 닿게 절을 하였다. 며칠 안에 얼마 안 되어 떠났다. 불법의 기운이 거듭 다시 중국 땅에 일어난 것은 도융의 힘 덕분이다.
그 후 도융은 팽성(彭城)으로 돌아와 항상 강설을 이어갔다. 도를 묻고자 찾아온 사람이 천여 명에 달하였다. 의지하여 따르는 문도들의 수도 3백 명이 꽉 찼다.
성품이 떠들썩한 자리를 좋아하지 않아, 항상 다락에 올라가 경전을 펴놓고 완상하였다. 정성을 다해 후학들을 이끌어 목숨이 다할 때까지 법을 폈다. 그 후 팽성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74세이다.
『법화경』·『대품경』·『금광명경』·『십지론』·『유마경』 등의 의소(義疏)를 지었다. 모두 세상에서 행한다.
10) 석담영(釋曇影)
담영은 혹 북쪽사람이라고 하지만 어디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성품이 텅 비어 고요하여 교유를 그다지 하지 않았다. 가난한 살림을 편히 여기고, 배움에 뜻을 두었다. 행동거지를 자세하게 살펴 지나침을 미치지 못함과 같이 여겼다. 그러나 정신과 기력이 재빨라서 뜻과 행동이 정반대였다.
『정법화경(正法華經)』과 『광찬반야경(光讚般若經)』을 잘 강의하였다. 법륜을 한 번 굴릴 때마다 곧 도인과 속인들이 천 명을 헤아렸다. 그 후 관중으로 들어가니 요흥이 크게 예의바른 접대를 더 하였다.
구마라집이 장안에 이르자, 담영은 그를 찾아가 따랐다. 구마라집이 요흥에게 말하였다.
“지난 번 담영을 만났습니다. 그 역시 이 나라 풍류의 드높은 기준이 될 만한 승려입니다.”
요흥은 칙명을 내려 소요원(逍遙園)에 머물면서 구마라집의 역경을 돕게 하였다.
처음 『성실론(成實論)』의 번역본이 나올 때, 쟁론하는 문답이 차례대로 거듭 왕복하였다. 담영은 그 지리함을 한탄하였다. 곧 이를 줄여 다섯 번으로 묶어서, 마침내 구마라집에 바쳤다. 구마라집이 말하였다.
“너무나 훌륭하다. 깊이 나의 뜻에 잘 맞는다.”
구마라집은 그 후 『묘법화경(妙法華經)』을 번역하였다. 담영은 이미 예전 부터 이 경을 으뜸으로 삼았다. 그래서 더욱더 심사숙고하여 곧 『법화의소(法華義疏)』 4권을 지었다. 아울러 『중론(中論)』에 주석을 달았다.
그 후 산 속 깊이 숨어살면서 티끌세상 밖에서 절조를 지켰다. 공덕을 닦고 선행을 세워 늙을수록 더욱 독실하였다. 진(晋)의 의희(義熙) 연간(405~418)에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70세이다.
11) 석승예(釋僧叡)
승예는 위군(魏郡)·장락현(長樂縣)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출가하기를 즐겨하였다. 그렇지만 나이 열여덟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자기의 뜻을 따를 수 있었다. 승현(僧賢) 법사에게 몸을 맡겨 제자가 되었다. 성품이 겸허하고 속내가 민첩하여, 배울수록 때마다 나아졌다. 나이 스물두 살에 이르자 경론에 두루 뛰어났다.
어느 날 승랑(僧朗) 법사의 『방광반야경(放光般若經)』의 강의를 들었다. 듣다가 여러 번 핵심을 찌르는 질문을 하였다. 승랑 법사는 승현 법사와는 호상(濠上)에서 물고기의 즐거움에 대해 토론한 장자(莊子)와 혜자(惠子)같이 가까운 사이였다[濠上之契]. 승현 법사에게 말하였다.
“요즘 승예의 질문을 받아보았어. 그렇지만 여러 번 생각을 거듭해도 통할 수가 없었어. 뛰어난 스승의 뛰어난 제자라고 일컬을 만하더군.”
스물네 살이 되자 , 이름난 나라를 두루 떠돌면서 곳곳에서 강설하였다. 그를 알아주는 이들이 책 보따리를 짊어지고 따라와 무리를 이루었다. 그는 항상 한탄하였다.
“경법은 아무리 미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인과를 알 만큼 하기에는 충분하다. 그러나 선법(禪法)은 아직 전수받지 못하였다. 그러니 마음을 둘 곳이 없다.”
그 후 구마라집이 관중에 이르렀다. 그에게 청하여 『선법요(禪法要)』 3권을 번역했다. 첫 권은 구마라타(鳩摩羅陀)가 지은 것이고, 마지막 권은 마명(馬鳴)이 설법한 것이다. 중간 권은 외국의 여러 성인들이 함께 지은 것이어서, 역시 『보살선(菩薩禪)』이라 일컬었다.
승예는 이 책을 얻고는 밤낮으로 이를 닦고 익혔다. 마침내 색·성·향, 미·촉의 다섯 경계를 정밀하게 단련하고, 훌륭히 안·이·비·설·신·의의 여섯 뿌리를 맑게 하는 경지에 들어갔다. 위사도공(僞司徒公) 요숭(姚嵩)이 깊이 예로써 귀하게 대우했다.
요흥(姚興)이 요숭에게 물었다.
“승예는 어떠한 사람인가?”
요숭이 대답하였다.
“실로 업(?)과 위(衛)의 소나무와 잣나무입니다.”
요흥은 칙명을 내려 그를 만났다. 공경대부들이 모두 모여 그의 재능과 기량을 구경하였다. 승예는 고상한 인품이 깊고 높으며, 머금고 토해내는 말이 빛나고 빈틈이 없었다. 요흥이 크게 칭찬하고 기뻐하였다. 곧 칙명으로 봉록과 관리와 사람과 가마를 공급하였다.
그 후 요흥은 요숭에게 말하였다.
“승예는 곧 사해의 영수[四海標領]이다. 어찌 한낱 업과 위의 소나무와 잣나무에 그치겠는가?”
이에 아름다운 명성이 멀리 퍼져나가, 멀고 가까운 곳에서 그의 덕에 귀의하였다.
구마라집이 번역하는 경은 모두 승예가 참고하여 바로잡았다. 예전에 축법호(竺法護)가 번역한 『정법화경(正法華經)』의 ?수결품(受決品)?에 이르기를, ‘하늘은 사람을 보고 사람은 하늘을 본다[天見人 人見天]’고 하였다. 구마라집이 이 경을 번역하다가 이 대목에 이르자 말하였다.
“이 말은 서역의 말뜻과 같다. 다만 말이 실질보다 지나친 점이 있을 따름이다.”
승예가 말하였다.
“하늘과 사람이 교접하여 둘이 서로 마땅함을 만나는 것[人天交接 兩得相見]이 아니겠습니까?”
구마라집이 기뻐하여 말했다.
“사실이 그렇다.”
그의 빼어난 깨달음의 두드러져 나옴이 모두 이와 같았다.
그 후 『성실론』의 번역본이 나오자, 승예를 시켜 이를 강의하였다. 구마라집이 승예에게 말하였다.
“이 쟁론(諍論) 가운데는 일곱 개의 변화된 곳이 있다. 그 글이 아비담의 이론을 논파한다. 그러나 말에 나타나 있는 것은 적고 숨겨져 있기에, 만약 물어보지 않고 터득한다면 뛰어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승예가 그윽하고 은미한 뜻을 열고 밝히면서, 끝내 구마라집에게 자문 받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참뜻에 맞게 아득한 이치를 이해하였다. 구마라집이 찬탄하였다.
“경론을 번역하면서 그대와 만났으니 참으로 한탄할 바가 없구나.”
『대지론(大智論)』·『십이문론(十二門論)』·『중론(中論)』 등의 서문을 지었다. 아울러 『대품경(大品經)』·『소품경(小品經)』·『법화경』·『유마경』·『사익경(思益經)』·『자재왕선경(自在王禪經)』 등의 서문도 지었다. 모두 세상에 전한다.
과거 승예가 훌륭히 위의를 가다듬어 경법을 널리 편찬하면서부터, 항상 이 모든 업적을 회향하여 안양정토에 태어나기를 소원하였다. 늘 일상생활의 어느 때라도 감히 서쪽으로 똑바로 등을 돌리지 않았다. 그 후 스스로 명이 다함을 알고, 문득 승려들을 모아 고별인사를 하면서 대중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평소에 서원하여 서방세계에 태어나고 싶었다. 내가 보는 바대로라면 어쩌면 갈 수 있을 것이다. 잘 모르겠으나, 결정코 벗어나리니 여우처럼 의심하지 말거라. 다만 몸·입·생각으로 지은 업보는 혹 서로 어긋나고 범하기도 하였다. 원컨대 큰 자비를 베풀어 오랜 겁토록 불법의 벗들이 되길 바란다.”
이에 방으로 들어가 몸을 씻고 목욕하고, 향 피우고 예배드렸다. 침상으로 돌아와 서방을 향하여 합장하면서 세상을 마쳤다. 이날 같은 절에 있던 이들은 모두 오색의 향기가 감도는 연기가 승예의 방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 이때 나이는 67세이다.
승해(僧楷)
당시에 사문 승해도 승예와 동학으로 역시 높은 명성이 있다고 한다.
12) 석도항(釋道恒)
도항은 남전(藍田) 사람이다. 아홉 살 때 길에서 놀 때에 은둔하는 선비인 장충(張忠)이 그를 보고 찬탄하였다.
“이 아이는 보통사람을 훌쩍 뛰어넘는 상(相)이 있다. 속세에 있으면 재상이 되어 반드시 정치를 보좌하는 공이 있을 것이다. 도에 처하면 반드시 불법을 빛나게 밝힐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늙어서 그것을 볼 수 없는 것이 한이로구나.”
도항은 어려서 부모를 잃었다. 계모를 섬기면서 효자로 알려졌다. 집이 가난하여 모아놓은 재산이 없어, 항상 손수 그림을 그리고 비단을 짜서 계모를 받들어 모시는 데 썼다. 몹시 경전을 좋아하여 밤낮으로 배움에 힘썼다.
나이가 스무 살에 이르러 계모도 죽자, 장사 지냄에 예를 다하였다. 상복을 다 입고 나서는 출가하였다. 불교 논리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였다. 아울러 뛰어난 것이 많아 배움이 내외의 경전에 해박하였다. 재치 있는 생각은 맑고 민첩하였다.
그 후 구마라집이 관중으로 들어왔다. 곧 그를 찾아가 제자의 예를 닦으니, 구마라집이 크게 가상하게 생각하였다. 여러 경전을 번역하기에 이르러서는 모두 자세하게 바로잡는 일을 도왔다.
도표(道標)
당시 도항의 동학으로 도표가 있었다. 그도 자못 재능과 힘이 있어 당시 명성을 독차지하여 도항과 버금갔다. 위진(僞秦)의 왕 요흥(姚興)은 도항·도표 두 사람을 신령한 기운이 걸출하고 밝아서, 나라를 다스릴 도량이 있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곧 위상서령(僞尙書令) 요현(姚顯)에게 명령하여, 도항·도표 두 사람을 끈질기게 핍박하였다.
“도를 그만두고 왕업을 도와 떨치게 하라.”
다시 도항 도표에게 글을 내렸다.
“경들의 밝은 지조는 실로 가상스러운 점이 있다. 다만 나는 사해에 군림하여 정치에 재능 있는 사람이 급히 필요하다. 지금 상서령 요현에게 명령하여, 경들의 법복을 빼앗게 하여 이 시대의 세상을 돕게 하였다. 진실로 마음을 도를 맛봄에 둔다면, 어찌 도인·속인의 차별에 얽매이겠는가? 바라건대 나의
이 생각을 알아주어서 절조를 지키겠다며 사양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에 도항·도표은 회답하였다.
“지난달 20일에 조서를 받들어보았습니다. 저희들의 법복을 빼앗으신다는 명을 받고는, 슬픈 마음에 젖어 속된 정[五情]을 지키는 것조차 잃었습니다. 저희들은 재질이 어둡고 짧으며 불법에 물든 지도 아직 깊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승복 아래에서 신명을 다하기를 맹세하였습니다. 아울러 불법을 익히느라 세속의 일에는 익숙하지 않습니다. 부질없이 비상한 업적만 폐지하여, 끝내 특수하게 남다른 공로는 없을 것입니다.
예전에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는 오히려 엄릉(嚴陵)의 마음을 구속하지 않았습니다. 위(魏)의 문제(文帝)도 관영(管寧)의 지조를 받아 들였습니다. 지존의 높은 마음을 억누르고 필부의 미미한 뜻을 이루게 한 것입니다. 하물며 폐하께서는 불도로써 중생을 다스리고 아울러 삼보를 널리 퍼뜨리고 계십니다. 원컨대 인민의 심정을 비추어보시고, 중생에 통달한 이치를 널리 드리우시기 바랍니다.”
요흥은 다시 구마라집과 승략(僧?) 두 법사에게 편지를 보냈다.
“헤어진 지 이미 몇십 일이 되어 매양 그리움이 더해간다. 차츰 따뜻해지면 크게 쉬겠거니 할 따름이다. 별 볼일 없는 몸이 위대한 거동을 하려다 보니, 더욱더 분수에 맞게 처신할 길이 없어, 딱히 마음만 산란스러울 뿐이다.
요즘 온갖 일의 정성스러움을 재능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할 필요가 있다. 근간에 도항·도표 두 사람에게 조서를 내려, 아라한의 옷을 벗고 큰 선비의 자취를 찾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도가 존재하지 않는 곳이란 없으니, 원컨대 두 법사가 나를 돕도록 이들을 타이르기 바란다.”
구마라집과 승략이 회답하는 편지를 보냈다.
“무릇 우리가 들은 바에 의하면, 가장 뛰어난 이는 도로써 백성들을 길러 만물이 스스로를 옳게 여기며, 그 다음가는 이는 덕으로써 천하를 다스린다고 합니다.1) 그런 까닭에 예전의 밝은 임금은 성품이 어긋난 사람은 다스리기 어렵다는 사실을 살피어, 남에게 맡기는 데에는 인연이 많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요(堯) 임금은 허유(許由)를 기산에 놓아두었습니다. 위문왕(魏文王)은 단간목(段干木)에게 수레에서 인사하는 예를 다하였습니다. 한고조(漢高祖)는 상산사호(商山四皓)2)를 종남산(終南山)에 놓아 주었습니다. 숙도(叔度)는 한악(漢岳)에게 부드러운 수레를 사양하였습니다. 이는 무릇 현인의 성품에 맞추어 현명함을 터득한 조치였습니다.
지금 도항·도표 등은 덕이 원만한 경지에 도달한 것도 아닙니다. 분수도 절조를 지키는 정도입니다. 그윽한 교화를 익힌 것도 아주 자잘하여, 불도를 가슴에 새겨 따르는 수준입니다. 심오한 경전을 펼쳐 분석하거나, 그윽하고 미묘한 경지를 연구하는 데 이르러서는, 어린 동자들을 깨우쳐 교화의 공덕을 도울 정도의 수준입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기왕의 은덕을 베푸시어, 그들의 미약한 지조를 지키도록 놓아주시기 바랍니다.”
그 후에도 요흥은 자주 교서를 내렸다. 그러나 온 경내가 이를 구제하여 위태로움을 가까스로 면할 수 있었다. 이에 도항은 마침내 탄식하였다.
“옛사람의 말처럼, 나의 재화를 더해주는 것은 나의 정신을 손상시킨다. 나의 명성을 생기게 하는 것은 내 몸을 죽이는 것이로다.”
이에 그림자를 바위 골짜기에 숨기었다. 어두운 수풀더미 속에서 목숨이 다하도록 푸성귀를 먹으면서 선정을 맛보아, 인간세계 밖에서 자취를 멀리하였다.
진(晋)의 의희 13년(417) 산의 집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72세이다.
도항은 『석박론(釋駁論)』과 『백항잠(百行簪)』을 짓고, 도표는 『사리불비담(舍利弗毘曇)』의 서문과 ?조왕교문(吊王喬文)?을 지었다. 모두 세상에 행한다.
13) 석승조(釋僧肇)
승조는 경조(京兆) 사람이다. 집이 가난하여 대서(代書)로 업을 삼았다. 마침내 책을 베껴 씀을 인연하여 경전과 역사를 두루 읽고, 고전문헌을 갖추어 다 읽었다. 그윽하고 미묘한 진리를 좋아하여, 늘 『노자』와 『장자』를 마음의 요체로 삼았다. 어느 날 『노자』의 ?덕장(德章)?을 읽다가 탄식하였다.
“아름답기는 아름답다. 그러나 정신이 그윽함에 깃드는 방법을 기약하기에는, 아직 선(善)을 다했다고 할 수 없다.”
그 후 그는 구역 『유마경』을 보고 기뻐하였다. 머리위로 받들어 펼쳐 그 의미를 찾아 완상하고는 말하였다.
“비로소 귀의할 곳을 알았다.”
이를 인연으로 출가하였다. 배움이 대승의 경전에 빼어나고, 아울러 삼장에 뛰어났다. 나이가 스무 살 때 이름을 관중과 조정에 떨쳤다. 당시 명예를 다투는 무리들이 그의 일찍 출세한 것을 시기하지 않음이 없었다. 혹 천리 밖의 먼 곳에서 책을 지고 달려와, 관중으로 와서는 변론을 겨루기도 하였다. 승조는 이미 재치 있는 생각이 아득하고 현묘한 데다 더욱이 담론에 뛰어났다. 핵심을 타서 그들의 날카로움을 꺾어, 일찍이 흘려 지나치거나 막히는 일이 없었다.
당시 경조의 덕망 있는 유학자나 관외의 빼어난 선비들치고, 그의 칼날 같은 변론에 고개 숙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기운을 누르고 콧대를 꺾었다.
그 후 구마라집이 고장(姑藏)에 이르렀다. 승조가 먼 곳에서 찾아가 따르자 구마라집은 끝없이 감탄하고 칭찬하였다.
구마라집이 장안으로 가자, 승조도 그를 따라 돌아왔다. 요흥(姚興)은 승조에게 명하여, 승예(僧叡) 등과 더불어 소요원(逍遙園)에 들게 하여, 경론을 자세히 가다듬는 일을 돕게 하였다.
승조는 성인의 시대와의 거리가 아주 멀어서 글 뜻에 조잡한 곳이 많다고 여겼다. 먼저 예전에 해석한 경전에서 때로 틀리고 잘못된 곳에 대해, 구마라집을 만나 묻고 배워서 깨달음이 더욱 많아졌다.
『대품경』을 번역한 후에, 승조는 곧 모두 2천여 글자에 이르는 『반야무지론(般若無知論)』3)을 지었다. 마침내 구마라집에게 바치니, 구마라집이 이를 읽고 훌륭하다고 칭송하였다. 이어 승조에게 말하였다.
“나의 이해력으로는 그대를 물리칠 수 없다. 그러니 이제부터 말할 때 서로 공경하도록 하자.”
당시 여산의 숨어사는 선비 유유민(劉遺民)이 승조의 이 논을 보고 곧 찬탄하였다.
“뜻밖에 방포(方袍: 승려의 外衣)에도 다시 평숙(平叔: 漢代의 文章家)이 있구나.”
이어 이것을 혜원에게 보이니, 혜원이 책상을 어루만지며 찬탄하였다.
“일찍이 없었던 일이로다.”
그러고는 함께 펴서 완미하기를 거듭 되풀이하였다. 유유민은 승조에게 편지를 보냈다.
“얼마 전 아름다운 물음을 받고, 멀리 우러러보는 마음을 품었습니다. 연말의 엄한 추위에 건강은 어떻습니까? 소식을 전할 길이 막히니, 더욱 끌리고 답답한 마음만 더해집니다. 제자는 시골구석에서 오래된 병으로 항상 앓습니다. 대중들이 건강하고 화목하기 바라며, 외국에서 온 법사들께서도 편안하고 건강하십니까?
지난해 여름 끝 무렵에 상인(上人)의 『반야무지론』을 보았습니다. 재주의 운용이 맑고 걸출하시며, 취지 가운데는 깊이 진실한 맛이 담겼습니다. 성인의 글을 미루어 밟아나가, 완연히 돌아가는 모습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책을 펴서 정중하게 완미해 보니, 손에서 책을 놓을 수 없습니다. 진실로 마음을 대승의 깊은 못에서 목욕시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품은 회포가 그윽함조차 끊어버린 곳에 있음을 깨달았고, 정교한 솜씨를 다하여 어느 곳도 빈틈이 없습니다. 다만 어두운 사람이라 깨닫기 어려워 아직도 의문이 남아있습니다. 지금 문득 그것을 다음과 같이 조목조목 말씀드립니다. 원컨대 조용한 여가에 거칠게나마 이를 풀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에 대하여 승조는 편지로 화답했다.
“예전에 뵈옵지 못하여 우두커니 상상하느라 수고로울 따름입니다. 전에 보내신 소(疏)와 질문을 펴놓고, 반복해서 그 취지를 찾아보니 기쁘기가 잠시나마 마주 대한 듯하였습니다. 서늘한 바람이 불고 삼가 할 절기에, 요즘 항상 어떻게 지내십니까?
빈도는 고단한 병으로 늘 몸이 좋지 않습니다만, 이곳 대중 가운데 몸담으며 심상하게 지낸답니다. 구마라집 스승님은 크게 건승하십니다.
후진(後秦)의 임금4)은 도에 대한 성품이 자연스러워, 타고난 기틀이 속인을 뛰어넘습니다. 삼보를 확고하게 지키고, 도를 펴는 데 힘씁니다. 이로 말미암아 색다른 경전과 뛰어난 승려들이 먼 곳에서부터 이르러, 영취산의 기풍이 이 땅에 모여듭니다. 이를 이끄는 임금의 원대한 거동은 곧 천 년에 한번 있을 나루터나 대들보라 하겠습니다. 서역에서 돌아와 대승의 새로운 경전 2백 여 부를 가져왔습니다. 구마라집 스승님이 대사(大寺)에서 새롭게 여러 경전을 번역하니, 법장(法藏)의 깊고 넓음이 나날이 각별하게 들립니다.
선사(禪師)5)는 와관사(瓦官寺)에서 선도(禪道)를 가르치니, 문도 수백 명이 밤낮으로 게으르지 않으며 화목하고 엄숙하여, 스스로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또 삼장법사6)는 중사(中寺)에서 율부를 출간하였습니다. 근본과 지말이 정밀하고 소상하여, 마치 부처님께서 처음 제정한 것을 보는 듯합니다. 비바사(毘婆娑)7) 법사는 석양사(石羊寺)에서 『사리불비담(舍利弗毘曇)』을 출간하였습니다. 범어 원본이라 비록 아직 번역하지는 않았지만, 때로 질문하는 가운데 나오는 말은 신기(新奇)합니다.
빈도는 일생을 분수에 넘치게 아름다운 운세에 참여하고 성대한 교화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석가모니의 열반의 집회를 보지 못한 것이 한탄스럽습니다. 그밖에 저에게 무슨 남은 한이 있겠습니까? 다만 도가 뛰어난 군자와 이 법회에 참가하지 못하는 것이 한이 될 따름입니다.
제 글이 깊이 있다고 칭찬하시고, 애오라지 다시 부탁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물어 오신 내용이 완곡하고 절실하여, 제가 영읍(?邑)의 목공처럼 마음대로 요리하기는 어렵습니다. 빈도는 생각이 미세한 곳까지 미치지 못하고, 아울러 글과 말에 서투릅니다. 게다가 또 지극한 취지는 말로 할 수 없는 것이어서, 말하면 근본 종지와는 뒤틀립니다. 이러쿵저러쿵 그만두지 않고 말해 보았자 끝내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애오라지 미친 사람의 말로서 보내오신 취지에 대답할 따름입니다.”
그 후 승조는 다시 『부진공론(不眞空論)』과 『물불천론(物不遷論)』 등을 지었다. 아울러 『유마경』에 주석을 달고, 여러 경론의 서문을 지었다. 모두 세상에 전한다.
그 후 구마라집이 죽은 후에, 길이 저 세상으로 간 것을 추도하였다. 발돋움하며 그리워하는 마음이 더욱 사무쳐서 마침내 『열반무명론(涅槃無名論)』을 지었다. 그 글에서 말한다.
“경에서는 유여열반(有餘涅槃)·무여열반(無餘涅槃)을 말한다. ‘열반’이란 범어를 중국말로 번역하면 ‘무위(無爲)’라는 뜻이다. 또한 ‘멸도(滅度)’라고도 표현한다. 무위라는 것은 허무적막(虛無寂寞)함이 유위의 세계보다 미묘하게 뛰어남을 취한 것이다. ‘멸도’라는 것은 큰 근심이 영원히 끊어져 4류(流)를 뛰어넘음을 말한 것이다. 이는 대개 거울에 비친 모습이 돌아갈 곳이요, 칭호가 단절된 그윽한 집이다. 그러나 ‘유여’와 ‘무여’라고 말하는 것은 아마도 나온 곳이 다른 호칭일 것이며, 중생에게 응대하는 거짓이름일 것이다.
나는 일찍이 한번 이에 대하여 말한 적이 있다. 무릇 열반의 도라는 것은 고요하고 텅 비어서 형체나 표현으로 얻을 수 없다. 미묘하고 상(相)이 없어서 마음으로 알 수가 없다. 뭇 존재를 뛰어넘어 그윽한 세계로 올라가고, 태허의 허공을 헤아려서 길이 오래간다. 이를 쫓아가려 해도 그 자취를 찾을 수 없다. 이를 맞이하려 해도 그 머리를 볼 수가 없다.
6취(趣)로도 그 태어남을 거두어드릴 수 없다. 힘으로 밀어붙여도 그 바탕을 변화시킬 수 없다. 아득하게 멀고 황홀하여 존재하는 것 같기도 하고, 가버린 것 같기도 하다. 다섯 개의 눈으로도 그 얼굴을 볼 수 없고, 두 귀로도 그 메아리를 들을 수 없다. 어둡고 그윽하니, 누가 이를 보았으며 누가 이를 깨달았겠는가? 두루 다스려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으면서, 홀로 유·무의 세계 밖에 그 자취를 끌고 간다. 그러므로 이를 말하는 사람은 그 진실을 잃는다. 이를 안다고 하는 사람은 그 어리석음으로 되돌아간다. 이를 있다고 하는 사람은 그 본성과 어긋나며, 이를 없다고 하는 사람은 그 바탕을 다친다.
그런 까닭에 석가모니는 마갈성(摩竭城)에서 방문을 닫았고, 유마거사는 비야리성(毘耶里城)에서 입을 다물었다. 수보리(須菩提)는 무(無)의 설을 제창함으로써 도를 밝혔고, 제석과 대범천은 들음을 끊음으로써 꽃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이러한 모든 진리는 신(神)이 거느리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입은 이를 위하여 다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어찌 이것을 말할 수 없다고 하겠는가? 말로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경에서는 말한다.
“진정한 해탈이란 말의 작용을 벗어난 것이다. 적멸에 영원히 편히 머물러 끝도 없고 시작도 없다. 어둡지도 않고 밝지도 않으며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다. 맑고 고요하기가 허공과 같아, 이름도 없고 증득함도 없다.”
논(論)에서는 말한다.
“열반은 유(有)도 아니다. 또한 무(無)도 아니다. 말로 표현할 길은 끊어지고, 마음으로 행할 곳도 멸한 경지이다.”
무릇 경론을 지은 취지를 찾아보면, 이것이 어찌 허구의 말이겠는가? 결과적으로 유(有)가 있다고 하지 않는 이유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유(有)가 없다고 하지 않은 이유는 없을 수 없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유의 경계에서 근본을 따져보면, 5음(陰)은 영원히 멸하는 것이다. 이것을 무의 고을에서 미루어 나가면, 그윽한 신령함은 다하지 않는 것이다. 그윽한 신령이 다하지 않으면, 맑고 고요한 하나(도)를 품는다. 5음이 영원히 멸하면, 모든 번뇌를 다 버린다. 모든 번뇌를 다 버리기 때문에 도와 함께 상통한다. 맑고 고요하게 하나를 품기 때문에 신비하면서도 공덕이 없다. 신비하면서도 공덕이 없기 때문에 지극한 공덕이 늘상 존재한다. 도와 함께 상통하기 때문에 텅 비면서도 바뀌지 않는다. 텅 비면서도 바뀌지 않는 것을 ‘유’라 할 수 없다. 지극한 공덕이 늘상 존재하는 것을 ‘무’라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유’와 ‘무’가 내부에서 단절되고, 일컬어지고 말하는 일이 외부에서 가라앉아, 보고 듣는 일이 미치지 못하는, 4공(空)이 어두운 경지이다. 맑으면서도 평탄하고 머무르면서도 크나큰 경지이다. 9류(流)가 여기에서 서로서로 귀의한다. 뭇 성인이 여기에서 그윽하게 만난다. 이것이 곧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경지이며, 크게 그윽한 고을이다. 그런데도 ‘유’와 ‘무’로써 그 방향과 구역을 규정지어 신비한 도의 경지를 말하고자 한다면, 어찌 아득히 먼 거리의 이야기가 아니겠느냐?”
그 뒤에도 열 번 펼치려다 아홉 번 구부려[十演九折] 무릇 수천 글자에 이
르렀다. 그러나 글의 분량이 너무 많아 여기에다 싣지 못한다.
논이 이루어진 후에 요흥(姚興)에게 표(表)를 올렸다.
“저는 아뢰옵나이다. 하늘은 하나(도)를 얻어서 맑고, 땅은 하나를 얻어서 편안하며, 군왕은 하나를 얻어서 천하를 다스린다고 하옵니다.8) 엎드려 생각하건대 폐하께서는 사리에 밝고 슬기로우며 몸을 삼가고 이치에 환하십니다. 도와 정신이 잘 만나서 나라 안의 인심과 미묘하게 일치하고 깨우치지 못하는 이치가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나라의 온갖 기틀을 능수능란하게 요리하고 하루 종일 도를 펴는 데 힘써, 창생들이 의지하고 힘입도록 글을 드리우셔서 모범을 지으십니다. 그런 까닭에 지경 안에 네 가지 큰 것 가운데 임금이 그 하나로 자리잡은 것입니다.9)
열반의 도라는 것은 무릇 삼승의 귀의하는 곳이자, 대승의 깊은 곳집입니다. 그 경지는 멀고 아득하여 어렴풋한 세계입니다. 보고 듣는 영역이 끊어져 그윽하게 텅 비고 아득하여, 뭇 중생들이 헤아릴 수 있는 경지가 아닙니다.
저는 미천한 몸으로 분수에 넘치게 나라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배움터에서 한가롭게 살면서, 구마라집 문하에 있기를 십여 년에 이르렀습니다. 비록 많은 경전의 취향이 다르고 뛰어난 귀취가 같지 않더라도, 열반이라는 하나의 진리만은 항상 가장 먼저 듣고 익혀 왔습니다. 다만 저는 재주와 식견이 어둡고 짧아, 비록 여러 번 가르침과 깨우침을 받기는 하였습니다만, 아직도 막막한 생각을 품어 어리석음이 다하도록 그만두지 못합니다.
또한 마치 어떤 깨우침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아직 높고 뛰어난 분이 먼저 제창하신 말씀을 경험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감히 스스로 결론을 내리지 못하였습니다. 불행하게도 구마라집 스승님이 세상을 떠나시어, 묻고 참고할 곳이 없는 바가 길이 한이 될 따름입니다. 그러나 폐하의 성덕은 외롭지 않아 홀로 구마라집 스승님과 정신으로 계합하시고, 일을 알며 도가 자리한 곳을 목격하여 당신의 그 마음을 결정하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구마라집 스승님의 현묘한 도풍을 진작시켜, 말세의 풍속을 계도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우연히 안성후(安成侯) 요숭(姚嵩)으로부터 무위(無爲)의 가르침의 궁극을 묻는 질문에 답했습니다. 자못 열반무명(涅槃無名)의 내용과 서로 넘나듦이 있었습니다. 지금 문득 『열반무명론』을 지었습니다. 열 번을 펼치려다 아홉 번을 구부린 엉터리 글입니다. 그렇지만 널리 수많은 경전의 이치를 캐내어, 그 증거에 기탁하여 비유를 이루었습니다. 이것으로서 폐하의 무명의 이루심을 우러러 진술하였습니다.
어찌 정신과 마음을 활짝 열고, 멀고도 마땅한 경지를 끝까지 다한다고 말하겠습니까? 애오라지 불문에 논의를 일으키고, 학도들에게 나눠주어 깨우치고자 할 따름입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임금님의 뜻에 참고가 된다면 보존하여 기록해 주시기 원하옵니다. 만약 차질을 빚는다면 내리시는 뜻에 엎드려 따르겠습니다.”
요흥의 회답한 요지는 정성스러웠다. 이에 찬양의 말을 갖추어 더하고는, 곧 칙명을 내려 베껴 쓰게 하고, 모든 자식과 조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가 당시에 중히 여겨진 바가 이와 같았다.
진(晋) 의희(義熙) 10년(414)에 장안에서 서른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