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전(高僧傳)
고승전 제01권
1. 역경(譯經) ①
01) 섭마등(攝摩騰)
02) 축법란(竺法蘭)
03) 안청(安淸)
04) 지루가참(支樓迦讖)
05) 담가가라(曇柯迦羅)
06) 강승회(康僧會)
07) 유기난(維祇難)
08) 축담마라찰(竺曇摩羅刹)
09) 백원(帛遠)
10) 백시리밀다라(帛尸梨密多羅)
11) 승가발징(僧伽跋澄)
12) 담마난제(曇摩難提)
13) 승가제바(僧伽提婆)
14) 축불념(竺佛念)
15) 담마야사(曇摩耶舍)
고승전 제02권
1. 역경 ②
01) 구마라집(鳩摩羅什)
02) 불야다라(弗若多羅)
03) 담마류지(曇摩流支)
04) 비마라차(卑摩羅叉)
05) 불타야사(佛陀耶舍)
06)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
07) 담무참(曇無讖)
고승전 제03권
1. 역경 ③
01) 석법현(釋法顯)
02) 석담무갈(釋曇無竭)
03) 불타집(佛馱什)
04) 부타발마(浮陀跋摩)
05) 석지엄(釋智嚴)
06) 석보운(釋寶雲)
07) 구나발마(求那跋摩)
08) 승가발마(僧伽跋摩)
09) 담마밀다(曇摩蜜多)
10) 석지맹(釋智猛)
11) 강량야사(畺良耶舍)
12)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
13) 구나비지(求那毘地)
고승전 제04권
2. 의해(義解) ①
01) 주사행(朱士行)
02) 지효룡(支孝龍)
03) 강승연(康僧淵)
04) 축법아(竺法雅)
05) 강법랑(康法朗)
06) 축법승(竺法乘)
07) 축법잠(竺法潛)
08) 지둔(支遁)
09) 우법란(于法蘭)
10) 우법개(于法開)
11) 우도수(于道邃)
12) 축법숭(竺法崇)
13) 축법의(竺法義)
14) 축승도(竺僧度)
고승전 제05권
2. 의해 ②
01) 석도안(釋道安)
02) 석법화(釋法和)
03) 축승랑(竺僧朗)
04) 축법태(竺法汰)
05) 석승선(釋僧先)
06) 축승보(竺僧輔)
07) 축승부(竺僧敷)
08) 석담익(釋曇翼)
09) 석법우(釋法遇)
10) 석담휘(釋曇徽)
11) 석도립(釋道立)
12) 석담계(釋曇戒)
13) 축법광(竺法曠)
14) 축도일(竺道壹)
15) 석혜건(釋慧虔)
고승전 제06권
2. 의해 ③
01) 석혜원(釋慧遠)
02) 석혜지(釋慧持)
03) 석혜영(釋慧永)
04) 석승제(釋僧濟)
05) 석법안(釋法安)
06) 석담옹(釋曇邕)
07) 석도조(釋道祖)
08) 석승략(釋僧?)
09) 석도용(釋道融)
10) 석담영(釋曇影)
11) 석승예(釋僧叡)
12) 석도항(釋道恒)
13) 석승조(釋僧肇)
고승전 제07권
2. 의해 ④
01) 축도생(竺道生)
02) 석혜예(釋慧叡)
03) 석혜엄(釋慧嚴)
04) 석혜관(釋慧觀)
05) 석혜의(釋慧義)
06) 석도연(釋道淵)
07) 석승필(釋僧弼)
08) 석혜정(釋慧靜)
09) 석승포(釋僧苞)
10) 석승전(釋僧詮)
11) 석담감(釋曇鑒)
12) 석혜안(釋慧安)
13) 석담무성(釋曇無成)
14) 석승함(釋僧含)
15) 석승철(釋僧徹)
16) 석담제(釋曇諦)
17) 석승도(釋僧導)
18) 석도왕(釋道汪)
19) 석혜정(釋慧靜)
20) 석법민(釋法愍)
21) 석도량(釋道亮)
22) 석범민(釋梵敏)
23) 석도온(釋道溫)
24) 석담빈(釋曇斌)
25) 석혜량(釋慧亮)
26) 석승경(釋僧鏡)
27) 석승근(釋僧瑾)
28) 석도맹(釋道猛)
29) 석초진(釋超進)
30) 석법요(釋法瑤)
31) 석도유(釋道猷)
32) 석혜통(釋慧通)
고승전 제08권
2. 의해 ⑤
01) 석승연(釋僧淵)
02) 석담도(釋曇度)
03) 석도혜(釋道慧)
04) 석승종(釋僧鍾)
05) 석도성(釋道盛)
06) 석홍충(釋弘充)
07) 석지림(釋智林)
08) 석법원(釋法援)
09) 석현창(釋玄暢)
10) 석승원(釋僧遠)
11) 석승혜(釋僧慧)
12) 석승유(釋僧柔)
13) 석혜기(釋慧基)
14) 석혜차(釋慧次)
15) 석혜륭(釋慧隆)
16) 석승종(釋僧宗)
17) 석법안(釋法安)
18) 석승인(釋僧印)
19) 석법도(釋法度)
20) 석지수(釋智秀)
21) 석혜구(釋慧球)
22) 석승성(釋僧盛)
23) 석지순(釋智順)
24) 석보량(釋寶亮)
25) 석법통(釋法通)
26) 석혜집(釋慧集)
27) 석담비(釋曇斐)
고승전 제09권
3. 신이(神異) ①
01) 축불도징(竺佛圖澄)
02) 단도개(單道開)
03) 축불조(竺佛調)
04) 기역(耆域)
고승전 제10권
3. 신이 ②
01) 건타륵(?陀勒)
02) 가라갈(訶羅竭)
03) 축법혜(竺法慧)
04) 안혜칙(安慧則)
05) 섭공(涉公)
06) 석담곽(釋曇?)
07) 사종(史宗)
08) 배도(杯度)
09) 석담시(釋曇始)
10) 석법랑(釋法朗)
11) 소석(邵碩)
12) 석혜안(釋慧安)
13) 석법궤(釋法?)
14) 석승혜(釋僧慧)
15) 석혜통(釋慧通)
16) 석보지(釋保誌)
고승전 제11권
4. 습선(習禪)
01) 축승현(竺僧顯)
02) 백승광(帛僧光)
03) 축담유(竺曇猷)
04) 석혜외(釋慧嵬)
05) 석현호(釋賢護)
06) 지담란(支曇蘭)
07) 석법서(釋法緖)
08) 석현고(釋玄高)
09) 석승주(釋僧周)
10) 석혜통(釋慧通)
11) 석정도(釋淨度)
12) 석승종(釋僧從)
13) 석법성(釋法成)
14) 석혜람(釋慧覽)
15) 석법기(釋法期)
16) 석도법(釋道法)
17) 석보항(釋普恒)
18) 석법오(釋法晤)
19) 석승심(釋僧審)
20) 석담초(釋曇超)
21) 석혜명(釋慧明)
5. 명률(明律)
01) 석혜유(釋慧猷)
02) 석승업(釋僧業)
03) 석혜순(釋慧詢)
04) 석승거(釋僧?)
05) 석도엄(釋道儼)
06) 석승은(釋僧隱)
07) 석도방(釋道房)
08) 석도영(釋道營)
09) 석지도(釋志道)
10) 석법영(釋法穎)
11) 석법림(釋法琳)
12) 석지칭(釋智稱)
13) 석승우(釋僧祐)
고승전 제12권
6. 망신(亡身)
01) 석승군(釋僧群)
02) 석담칭(釋曇稱)
03) 석법진(釋法進)
04) 석승부(釋僧富)
05) 석법우(釋法羽)
06) 석혜소(釋慧紹)
07) 석승유(釋僧瑜)
08) 석혜익(釋慧益)
09) 석승경(釋僧慶)
10) 석법광(釋法光)
11) 석담홍(釋曇弘)
7. 송경(誦經)
01) 석담수(釋曇邃)
02) 석법상(釋法相)
03) 축법순(竺法純)
04) 석승생(釋僧生)
05) 석법종(釋法宗)
06) 석도경(釋道?)
07) 석혜경(釋慧慶)
08) 석보명(釋普明)
09) 석법장(釋法莊)
10) 석혜과(釋慧果)
11) 석법공(釋法恭)
12) 석승부(釋僧覆)
13) 석혜진(釋慧進)
14) 석홍명(釋弘明)
15) 석혜예(釋慧豫)
16) 석도숭(釋道嵩)
17) 석초변(釋超辯)
18) 석법혜(釋法慧)
19) 석승후(釋僧候)
20) 석혜미(釋慧彌)
21) 석도림(釋道琳)
고승전 제13권
8. 흥복(興福)
01) 석혜달(釋慧達)
02) 석혜원(釋慧元)
03) 석혜력(釋慧力)
04) 석혜수(釋慧受)
05) 석승혜(釋僧慧)
06) 석승익(釋僧翼)
07) 석승홍(釋僧洪)
08) 석승량(釋僧亮)
09) 석법의(釋法意)
10) 석혜경(釋慧敬)
11) 석법헌(釋法獻)
12) 석법헌(釋法獻)
13) 석승호(釋僧護)
14) 석법열(釋法悅)
9. 경사편(經師篇)
01) 백법교(帛法橋)
02) 지담약(支曇?)
03) 석법평(釋法平)
04) 석승요(釋僧饒)
05) 석도혜(釋道慧)
06) 석지종(釋智宗)
07) 석담천(釋曇遷)
08) 석담지(釋曇智)
09) 석승변(釋僧辯)
10) 석담빙(釋曇憑)
11) 석혜인(釋慧忍)
10. 창도편(唱導篇)
01) 석도조(釋道照)
02) 석담영(釋曇穎)
03) 석혜거(釋慧?)
04) 석담종(釋曇宗)
05) 석담광(釋曇光)
06) 석혜분(釋慧芬)
07) 석도유(釋道儒)
08) 석혜중(釋慧重)
09) 석법원(釋法願)
10) 석법경(釋法鏡)
고승전 제14권
서록(序錄)
고승전 제01권
1. 역경(譯經) ①
01) 섭마등(攝摩騰)
섭마등은 본래 중천축(中天竺)1)국 사람이다. 풍채 있는 거동이 훌륭하고 대승(大乘)과 소승(小乘)의 경(經)을 잘 알았다.
항상 돌아다니면서 교화하는 일을 맡았다. 언제인가 천축국의 지배를 받는 작은 나라에 가서
『금광명경(金光明經)』2)을 강의한 적이 있다. 때마침 적국이 국경을 침범하였다. 섭마등이 말하였다.
“경에서 이르기를, ‘이 경을 강설하면, 지신(地神)의 보살핌에 힘입어 머무는 곳이 안락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막 싸움이 벌어지려 하니 이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에 몸을 돌보지 않으리라 서원하고 몸소 가서 화친할 것을 권했다. 마침내 두 나라가 서로 즐거워하고,
섭마등도 이로 말미암아 지위가 높이 올라갔다.
한(漢)나라 영평(永平) 연간(58~75) 어느 날 밤에 명제(明帝)가 금빛 나는 사람[金人]이 공중에서 날아오는 꿈을 꾸었다.
이에 여러 신하들을 불러서 꿈꾼 바를 풀이하였다. 통인(通人)3) 부의(傅毅)가 대답하였다.
“제가 듣기에 서역에는 부처[佛]라는 신(神)이 있다고 합니다. 폐하께서 꿈꾸신 바는 아마도 필시 이것이었을 것입니다.”
황제가 그렇게 여기고 곧 낭중(郞中) 채음(蔡?)과 박사 제자(博士弟子) 진경(秦景) 등을 보내 천축국으로 가서
불법(佛法)을 찾도록 하였다. 채음 등은 그곳에서 섭마등을 만나보고 한(漢)나라로 갈 것을 요청하였다.
섭마등은 불법을 널리 펼 것을 굳게 마음먹은 터라,
피로함과 괴로움을 꺼리지 않고 고비사막 건너기를 무릅써서 낙양에 이르렀다.
명제는 후한 상을 내리고 접대를 잘해 성의 서쪽 문 밖에 정사(精舍)를 세워 거처하게 하였다.
이것이 중국 땅에 사문(沙門)이 있게 된 시초였다. 그러나 불법이 처음 전해질 때라 아직 믿어 귀의하는 이들이 없었다.
그래서 깊은 깨달음을 쌓아두기만 하고 가르침을 베풀어 펼칠 곳이 없었다.
그 후 얼마 있다가 낙양에서 돌아가셨다.
기(記)에서 말한다.
“섭마등이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한 권을 번역하여 처음에는 난대(蘭臺) 석실(石室) 열네 번째 칸 안에 봉하여 두었다.
섭마등이 머무른 곳은 오늘날 낙양성 서쪽 옹문(雍門) 밖에 있는 백마사(白馬寺)이다.” 전하는 말에 이른다.
“일찍이 외국의 국왕이 여러 절들을 훼손하고 무너뜨릴 적에 초제사(招提寺)4)만이 미처 훼손되지 않았다.
어느 날 밤에 흰 말 한 마리가 탑을 돌며 슬피 울부짖었다. 즉시 이 사실을 왕에게 아뢰니,
왕이 곧바로 여러 절을 무너 뜨리는 일을 멈추었다. 이 일로 인하여 ‘초제’라는 절 이름을 고쳐’백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여러 절들이 이름을 지을 때에 대부분 그것을 본보기로 취한다.”
02) 축법란(竺法蘭)
축법란도 역시 중천축국 사람이다. 경론(經論) 수만 장을 외워 천축국 학자들의 스승이라고 자부하였다.
당시 채음 일행이 그 나라에 도착하고 난 뒤, 축법란은 섭마등과 함께 돌아다니며 교화[遊化]할 것을 약속하였다.
마침내 서로 따라서 한나라에 왔다. 그 때 축법란에게 배우던 무리들이 그가 떠나는 것을 만류하고 막자,
그는 샛길로 빠져나가 이르렀다.
낙양에 도착한 이후 축법란은 섭마등과 함께 머물렀다. 얼마 지나 중국말을 잘하자,
채음이 서역에서 가져 온 불경에서 『십지 단결경(十地斷結經)』·『불본생경(佛本生經)』·
『법해장경(法海藏經)』·『불본행경(佛本行經)』·『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다섯 부(部)를 번역하였다.
도적의 난리통에 도읍을 옮기느라 네 부는 없어져서 강좌(江左)에 전하지 않는다.
오직 『사십이장경』만이 지금도 남아 있지만 이천여 글자 가량이 된다.
중국 땅에 현존하는 여러 경전들은 이것을 시초로 삼는다.
또 채음은 서역에서 석가께서 기대어 계신 모습을 그린 그림을 얻었다.
이것은 우전왕(優田王)5)의 전단상사(?檀像師)가 그린 네 번째 작품이다.
낙양에 이르자 명제(明帝)는 즉시 화공으로 하여금 베껴 그려서 청량대(淸凉臺)와 현절릉(顯節陵)에 걸어 두었다.
원래의 상(像)은 오늘날 전해지지 않는다.
또한 예전에 한무제가 곤명지(昆明池)6)를 파다가 바닥에서 검은 재[黑灰]를 얻었다.
이것에 대하여 동방삭(東方朔)에게 물었더니 동방삭이 말하였다.
“자세히 알지 못하니, 서역 사람에게 물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축법란이 온 후에 여러 사람들이 그에게 가서 물어 보았다. 축법란이 말하였다.
“세계가 종말을 맞을 때에 겁화(劫火)7)가 훨훨 불탑니다. 이 재가 바로 그것입니다.”
동방삭의 말이 증명되자 믿는 자들이 더욱 늘었다. 후에 축법란이 낙양에서 돌아가셨다.
그 때 나이는 60여 세이다.
03) 안청(安淸)
안청의 자(字)는 세고(世高)이다. 안식국(安息國)8) 왕과 정후(正后) 사이에서 태어난 태자이다.
어려서부터 효행으로써 칭송을 받았다. 게다가 총명하고 민첩하게 공부하며 애써 배우기를 좋아하였다.
외국의 전적(典籍) 및 칠요(七曜)9)·오행(五行)·의방(醫方)·이술(異術)과 날짐승이나
들짐승의 소리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지 못한 것이 없었다.
어느 날 안세고가 길을 가다가 한 떼의 제비를 보고는 문득 같이 가던 이에게 말하였다.
“제비가 ‘반드시 먹을 것을 보내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지저귑니다.”
조금 있다가 과연 먹을 것을 가져온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기므로 빼어나게 남다르다는 명성이
일찍부터 서역에 퍼졌다.
안세고는 출가하기 전에도 계율을 받드는 것을 매우 엄격히 하였다. 부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에 인생의 괴로움과 헛됨[空]을 깊이 깨닫고, 걸림돌이 되는 육체를 꺼려 떠나고자 하였다.
그래서 상복을 벗은 뒤에 마침내 숙부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출가하여 불도를 닦았다.
그는 경장(經藏)을 널리 알았다. 특히 아비담학(阿毘曇學)10)에 정통하고 선경(禪經)11)을 깨달아 간략하게 그 미묘함의 끝까지 다 하였다.
그 후 그는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널리 교화를 폈다. 한나라 환제(桓帝)12) 초기에 처음으로 중국에 이르렀다.
그는 재주와 깨달음이 빠르고 민첩하여 한 번 듣기만 해도 능숙하였다.
그래서 중국에 이른 지 오래지 않아 곧 중국말을 완전하게 익혔다.
이에 많은 경전을 번역하여 범어(梵語)를 한문으로 옮겼다. 『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음지입경(陰持入經)』·대(大)·소(小)의 『십이문경(十二門經)』·
백육십품경(百六十品經)』 등이 그것이다.
과거 외국의 삼장(三藏)13)인 중호(衆護)가 경의 요점을 찬술하여 27장(章)을 지었다.
안세고는 여기에서 7장을 뽑아 한문으로 번역해 냈다. 바로 『도지경(道地經)』이 이것이다.
안세고가 앞뒤로 낸 경론(經論)은 모두 39부(部)이다. 이치를 밝게 분석하고 문자를 참으로 올바르게 썼다.
설명을 잘하면서도 화려한 데로 흐르지 않고, 표현이 질박하면서도 거칠지 않았다.
이는 무릇 읽는 자들이 부지런히 힘쓰면서도 싫증나지 않도록 한 것이다.
안세고는 하늘의 이치와 사람의 본성을 깊이 더듬어 저절로 인연의 업보를 알았다.
세상에서 헤아려 생각할 수 없는 신령한 자취가 많았다. 어느 때인가 안세고는 스스로 말하였다.
“전생에도 이미 출가하였다. 그 때 함께 공부하던 벗 가운데 성을 잘 내는 사람이 있었다.
걸식하러 다니다가 마뜩치 않은 시주(施主)를 만나면 그 때마다 번번이 원한을 품었다.
내가 자주 꾸짖고 타일렀지만 끝내 잘못을 뉘우치거나 고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세월이 20여 년이 흐른 뒤 벗과 이별을 하며, ‘나는 광주(廣州) 로 가서 전생[宿世]의 인연을 끝마치려 한다. 그대는 경에 밝고 부지런히 수행하는 것이 나에게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성품이 성을 내고 노하는 일이 많아서 생명이 다한 뒤에는 반드시 악한 몸을 받을 것이다.
만일 내가 도를 얻게 된다면 반드시 그대를 제도하리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광주에 이르니 도적 떼들이 크게 난을 일으켰다. 길에서 마주친 한 소년이 손에 침을 뱉고 칼을 뽑으며 말하기를 ‘진정 너를 여기서 만나는구나’라고 하였다. 내가 웃으며 말하기를, ‘나는 그대에게 숙명적인 빚이 있다.
그래서 먼 곳에서 찾아와 그것을 갚으려고 한다. 그대의 분노는 본래 전생에서 가졌던 생각이다’ 하고는,
목을 늘이고 칼을 받아 얼굴에 두려운 기색이 없었다. 끝내 도적은 나를 죽이고 말았다.
길을 가득 메워 지켜보던 사람들이 그 기이한 광경을 보면서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 후에 나의 영혼은 돌아와 안식국왕의 태자가 된 것이니 이것이 지금의 이 몸인 것이다.”
안세고는 중국을 돌아다니며 교화하면서 경을 널리 펼치는 일을 마쳤다.
영제(靈帝) 말엽에 관락(關洛: 關中·洛陽)이 몹시 어지러웠다. 이에 강남에 법을 전하려고 가면서 말하였다.
“나는 여산(廬山)14)을 지나면서 옛날에 같이 공부하던 벗을 제도해야만 한다.”
걸어 공정호(?亭湖)15)의 사당에 이르렀다. 이 사당에는 예로부터 위엄서린 신령[靈威]이 있었다.
떠돌아다니며 장사하는 사람들이 여기에서 기도하면, 바람이 순조롭게 불어 사람들이 지체하여 머무르는 일이 없었다.
언젠가 사당 신령의 대나무[神竹]를 구하는 사람이 있었다. 미처 허락을 받기 전에 마음대로 가져갔다.
배가 즉시 뒤집혀서 가라앉고 대나무[竹]는 본래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이런 일이 있고부터는 뱃사람들이 공경하고 꺼려하여,
신령의 그림자만 비쳐도 두려워 떨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안세고와 함께 가던 삼십여 척의 배가 이 사당에 희생을 바치고 복을 빌었다.
신령이 내려와 축관의 입을 빌려 말하였다. “배 안에 있는 사문을 어서 모셔 오라.”
선객들이 모두 크게 놀라 안세고에게 사당으로 들어가기를 청하였다.
신령은 안세고에게 말하였다.
“내가 전생에 외국에서 그대와 함께 출가하여 도를 배웠을 때, 곧잘 보시하기를 좋아하면서도 성내어 노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지금은 공정호의 사당신이 되어 주변 천 리를 제가 다스립니다. 예전에 보시한 공덕으로 진귀한 보물이 몹시 풍부합니다.
하지만 예전에 성을 내던 성품 때문에 이처럼 신령이 되는 업보를 받았습니다.
오늘 함께 공부하던 벗을 만나니,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합니다.
수명을 곧 마칩니다만 보기 흉한 형체가 너무도 큽니다.
만약 여기에서 죽으면 강호를 더럽히므로 산서(山西)의 못으로 가려 합니다.
이 몸이 죽고 난 뒤에는 지옥에 떨어질까 두렵습니다.
내게 있는 비단 천 필과 여러 가지 보물로 불법을 세우고 탑을 만들어서 좋은 곳에 태어나도록 해 주십시오.”
안세고가 말하였다. “일부러 제도하러 여기까지 왔거늘 어찌하여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까?”
신령이 말하였다. “몹시 보기 흉한 모습이라서, 사람들이 보면 반드시 두려워할까봐 그렇습니다.”
안세고가 말하였다. “모습을 드러내기만 하는 것이라면 사람들이 그다지 괴이쩍게 여기지 않으리다.”
그러자 신령이 제단 뒤에서 머리를 내밀었다. 길이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커다란 이무기였다.
그 꼬리가 안세고의 무릎까지 이르렀다. 안세고가 그를 향해 범어(梵語)로 몇 마디 나누고 몇 수 범패(梵唄)로 찬탄하였다.
이무기는 슬픔의 눈물을 비 오듯이 흘리더니 이내 모습을 감추었다.
안세고는 곧 비단과 보물을 거두어 이별하고 떠났다. 배들이 돛을 올리고 떠나자 이무기가 다시 몸을 드러내어
산에 올라 내려다보았다. 사람들이 손을 흔들자 이내 모습이 사라졌다.
삽시간에 예장(豫章)에 당도하였다. 곧장 공정호의 사당에서 가지고 온 물건으로 동사(東寺)를 세웠다. 안세고가 떠나간 후에 신령은 바로 수명을 다하였다.
저녁 무렵에 한 소년이 배 위에 올랐다. 안세고 앞에서 길게 무릎을 꿇고 그에게서 주원(呪願)을 받고는 문득 사라졌다.
안세고는 뱃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방금 전에 있던 소년이 바로 공정호 사당의 신령인데, 흉한 모습에서 벗어났구려.”
이로부터 사당의 신령은 사라지고 다시는 영험한 일이 없었다. 뒤에 사람들이 산서(山西)의 못에서 죽은
이무기 한 마리를 보았다. 머리에서 꼬리까지의 길이가 몇 리에 이르렀다. 지금의 심양군(?陽郡) 사촌(蛇村)이 바로 그곳이다.
안세고는 그 뒤에 다시 광주(廣州)로 가서 전생[前世]에 자기를 해친 소년을 찾았다. 그 때의 소년은 아직도 살아 있었다.
안세고는 그의 집으로 가서 예전의 인과에 얽힌 일을 말하였다.
아울러 숙명의 인연을 들려주고 다시 만난 것을 기뻐하면서 말하였다.
“나에게는 아직도 갚아야 할 일이 남았습니다. 이제 회계(會稽) 땅에 가서 그것을 다하려고 합니다.”
광주의 이 사람은 안세고가 비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뜻이 환히 풀려서 이해되자,
지난날의 잘못을 거슬러 올라가 뉘우치고는 정중하게 대접하였다.
안세고를 따라 동쪽으로 가다가 마침내 회계에 도착하였다.
그곳에 이르자마자 시장으로 들어섰다. 마침 시장 안에서는 싸움판이 벌어졌다.
서로 치고 받는 자들이 잘못 주먹을 휘둘러 안세고의 머리를 치는 바람에 그 때 숨을 거두고 말았다.
광주 사람은 연거푸 두 가지 보응을 경험하고는 드디어 불법을 부지런히 닦았다. 아울러 사연을 다 갖추어 이야기하니,
멀거나 가깝거나 그 소식을 들은 이들이 비통해 마지않았다. 삼세(三世)에 걸친 인연이 징험이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안세고는 왕족이면서 서역에서 온 손님이라서 모두 안후(安侯)라고 불렀다. 지금까지도 그렇게 호칭한다.
천축국은 자칭 그들의 글을 천서(天書)라 하고 말을 천어(天語)라 한다.
중국과는 아주 달라서 소리와 뜻이 잘 맞지 않는다. 안세고 전후로 나온 번역들 중에는 잘못된 것이 많다.
안세고가 번역한 것만이 여러 번역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
도안(道安)은 ‘경을 대하여 가르침을 받는다면 성인을 뵙고 직접 가르침을 받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여겼다.
여러 세대에 걸쳐 밝은 덕을 지닌 분들께서도 다 같이 이처럼 찬탄하고 사모하신 것이다.
내가 여러 기록을 찾아보니, 안세고의 일을 기재하는 내용이 실려 있기도 하고 빠져 있기도 하다.
아마도 권적(權迹)16)을 드러내거나 숨기기도 하고, 응하거나 응하지 않던 것[應廢]의 실마리가 너무 많기[多端] 때문이다.
간혹 전달하는 자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서로 내용이 어긋났을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여러 가지 차이를 함께 나열한다면,
그런 대로 논의를 할 만할 것이다.
석도안(釋道安)의 『경록(經錄)』17)에서는 말한다.
“안세고(安世高)는 한(漢)나라 환제(桓帝) 건화(建和) 2년(148)에서 영제(靈帝) 건녕(建寧) 연간(168~171)에 이르는 20여 년 동안에 30여 부의 경을 번역해 냈다.”
또 『별전(別傳)』에서는 말한다.
“진(晋)나라 태강(太康, 280~289) 말년에 안후(安侯)라는 도인(道人)이 있었다. 상원(桑垣)에 와서 불경을 번역하여 냈다.
이윽고 함 하나를 봉하여 절에 두며 이르기를, ‘4년이 지난 후에 그것을 열어 보시오’라고 하였다.
오(吳)나라 말기에 양주(楊州)로 가서 사람을 시켜 물건 한 상자를 팔아 노비를 한 사람 샀다.
그리고 복선(福善)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고 말하기를, ‘이 사람은 선지식(善知識)18)이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노비를 데리고 예장(豫章)으로 가서 공정호 사당의 신령을 제도하고, 신령을 위해 절을 세우는 일을 마쳤다.
복선이 칼로 안후의 늑골을 찌르니, 여기에서 돌아가셨다.
상원 사람들이 이에 그가 봉한 함을 여니 나뭇결이 저절로 글자를 이루기를, ‘
나의 도를 높일 사람은 거사(居士) 진혜(陳慧)요, 『 선경 (禪經)』을 전할 사람은 비구 승회(僧會)이다’라고 하였다.
이 날이 바로 4년째 되는 날이다.” 또 유중옹(庾仲雍)의 『형주기(荊州記)』에서는 말한다.
“진(晋)나라 초에 안세고(安世高)라는 사문이 공정호 사당 신령을 제도하여 재물을 얻었다.
형성(荊城)의 동남쪽 모퉁이에 백마사(白馬寺)를 세웠다.”
송나라 임천(臨川) 강왕(康王)의 『선험기(宣驗記)』에서는 말한다.
“이무기[?]가 오(吳)나라 말에 죽었다.”
담종(曇宗)의 『탑사기(塔寺記)』에서는 말한다.
“단양(丹陽) 와관사(瓦官寺)는 진(晋)나라 애제(哀帝) 때 사문 혜력(慧力)이 지은 것이다.
후에 사문 안세고가 공정호(?亭湖) 사당의 보물로 수리하였다.”
그러나 도안(道安) 법사는 여러 경을 교열하고 나서 번역한 경들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반드시 잘못된 것을 그대로 따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漢)나라 환제(桓帝) 건화(建和) 2년에서부터 진(晋)나라 태강(太康) 말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140여 년이 된다.
만약 안세고가 장수하였다면 혹 이와 같을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어째서인가? 강승회는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을 주석한 책의 서문에서 말한다.
“이 경은 안세고가 낸 것이지만, 오랫동안 감추어져 있었다. 마침 남양(南陽)의 한림(韓林)과 영천(穎川)의 문업(文業),
회계(會稽)의 진혜(陳慧)란 사람이 있었다. 이 세 사람의 현인(賢人)은 독실하고 빈틈없이 도를 믿었다.
함께 모여서 서로에게 가르침을 청하였다. 이에 진혜(陳慧)의 뜻으로 미루어 나는 그 내용을 짐작하였다.”
얼마 안 되어 강승회는 진(晋)나라 태강(太康) 원년(元年, 280)에 돌아가셨다.
그런데도 이미 “이 경은 나온 뒤 오랫동안 감추어져 있었다”고 하였다.
또 안세고가 봉했던 상자에 나타난 글자에도 “내 도를 높일 사람은 진혜(陳慧)요,
『선경』을 전할 사람은 비구 승회이다”라고 하였다.
『안반수의경』에서 분명히 한 바는 선업(禪業)을 말한 것이다.
여기에서 봉함의 기록이 참으로 허무맹랑하게 조작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미 두 사람에게 바야흐로 불도(佛道)를 전한다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어찌 안세고가 강승회와 더불어
세상을 함께 했다고 인정할 수 있겠는가? 또 『별전(別傳)』에서는 스스로 말한다.
“『선경(禪經)』을 전할 이는 비구 승회이다.”
승회는 이미 태강 초에 죽었다. 그러니 어찌 태강 말에 안후 도인이 살아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앞뒤의 말이 스스로 모순되거늘,
한 책에서 진(晋)나라 초(初)를 잘못 가리킨 것을 그대로 좇았다. 이로부터 후세의 여러 작자들이,
혹은 태강(太康)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오(吳)나라 말기라고도 하여 부화뇌동해서 덩달아 다투니, 바로잡을 수가 없었다.
이미 진(晋)나라 초라는 주장은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런데도 『담종기(曇宗記)』에는 “진(晋)나라 애제(哀帝) 때 안세고가 바야흐로 다시 절을 수리하였다”라고 하였다.
그 잘못된 설이 지나쳐도 너무나 동떨어졌다.
04) 지루가참(支樓迦讖)
지루가참은 바로 지참(支讖)이라고도 한다. 본시 월지(月支)19) 사람이다.
행실이 순수하고 깊이가 있으며, 타고난 성품이 막힘 없이 툭 터지고 민첩하였다.
계율을 받아 지키는데 매우 정성스러워서 칭송이 자자하였다.
그는 여러 가지 경들을 암송하고, 불법을 널리 펴는 일에 뜻을 두었다.
한나라 영제(靈帝, 167~189) 때에 낙양에 노닐다가 광화(光和)20)와 중평 (中平)21) 사이에 범문(梵文)을 옮겨 번역하여
『반야도행경(般若道行經)』·『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수능엄경(首楞嚴經)』 세 경을 냈다.
또한 『아사세왕경(阿?世王經)』·『보적경(寶積經)』 등 모두 십여 부의 경을 번역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되어 기록한 것이 없어졌다.
도안(道安)은 예와 이제의 것을 교정(校定)하고 문체(文體)를 정밀하게 살피고 나서 말하였다.
“지루가참이 낸 것인 듯하다. 그가 번역한 이러한 여러 경들은 모두 본래의 뜻을 깊이 터득하여
쓸데없이 수식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지루가참은 불법의 요점을 잘 베풀어 도를 널리 전한 사람이라고 이를 만하다.”
그 뒤에 생을 마친 곳은 알지 못한다.
축불삭(竺佛朔)
당시에 천축국의 사문(沙門) 축불삭이 있었다. 그도 역시 한나라 영제(靈帝) 때에 『도행경(道行經)』을 가지고
낙양으로 가서 곧바로 범어(梵語)를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번역을 하는 사람들이 당시에 제대로 알지 못하여
그 뜻이 잘못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그의 경우에는 내용을 꾸미지 않고 바탕을 보존하여 경의 뜻을 깊이 터득하였다.
축불삭은 또한 광화(光和) 2년(179)에 낙양에서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을 번역했다. 지루가참이 말을 옮기고,
하남(河南)과 낙양의 맹복(孟福)과 장련(張蓮)이 붓으로 받아썼다.
안현(安玄)
또한 당시에 우바새(優婆塞) 안현(安玄)이 있었으니 안식국 사람이다. 성품이 곧고 깨끗하며 이치에 깊이 잠겼다.
널리 여러 경들을 외우고, 훤히 익힌 바가 많았다. 역시 한나라 영제(靈帝) 말에 낙양에서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였다.
공(功)이 있기에 기도위(騎都尉)라고 부른다.
그의 성품은 텅 비어 조용하고 온순하고 공손하였다. 항상 불법을 일삼는
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여겼다. 점차 중국말을 알자 경전을 펴내는 일에 뜻을 두었다.
그래서 항상 사문들과 함께 도의(道義)를 강론하므로, 세상에서는 그를 도위(都尉)라고 부른다.
안현은 사문 엄불조(嚴佛調)와 함께 『법경경(法鏡經)』을 번역했다. 안현은 입으로 범문(梵文)을 번역하고,
엄불조가 붓으로 받아썼다. 이치가 맞고 음이 정확하여 경의 미묘한 뜻을 다하여,
그 뛰어난 문학이 아름다워서 후대가 이어받았다.
엄불조(嚴佛調)
엄불조는 본래 임회(臨淮) 사람이다. 열두 살부터 뛰어나게 총명하고 민첩하여 배우기를 좋아하였다.
세상에서는 안후(安候)·도위(都尉)·엄불조(嚴佛調) 세 사람이 옮겨 번역한 것을 칭찬하여,
그들의 뒤를 ‘이어받기가 어렵다’는 ‘난계(難繼)’라고 부른다.
엄불조는 또한 ?십혜장구(十慧章句)?를 지었다. 역시 세상에 전한다.
도안(道安)은 엄불조가 경을 번역한 것을 극찬하여 말한다.
“책 전체가 분명하면서도 번잡하지 않고 교묘하다.”
지요(支曜)·강거(康巨)·강맹상(康孟詳)
또한 사문 지요·강거·강맹상 등은 모두 한나라 영제(靈帝, 168~189)와 헌제(獻帝, 190~220) 연간에,
슬기로운 배움이 있다고 이름이 나서 서울 낙양(洛陽)까지 알려졌다.
지요는 『성구정의경(成具定意經)』·『소본기경(小本起經)』
등을 번역하고, 강거는 『문지옥사경(問地獄事經)』을 번역하였다. 모두 말이 올바르고 이치가 있으며 꾸미지 않았다.
강맹상은 『중본기경(中本起經)』과 『수행본기경(修行本起經)』을 번역하였다. 이보다 앞서 사문 담과(曇果)가
가유라위국(迦維羅衛國)에서 범본(梵本)을 얻자, 강맹상이 축대력(竺大力)과 함께 한문(漢文)으로 번역하였다.
도안은 말한다. “강맹상이 번역한 것은 아름답고 자연스러워서 그윽한 의미를 충분히 드러냈다.”
05) 담가가라(曇柯迦羅)
담가가라는 중국말로 법시(法時)라 하며 본래 중천축국 사람이다.
집안이 대대로 크게 부유하고 항상 청정한 복[梵福]을 닦았다.
담가가라는 어려서부터 재주 있고 슬기로우며 바탕이 남보다 뛰어났다.
책을 한 번 읽기만 해도 글의 뜻을 환히 깨달았다. 『사위타론(四圍陀論)』을 뛰어나게 배우고,
풍운(風雲)·성수(星宿)·도참(圖讖)·운변(運變)을 두루 꿰뚫지 않음이 없었다.
스스로 말하기를, “천하 문장의 이치가 다 나의 가슴 속에 들어 있다”고 하였다.
나이 25세에 이르러 어느 승방(僧坊)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법승(法勝)22)의 『아비담심론(阿毘曇心論)』을 보았다.
그것을 가져다 보아도 아득하여 도무지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은근하게 거듭 살펴보았으나 더욱 어두컴컴하기만 하였다. 이에 탄식하였다.
“내가 배움을 쌓은 지 여러 해가 흘렀다. 분전(墳典)23)을 잘 안다고 자부하고 경서들을 자유자재로 요리하였다.
글의 뜻을 두 번 생각하지 않고 문장을 거듭 살펴보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불서(佛書)를 보니, 문득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범위 밖에서 나왔다.
반드시 이치를 깊이 더듬어서 따로 정밀하게 살펴봐야만 하겠다.”
이에 책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가, 어떤 비구에게 대략 해석해 줄 것을 청하였다. 드디어 인과를 깊이 깨닫고,
삼세를 매우 잘 이해하였다. 비로소 부처의 가르침이 넓고도 넓어 세속의 책들이 미칠 수 없음을 알았다.
이에 세상의 영화로움을 버리고 출가하여 정성스럽고 간절한 마음으로 수행하였다.
그는 대승·소승의 경과 여러 비니(毘尼)를 읽고, 항상 돌아다니며 교화하는 일을 귀하게 여겼다.
오로지 수행에만 몰두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
위(魏)나라 가평(嘉平) 연간(249~254)에 낙양에 이르렀다.
당시 위나라에는 불법이 있기는 하였다. 그러나 전반적인 분위기가 그릇되게 바뀌어져,
뭇 승려들이 아직도 삼보에게 귀의하는 계[歸戒]를 받지 않았다. 다만 머리를 깎은 것이 세속과 다를 뿐이었다.
설령 재참(齋懺)24)을 하더라도, 섬김에 있어서는 유교 의식인 사당에 지내는 제사[祠祀]를 본받았다.
담가가라가 오고 난 뒤부터 부처의 가르침이 크게 행해졌다.
당시 여러 승려들이 담가가라에게 계율을 번역해 줄 것을 청하였다.
담가가라는 율부의 제도에 대한 자세한 말씀이 번잡하고 지나치게 범위가 넓다고 여겼다.
그래서 부처의 가르침이 번창하기 전에는 결코 그것을 받들어 사용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에 ?승기계심(僧祇戒心)?을 번역하여 조석(朝夕)의 의례를 갖추었다. 그리고 다시 인도 승려[梵僧]에게 청하여
갈마법(?磨法)을 세워 계를 받으니, 중국의 계율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후에 담가가라가 돌아가신 곳은 알지 못한다.
강승개(康僧鎧)
당시에 또한 외국의 사문으로 강승개가 있었다. 역시 가평(嘉平, 249~254) 말에 낙양에 와서
『욱가장자경(郁伽長者經)』 등 4부의 경을 번역했다.
담제(曇帝)
또한 안식국의 사문 담제 역시 계율의 학문[律學]을 잘하였다.
위(魏)나라 정원(正元, 254~255) 중에 낙양으로 와서 『담무덕갈마(曇無德?磨)』를 번역했다.
백연(帛延)
또 사문 백연은 어디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역시 재주 있고 총명하여 깊은 이해가 있었다.
위(魏)나라 감로(甘露, 256~260) 중에 『무량청정평등각경(無量淸淨平等覺經)』 등 6부의 경을 번역했다.
그 후에 돌아가신 곳은 알지 못한다.
06) 강승회(康僧會)
강승회의 선조는 강거(康居) 사람으로 대대로 천축국에서 살았다.
그의 아버지는 장사꾼이었기 때문에 교지(交趾)로 옮겨갔다.
강승회가 십여 세 무렵에 부모님이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지극한 효자였다.
상복을 벗고서야 출가하여 매우 엄격하게 힘껏 수행하였다.
사람됨이 관대하고 올바르며 학식과 도량이 있었다. 뜻을 돈독히 하여 배우기를 좋아하여 환히 삼장(三藏)을 이해하였다.
널리 육경(六經)을 보고, 천문(天文)과 도위(圖緯)에 대해서도 두루 섭렵하였다. 요점을 잘 분별하여 자못 글을 잘 지었다.
당시 손권이 이미 강남을 지배하였다. 부처의 가르침은 아직 행해지지 못했다.
이보다 앞서 우바새인 지겸(支謙)이 있었다. 자는 공명(恭明)이고, 일명 월(越)이라고 하였다.
본래 월지의 사람으로 한나라에 와서 노닐었다.
과거 한나라 환제(桓帝)에서 영제(靈帝)에 이르는 기간에 지참(支讖)이 여러 경들을 번역했다.
또 지량(支亮)이라는 인물은 자(字)가 기명(紀明)으로, 지참에게 배움을 받았다. 지겸은 또한 지량에게서 수업을 받았다.
널리 경서를 읽어 정밀하게 탐구하지 않음이 없었다. 세간의 기예(伎藝)를 익힌 것이 많았으며 다른 나라의 글도 두루 배워
여섯 나라의 말에 뛰어났다.
그 모습은 호리호리한 큰 키에 몸이 마르고 거무튀튀하였다.
눈은 흰자위가 많고 눈동자는 누런빛을 띠었다. 당시 사람들이 그에 대하여 말하였다.
“지랑(支郞)은 누런 눈동자에 몸이 비록 호리호리하지만 꾀주머니[智囊]이다.”
한나라 헌제(獻帝, 190~220) 말에 난리가 일어나자 오나라로 피하였다.
손권(孫權)이 그가 재주가 있고 지혜롭다는 말을 듣고는,
그를 불러 만나보고 기뻐하였다. 벼슬을 주어 박사(博士)로 삼아 동궁(東宮)을 돕고 이끌도록 하였다.
위요(韋曜) 등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보탬이 되고자 힘썼다.
그렇지만 한나라 바깥 지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오지(吳志)』에는 실리지 않았다.
지겸은 불법의 큰 가르침이 행해지고는 있지만, 경들이 대부분 범문이라서 아직 번역이 미진하다고 여겼다.
외국어를 아주 잘하므로 여러 본들을 수집하여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오나라 황무(黃武) 원년(元年, 222)에서 건흥(建興, 252~253) 중에 이르기까지
『유마경(維摩經)』·『대반니원경(大般泥洹經)』·『법구경(法句經)』·『서응본기경(瑞應本起經)』 등
마흔아홉 가지의 경을 번역해냈다. 곡진하게 성스러운 뜻을 실었으면서도 말의 뜻이 운치가 있고 우아하였다.
또한 『무량수경(無量壽經)』과 『중본기경(中本起經)』에 의거하여,
?보리련구(菩提連句)?와 ?범패삼계(梵唄三契)?를 지었다.
아울러 『요본생사경(了本生死經)』 등에 주석을 달았다. 모두 세상에 행한다.
당시 오나라에 처음으로 불교의 큰 법이 퍼졌으나, 풍속의 교화[風化]는 아직 완전하지 못하였다.
강승회는 강남[江左]25)에 불도를 떨치어 탑과 사찰[圖寺]을 성하게 일으키고자 하여, 지팡이를 짚고 동쪽으로 떠돌아다녔다.
오나라 적오(赤烏) 10년(248)에 처음 건업(建?)26)에 이르러 띳집을 지어 불상을 모시고 도를 행하였다.
당시 오나라에서는 사문을 처음 보았다. 이 때문에 그 모습만 보고 도(道)는 알지 못하여 이상하게 속이는 짓이라고 의심하였다.
그래서 담당 관리가 손권(孫權)에게 아뢰었다.
“어떤 오랑캐가 국경 안으로 들어와 자칭 사문이라 합니다. 얼굴이나 복장이 보통과는 다릅니다.
이 일을 조사해봐야 하겠습니다.” 손권이 말하였다.
“옛날 한나라 명제(明帝)가 꿈에 본 신(神)을 부처로 불렀다고 한다.
그들이 섬기는 바가 어찌 옛날의 그것이 아니겠는가?”
즉시 강승회를 불러 꾸짖어 물었다.
“어떠한 영험(靈驗)이 있는가?”
강승회가 말하였다. “여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신 지가 어느덧 천 년이 흘렀습니다.
유골인 사리는 신비하게 빛을 발하여 사방을 비춥니다.
옛날 아육왕(阿育王)27)은 탑을 세운 것이 팔만 사천 개입니다. 대개 탑과 절을 일으키는 것은
여래께서 남기신 교화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손권은 이 말을 듣고 과장되고 허황하다고 여겨서 강승회에게 말하였다.
“만약 사리를 얻는다면 마땅히 탑사를 세우겠다. 그렇지만 그것이 헛되고 망령된 것이라면 나라에서 정한 형벌대로 하리라.”
이에 강승회는 이레 동안의 기일을 청하고 그를 따르는 무리들에게 말하였다.
“법이 흥하느냐 망하느냐가 이 한 번의 일에 달려 있다. 지금 지극한 정성으로 하지 않으면, 나중에 다시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는 모두 고요한 방에서 깨끗하게 재계하면서, 구리로 만든 병을 상에 놓고 향을 피워 간절하게 소원을 빌었다.
이레의 기한이 끝났지만 고요할 뿐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이에 다시 이레 동안의 기간을 더 얻었으나 역시 전과 같았다.
손권은 사람을 속이는 거짓된 일이라 하고 죄를 주고자 하였다.
강승회가 다시 세 번째로 이레의 기간을 청하였다. 손권은 다시 한 번 특별히 그 청을 들어 주었다.
강승회는 그의 무리들에게 말하였다.
“공자께서는 ‘문왕이 이미 돌아가셨으나 그 분이 남기신 문(文)은 여기에 있지 않는가?’라 하셨다.28)
법의 영험이야 반드시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아무런 감응이 없다면, 왕이 벌을 내리기를 기다릴 것도 없다.
마땅히 죽을 각오로 바라야만 할 것이다.”
21일 저녁 무렵에도 보이는 바가 없자, 모두들 두려움에 떨지 않음이 없었다.
그런데 5경(更)29)이 되자 문득 병 속에서 달그랑 달그랑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강승회가 가서 살펴보니 과연 사리가 들어 있었다.
다음날 아침 강승회는 사리를 가져다가 손권에게 바쳤다. 조정에 모인 신하들이 모두 모여 바라보았다.
오색의 찬란한 광채가 사리병 위로 뻗쳐 나왔다. 손권이 직접 손으로 구리 쟁반 위에 병을 기울이자,
사리가 부딪쳐 쟁반이 곧 깨어지고 말았다. 손권은 몹시 두려워서 놀라 일어나 말하였다.
“참으로 보기 드문 상서로다.”
강승회가 앞으로 나아가 말하였다. “사리의 신비로운 위엄이 어찌 다만 광채를 발하는 일에만 그치겠습니까?
세상의 종말을 사르는 불로도 태울 수 없고, 금강(金剛)의 방망이로도 깨뜨릴 수 없습니다.”
손권은 명령을 내려 그것을 시험하였다. 강승회는 다시 맹서하여 말하였다.
“진리의 구름이 사방을 덮으면, 모든 백성들이 그 은택에 우러러 젖게 됩니다.
원하건대 다시 신비로운 자취를 드리우시어, 널리 위엄 서린 영험을 보여 주소서.”
이에 사리를 쇠로 된 다듬잇돌 위에 올려놓고, 힘이 센 자에게 내려치도록 하였다.
쇠로 된 다듬잇돌은 움푹 패이고, 사리는 아무런 흠집도 생기지 않았다.
손권은 크게 탄복하고 즉시 탑사(塔寺)를 세웠다.
처음으로 절을 세웠기 때문에 건초사(建初寺)라고 부른다. 그곳의 땅 이름은 불타리(佛陀里)라고 한다.
이로 말미암아 강남에서 불법이 마침내 일어났다.
그 후 손권의 손자 손호(孫皓)가 정사를 맡자 법령이 가혹해졌다.
부정(不正)한 제사를 모두 없애 버렸으며, 절도 아울러 헐어 없애고자 하였다. 손호가 말하였다.
“이런 절들이 어찌하여 일어나는가? 만약 그 가르침이 참되고 올곧아서 성스러운 가르침과 서로 맞는 것이 있다면
마땅히 그 도를 받들겠다. 하지만 만약 그것이 진실하지 못하다면 모두 다 불태워 버리리라.”
여러 신하들이 모두 아뢰었다.
“부처의 위엄 서린 힘은 여타의 다른 신(神)과는 다릅니다.
강승회의 상서로운 감응 때문에 대황(大皇)께서 절을 창건하였습니다.
이제 만약 가볍게 여겨서 훼손한다면 후회할 일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손호는 장욱(張昱)을 절로 보내어 강승회를 꾸짖도록 하였다.
장욱은 본래 재치 있게 말을 잘하는지라, 종횡무진으로 어려운 질문을 퍼부었다.
강승회는 임기응변하여 대답을 펼쳐 나갔다. 말의 이치가 창날 솟구치듯 날카롭게 빼어나 막힘이 없었다.
아침 일찍부터 저녁까지 장욱은 강승회를 굴복시킬 수 없었다.
장욱이 그곳에서 물러나 돌아갈 적에 강승회가 문까지 배웅을 하였다.
마침 절 옆에 부정한 신에게 제사를 모시는 자가 있었다.
장욱이 말하였다. “부처의 신묘한 가르침이 그렇게 훌륭하다면,
어떤 까닭으로 이러한 무리들이 가까이에 있는데도 고치지 못하는가?”
강승회가 말하였다. “뇌성벽력이 산을 부술 정도로 요란하다 할지라도,
귀머거리가 듣지 못하는 것은 그 소리가 작아서가 아닙니다.
참으로 이치가 통하면 만 리 밖에서도 응하게 마련입니다. 만약 그것이 막혀 있다면,
간장과 쓸개처럼 아무리 가까이 붙어 있다 하더라도, 초(楚)나라나 월(越)나라처럼
멀리 떨어져 있는 것[肝膽楚越]30)이나 다름없습니다.”
장욱은 돌아와 칭찬하였다. “강승회의 재주와 명석함은 제가 헤아릴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원하건대 왕께서 친히 살펴보소서.” 손호는 크게 조정의 인재를 모아 놓고, 마차를 보내어 강승회를 맞이하였다.
강승회가 자리에 앉자 손호가 물었다. “부처의 가르침에서 밝히는 선악보응(善惡報應)이란 무슨 뜻인가?”
강승회가 대답하였다. “무릇 훌륭한 임금이 효성과 자애로써 세상을 가르치면,
붉은 까마귀가 날고 노인성(老人星)이 나타납니다.
어진 덕으로 만물을 기르면, 예천(醴泉)이 솟아오르고 아름다운 곡식이 납니다.
이와 같이 선한 행위를 하면 상서로운 일이 있습니다.
악한 행위를 하면 또한 그와 같이 거기에 상응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악한 일을 하면 귀신이 그에 대한 벌을 줍니다.
드러난 곳에서 악한 일을 하면 사람들이 그에 대한 벌을 줍니다.
『주역(周易)』에서도 ‘착한 일을 많이 한 집에 반드시 좋은 일들이 많을 것이다[積善餘慶]’라고 합니다.
『시경(詩經)』에서도 ‘복을 구하는 데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네[求福不回]’31)라고 읊습니다.
비록 유가 경전의 바른 말씀이라고는 하지만, 또한 부처의 가르침에서도 나오는 사리 분명한 교훈입니다.”
손호가 다시 물었다. “만약 그렇다면 주공(周公)이나 공자가 이미 밝히신 것이니,
불교의 쓰임새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강승회가 대답하였다. “주공이나 공자의 말씀은 대략 우리와 가까운 자취만을 보여 주었습니다.
하지만 부처의 가르침에 있어서는 그윽함과 미묘함이 몹시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악한 일을 행하면 오랜 세월 동안 지옥에서 고통을 겪어야 하고,
선한 일을 행하면 길이 극락세계의 즐거움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선을 권하고 악함을 막고자 밝혔습니다. 그러니 어찌 그 가르침이 크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손호는 그 때 그 말을 꺾을 만한 방법이 없었다. 그렇지만 손호가 불교의 바른 법을 들었다고는 하나,
어리석고 포악한 성질 때문에 그 잔학함을 누를 수가 없었다.
그 뒤에 숙위병(宿衛兵)들을 후궁(後宮)으로 보내어 정원을 수리하였다.
이 때 땅 속에서 높이가 몇 자[數尺]나 되는 금으로 된 불상을 발견하고는 손호에게 바쳤다.
손호는 불상의 깨끗하지 않은 부분을 드러내어 더러운 오물을 끼얹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웃으면서 즐거워하였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온몸에 큰 종기가 생겼다.
특히 음부(陰部) 부분이 더욱 아파서 울부짖는 소리가 하늘을 찌르는 듯하였다.
태사(太史)가 점을 쳐서 말하였다. “위대한 신을 범했기 때문이옵니다.”
즉시 여러 사당에 기도를 드렸으나, 끝내 아무런 차도가 없었다.
궁녀 중에 이전부터 불법을 받드는 자가 있었다.
궁녀가 손호에게 물었다. “폐하께서는 절에 나아가 복을 빌어 보시지 않을는지요?”
손호는 머리를 쳐들고 말하였다. “부처라는 신(神)이 그렇게 위대한가?”
그러자 궁녀가 말하였다. “부처는 위대한 신이십니다.”
드디어 손호는 마음속으로 궁녀가 말한 뜻을 깨달았다.
그래서 궁녀는 즉시 불상을 가져다가 전(殿) 위에 모셔 두었다.
향내나는 더운물로 수십 번을 씻고 나서, 향을 사르고 참회하였다.
손호는 정성스럽게 베갯머리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자신의 죄상을 스스로 고백하였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통증이 차차 나아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사신을 절로 보내 도인(道人)을 찾아, 그에게 설법해 주기를 청하였다.
강승회가 그를 따라 궁으로 들어갔다. 손호는 예를 갖추어 죄와 복을 얻는 연유에 대하여 물었다.
강승회는 그를 위하여 상세하게 풀어 설명하였다. 그 말이 매우 정밀하고 요점이 있었다.
손호는 원래 뛰어난 이해력이 있기 때문에 매우 기뻐하였다.
이로 인해서 사문의 계율이 어떠한 것인지 알고자 하였다.
강승회는 계율의 내용이 비밀 스러운 것이라서, 사문(沙門)이 아닌 자에게는 가벼이 알려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본업(本業) 백삼십오원(百三十五願)을 취하였다.
그것을 일상의 생활에서 끊임없이 중생을 구원하기를 원하는 이백오십사(二百五十事)로 분류하였다.
손호는 자비의 원력이 크고도 넓다는 것을 깨닫고, 더욱 착한 마음을 더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곧장 강승회에게 나아갔다.
5계(戒)32)를 받고 나서 열흘 만에 질병이 깨끗이 나았다.
이에 강승회가 머무는 절을 더욱 잘 꾸몄다.
종실(宗室)에도 반드시 받들지 않으면 안 된다고 널리 알렸다.
강승회는 오나라 조정에서 자주 불법을 설하였다.
그렇지만 손호의 성품이 흉악하고 거칠어서 오묘한 뜻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오직 응보(應報)와 같이 알기 쉬운 일들을 이야기하여, 그의 마음을 열어 주었다.
강승회는 건초사(建初寺)에서 여러 경들을 번역했다.
이른바 『아난염미경(阿難念彌經)』·『경면왕경(鏡面王經)』·『찰미왕경(察微王經)』·『범황경(梵皇經)』 등이다.
또한 『소품경(小品經)』·『육도집경(六度集經)』·『잡비유경(雜譬喩經)』 등을 번역했다.
모두 경의 본질을 신묘하게 터득하고 글의 뜻도 참으로 올바르다.
또 니원(泥洹)의 패성(唄聲: 범패소리)33)을 전하였다.
맑으면서도 아름답고, 슬프면서도 밝은 분위기여서 한 시대의 모범이 되었다.
또한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법경경(法鏡經)』·『도수경(道樹經)』, 이 세 가지 경전에
주석을 달고 아울러 경의 서문을 지었다.
말의 취지가 바르면서 무르익고 뜻이 은근하고 그윽하여 모두 세상에 알려졌다.
오나라 천기(天紀) 4년(280) 4월 손호가 진(晋)나라에 항복하였다.
9월에는 강승회가 병에 걸려 돌아가셨다. 이 때가 진나라 무제(武帝) 태강(太康) 원년(280)이다.
진나라 성제(成帝, 326~335) 함화(咸和) 중에 소준(蘇峻)이 난을 일으켜 강승회가 세운 탑이 불탔다.
사공(司空) 하충(何充)이 이를 수리하여 다시 지었다.
평서장군(平西將軍) 조유(趙誘)는 대대로 불법을 받들지 않았으므로 삼보(三寶)를 업신여겼다.
이 절에 들어가서 여러 도인들에게 말하였다.
“오래 전부터 이 탑이 자주 빛을 발한다고 들었다.
헛되고 괴이하여 있을 수 없는 일이라서 믿을 수 없다.
만약 내가 직접 보게 된다면 더 따질 일이야 없겠지만.”
말을 마치자마자 탑에서 즉시 오색 빛이 뿜어져 나왔다. 법당과 당간[堂刹]까지 비추었다.
조유는 두려워 털끝이 바짝 곤두섰다. 이로 말미암아 조유는 불법을 믿고 공경하여,
절의 동쪽에 다시 작은 탑을 세웠다. 이는 멀게는 크나큰 성인[大聖]이신 부처님의 신령스런 감응이며,
가까이로는 역시 강승회의 힘이다. 그러므로 그의 초상화를 그려서 지금까지 전한다.
손작(孫綽)이 그를 위하여 찬(贊)을 지었다.
님께서 남긴 범패 소리
참으로 아름다운 바탕일세
눈앞의 걱정 따위 사라지니
넉넉하고 편안할손
어두운 밤과 같은
허물 떨쳐 물리치시어
초연하게 멀리 나아가고
우뚝 높이 솟았구려.
會公簫瑟 寔惟令質
心無近累 情有餘逸
屬此幽夜 振彼尤黜
超然遠詣 卓矣高出
어떤 기(記)에 이르기를, “손호가 사리(舍利)를 쳐서 시험한 것으로 보아,
손권의 시대는 아니라고 일컫는다”고 하였다.
내가 생각해 보건대, 손호가 절을 부수려고 할 때 여러 신하들이 모두 답하기를, “강승회의 상서로운 감응 때문에 대황(大皇: 손권)께서 절을 창건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니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처음에 사리의 신통함을 느끼게 된 일은 필시 손권의 시대일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 사람들이 적은 전기(傳記)에서는 모두 말한다.
“손권이 오나라 궁중에서 사리의 신통함을 알았다”고 하였다.
그 후에 다시 신의 영험함을 시험한 것은 어쩌면 손호일 수 있다.
07) 유기난(維祇難)
유기난은 본래 천축국 사람이다. 대대로 다른 도를 받들어 불을 섬기는 일[火祠]을 올바른 것으로 알았다.
당시 천축국의 어떤 사문이 소승을 배우고 도술을 많이 행하였다. 먼 길을 다녀오다가 해가 저물자,
사문은 유기난의 집에서 묵으려 하였다. 유기난의 집에서는 다른 도를 섬겼기 때문에 부처의 제자를 시기하였다.
그래서 문 밖 한데[露地]서 자고 가도록 하였다.
사문은 밤에 몰래 주술을 써서 유기난의 집에서 섬기는 불을 순식간에 타서 없앴다.
이에 온 집안사람이 모두 뛰쳐나왔다. 사문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집에 들어가 공양할 것을 청하였다.
사문은 주문으로 불길을 다시 살렸다. 유기난은 사문의 신통한 힘이 자기보다 나은 것을 보고는,
불법에 나아가서 크게 믿고 좋아하는 마음이 생겼다. 드디어 본래 섬기던 바를 버리고 출가하여 도를 닦았다.
이 사문을 의지하여 화상(和尙)34)으로 삼았다.
삼장(三藏)35)을 수학(受學)하고 사함(四含: 四阿含)을 매우 잘하였다.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교화하니 모두들 받들지 않음이 없었다.
오나라 황무(黃武) 3년(224), 벗인 축률염(竺律炎)과 함께 무창(武昌)에 이르렀다.
『담발경(曇鉢經)』 범본(梵本)을 가지고 갔다. 담발(曇鉢)은 곧 『법구경(法句經)』이다.
당시 오나라 사람들이 다 같이 경을 번역할 것을 청하였다. 유기난은 아직 중국말을 잘하지 못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에 벗인 축률염과 함께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축률염 역시 아직 중국말을 잘하지 못하여,
그 의미를 다하지 못한 것이 제법 있었다. 뜻은 본래의 의미를 살리는 데 두었으며, 표현은 질박한 편이다.
?법립(法立)·법거(法巨)
진(晋)나라 혜제(惠帝, 290~306) 말에 법립이라는 사문이 다시 번역하여 다섯 권으로 만들었다.
사문 법거가 붓으로 적었다. 그의 표현은 조금 화려하다. 또한 법립은 따로 『소경(小經)』을 냈다.
거의 백여 수(首)에 가깝다. 영가(永嘉, 307~313) 말년에 난리를 만나 대부분 남아 있지 않다.
08) 축담마라찰(竺曇摩羅刹)
축담마라찰은 중국말로 법호(法護)라 한다. 그의 선조는 월지국(月支國) 사람이다. 본래의 성은 지(支)씨이다.
대대로 돈황군(燉煌郡)에서 살았다. 나이 여덟 살에 출가하여 외국 사문 축고좌(竺高座)를 스승으로 섬겼다.
경을 매일 만 자씩 읽고, 한 번 보기만 하여도 이해하였다. 타고난 성품이 깨끗하고 아름다우며,
절조 있는 행동은 깨끗하고 엄격하였다. 뜻이 돈독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여 만 리 밖에라도 스승을 찾아갔다.
이 때문에 6경(經)을 널리 보고 마음을 7적(籍)에 노닐었다.
아무리 세상에서 비방하거나 칭송하는 데 힘쓰더라도 일찍이 마음에 꺼린 적이 없었다.
이 때는 진(晋)나라 무제(武帝, 265~290)의 치세이다. 비록 서울에서 절과 불화와 불상이 존숭되기는 하지만,
심오한 대승의 경전들은 총령(?嶺: 파미르 고원) 밖에 모여 있었다. 법호(法護)는 이에 한탄하여 분발하고,
불도를 널리 펴는 일에 뜻을 두었다.
그래서 스승을 따라 서역에 가서 여러 나라를 차례로 돌아다녔다.
외국의 언어가 모두 서른여섯 가지이다. 글씨도 역시 그와 같다. 법호는 그것을 두루 배웠다.
훈고를 철저히 익히고, 음과 뜻과 글자의 체까지 두루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드디어 많은 『범경(梵經)』을 가지고 중국으로 돌아왔다.
돈황(燉煌)에서 장안으로 돌아오면서 연도에서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그가 얻은 것은 『현겁경(賢劫經)』·『정법화경(正法華經)』·『광찬경(光讚經)』 등 165부이다.
부지런히 애쓰면서 오직 세상에 크게 유통시키는 것[弘通]을 일삼았다.
평생토록 베끼고 번역하느라 힘이 들어도 싫증내지 않았다.
경법(經法)이 중국에 널리 퍼지게 된 것은 법호의 힘이다.
법호는 진(晋)나라 무제(武帝) 말년, 깊은 산에 숨어살았다.
산에는 맑은 시내가 있어 항상 깨끗이 목욕하고 양치질하였다.
후에 장작을 캐는 나무꾼들이 물가를 더럽혔다. 얼마 가지 않아 물이 말라 버렸다.
이에 법호가 배회하며 탄식하였다. “사람이 덕이 없어 마침내 맑은 샘이 그쳤구나.
물이 영원히 말라 버린다면 참으로 살아갈 수 없으리라. 당장 옮겨가야겠다.”
말을 마치자 샘물이 솟아올라 시냇물이 넘실댔다. 그의 깊은 정성에 감응하는 바가 이와 같았다.
그러므로 지둔(支遁)은 그의 초상화에 다음과 같이 찬탄하였다.
님의 맑고 고요함이여,
도덕이 깊고도 아름다워라.
궁벽한 골짝 나직한 읊조림에
마른 샘 물 솟구쳐 응답했다네.
아득하여라, 님이여.
하늘이 내리신 크나큰 아름다움으로
고비 사막 건너
우리들 그윽한 경지로 이끄셨네.
護公澄寂 道德淵美
微吟窮谷 枯泉漱水
邈矣護公 天挺弘懿
濯足流沙 領拔玄致
뒤에 장안 청문(靑門) 밖에 절을 세우고 부지런히 도를 행하였다. 이에 덕스런 교화가 멀리까지 퍼지고,
명성이 사방 멀리까지 뒤덮였다. 승려 수천 명이 모두 그를 종사로 섬겼다.
진(晋)나라 혜제(惠帝, 290~306) 때에 이르러 서쪽으로 달아났다. 관중(關中) 지방이 어지러워 백성들이 이리저리로 흩어졌다.
법호는 문도들과 함께 피난하여 동쪽으로 내려와 민지(?池)에 이르렀으나, 병이 들어 돌아가셨다. 이 때의 나이가 78세이다.
뒤에 손작(孫綽)이 『도현론(道賢論)』을 지었다. 인도의 일곱 승려를 죽림칠현(竹林七賢)36)과 빗대었는데,
법호를 산거원(山巨源)과 짝하였다. 『도현론』에서 논(論)하였다.
“법호공의 덕은 만물의 근본에 머물고, 산거원[山濤]의 위치는 도를 논하는 자리에 올라섰다.
두 분은 덕스런 자태가 높고도 원대하여 비슷한 분들이라 할 만하다.”
그가 후대 사람에게 기려지는 바가 이와 같았다.
섭승원(?承遠)·섭도진(?道眞)
당시 청신사(淸信士) 섭승원은 밝게 이해하는 재주가 있었고, 뜻을 돈독히 하여 불법에 힘썼다.
법호공(法護公)이 경전을 번역할 때 대부분 문구(文句)를 바로잡았다.
『초일명경(超日明經)』을 처음 번역할 적에 자못 번다하고
중복되는 것이 많았다. 섭승원이 깎아 내기도 하고 바로잡기도 하여 지금 쓰이는 두 권으로 만들었다.
그가 상정(詳定)한 바가 대부분 이와 같다.
섭승원에게는 도진(道眞)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역시 범학(梵學)을 잘 하였다.
이들 부자는 말을 엮는 데 아름다우면서도 무리가 없어서 원래의 책 내용에 누를 끼치지 않았다.
또 축법수(竺法首)·진사륜(陳士倫)·손백호(孫伯虎)·우세아(虞世雅) 등은
모두 법호의 뜻을 이어받아 집필하고 상세하게 교정하였다.
도안(道安)은 말한다. “법호공이 번역하신 바가 만일 세밀하게 이 분들의 손과 눈을 거쳤다면
강령(綱領)이 반드시 바로잡혔을 것이다. 비록 번역한 경의 말이 미묘하거나 아름답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기상이 드넓고 사리에 통달하여 시원하게 펼쳐 냈다.
특히 무생(無生)의 이치를 잘 알아 혜(慧)에 의존하고 수식을 하지 않았다. 그 표현이 질박하여 근본에 가깝다.”
칭찬함이 이와 같았다. 법호의 집안은 대대로 돈황에서 살았다.
그가 사람들을 교화하여 불법으로 두루 적셔주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모두 돈황 보살이라고 일컬었다.
09) 백원(帛遠)
백원의 자는 법조(法祖)이다. 본래의 성(姓)은 만(萬)씨로 하내(河內) 사람이다.
아버지인 위달(威達)은 유학(儒學)의 바른 의리로 이름이 알려져서, 고을에서 관리로 임명하려고 불렀으나 가지 않았다.
법조가 어린 나이에 도를 향한 마음을 일으켜서 아버지에게 출가할 것을 여쭈었다.
말하는 이치가 절실하고 지극하여 아버지가 그 뜻을 빼앗을 수 없었다. 드디어 옷을 바꾸어 입고 불도를 따랐다.
법조는 재주와 생각이 뛰어나고 민첩하며, 밝은 성격이 무리에서 빼어났다. 날마다 팔구천 글자의 경을 읽고,
대승을 닦아 뛰어나게 그윽하고 미묘한 경지에 들어갔다. 세속의 분소(墳素)37)도 대부분 해박하게 꿰뚫었다.
이에 장안에 정사(精舍)를 지어 강습을 일삼았다. 속인과 승려로서 가르침을 받는 이들이 거의 천 명이나 되었다.
진(晋)나라 혜제(惠帝, 290~306) 말에 태재(太宰)인 하간(河間) 왕옹(王?)이 관중(關中)에 주둔할 적에,
마음을 비워 공경하고 중하게 받들면서 사우(師友)의 예로 대하였다.
한가한 시간이나 조용한 밤마다 도덕(道德)에 대해서 맑게 강의하였다. 그 때에 서부(西府)가 처음 지어졌다.
뒤로 갈수록 더욱더 성하였다. 말 깨나 하는 이들이 모두 그의 멀리까지 내다보는 능력에 대하여 탄복하였다.
법조는 군웅(群雄)들이 서로 다투어 바야흐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고는,
마음속으로 농우(?右)에 숨어 지내며 우아한 지조를 보존하고자 뜻을 두었다.
때마침 장보(張輔)가 진주 자사(秦州刺史)가 되어 농상(?上) 근처에 주둔함으로, 법조는 그와 함께 길을 떠났다.
장보는 법조의 이름과 덕이 환하게 드러나고, 여러 사람들이 그를 우러러 믿고 따르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승려의 옷을 벗겨 자기를 보좌하는 부하로 만들고 싶어하였다. 법조는 굳은 뜻을 바꾸지 않았다.
장보는 이로 말미암아 유감을 품었다.
이보다 앞서 고을사람 관번(管蕃)이 있었다. 법조와 함께 논의를 할 적마다 자주 법조의 의견에 굴복하였다.
그래서 관번은 깊이 부끄러움과 한을 품어 매번 없는 일을 꾸며대어 헐뜯었다.
법조가 길을 가다가 견현(?縣)에 이르자 갑자기 도인(道人)과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며칠 뒤에는 전생의 인연을 갚으리라.”
그리고는 이별의 말을 하면서 유서[素書]를 써서 불경과 불상과 재물을 나누어 베풀었다.
이튿날 새벽에 장보에게 가서 함께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장보의 뜻을 거슬렀다.
장보는 그를 가두고 벌을 내리니, 사람들은 모두 괴이하게 여기며 탄식하였다. 법조는 말하였다.
“나는 전생의 갚음을 하러 여기에 왔다. 이는 숙명의 오랜 갚음이다. 오늘의 일 때문만이 아니다.”
이에 부르짖었다.
“시방의 부처님과 조사님들이시여, 제가 전생에 몸으로 지은 죄업의 인연을 환희심으로 다 갚고자 합니다.
바라옵건대 다음 생에서는 장보와 함께 선지식이 되어 살인의 죄를 받게 마옵소서.”
드디어 채찍 50대를 맞고 갑작스럽게 목숨이 다하였다. 장보는 나중에 그 일을 모두 듣고는 크게 놀라서 안타깝게 여겼다.
과거에 법조가 도로써 교화하는 명성이 관롱(關?)38)에 퍼졌다.
효산(?山)과 함곡관(函谷關) 오른쪽 지역에서는 그를 신처럼 받들었다.
그러므로 오랑캐들이나 나라 사람들이 모두 한탄하고 통곡하여 장례하러 가는 길에서 눈물을 흘렸다.
농상(?上)의 강족(羌族)과 호족(胡族)들이 정예 기병 5천 명을 거느리고 법조를 맞이하여 서쪽으로 돌아가려고 하였다.
중간에 그가 해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슬픔을 금할 길이 없어 모두들 분격하여 법조의 원수를 갚고자 하였다.
장보가 군대를 상롱(上?)으로 보내자, 강족과 호족들이 날랜 기병을 거느리고 맞아 싸웠다.
당시 천수(天水) 지방의 옛 창하독(?下督)39) 부정(富整)이 드디어 분발하여 장보를 베었다.
여러 오랑캐들은 원한을 씻고 나서 칭선(稱善)하며 돌아갈 때에, 법조의 주검을 고루 나누어 가서 각기 탑묘(塔廟)를 세웠다.
장보의 자는 세위(世偉)이다. 남양 사람으로 장형(張衡)의 후예이다.
비록 재능과 학식은 있으나 잔혹하여 이치를 따르지 않았다.
천수의 태수 봉상(封尙)을 제멋대로 죽이니, 백성들이 의심하고 놀라서 난을 일으켜 그를 벤 것이다.
관번(管蕃)도 역시 끝내 마음을 쓰는 것이 삿되고 험악하기 때문에 패배를 불러들였다.
그 후에 얼마 되지 않아 이통(李通)이라는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소생하여 말하였다.
“법조 법사(法祖法師)께서 염라대왕의 거처에 계시면서 염라대왕을 위하여 『수능엄경(首楞嚴經)』을 강의하시는 것을 보았다.
그 분이 말씀하시기를, ‘경을 강의하는 일을 마치면 도리천(?利天)으로 갈 것이다’고 하였다.
또한 좨주(祭酒: 벼슬 이름) 왕부(王浮)라는 사람이 있었다. 일명 도사(道士) 기공(基公)이라고도 하였다.
그가 온몸을 결박당한 채로 법조에게 참회를 구하는 것을 보기도 하였다.”
예전에 법조가 평소 왕부와 더불어 매번 옳고 그름을 다툴 적에, 왕부가 막히는 일이 많자 성이 나서 스스로 참을 수가 없었다. 이에 『노자화호경(老子化胡經)』을 지어 불법을 왜곡하고 비방하였다. 그 재앙이 자신에게 돌아가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죽어서 참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손작(孫綽)의 『도현론(道賢論)』에는 법조를 혜강(?康)40)과 짝하여 논평하였다.
“백조(帛祖)의 허물은 관번(管蕃)에게서 시작하고, 중산(中散)41)의 재앙은 종회(鍾會)에게서 생겨났다.
두 현인 모두 빼어난 기상을 지녔으나 자신의 몸을 도모하는 생각에 어두웠다.
세상 일 밖에 마음을 두느라 세상을 가볍게 여겼다.
그러므로 화를 불러들인 것이 자못 다르지 않다.”
법조가 칭송을 받은 것이 이와 같다. 법조는 널리 책을 섭렵하고 익힌 것이 많아 범어(梵語)와 한문을 아주 잘하였다.
일찍이 『유체(惟逮)』·『제자본(弟子本)』·『오부승(五部僧)』 세 부(部)의 경을 번역하고, 『수능엄경』의 주(注)를 내었다.
또한 따로 여러 부(部)의 소경(小經)들을 번역하였다. 난리 통에 다 잃어버려 그 이름은 알 수 없다.
백법조(帛法祚)
법조(法祖)의 아우인 법조(法祚)도 역시 어려서부터 이름을 떨쳤다. 박사(博士)로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나이 25세에 출가하여 불교의 이치를 깊이 꿰뚫어서 관롱(關?)에서는 이름이 알려졌다.
당시 양주 자사(梁州刺史)는 장광(張光)이었다.
법조의 형이 옷을 바꾸어 입으려고 하지 않아서 장보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자 장광도 역시 법조(法祚)를 핍박하면서 불도(佛道)를 닦는 일을 그만두게 하였다.
그렇지만 법조(法祚)는 뜻을 지키며 지조를 굳혀 죽기를 맹세하였다.
드디어 장광에게 해를 입었다. 이 때 나이는 57세이다.
법조(法祚)는 『방광반야경(放光般若經)』의 주를 내었고, 『현종론(顯宗論)』 등을 지었다.
장광은 자가 경무(景武)이며 강하(江夏) 사람인데 후에 무도(武都)가 되었다.
저양(?楊)의 난리에 적에게 포위되자 분개하여 죽었다.
위사도(衛士度)
당시 진(晋)나라 혜제(惠帝, 290~306) 때에 우바새 위사도라는 인물이 『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 두 권을 번역해 냈다.
위사도는 본래 사주(司州) 급군(汲郡) 사람이다. 한문(寒門)에서 은거하고 안빈낙도의 생활을 하면서 불법으로 마음을 삼았다.
그가 죽던 날에는 청정하게 몸을 닦고 천여 마디의 경을 읊었다.
그런 연후에 옷을 단정히 하고 시체처럼 누워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10) 백시리밀다라(帛尸梨密多羅)
백시리밀다라는 중국말로 길우(吉友)라 하며 서역 사람이다. 당시 사람들이 고좌(高座)42)라고 불렀다.
전(傳)에서는 말한다. “국왕의 아들로서 마땅히 대를 이어야 했다.
그러나 나라를 아우에게 양보하고 남이 모르게 태백(太伯)43)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하늘의 계시를 마음속으로 깨달아 드디어 사문이 되었다.”
백시리밀다라는 타고난 자태가 높고 밝았다. 신령한 풍채가 뛰어나서 직접 그를 대하면 남들보다 우뚝 빼어났다. 진(晋)나라 영가(永嘉, 307~313) 중에 처음 중국에 왔다.
난리를 만나자 양자강을 건너와서 건초사(建初寺)에 머물렀다.
승상(丞相) 왕도(王導)가 한 번 보자마자 기이하게 여겨서, 어울릴 만한 같은 무리로 생각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이 세상에 드러났다. 태위(太尉) 유원규(庾元規)·광록(光錄) 주백인(周伯仁)·태상(太常)
사유여(謝幼與)·정위(廷尉) 환무륜(桓茂倫)은 모두 일대의 명사(名士)이다.
그를 보고 종일토록 여러 번 탄복하여 가슴을 열어 젖히고 관계를 맺었다.
일찍이 왕도가 백시리밀다라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백시리밀다라는 허리띠를 풀고 누워 엎치락뒤치락 하면서 말을 나누고 정신으로 교감하였다.
당시 상서령(尙書令) 변망지(卞望之)도 역시 백시리밀다라와 사이좋게 지냈다.
얼마 후에 변망지가 왔다. 백시리밀다라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용모를 꾸미고는, 단정하게 앉아 그를 대하였다.
그 까닭을 묻자 백시리밀다라는 말하였다.
“왕공(王公)은 풍류의 도로써 대하기를 남에게 기대하고, 변령(卞令)은 법도를 따라
남에게 엄격하게 대하기 때문에 그러했을 뿐입니다.”
뭇 귀족[諸公]들은 그제서야 그의 정신이 시원스러움과 엄격함의 둘 다에서 적당함을 얻었음을 칭찬하였다.
정위 환무륜이 일찍이 백시리밀다라를 위하여 별명을 지으려고 하였다. 오래 지나도록 짓지 못하였다.
어떤 이가 백시리밀다라는 탁월하고 밝다는 탁랑(卓朗)이라고 하였다.
이에 환정위는 너무나 탄복하여 별명 붙이기의 극치라고 여겼다.
대장군(大將軍) 왕처중(王處仲)이 남하(南夏)에 있었다.
왕도·주백인 등 여러 제후들이 모두 백시리밀다라의 재주를 높이 평가하는 것을 듣고 잘못된 일이라고 의심하였다.
그러나 백시리밀다라를 보자 기쁨이 마구 치달려서 한 번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경건함을 다 하였다.
주의(周?)는 복야(僕射)가 되어 사람을 선발하는 일을 맡았다. 부임하러 오다가 백시리밀다라를 방문하였다.
이에 백시리밀다라가 탄식하였다.
“만일 태평한 세상에 이러한 어진 이를 선발한다면, 참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한이 없게 할 것이다.”
조금 지나서 주의가 살해를 당하였다. 백시리밀다라는 주의의 자식을 보살피러 갔다.
이에 마주 앉아 인도의 범패[胡唄] 세 계(契)를 지었다. 범패의 울림이 구름의 기운을 눌러버렸다.
다음으로 수천 글자의 주문(呪文)을 외웠다. 목소리가 높고 화창하면서도 얼굴빛이 변함이 없었다.
얼마를 지나 눈물을 흘리다가 거두었다. 그러나 신기(神氣)가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
그가 슬픔과 기쁨의 감정을 일으키고 거두는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왕공이 일찍이 백시리밀다라에게 말하였다.
“어울릴 만한 외국 사람으로는 그대 한 사람만이 있을 뿐이다.”
백시리밀다라가 웃으며 말하였다. “만약 내가 그대들과 같았다면, 오늘 어찌 여기에 있을 수 있겠는가?”
당시에 아름다운 말로 여겼다. 백시리밀다라는 성품이 고상하고 간결하여 진(晋)나라 말을 배우지 않았다.
그래서 여러 제후들이 그와 더불어 말할 때에는, 백시리밀다라가 비록 번역을 통한다고 할지라도,
말을 하기 전에 이미 정신으로 깨닫고 뜻으로 이해하여 문득 그 의미를 다 알았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의 타고난 빼어남과 깨달음[悟得]이 비상한 것을 감탄하지 않음이 없었다.
백시리밀다라는 주술(呪術)을 잘 하여서 향하는 곳마다 모두 영험이 있었다.
과거 강남에는 주문을 외우는 법술이 없었다. 백시리밀다라가 『공작왕경(孔雀王經)』을 번역하여 여러 신주(神呪)를 밝혔다.
또한 제자 멱력(覓歷)에게는 높은 소리의 범패(梵唄)를 가르쳐 주었다. 지금까지 그 소리가 전한다.
진(晋)나라 함강(咸康, 335~342) 연간 중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80여 세이다. 여러 귀족들이 그 소식을 듣고는 애통하고 안타까워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환선무(桓宣武)가 매번 말하였다. “어려서 고좌(高座)를 뵌 적이 있다.
그분의 정신은 당시에도 매우 뛰어나다고 칭송받았다.”
낭야(瑯?) 왕민(王珉)은 백시리밀다라를 스승으로 섬겼다.
그를 위하여 서(序)를 쓰면서 말하였다. “『춘추(春秋)』 ?필법?에는 오(吳)와 초(楚)를 자작(子爵)44)이라고 칭하였다.
『춘추』 3전을 지은 이들이 중국을 앞세우고 사방 오랑캐를 뒤세웠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은주(夏殷周) 3대(代)의 중국인 후예들은 속된 것에서 벗어난 예를 행하지만,
탐욕스런 오랑캐는 어질게 양보하는 성품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세상에 우뚝한 빼어난 인물이 때로 저쪽에서도 태어난다.
뛰어난 재능이 이곳의 인물들과 짝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하늘이 뛰어나고 위대한 인물을 내려 줄 때에는,
중화와 오랑캐를 가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겠다.
이후 오직 한나라 때에 김일제(金日?)45)가 있었다. 김일제의 훌륭함은 어질고 효성스럽고 충성스러우며,
덕이 있고 미더우며 순수하고 지극하다. 그러나 명석함과 통달함으로써 평가할 만한 인물감은 못된다.
백시리밀다라는 저 높은 마음의 산봉우리 끝까지 나아가신 분이다. 준수한 인걸들과 정신으로 교감을 나누시어,
바람처럼 맑게 번뇌를 벗어나도록 이끌어 주셨다. 그래서 김일제와의 거리는 멀어도 너무나 멀다고 하겠다.”
백시리밀다라는 항상 석자강(石子岡)의 동쪽에 있으면서 두타(頭陀)46)를 행하였다.
그리고 삶을 마친 후에는 여기에 묻혔다. 성제(成帝)는 그의 풍모를 그리워하여 탑을 무덤에다 세웠다.
후에 관우(關右)의 어떤 사문이 서울에 와서 머물면서 비로소 무덤이 있는 곳에 절을 일으켰다.
진군(陳郡)의 사곤(謝琨)이 그 일을 도와 완성하고, 지나간 일을 추모하여 기리고자 고좌사(高座寺)라고 하였다.
11) 승가발징(僧伽跋澄)
승가발징은 중국말로 중현(衆現)이라 한다. 계빈국(?賓國) 사람이다.
의지가 굳세어 깊고 아름다운 생각이 있었다. 뛰어난 스승을 두루 찾아다녔다.
삼장(三藏)을 갖추어 익히며 여러 경전을 널리 보았다. 특히 몇몇 경(經)에는 아주 밝았다.
아비담비바사론(阿毘曇毘婆沙論)』을 암송하여 그 미묘한 의미를 꿰뚫었다.
항상 여러 곳을 돌아다니겠다는 뜻을 품고, 풍속을 살펴 널리 교화하였다.
부견(?堅)의 건원(建元) 17년(381)에 관중으로 들어왔다. 이에 앞서 대승의 경전은 널리 퍼지지는 못하고,
선수(禪數)의 학문(學問)이 매우 성하였다. 그가 장안에 이르고 나니, 모두 그를 불법의 거장이라고 일컬었다.
부견의 비서랑(秘書郞) 조정(趙正)은 불법을 높이 우러렀다.
외국에서는 『아비담비바사론』을 익혀야 할 으뜸으로 치는데, 승가발징이 이를 외운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4사(事)47)의 예로써 공양하고, 범문(梵文)을 번역해 줄 것을 청하였다.
마침내 이름난 덕[名德]48)을 지닌 법사 석도안(釋道安) 등과 함께 승려들을 모아 번역을 하였다.
승가발징이 불경 원본을 입으로 읊으면, 외국 사문 담마난제(曇摩難提)가 붓으로 범문을 받아 적었다.
불도라찰(佛圖羅刹)이 번역하면, 진(秦)의 사문 민지(敏智)가 붓으로 받아 적어 한문본을 만들었다.
위진(僞秦) 건원(建元) 19년(383)에 번역하였다. 초여름에 시작하여 한가위에 끝마쳤다.
과거에 승가발징이 『바수밀경(婆須蜜經)』 범본(梵本)을 가지고 왔었다.
다음 해에 조정(趙正)이 다시 번역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승가발징과 담마난제와 승가제바 세 사람이 함께 범본을 잡고,
진(晋)나라 사문 불념(佛念)이 번역하였다. 혜숭(慧嵩)이 받아 적고, 도안(道安)과 법화(法和)는 마주하여 함께 교정하였다.
이 때문에 두 가지 경전이 유포되어 전해져서 배움이 오늘에 이른다.
승가발징은 계율과 덕이 바르고 거룩하였다. 마음에 잡념이나 망상이 없이 세속을 벗어났다.
그러므로 관중(關中)의 승려들이 모범으로 본받았다. 그 후 어디에서 돌아가셨는지는 모른다.
불도라찰(佛圖羅刹)
불도라찰은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른다. 덕스런 일에 순수하고 경전을 두루 보았다.
오랫동안 중국에서 노닐었기 때문에 중국어에 매우 익숙하였다.
그의 범문(梵文) 번역본이 부견(?堅)의 시대에는 귀중하게 여겨졌다.
12) 담마난제(曇摩難提)
담마난제는 중국말로 법희(法喜)라 하며 도거륵(兜?勒) 사람이다. 7·8 세 무렵에 속세를 떠났으며,
총명과 지혜를 일찍 이루었다. 경전(經典)을 연구하고 외우며, 전심전력으로 업을 닦았다.
두루 삼장(三藏)을 보고,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을 암송하였다.
널리 알고 두루 들어 종합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이 때문에 나라 안의 먼 곳이나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추앙하여 감복하였다.
어려서부터 곳곳을 보고, 두루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항상 말하였다.
“불법을 크게 펴려면 아직 듣지 못한 곳에 베풀어야 마땅하다.”
그래서 멀리 고비 사막의 위험을 무릅쓰고, 진리의 보배를 품고 동쪽으로 들어왔다.
부씨(符氏)49)의 건원(建元, 365~384) 중에 장안(長安)에 이르렀다.
담마난제는 배움이 이미 넉넉하여 명성이 크게 났다. 그러므로 부견(符堅)이 깊이 예를 갖춰 대접하였다.
이보다 앞서 중국의 여러 불경에는 아직 사함(四含: 四阿含經)이 없었다.
부견의 신하로 무위태수(武威太守)인 조정(趙正)이 경을 번역할 것을 청하고자 하였다.
당시에 모용충(慕容?)이 이미 모반하여 군사를 일으켜 부견을 공격하니 관중(關中)이 어지러웠다.
조정은 법을 사모하는 마음이 깊어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았다.
불도를 위하여 도안(道安) 등에게 청하여 장안성(長安城) 안에 교리를 공부하는[義學]50) 승려들을 모았다.
그리고 담마난제에게 『중아함경(中阿含經)』과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의 두 아함(阿含)을 번역해 낼 것을 청하였다.
아울러 이보다 앞서 『비담심론(毘曇心論)』·『삼법도론(三法度論)』 등 모두 106권을 먼저 번역했다.
불념(佛念)이 번역하고, 혜숭(慧嵩)이 붓으로 받아썼다.
여름에 시작하여 이듬해 가을까지 연속적으로 2년이 걸려 문자가 바야흐로 갖추어졌다.
그러나 요장(姚?)이 관내(關內)를 침범하여 쳐들어오니 사람들의 마음이 불안해졌다.
담마난제는 이에 그곳에서 작별을 하고 서역(西域)으로 돌아갔다. 그가 삶을 마친 곳은 알지 못한다.
조정(趙正)
그 때에 부견(符堅)이 처음으로 패하자 여러 곳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요사한 오랑캐들이 멋대로 사납게 굴어 백성들이 흩어져 사방으로 나갔다.
그런데도 오히려 『대부(大部)』를 번역할 수 있었으니, 이는 대개 조정(趙正)의 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다.
조정의 자는 문업(文業)이다. 낙양(洛陽) 청수(淸水) 사람이라고도 하고 제음(濟陰) 사람이라고도 한다.
나이 18세에 위진(僞秦)의 저작랑(著作郞)이 되었다. 후에 황문시랑(黃門侍郞), 무위태수(武威太守)에 올랐다.
그 사람의 모습이 수염이 없고 삐쩍 마르며, 처첩은 있으나 자식이 없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고자라고 하였다.
그런데도 그 뜻과 국량이 민첩하고 통달하여, 배움이 불전과 외전(外典)을 겸비하였다.
성품이 나무라고 간하기를 좋아하여 말을 돌리거나 피하는 바가 없었다.
부견(符堅)이 말년에 선비족(鮮卑族)을 사랑하는 데에 빠져서 정사를 등한시하였다. 조정은 노래를 불러 간하였다.
예전에 들었어라. 맹진(孟津)51)의 강물은
한 굽이가 천 리에 이른다고[千里一曲].52)
이 물은 본래 맑았거늘
누가 어지럽혀 탁하게 했나.
昔聞孟津河 千里作一曲
此水本自淸 是誰攪令濁
부견이 낯빛이 변하여 말하였다.
"바로 짐이다."
그러자 조정은 또 노래하였다.
북쪽 동산에 한 그루 대추나무가 있네.
잎이 우거져 그늘을 드리웠구나.
대추 겉이 살쪘어도 갈라보면
안에는 붉은 씨앗[赤心]53) 들어 있네.
北園有一棗 布葉垂重陰
外雖饒棘刺 內實有赤心
부견이 웃으며 말하였다.
"조문업, 자네가 아닌가?"
그가 놀리는 말을 하면서도 기지(機智)가 민첩한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뒤에 관중(關中) 지방에 불법(佛法)이 성하자 조정은 이에 출가를 하고자 원하였다.
부견은 그를 아껴서 허락하지 않았다. 부견이 죽은 뒤에 이르러 바야흐로 그 뜻을 이루었다.
이름을 고쳐 도정(道整)이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송(頌)을 지었다.
부처를 따르는 생이 이리도 늦었건만
죽음은 한결같이 이리도 빠를까.
석가모니께 귀명(歸命)54)하여
오늘에야 불도에 몸담았네.
佛生何以晩 泥洹一何早
歸命釋迦文 今來投大道
후에 상락산(商洛山)에 은둔하여 오로지 불경과 계율을 연구하였다.
진(晋)의 옹주자사(雍州刺史) 극회(?恢)가 그의 높은 절개를 흠모하여 가까이에서 함께 노닐었다.
양양(襄陽)에서 삶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60여 세이다.
13) 승가제바(僧伽提婆)
승가제바는 중국말로 중천(衆天), 혹은 제화(提和)라고 한다. 음을 잘못 발음한 때문이다.
본래의 성(姓)은 구담씨(瞿曇氏)로 계빈국(?賓國) 사람이다.
불도에 입문하여 배움을 닦으면서 멀리까지 훌륭한 스승을 구하였다.
배움은 삼장(三藏)에 뛰어났다. 특히 『아비담심론(阿毘曇心論)』을 더욱 잘하여 그 섬세한 뜻까지 꿰뚫었다.
그는 항상 『삼법도론(三法道論)』을 읽으며 밤낮으로 감탄하고 음미하였다. 그것을 도(道)로 들어가는 곳집으로 여겼다.
사람됨은 빼어나고 밝으며, 깊이 사물을 보는 능력이 있었다. 행동거지는 온화하면서도 공손하였다.
남을 가르치는 일에 힘을 써서 진실하면서도 게으르지 않았다.
부씨의 건원 연간(365~384)에 장안(長安)으로 들어와서 법으로 널리 교화를 펼쳐 나갔다.
과거 승가발징(僧伽跋澄)이 『바수밀경(婆須蜜經)』을 번역하고,
담마난제(曇摩難提)가 번역한 두 아함(阿含)·비담(毘曇)·광설(廣說)·삼법도(三法度) 등이 모두 백만여 글자에 이르렀다.
모용(慕容)의 난리를 만나 오랑캐들이 어지러이 소란을 일으켰다.
게다가 번역하는 사람들도 일이 갑작스러워서 미처 세밀하게 잘하지 못하여, 뜻과 구절의 의미가 왕왕 극진하지 못하였다.
얼마 지나서 도안(道安)마저 세상을 뜨니, 미처 바로 고칠 수 없었다.
후에 산동(山東) 지방이 맑게 평정되었다.
승가제바는 이에 기주(冀州)의 사문 법화(法和)와 함께 낙양으로 가서, 4·5년간 앞서의 경을 연구하고 강의하였다.
중국에서 생활하는 날들이 점차 쌓이면서 중국어에 두루 밝아졌다.
바야흐로 앞서 전역(傳譯)한 경들이 그 의미가 어그러지고 잘못된 것이 많음을 알았다.
법화는 미처 바로 잡지 못한 것을 개탄하였다.
이에 다시 승가제바로 하여금 아비담(阿毘曇)과 광설(廣說) 등 여러 경들을 번역하게 하였다.
조금 지나서 요흥(姚興)이 진(秦)나라에서 왕 노릇을 하자, 불법과 관련된 일들이 매우 성하였다.
이에 법화가 관중으로 들어가고, 승가제바는 양자강을 건넜다.
이보다 앞서 여산(廬山)의 혜원(慧遠) 법사가 대승 경전에 지극한 관심을 가지고 정성을 기울여 널리 경장(經藏)을 모았다.
마음을 비우고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어 멀리서 오는 손님을 오랫동안 기다렸다.
그가 이르렀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곧장 여산[廬岳]으로 들어올 것을 청하였다.
진(晋)나라 태원(太元, 376~396) 중에 『아비담심론(阿毘曇心論)』과 『삼법도론(三法度論)』 등을 번역할 것을 부탁하였다. 이에 승가제바는 반야대(般若臺)에서 범문(梵文)을 손수 손에 들고, 입으로는 중국어로 번역하였다.
화려함을 버리고 실질은 보존하여 그 본뜻을 드러내는 데에 힘썼다. 지금 전하는 바는 대체로 그의 문장이다.
융안(隆安) 원년(397)에 이르러 서울로 왔다. 진(晋)나라 조정의 왕들과 귀족들[王公]과 풍류를 즐기는 명사(名士)들이,
그가 있는 곳으로 찾아와 공경의 예를 다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당시에 위군(衛軍) 동정후(東亭侯)인 낭야(瑯?)의 왕순(王珣)은 깊이가 있고 아름다우며 깊은 믿음이 있어서 불법을 늘상 지켰다. 정사(精舍)를 건립하고 널리 공부하는 대중들을 불러들였다.
승가제바가 온 뒤에 왕순은 곧 그를 맞이하였다. 정사에서 아비담을 강설할 것을 청하니, 이름난 승려들이 모두 모였다.
승가제바의 가르침이 이미 정밀한데다 뜻을 밝게 풀고 이치를 잘 펼치니, 모든 무리들이 기뻐하며 깨우쳤다.
당시에 왕미(王彌)도 역시 그 자리에서 강의를 들었다. 후에 다른 방에서 스스로 공부하였다.
왕순이 법강도인(法綱道人)에게 친애하는 왕미의 터득한 바가 어느 정도인지 물었다.
승가제바가 대답하였다. “대략 전체적으로는 옳습니다.
다만 작은 부분에서는 아직 자세하게 핵심을 파고들지는 못했습니다.”
그의 설명과 분석이 분명하여 사람의 마음을 쉽게 열어주는 것이 이와 같았다.
그해 겨울 왕순은 서울의 교리를 공부하는[義學] 사문 석혜지(釋慧持) 등 사십여 인을 모았다.
다시 승가제바에게 『중아함경(中阿含經)』을 거듭 번역해 줄 것을 청하였다.
승가라차(僧伽羅叉)
계빈국(?賓國)의 사문 승가라차가 범본(梵本)을 잡고, 승가제바가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다음 해 여름에 그 일을 마쳤다. 그가 양자강과 낙양 근처에서 번역한 여러 경만 해도 백여 만 글자나 되었다.
북쪽과 남쪽을 차례로 돌아다녔다. 풍속(風俗)에 맞추어 조용히 기민하게 깨우치면서도, 웃으면서 이야기를 잘 하였다.
그가 불도로써 중생들을 교화시켰다는 명성과 영예가 들리지 않는 곳이 없었다. 뒤에 생을 마친 곳은 알지 못한다.
14) 축불념(竺佛念)
축불념은 양주(凉州)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했다. 맑고 굳건하게 뜻을 두었다.
밖으로 드러난 태도는 온화하고 내면은 밝아서 화통하며, 영특하고 민첩한 식견이 있었다.
많은 경전을 외우고 익혔으며, 거칠게나마 외전(外典)들을 섭렵하였다. 창아(蒼雅)55)와 훈고(訓?)에 더욱 밝게 다다랐다.
어려서부터 여러 곳을 돌아다니기 좋아하여 풍속(風俗)을 살펴 잘 맞추었다.
집안 대대로 서하(西河)에 살아, 서역 여러 나라의 말을 밝게 알았다.
중국어와 오랑캐말의 소리와 뜻을 모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교리를 잘 이해한다는 명예는 비록 없었으나, 들은 바가 많다는 명성은 크게 드러났다.
부씨(符氏)의 건원(365~384) 중에 승가발징(僧伽跋澄)·담마난제(曇摩難提) 등이 장안(長安)으로 들어왔다.
조정(趙正)이 그들에게 여러 경들을 번역해 줄 것을 청하였다. 당시의 뛰어난 승려들도 번역할 능력이 없었다.
대중들은 모두 축불념을 추대하였다.
이에 승가발징이 범문(梵文)을 잡고 축불념이 중국어로 번역하였다.
의심나는 뜻은 판가름하여 고치니, 소리와 글자[音字]56)가 바야흐로 바로잡혔다.
건원 20년(384) 5월에 이르러 다시 담마난제에게 청하여 『증일아함경』과 『중아함경』을 번역했다.
장안성 안에 교리를 공부하는[義學] 승려들을 모아서 축불념에게 번역해 줄 것을 청하였다.
부연하며 분석하고 연구하며 밝혀 나간 뒤, 2년 만에야 끝을 맺었다.
두 아함(阿含)을 세상에 드러내게 한 것은 축불념이 번역하여 펴낸 공로에 힘입었다.
안세고(安世高)와 지겸(支謙) 이후로는 축불념을 뛰어넘는 이가 없었다.
부견(符堅)과 요홍(姚泓) 2대에 걸쳐 번역하는 사람들의 으뜸이 되었다.
그러므로 관중(關中)의 대중승려들은 모두 함께 그를 칭찬하였다.
뒤이어 『보살영락경(菩薩瓔珞經)』·『십주단결경(十住斷結經)』·『출요경(出曜經)』·『포태경(胞胎經)』·『중음경(中陰經)』 등을 냈다. 처음으로 안정되게 바로 잡기는 했으나 뜻에 미진한 곳이 많았다.
마침내 병이 들어 장안에서 삶을 마쳤다. 원근(遠近)의 승려들과 세속인들이 탄식하여 아쉬워 마지않았다.
15) 담마야사(曇摩耶舍)
담마야사는 중국말로 법명(法明)이라 한다. 계빈국(?賓國)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여 열네 살에는 불야다라(弗若多羅)57)가 알아줄 정도였다.
커서는 기운과 재간이 높고 시원하며, 바르고 신령스런 지혜[神慧]가 있었다.
경전과 율장을 두루 보아 환하게 깨달은 것이 무리에서 뛰어났다.
8선(禪)을 도야하고 7각(覺)에 마음을 두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그를 부두바타(浮頭婆馱)에 비유하였다.
산택(山澤)에서 외롭게 수행하며 늑대나 호랑이를 피하지 않았다.
홀로 머물러 생각에 깊이 잠겨 자칫하면 밤낮을 바꾸기도 하였다.
언제인가 나무 아래에서 수행하며, 매양 스스로를 엄하게 꾸짖었다.
“나이 30에 이르도록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하다니, 어찌 이리도 게으른가?”
이에 여러 날 동안 잠을 자지 않고 먹지 않았다. 오로지 고행으로 정진하며 예전에 지은 죄들을 참회하였다.
이에 꿈속에서 박차천왕(博叉天王)을 뵈었다. 그 분이 말씀하셨다.
“사문이란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널리 교화하여, 많은 중생을 구제하기를 늘 마음에 새겨야 한다.
그렇거늘, 어찌 쩨쩨한 절개에 얽매여서 홀로 자기만을 착하게 할 뿐인가?
도는 여러 인연을 빌리고 다시 무르익을 때를 기다려야 한다.
분수가 아닌데도 억지로 구하면 죽도록 증험이 없으리라.”
곧 깨닫고 스스로 사유(思惟)하여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도를 전수하고자 하였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다. 이름난 곳을 지나고 여러 나라를 거쳤다.
진(晋)나라 융안(隆安, 397~401) 연간 중에 처음으로 광주(廣州)에 이르러 백사사(白沙寺)에 머물렀다.
담마야사는 비바사율(毘婆沙律)을 잘 외웠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그를 부를 때에는 대비바사(大毘婆沙)라고 불렀다.
당시 이미 나이가 85세이고,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85인이었다. 그 때 청신녀(淸信女: 優婆夷) 장보명(張普明)이 불법에 대해서 가르침을 청하였다. 담마야사는 그녀를 위하여 부처님 생애의 연기(緣起)에 대하여 설법하였다.
아울러 『차마경(差摩經)』한 권을 번역해 냈다.
의희(義熙) 연간(405~418)에 장안(長安)으로 갔다. 당시에는 요흥(姚興)58)이 참람한 연호를 쓰면서 불법을 매우 존숭하였다. 담마야사가 그곳에 이르자 매우 특별하게 예우를 갖추었다. 마침 천축국의 사문 담마굴다(曇摩掘多)가 관중으로 들어왔다.
비슷한 이들끼리 서로 만났으므로[同氣相求]59) 완연히 옛 친구 같았다.
이 때문에 담마야사와 함께 『사리불아비담론(舍利弗阿毘曇論)』을 번역하였다.
후진(後秦) 홍시(弘始) 9년(407)에 처음으로 범서(梵書)로 글을 쓰기 시작해서 16년(414)에 이르러 번역을 마쳤다.
모두 22권이다. 위태자(僞太子)60) 요홍(姚泓)이 이치와 의미에 친히 관여하고, 사문 도표(道標)가 그를 위해 서문을 썼다.
담마야사는 후에 남쪽 강릉(江陵)을 떠돌다, 신사(辛寺)에 머물러서 크게 선법(禪法)을 펼쳤다.
고요함을 맛보러 온 나그네 중에는 가시덤불을 헤치고 이른 자도 3백여 명이었다.
무릇 선비나 서민들 가운데, 비록 그 전에는 불교를 믿는 마음이 없었던 이라 할지라도, 뵙기만 하면 모두 공경하고 기뻐하였다.
우담마야사는 스스로 말하였다. “스승 한 사람과 제자 한 사람이 업을 닦아서[修業] 함께 나한(羅漢)의 경지를 터득하였다.”
전하는 사람이 그 정확한 이름은 잊었다. 또한 일찍이 바깥문에서 문을 닫고 좌선했을 때의 일이다.
갑자기 5·6명의 사문이 그 방으로 들어가기도 하였다.
때로는 사문이 나무 끝에서 날아오는 것을 본 사람도 왕왕 한둘이 아니었다.
그는 항상 신명(神明)과 교접(交接)하면서도 어리석은 속세 사람들을 굽어보아 함께 하였다.
비록 도의 자취를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을지라도 당시 사람들은 모두 이미 성과(聖果)61)의 단계에 이르렀다고 말하였다.
송나라 원가(元嘉, 424~452) 연간 중에 서역으로 돌아갔다. 임종한 곳을 알지 못한다.
축법도(竺法度)
담마야사에게는 법도라는 제자가 있다. 범어(梵語)와 중국어를 잘하여 항상 번역을 하였다.
법도는 본시 축바륵(竺婆勒)의 아들이다. 축바륵은 오랫동안 광주(廣州)에서 머무르며, 이득을 구하여 오갔다.
이렇게 오고 가는 도중에 남강(南康)에서 아들을 낳았다. 그래서 남강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커서는 금가(金迦)라고 불렀다. 불도에 들어온 이후에는 법도(法度)라고 하였다.
법도는 처음에 담마야사의 제자가 되어 경법(經法)을 이어받았다.
담마야사가 외국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법도는 문득 잘못된 곳을 바로잡는다고 홀로 고집하여
일정한 규칙으로 남들을 이끌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하였다.
“오로지 소승(小乘)을 배워야 한다. 대승 경전을 읽는 것을 금한다.
오직 석가만을 예불하라. 시방불(十方佛)에게는 하지 말라. 먹을 때는 구리 발우를 써라. 따로 응기(應器)62)를 두지 말아라.”
또한 여러 비구니들에게 명하여 서로 잡고 길을 다니게 했다.
죄를 뉘우치는 날에는 단지 땅에 엎드려서 서로 마주 보도록 하였다.
오직 송(宋) 땅의 옛 단양(丹陽) 지사 안원(顔瑗)의 딸 법홍(法弘)비구니,
교주 자사(交州刺史) 장목(張牧)의 딸 보명(普明)비구니가 처음으로 그 법을 받았다.
지금 서울의 선업(宣業)과 홍광(弘光) 같은 여러 비구니들이 그가 남긴 가르침을 익혔다.
동쪽 땅의 비구니들에게도 당시 그러한 법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