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2. 두 가지 관찰

3.12. 두 가지 관찰

(724)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어느 날 부처님께서는 사아밧티이의 동원(東園)에 있는 미가아라 장자 어머니의 누각(鹿子母講堂) 안에 계시었다. 그 때 거룩하신 스승은 정기적인 집회(布薩) 날인 달 밝은 보름밤에 수행승(비구)의 무리에 둘러 싸여 집밖에 계시었다.

거룩하신 스승께서는 묵묵히 앉아 있는 수행승들을 돌아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시었다.

“여러 수행승들이여, 착하고 거룩하게 집을 나와 깨달음에 이르는 여러 가지 진리가 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착하고 거룩하게 집을 나와 깨닫게 하는 여러 가지 진리를 듣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고 누가 그대들에게 묻거든,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라. ‘두 가지 진리를 있는 그대로 알기 위해서’라고. 그렇다면 그대들이 말하는 두 가지란 무엇이냐고 한다면,’이것은 괴로움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원인이다’하는 것이 하나의 관찰이고,’이것은 괴로움의 그침이다.

이것은 괴로움을 그치게 하는 길이다’하는 것이 둘째 관찰이다. 수행승들이여, 이렇게 두 가지를 바르게 관찰하여 게으르지 않고 정진하는 수행승에게는 두 가지 과보중에서 어느 하나를 기대할 수 있다.

즉, 현세에서 지혜를 증득(證得)하든가, 혹은 번뇌의 남음이 있는 이 헤매는 생존에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일이다.”

거룩한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셨다.그리고 행복한 스승께서는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괴로움을 모르고, 또 괴로움이 생기는 원인을 모르며, 괴로움을 남김없이 없애는 방법도, 괴로움을 그치게 하는 길도 모르는 사람들.

(725) 그들은 마음의 해탈을 얻지 못하고, 지혜의 해탈도 얻지 못한다. 그들은 윤회를 끊어 버릴 수가 없다. 그들은 생과 늙음을 받는다.

(726) 그러나 괴로움을 알고,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인을 알고, 괴로움을 남김 없이 없애는 방법을 알고, 또한 괴로움을 그치게 하는 길을 안 사람들.

(727) 그들은 마음의 해탈을 이루고, 지혜의 해탈도 구현한다. 그들은 윤회를 끊어 버릴 수가 있다. 그들은 생과 늙음을 받지 않는다.”

(728) “수행승들이여, 또 다른 방법에 의해서도 두 가지 일을 바르게 관찰할 수가 있는가 하고 묻는 이가 있거든,’있다’고 대답해라. 무슨 까닭인가. 어떤 괴로움이라도 모두 업(業)에 따라 생기는 것이라고 함이 하나의 관찰이고, 그러나 업을 남김 없이 끊어 버린다면 괴로움이 생기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둘째 관찰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두 가지를 바르게 관찰하여 게으르지 않고 정진하는 수행승에게는, 두 가지 과보 중에서 어느 하나를 기대할 수 있다. 즉, 현세에서 지혜를 증득하든가, 혹은 번뇌가 남아 있는 이 헤매는 생존에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일이다.” 거룩한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행복한 스승께서는 다시 다음같이 말씀하셨다.

“세상에 있는 여러 가지 형태의 괴로움은 생존의 업에 따라 일어난다. 참으로 알지 못하고 그 생존의 업을 짓는 어리석은 자는 되풀이해서 괴로움을 받는다.

그러므로 똑똑히 알고 괴로움이 생기는 원인을 관찰해 업을 짓지 말아라.”

(729) “수행승들이여, 또 두 가지 일을 바르게 관찰하는 다른 방법이 있는가 하고 그대들에게 묻는 이가 있거든, ‘있다’고 대답해라. 어째서 그런가. 어떠한 괴로움이든 무명(無明)으로 인해서 생긴다고 함이 하나의 관찰이다. 그러나 무명을 남김 없이 없애 버린다면 괴로움은 생기지 않는다 함이 둘째 관찰이다. 이와 같이 두 가지를 바르게 관찰하여 게으르지 않고 정진하는 수행승에게는 두 가지 과보 중에서 어느 하나를 기대할 수 있다 즉, 현세에서 지혜를 증득하든가, 또는 번뇌의 남음이 있는 헤매는 이 생존에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일이다.”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또 다음같이 말씀하셨다.

“이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되풀이하여 윤회를 받는 사람들은 그 귀취가 무명에만 있다.

(730) 이 무명이란 커다란 헤매임인데, 이로 말미암아 오랜 윤회가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밝은 지혜에 이른 중생들은 다시 생존을 받는 일이 없다.”

(731) “수행승들이여, 또 두 가지 일을 바르게 관찰하는 다른 방법이 있는가 라고 누가 그대들에게 묻거든’있다’고 대답해라. 어째서 그런가. 어떠한 괴로움이든 모두 형성력(形成力)으로 인해 생긴다 함이 하나의 관찰이다.

그러나 형성력을 남김 없이 없애 버린다면 괴로움은 생기지 않는다 함이 둘째 관찰이다. 이와 같이 두가지를 바르게 관찰하여 게으르지 않고 정진하는 수행승에게는 두 가지 과보 중에 어느 한가지를 기대할 수 있다. 즉, 현세에서 지혜를 증득하든가, 또는 번뇌의 남음이 있는 이 헤매는 생존에 돌아오지 않는 일이다.”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또 다음같이 말씀하셨다.

“어떠한 괴로움이 모두 형성력으로 인해 생기는 것이다. 모든 형성력이 없어진다면 괴로움이 생기지도 않는다.

(732) 괴로움은 형성력으로 인해 일어난다고 알아서, 모든 형성력을 없애고 욕심을 끊는다면, 괴로움은 없어지고 만다. 이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라.

(733) 바르게 보고, 바르게 안 현자나 베에다에 통달한 사람들은, 악마의 속박에서 벗어나 다시는 생존을 받지 않는다.”

(734) “수행승들이여, 또 다른 두 가지 일을 바르게 관찰하는 방법은 없는가고 그대들에게 누가 묻거든’있다’고 대답해라. 어째서 그런가. 어떤 괴로움이든 식별(識)로 인해서 일어난다 함이 하나의 관찰이다. 그러나 식별작용을 남김 없이 없앤다면 괴로움도 생기지 않는다 함이 둘째 관찰이다.

이와 같이 두가지를 관찰하여 게으르지 않고 정진하는 수행승에게는 두 가지 과보중 어느 하나가 기대된다. 즉, 현세에서 지혜를 증득하든가, 또는 번뇌의 마음이 있는 이 헤매는 미망의 생존에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일이다.”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어떠한 괴로움이 생길지라도 그것은 모두 식별작용으로 인해 일어난다. 식별작용이 소멸된다면 괴로움이 생길 수 없다.

(735) 괴로움은 식별작용에 의해 일어난다고 알아 식별작용을 고요히 가라앉힌 수행승은, 쾌락을 탐하지 않고 평안에 돌아가 있다.”

(736) “수행승들이여, 또 두 가지 일을 바르게 관찰하는 다른 방법은 있는가 라고 그대들에게 누가 묻거든 ‘있다’고 대답해라. 어째서 그런가. 어떤 괴로움도 모두 접촉으로 인해서 일어난다 함이 그 하나의 관찰이다.

그러나 접촉을 남김 없이 아주 없애 버린다면 괴로움이 일어나지 않는다 함이 둘째 관찰이다. 이와 같이 두 가지로 바르게 관찰하여 게으르지 않고 정진하는 수행승에게는 두 가지 과보 중에 어느 하나가 기대된다. 즉, 현세에서 지혜를 증득하든가, 또는 번뇌의 남음이 있는 이 헤매는 생존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일이다.”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접촉에 얽매이고, 생존의 물결에 밀리며, 사특한 길에 든 사람은 속박을 끊기 어렵다.

(737) 그러나 접촉을 잘 알아 평안을 즐기는 사람은, 실로 접촉을 없애 버렸기 때문에 쾌락을 느끼지 않고 평안에 돌아가 있다.”

(738) “수행승들이여, 또 두 가지 일을 바르게 관찰하는 다른 방법이 있는가 라고 누가 그대들에게 묻거든’있다’고 대답해라. 어째서 그런가. 어떤 괴로움도 모두 감수(感受)로 인해서 일어난다 함이 하나의 관찰이다. 모든 감수를 남김없이 없애 버린다면 괴로움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 둘째 관찰이다. 이와 같이 두 가지로 바르게 관찰하여 게으르지 않고 정진하는 수행승에게는 두 개의 과보 중에 어느 하나가 기대된다. 즉, 현세에서 지혜를 증득하거나, 또는 번뇌의 남음이 있다면, 이 헤매는(迷妄) 생존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일이다.”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또 다음같이 말씀하셨다. “즐겁든 괴롭든,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건 간에 냇적으로나 욋적으로 감수된 것은 모두,

(739) 괴로움이라 알고, 없어지고 말 허망한 사물에 접촉할 때마다 소멸을 인정하고야 그에 대한 집착을 버린다. 온갖 감수가 소멸하기 때문에 수행승은 쾌락을 느끼지 않고 평안에 돌아가 있다.”

(740) “수행승들이여, 또 두 가지 일을 바르게 관찰하는 다른 방법이 있는가 라고 누가 그대들에게 묻거든 ‘있다’고 대답해라. 어째서 그런가. 어떤 괴로움도 모두 애착으로 인해 일어난다 함이 하나의 관찰이다. 그러나 애착을 남김 없이 없애 버린다면 괴로움이 일어나지 않는다 함이 둘째 관찰이다. 이와 같이 두 가지를 바르게 관찰하고 게으르지 않고 정진하는 수행승들에게는 두 과보 중에 어느 하나가 기대된다.

즉, 현세에서 지혜를 증득하거나, 또는 번뇌의 남음이 있는 이 헤매는 생존에 돌아오지 않는 일이다.”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애착을 벗삼는 사람은 이 상태에서 저 상태로 영원히 굴러 윤회를 벗어나지 못한다.

(741) 애착은 괴로움이 생기는 원인이라는 이 우환을 알아, 수행승은 애착을 버리고 집착 없이 바른 생각을 가지고 편력해야 한다.”

(742) “수행승들이여, 또 두 가지 일을 바르게 관찰하는 다른 방법이 있는가 라고 누가 그대들에게 묻거든 ‘있다’고 대답해라. 어째서 그런가. 어떤 괴로움이든 모두 집착으로 인해 일어난다 함이 하나의 관찰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집착을 남김 없이 없애 버린다면 괴로움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 둘째 관찰이다.

이와 같이 두 가지 일을 바르게 관찰하여 게으르지 않고 정진하는 수행승에게는, 두 가지 과보 중 어느 하나가 기대된다. 즉, 현세에서 지혜를 증득하거나, 번뇌가 남아있는 이 헤매는 생존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일이다.”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집착으로 인해 생존이 생긴다. 생존하는 자는 괴로움을 받는다. 태어난 자에게는 죽음이 있다. 이것이 괴로움이 생기는 원인이다.

(743) 그러므로 현자들은 집착이 소멸되는 까닭을 바르게 알고, 태어남의 소멸을 잘 알아 다시는 생존을 받지 않는다.”

(744) “수행승들이여, 또 두 가지 일을 바르게 관찰하는 다른 방법이 있는가 라고 누가 그대들에게 묻거든 ‘있다’고 대답해라. 어째서 그런가. 어떤 괴로움이든 모두 기동(起動)에 의해서 일어난다 함이 하나의 관찰이다.

그러나 기동을 남김 없이 없애 버린다면 괴로움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 둘째 관찰이다. 이와 같이 두 가지 일을 바르게 관찰하여 게으르지 않고 정진하는 수행승들에게는, 두 가지 과보 중 어느 하나가 기대된다. 즉, 현세에서 지혜를 증득하거나, 번뇌가 남아있는 이 헤매는 생존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일이다.”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어떠한 괴로움도 모두 기동(起動)으로 인하여 생긴다.

모든 기동이 소멸되면 괴로움도 생기지 않는다.”

(745) 괴로움은 기동으로 인해 생긴다는 것을 알아 모든 기동을 버리고, 기동이 없는 상태에서 해탈하여,

(746) 생존에 대한 애착을 끊고 마음이 고요한 수행승은 생의 윤회를 벗어난다. 그는 다시는 생존을 받지 않는다.”

(747) “수행승들이여, 또 두 가지 일을 바르게 관찰하는 다른 방법이 있는가 라고 누가 그대들에게 묻거든 ‘있다’고 대답해라. 어째서 그런가. 어떠한 괴로움이든 모두 음식으로 인해 일어난다 함이 하나의 관찰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음식을 남김 없이 없애 버린다면 괴로움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 둘째 관찰이다.

이와 같이 두 가지 일을 바르게 관찰하여 게으르지 않고 정진하는 수행승에게는, 두 가지 과보 중 어느 하나가 기대된다. 즉, 현세에서 지혜를 증득하거나 또는 번뇌가 남아있는 이 헤매는 생존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일이다.”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어떠한 괴로음이 일어날지라도 그것은 모두 음식으로 인해 생긴다. 모든 음식이 소멸되면 괴로움도 생기지 않는다.

(748) 괴로움은 음식으로 인해 생긴다는 이 우환을 알아, 모든 음식을 잘 알고 모든 음식에 의지 하지 않는다.

(749) 모든 번뇌의 때를 없애 버림으로써 병이 나지 않음을 바르게 알고 반성하여 음식을 애용하고, 이치에 사는 베에다의 달인(達人)은 어리석은 생존자의 수에 들지 않는다.”

(750) “수행승들이여, 또 두 가지 일을 바르게 관찰하는 다른 방법이 있는가 라고 누가 그대들에게 묻거든 ‘있다’고 대답해라. 어째서 그런가. 어떤 괴로움이든 모두 동요(動搖)로 인해 일어난다 함이 하나의 관찰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동요를 남김 없이 없애 버린다면 괴로움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 둘째 관찰이다.

이와 같이 두 가지 일을 바르게 관찰하여 게으르지 않고 정진하는 수행승에게는 두 가지 과보 중 어느 하나가 기대된다. 즉, 현세에서 지혜를 증득하거나, 번뇌가 남아있는 이 헤매는 생존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일이다.”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어떠한 괴로움이 일어날지라도 모두 동요로 인해서 일어난다. 모든 동요가 그치게 되면 괴로움도 생기지 않는다.

(751) 괴로움은 동요로 인해 일어난다고 알아서, 그 때문에 수행승은 애착의 동요를 버리고, 모든 형성력을 종식시켜, 무동요 무집착으로 바른 생각을 가지고 편력해야 한다.”

(752) “수행승들이여, 또 두 가지 일을 바르게 관찰하는 다른 방법이 있는가 라고 누가 그대들에게 묻거든 ‘있다’고 대답해라.

어째서 그런가. 걸림이 있는 사람은 주저한다는 것이 하나의 관찰이다. 걸림이 없는 사람은 주저하지 않는다는 것이 둘째 관찰이다.

이와 같이 두 가지를 바르게 관찰하여 게으르지 않고 정진하는 수행승에게는, 두 가지 과보 중 어느 하나가 기대된다. 즉, 현세에서 지혜를 증득하거나, 번뇌가 남아있는 이 헤매는 생존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일이다.”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걸림이 없는 사람은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걸림이 있는 사람은 이 상태에서 저 상태로 집착하고 있어 윤회를 벗어날 수 없다.

(753) 여러 가지 걸림 속에 커다란 두려움이 있다는 이 우환을 알아, 수행승은 걸림 없고 집착 없이 바른 생각을 가지고 편력해야 한다.

(754) “수행승들이여, 또 두 가지 일을 바르게 관찰하는 다른 방법이 있는가 라고 누가 그대들에게 묻거든’있다’고 대답해라. 어째서 그런가. 물질적 영역보다도 비물질적 영역이 더욱더 고요하다고 하는 것이 하나의 관찰이다. 비물질적 영역보다 소멸의 편이 더욱 고요하다 하는 것이 둘째 관찰이다. 이와 같이 두가지를 바르게 관찰하여, 게으르지 않고 정진하는 수행승들에게는 두 가지 과보 중 어느 하나가 기대된다.

즉, 현세에서 지혜를 증득하거나, 번뇌가 남아있는 이 헤매는 생존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일이다.”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물질적 영역에 태어나는 모든 생물과 비물질적 영역에 사는 모든 생물들은 소멸을 모르기 때문에,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난다.

(755) 그러나 물질적 영역을 잘 알고, 비물질적 영역에 안주하여 소멸에서 해탈한 사람들은 죽음을 버린 것이다.”

(756) “수행승들이여, 또 두 가지 일을 바르게 관찰하는 다른 방법이 있는가 라고 누가 그대들에게 묻거든 ‘있다’고 대답해라.

어째서 그런가. 수행승들이여, 신과 악마가 공존하는 세계, 사문,바라문,신,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존자가 ‘이것은 진리다’고 생각한 것을, 성자들은 ‘이것은 허망하다’고 사실대로 바른 지혜를 가지고 본다. 이것이 하나의 관찰이다.

신과 악마가 공존하는 세계, 사문, 바라문, 신,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존자가’이것은 허망하다’고 생각한 것을, 성자들은 ‘이것은 진리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써 보는 것이 둘째 관찰이다.

이와 같이 두 가지를 바르게 보아 게으르지 않고 정진하는 수행승에게는 두 가지 과보 중 어느 하나가 기대된다. 즉, 현세에서 지혜를 증득하거나, 번뇌가 남아있는 이 헤매는 생존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일이다.”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보라. 신과 세상사람들은 내가 아닌 것을 나(我)라고 생각하고 명칭(名)과 형태(色)에 집착해 있다. 이것이야말로 진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757) 어떤 것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고 생각하더라도 그것이 사실과는 다르다. 왜냐 하면, 어리석은 자의 생각은 허망하기 때문이다. 지나 가버리는 것은 허망한 것이므로.

(758) 그러나 안정은 허망한 것이 아니다. 성자들은 이것을 진리로 안다. 그들은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에, 쾌락을 탐하지 않고 평안에 돌아간 것이다.”

(759) “수행승들이여, 또 두 가지 일을 바르게 관찰하는 다른 방법이 있는가 라고 누가 묻거든’있다’고 대답해라. 어째서 그런가. 수행승들이여, 신과 악마가 공존하는 세계, 사문,바라문,신,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존자가’이것은 안락이다’라고 생각한 것을, 성자들은’이것은 고뇌다’라고 사실대로 바른 지혜로써 살핀다.

이것이 하나의 관찰이다. 신과 악마가 공존하는 세계, 사문,바라문,신,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존자가’이것은 고뇌다’고 생각한 것을, 성자들은 ‘이것은 안락이다’고 사실대로 바른 지혜로써 살핀다. 이것이 둘째 관찰이다.

이와 같이 두 가지를 가지고 바르게 살피며,게으르지 않고 정진하는 수행승에게는, 두 가지 과보 중 어느 하나가 기대된다. 즉, 현세에서 지혜를 증득하거나, 번뇌가 남아있는 이 헤매는 생존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일이다.”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있다고 할 수 있는 빛깔,음성,향기,맛,만져지는 것, 생각할 수 있는 것으로 한결같이 사랑스럽고 마음에 드는 것.

(760) 그것들은 실로 신이나 세상사람들에게는 다같이 <안락>이라 인정되고 있다. 또한 그것이 멸할 때에는 그들은 그것을 <고뇌>라고 생각한다.

(761) 그러나 성인들은 자기의 신체를 단멸(斷滅)하는 것이 안락이라고 생각한다. 바르게 보는 사람들의 생각은 세상의 사람들과는 정반대다.

(762) 다른 사람들이 <안락>이라 하는 것을 성자들은 <고뇌>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이 <고뇌>라고 하는 것을 성자들은 <안락>이라고 생각한다. 알기 어려운 진리를 보라. 무지란 사람들은 여기서 헤매게 된다.

(763) 덮여 있는 사람에게는 어둠이 있다. 바르게 보지 않는 사람에게는 암흑이 있다. 선량한 사람에게는 펼쳐 보임(開顯)이 있다. 마치 볼 수 있는 사람에게 광명이 있는 것처럼. 이치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짐승같은 치인(痴人)은 안락의 곁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모른다.

(764) 생에 대한 탐욕에 사로잡히고 생존의 흐름에 떠 내려가, 악마의 영토에서 사는 사람은 이 진리를 깨닫기 힘들다.

(765) 성자들 말고 누가 이 경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인가. 이 경지를 바르게 알면, 번뇌의 때가 묻지 않은 이가 되어 원만한 평안에 들어가리라.”

스승(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행승들은 기뻐하면서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이 설법이 있을 때 육십명의 수행승들은 집착이 없어져 마음이 더러움에서 해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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