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보장경(雜寶藏經) 제01권
원위(元魏) 서역삼장(西域三藏) 길가야(吉迦夜)·담요(曇曜) 공역
001. 십사왕(十奢王)의 인연
옛날 사람의 수명이 1만 세였을 때 한 왕이 있었는데,이름을 십사(十奢)라 하였으며, 그는 염부제(閻浮提)의 왕이었다.
왕의 큰 부인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라마(羅摩)라 하였고,둘째 부인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라만(羅漫)이라 하였다.
라마 태자는 큰 용맹과 힘이 있어 나라연(那羅延)과 같고, 또 선라(扇羅)가 있어서소리를 듣거나 얼굴을 보고는 곧 해치기 때문에 아무도 당할 이가 없었다.
왕의 셋째 부인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바라타(波羅陀)라 하였고,또 넷째 부인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멸원악(滅怨惡)이라 하였다.
왕은 그 셋째 부인을 유달리 사랑하여 그녀에게 말하였다.
“나는 지금 내가 가진 모든 재보를 너에게 다 주어도 아까워하지 않겠다.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내게 말하라.”
부인이 대답하였다.
“나는 지금 구하는 것이 없습니다. 이 뒷날 원할 것이 있으면 다시 아뢰겠습니다.”그 때 왕은 병을 만나 목숨이 매우 위독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태자 라마를 세워자기를 대신해 왕을 삼고, 비단으로 머리털을 묶고 머리에 하늘관[天冠]을 씌워위의와 법도를 왕의 법과 같게 하였다.
셋째 부인은 왕의 병을 보살피다가 왕의 병이 조금 나은 것을 보자그것을 자기 힘이라 믿었다. 그리하여 라마가 왕의 자리를 이어받는 것을 보고 마음에질투가 생겨, 곧 왕에게 아뢰어 전날의 소원을 말하였다.
“원컨대 라마를 폐하고 내 아들을 왕으로 삼아 주소서.”왕은 이 말을 듣자, 마치 목구멍에 무엇이 걸려 그것을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는 것처럼,큰 아들을 폐하자니 이미 왕으로 세운 터요, 폐하지 않자니 전날 그 소원을이미 허락한 터이었다. 그러나 십사왕은 젊을 때부터 일찍 약속을 어긴 일이 없었으며,또 왕의 법에는 두 말이 있을 수 없고 앞의 말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다.이렇게 생각하고 곧 라마를 폐하고 그 의복과 하늘관을 빼앗았다.
그 때 그 아우 라만은 그 형에게 말하였다.”형님은 그런 용맹과 힘이 있고 또 선라까지 겸하였는데,어찌 그것을 쓰지 않고 이런 치욕을 당합니까?”형은 대답하였다.
“아버지 소원을 어기면 효자라 할 수 없다. 그리고 지금의 저 어머니가우리를 낳지 않았지마는, 우리 아버지가 저를 사랑하고 대접하는 것은우리 어머니를 대하는 것과 같다. 아우 바라타는 아주 온화하고 유순하여조금도 다른 생각이 없는데 지금 내가 큰 힘과 선라를 가졌다 하여어찌 그 부모와 아우에게 해를 끼쳐 못할 짓을 하겠는가?”아우는 그 말을 듣고 이내 잠자코 있었다.
그 때 십사왕은 두 아들을 멀리 깊은 산으로 보내면서,12년이 지나서야 본국으로 돌아올 것을 허락한다고 말하였다.
라마 형제는 부모의 명령을 받들고 조금도 원한이 없이 부모에게 절하여 하직하고멀리 깊은 산으로 들어갔다.그 때 바라타는 그 전에 다른 나라에 가 있었는데,이내 불러 본국으로 돌아오게 하여 왕을 삼으려 하였다.
그러나 바라타는 본래부터 두 형과 화목하고 공순하며 매우 공경하고 겸양하는 터이었는데본국에 돌아와 보니 부왕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그리고 그 어머니가 함부로 그 형인 왕을 폐하고 자기를 왕으로 세운 뒤에두 형을 멀리 떠나 보낸 것을 비로소 알고는 그 생모(生母)의 소행이 도리가 아님을미워하여 꿇어앉거나 절하지 않고 말하였다.
“어머님은 왜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여 우리 집안을 망치려 하십니까?”그리고 큰 어머니를 향해 절하고는 공경하고 효순하기가 보통 때보다 갑절이나 더하였다.바라타는 곧 군사를 이끌고 그 산으로 달려가 군사들을 뒤에 머물러 두고자기 혼자 나아갔다.
아우가 오는 것을 보고 라만은 그 형에게 말하였다.”형님은 전에 늘 ‘저 아우 바라타는 의리가 있고 겸양하며 공순하다’고 칭찬하셨는데,지금 군사를 끌고 온 것을 보면 우리 형제를 죽이려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형은 바라타에게 말하였다.
“아우는 지금 왜 군사를 거느리고 왔는가?”
아우는 형에게 말하였다.
“길에서 도적을 만날까 두렵기 때문에 몸을 보호하기 위해 군사를 데리고 왔을 뿐이요,다른 뜻은 없습니다. 형님은 본국으로 돌아가 나라 정사를 맡아 다스리기 바랍니다.”형은 대답하였다.
“우리는 일찍 아버지 명령을 받들어 여기 왔는데 지금 어떻게 갑짜기 돌아가겠는가.만일 우리 마음대로 한다면 그것은 사람의 자식으로서 어버이에게 효도하는 의리가아닐 것이다.”
아우는 간절하고 절실하게 청하였지만 형의 뜻은 확고하여 먹은 마음은 더욱 굳었다.아우는 마침내 그 형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음을 알고 곧 형이 신은 가죽신을 얻어 가지고,슬퍼하고 괴로워하면서 본국으로 돌아와 나라 일을 다스렸다.
나라를 다스리되 언제나 그 가죽신을 어좌(御座)에 올려 놓고, 아침 저녁으로 예배하고문안드리는 의리는 형을 대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항상 그 산으로 사람을 보내어자주자주 그 형을 청하였다. 그러나 그 두 형은 12년이 지난 뒤에 돌아오라는아버지의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연한이 차지 않았다 하여,지극한 효도와 충성으로 감히 그 명령을 어기지 않았다.
그 뒤에 차츰 연한이 차게 되고, 또 그 아우가 자주 사람을 보내어 간절히 부르며,신을 공경하기를 자기를 대한 것과 같이 한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아우의 지극한 정에 감동되어 드디어 본국으로 돌아왔다.그들이 본국으로 돌아오자 아우는 왕위를 사양해 형에게 돌렸다.그러나 형은 또 사양하면서 말하였다.
“아버지가 먼저 아우에게 주셨는데 우리는 받을 수 없다.”아우도 사양하면서”형님은 맏아들입니다. 아버지의 업을 이어 받는 것은 바로 형님이어야 합니다.”이와 같이 자꾸 서로 사양하다가 할 수 없이 형이 도로 왕이 되었다.
그들은 형제끼리 서로 우의가 돈독하고 화목하였으므로 그 교화가 크게 떨치고도덕이 널리 퍼져 백성들은 모두 그 감화를 입었고 서로 권하여 받들어 섬기며효도하고 공경하였다.
바라타 어머니는 비록 큰 허물을 지었지만 거기에 대해서 조금도 원한이 없었으므로,그 충성과 효도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바람과 비는 때를 맞추어 다섯 가지 곡식은풍성하였고 사람은 병이 없었으며, 염부제 안의 모든 인민들은 보통 때보다 열 갑절이나번성하고 풍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