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함경 22.삼보(三寶)

22. 삼보(三寶)

“너희가 무인 광야를 가게 될 때는 여러 공포가 있을 것이며, 마음은 놀라고 머리카락은 곤두서리라. 그런 때는 마땅히 여래를 염하라.

여래는 응공(應供 ; 붓다를 일컫는 이름의 하나. 마땅히 중생의 공양을 받을 만하다는 뜻), 등정각(等正覺 ; 평등한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 역시 붓다를 일컫는 이름), 불(佛), 세존이시라고. 이리 염하면 공포가 사라지리라.

또 법을 염하라. 부처님의 바른 법은 현재에 능히 번뇌를 떠나게 하고, 때를 기다릴 필요가 없으며, 통달 친근(通達親近)하여 자각에 의해 알 수 있는 것이라고. 이리 염하면 공포가 사라지리라.

또 승(僧)을 염하라. 세존의 제자들은 잘 수행하고, 바로 수행하고, 세간의 복전(福田 ; 복의 원인. 붓다에게 귀의한다든지 그 교단에 귀의하면 복을 받게 되므로 이르는 말)이라고. 이리 염하면 공포가 사라지리라.” ([雜阿含經] 35:11 毘舍利賈客)

여기에서는 한역만이 있을 뿐, 팔리 삼장에는 없는 경을 다루어 보겠다. 그 개략만을 소개하면 이렇다.

밧지국의 서울 베사리(毘舍利) 교외에 마루가다라는 못이 있고, 그 못가에 세워진 중각강당에 붓다가 머물고 계시던 때의 일이다. 그곳은 큰 숲과 연해 있었기 때문에, 대림중각 정사(大林重閣精舍)라는 이름으로 자주 경전에도 나타나는 고장이다.

마침 그때 베사리에서는 많은 상인들이 타카시라(Takkasila)로 떠나기 위해서 채비를 서두르고 있었다고 한다. 이 일절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지만, 좀 설명해 두지 않으면 안 될 점이 있다. 베사리가 당시의 인도에서 가장 번영하는 도시 중의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그곳이 여러 나라 무역의 중계점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상인들이 가려고 했다는 타카시라는 멀리 인도의 북서부에 있던 도시이며, 거기서부터 당시의 교통로는 동남쪽으로 뻗어, 사바티, 베사리 그리고 라자가하에 이르게 되어 있었다. 이른바 ‘장자’라고 불리는 대상인들은 대상(隊商)을 조직하여 그 길을 왕래하면서, 국제간의 무역으로 큰 이익을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타카시라로 떠나기 위해 준비를 서두르고 있는 상인들도 그런 대상의 하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런 일을 알아 두면, 그들이 붓다를 찾아가서 가르침을 받게 되는 그 뜻이 잘 이해될 터이다.

그런데 여행 준비를 서둘던 상인들은 마침 붓다가 마하바나(大林)정사에 계심을 알자, 곧 거기로 붓다를 찾아가서 여러 가지 설법을 들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에는 붓다와 그 제자들을 초대하여 정성껏 공양했다. 여기에 인용한 일절은 그 공양이 끝나고 나서 붓다가 그들을 위해 이야기한 가르침의 일부분이다.

“너희는 이제부터 무인 광야를 가게 될 터이니까, 여러 가지 공포를 맛보아야 하리라.”

그들이 지금 가려고 하는 길은 붓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장사하는 길이요 무역하는 길이었지만, 붓다에게는 그것이 그대로 전도의 길이었다. 라자가하 – 베사리 – 사바티 사이를 붓다는 몇 번이나 오고 갔던가.

도시를 팔리 어에서는 나가라(nagara)라고 한다. 이런 도시들은 성벽으로 에워싸이고 인구가 조밀하며 물자도 풍부하여, 경에도 “밤낮 열 가지 소리가 들려 번창을 자랑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열 가지 소리란 코끼리 소리, 말소리, 북소리, 장구소리, 비파 소리, 노래 소리, 징소리, 동라 소리, 그리고 떠들썩한 사람 소리라고 한다. 물론 현대의 대도시와 견주어 그 규모를 상상해서는 안 되겠지만, 고대 유럽의 아테네나 로마와 함께 인류 사회에 나타난 가장 초기에 속하는 도시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나는 그것들을 ‘인도적

폴리스’라고 부르고자 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인류 문화사에서 무엇보다도 주목되어야 할 현상의 하나라고 믿는 바이다.

그러나 그런 도시 생활은 인도 전역이 그만큼 개척되고 문명화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도시에서 한 걸음만 밖으로 나가면 인적도 없는 광야와 삼림이 깔려 있었다. 아니 더 상세히 설명한다면, 성문 바로 밖에는 니가마(시장)가 있어서 상품은 거기까지 운반되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를테면 사바티 성 밖에는 생선을 파는 니가마가 있었고, 바라나시 성문 밖 십자로에서는 사슴 고기를 팔고 있었으며, 대개의 도시에서는 야채 장사들도 성문 밖에 점포를 벌이는 것이 관례가 되어 있었다. 이런 니가마에서 더 가면 여기저기 ‘마마’라고 불리는 마을이 있어서 주위의 땅을 경작하여 농사를 짓고 있었으며, 또 적당한 정사도 그런 데에 있었다. 그러나 그런 곳은 드넓은 지역에서 볼 때 아주 일부분에 그쳤고, 성 밖은 대개 태고로부터 사람의 손이 간 적이 없는 대자연 그대로의 상태였다.

그런 속을 지나 먼 지역으로 뻗은 통행로가 갖가지 공포와 위험을 수반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대상(隊商)을 조직하고 충분한 경비 수단을 강구하지 않고는 결코 그런 길을 갈 수가 없었다. 붓다도 제자들과 함께 자주 여행을 해 보았으므로 그런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상인들을 상대로 그런 위험에 대처할 가르침을 설하였던 것이다.

“만약 그런 때에는 마땅히 여래를 마음속에서 염하라. 여래는 응공, 등정각, 불, 세존이시라고. 그렇게 염하면 너희의 공포가 사라지리라.

또 너희는 마땅히 붓다의 가르침을 염하라. 여래가 설하신 가르침은 현재에서 당장 효능이 있는 것, 때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것,

능히 안온하게 만들어 주는 것, 지혜있는 사람이면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만약 그렇게 염한다면 너희의 공포는 곧 사라지리라.

또 너희는 교단(僧伽)을 염하라. 여래의 교단은 잘 수도하는 사람들의 집단, 바르게 수행하는 사람들의 집단, 그리고 이 세상에서 최상의 복전이라고. 만약 그렇게 염한다면 너희의 공포는 곧 사라지리라.”

그 때 붓다가 설한 말씀을 한역에 의거하여 더 쉬운 말로 옮겨 보면 이렇게 될 것이다. 그리고 붓다는 그것을 다시 설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제석천(帝釋天)의 설화를 말씀했다고 되어 있다.

그것은 아주 먼 옛날이거니와, 신들과 아수라(阿修羅) 사이에 싸움이 벌어진 일이 있었다. 근대 인드라(제석천)는 신들에게 이런 훈시를 주었다.

“너희는 싸움에 임하여 만약 공포로 머리가 쭈뼛할 때는 모두 내 깃발을 쳐다보아라. 그렇게 하면 공포가 사라지리라. 그러나 만일에 내 깃발을 쳐다볼 수 없을 때에는 파자파디천(波자波提天)의 깃발을 쳐다보아라. 만약에 또 파자파디천의 깃발을 볼 수 없을 때에는 바루 나천(婆樓那天)의 깃발을 쳐다보아라. 다시 그것도 볼 수 없을 때에는 이사나천(伊舍那天)의 깃발을 쳐다보아라. 그렇게 하면 너희는 그 공포를 떨쳐 버릴 수 있으리라.”

이것은 물론 바라문에 전하는 옛날 신화를 인용한 것이려니와, 그것으로 붓다가 강조하고자 한 것은 다름 아닌 삼보 귀의의 정신이었다고 생각된다.

불, 법, 승의 삼보에 대해 귀의의 뜻을 표명하는 일, 즉 삼보 귀의 또는 삼귀의(tini saranagmanani)가 불교 교단의 의식으로서 채택된 것은 붓다가 설법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율장] 대품(大品) 1 ‘대건도(大腱度)’는 출가한 비구나 재가 신자의 수계(受戒), 즉 불교 교단의 일원이 될 때의 의식에 관한 것을 기록한 문헌이다. 거기에 따르면 처음으로 붓다 앞에서 삼귀의의 고백을 한 것은 바라나시의 장자였다고 한다. 그것은 붓다가 그 도시의 교외에 있는 이시파다나 미가다야(鹿野苑)에서 첫 설법에 성공함으로써 다섯 비구를 제자로 삼은 직후의 일이었다. 그때 그 고장 장자의 아들인 야사(耶舍)라는 젊은이가 찾아와서 붓다의 가르침을 듣고 제자가 외었는바, 아들의 가출에 놀란 장자가 허둥지둥 달려와서 붓다를 만나본 결과, 그도 또한 신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때 그 장자가 붓다 앞에서 표명한 말을 경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저는 이에 세존과 그 가르침과 그 비구중(衆)에 귀의하나이다. 세존이시여, 저를 우바새(재가 신자)로서 받아 주시옵소서. 오늘부터 시작하여 이 목숨 다할 때까지 귀의하겠나이다.”

이것이 처음으로 삼귀의를 표명한 우바새였다는 것이 이 경의 주장이다.

그리고 이런 고백이 수계(受戒), 즉 교단의 일원이 되는 주요한 의식으로 채택된 것은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그때 붓다의 제자는 60명에 달했으므로,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그들을 각처에 보내 그 가르침을 널리 전파하도록 했다. 이것을 나는 ‘붓다의 전도 선언’이라고 부르거니와, 그리하여 파견된 비구들은 귀의하여 출가하고자 하는 사람이 생겼을 경우, 그들을 붓다 앞에 데리고 와서 그 허가를 받을 필요가 있었다. 먼 고장에서 그 일 때문에 일일이 찾아와야 한다는 것은 여간 힘이 드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붓다는 심사숙고한 끝에 비구들에게도 수계, 즉 출가를 허가하는 권한을 주었다.

“비구들이여, 나는 허락하노니, 너희는 각자 먼 고장에 있어서, 출가시키고 구족계(upasampada ; 불교 교단에 들어오는 허가)를 주라.

비구들이여, 출가시키고 구족계를 주는 데는 이렇게 함이 좋도다. 먼저 머리와 수염을 깎고, 가사를 입고, 윗옷을 한쪽 어깨에 걸치고, 비구의 발밑에 절한 다음 꿇어앉아서 합장하고 이렇게 말하게 하라.

‘불(佛)에 귀의하나이다. 법(法)에 귀의하나이다. 또다시 승에 귀의하나이다.’

다시 불에 귀의하나이다. 다시 법에 귀의하나이다. 다시 승에 귀의 하나이다. 또다시 불에 귀의하나이다. 또다시 법에 귀의하나이다. 또다시 승에 귀의하나이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삼귀의를 세 번 부르는 것으로 출가시키고 구

족계를 줄 것을 허락하노라.”

불(佛)이니 세존(世尊)이니 여래(如來)니 하는 것은 교조인 붓다를 가리키는 말이다. 법(法)이란 물론 붓다의 가르침이다. 그리고 승(僧)이라 함은 승가(僧伽) 즉 불교 교단을 뜻하며, 그 원어는 samgha이다. 이 불, 법, 승은 불교의 세 기둥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이것을 세 보배 즉 삼보라고 한다. 이것들에 귀의(sarana)한다는 것은 삼보를 오직 의지한다는 뜻이다. 아마도 불교에서 가장 종교적인 특색이 발휘된 것은 이 삼귀의에 있다고 해도 좋으리라고 믿는다.

전 세기 전방부터 점차 불교, 특히 원시 불교의 진상을 이해하기에 이른 유럽의 학자들은 자주 불교의 종교성에 대해 왈가왈부하며 논쟁을 벌여 왔다. 기독교의 전통 속에서 살아 온 그들로서는 불교가 어째서 종교일 수 있는지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으리라. 그들의 선입견에 의하면 종교란 신과 인간의 관계이어야 했다. 그런데 이제 그들 앞에 나타난 불교는 아무래도 그런 기준에 맞지가 않았다. 가장 중요한 신(神)이니 구제자니 하는 것이 없었다. 이것이 어떻게 종교일 수 있는가? 그들이 당황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리하여 어떤 학자는 “불교는 종교를 무시한다.”고 했고, 또 어떤 학자는 “불교는 기도 없는 도덕 체계에서 출발하여 마침내 종교가 되었다.”고 말했다.

이런 그들의 단정은 이제 와서 돌이켜 볼 때 매우 재미있는 점이 없지 않다고 하겠다. 불교가 종교를 무시했다는 것은 대체 무슨 뜻인가? 처음에는 도덕 체계이던 것이 차츰 종교가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런 생각은 결국 그들의 좁은 종교관의 틀 속에 어떻게 하든 불교까지도 우겨 넣으려고 한 데서 비롯된 견강부회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 사정은 많이 달라졌다. 기독교밖에는 알지 못하던 유럽의 학자들에게도 여러 종교에 관한 지식이 급속히 퍼졌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그들의 좁은 종교관으로는 도저히 처리되지 않는 종교도 적지 않았다. 이제 검토되어야 할 것은 오히려 그들이 지니고 있던 종교관, 그것이었다. 그러면 대체 종교란 무엇인가? 그들은 다시 한 번 이 물음 앞에 서야 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원시 미개 종교로부터 기독교와 불교에 이르는 모든 종교를 앞에 놓고, 거기에 공통되는 본질적 요소가 무엇인지를 찾아보았다. 그 결과 그들이 마지막에 가서 부딪친 것은 ‘성스러운 것’이라는 개념이었다. 즉 신의 유무가 종교의 성립을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성스러운 것이 추구될 때 종교가 성립한다는 의견이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불교도 또한 훌륭히 종교 속에 넣을 수 있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를테면 제데르블롬이 그의 저서 [신앙의 생성]에서 삼보를 가리키며

“붓다가 인생의 황야 속에서 존재의 불행과 고뇌로부터 멀리 떠난 오아시스를 발견한 일, 거기에 성스러운 것이 풍성한 내용을 지니고 속된 것과 대치되어 있는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 그 보기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유럽의 학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것이 중대한 관심사일 수는 없는 문제이다. 그들이 불교를 종교의 범주 안에 넣든 넣지 않든, 불교는 몇 천 년에 걸쳐 종교 노릇을 해 온 것이 사실이다. 또 오늘의 우리에게도 훌륭한 종교임에 틀림없을 터이다. 그리고 불교인의 가장 엄숙한 종교적 심정은 붓다 재세 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저 붓다와 그 가르침과 교단에 대해 진심에서 삼귀의를 부를 때처럼 잘 나타나는 일은 없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볼 때, 불교의 가장 종교적인 일면은 이 삼귀의에 있다고 해도 좋을 줄로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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