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포살(布薩)
“대중이여, 들으시라. 오늘은 15일 포살일이니, 만약 대중에게 지장이 없다면 교단은 포살을 베풀고 계본(戒本)을 외리라.
무엇을 교단의 첫 행사라고 하는가? 여러 대덕이 몸의 청정함을 고백함이니, 나는 이제 계본을 읽으리라. 대중은 여기에서 잘 듣고, 잘 생각 할지어다.
만약 스스로 허물이 있음을 자각한 사람은 나서서 드러내라. 또 죄 없는 이는 잠자코 있을지니, 잠잠하면 여러 대덕의 청정함을 알리로 다. 만약 누가 물을 때에는 마땅히 대답해야 하리니, 이같이 비구는 이 대중 속에서 세 번까지 질문 받을 것이며, 세 번 질문을 받고도 죄가 있으면서 고백하지 않는다면, 고의적인 망어죄(妄語罪)를 얻으리라. 고의적 망어는 도에 장애가 된다고 붓다께서는 설하셨나니, 그러므로 죄 있는 것을 기억하는 비구로 청정하기를 원하는 이는 그 죄를 드러내라. 드러내면 그는 안락함을 얻으리로다.” ([律藏] 大品 2 佈薩건度)
원시 불교 교단의 생활상, 즉 붓다와 그 제자가 하루하루 어떤 생활을 했나 하는 점은 오늘의 사찰의 양상을 근거로 해서는 좀처럼 알아내기가 어려울 것임에 틀림없다. 거기서는 장례식이나 추선(追善 ; 죽은 이의 명복을 비는 불사)의 의식이 거행되지는 않았다. 또 독경이나 불공이 올려지는 일도 없었다. 즉 그들의 생활은 사제자(司祭者)로서의 그것이 아니라, 수행자로서의 하루하루였기 때문이다. 붓다가 설하는 가르침을 이해하고, 그것을 자기 몸에 구현해 가는 일, 그것밖에는 그들이 해야 할 일이란 없었던 것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면 그들은 곧 위의를 갖추고 거리나 마을로 갔다. 탁발을 위해서이다. 탁발(托鉢)이란 불교가 중국에 들어간 다음에 생겨난 말이지만 매우 재미있는 말이다. 탁(托)이란 손으로 받는다는 뜻으로 발(鉢)을 손에 들고 음식을 받는다는 것이니까, 탁발이란 걸식이요, 밥을 비는 일이다. 그러나 만약 그 발우(鉢盂)에 음식을 넣어 주는 사람이 없다면, 그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그의 생존은 이 발우에 달려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거지처럼 애걸복걸하여 가면서 음식을 얻는 것은 아니며 “만약 내가 하는 일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면 이 발우에 음식을 넣어 주시오.”하는 것이 그 심정이어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비구는 이 탁발에 비구로서의 생명을 걸고 있는 셈이 된다. 토겐(道元(1200~1253) ; 일본 조동종의 개조. 중국에 유학하여 여정(如淨)에게서 도를 배우다. 저서에 <<정법안장>> 등이 있다) 이 [정법안장수문기]에서 의량(衣糧)의 두 가지 일은 소연(小緣)이긴 하지만, 행자(行者)의 대사이다. 라고 한 것도 그러한 뜻이라고 추측된다. 따라서 그것은 법식을 좇고 예의를 갖추어 엄숙한 태도로 행해져야 했다. 한 경([상응부 경전] 4:18 단식. 한역 동본, [잡아함경] 39:15 걸식)에 의하면, 붓다도 어떤 날에는 깨끗이 씻은 발우를 그대로 가지고 돌아오시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붓다가 마가다국의 시골, 판차사라(五葦)라는 마을에 계실 때의 일이었다. 그 날은 마침 젊은 남녀들이 서로 선물을 주고받는 축제가 벌어지는 날이었다. 붓다는 그 아침에도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탁발을 위해 그 마을을 찾아갔으나,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축제에 마음이 가 있기 때문인지 아무도 붓다를 공양하려고 하지 않았다. 여기서부터 경의 서술은 악마 이야기의 형식을 취하게 되거니와, 그 돌아오는 길에 마라(악마)가 모습을 나타내어 붓다에게 말을 걸었다.
“사문이여, 음식을 얻었는가?”
“얻지 못했다.”
“그러면 다시 마을로 돌아가라. 이번에는 공양을 얻을 수 있도록 내가 해주겠다.” 그러나 붓다는 단호히 그것을 거부했다.
“음식은 비록 얻지 못했다 해도 보라, 우리는 즐겁게 사나니, 이를테면 저 광음천(光音天 ; 인도의 전설에 나오는 천상 세계의 하나. 이 세계에 태어난 사람들은 음성이 없고, 말할 때에는 입에서 광명이 나와 언어를 대신한다고 한다) 모양 기쁨을 음식삼아 살아가리라.”
여기서 악마의 속삭임이라고 되어 있는 것은 붓다의 내부에서 일어난 식욕의 유혹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붓다라고 해도 시장하면 먹고 싶은 생각이 일어나리라. 지금 다시 간다면 이미 선물의 교환도 끝났을 것이니까 공양을 얻을 수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런 생각이 순간적으로 붓다의 머리에 떠올랐다고 해서 조금도 이상할 것은 없겠다. 하지만 탁발이란 그들에게 그런 것일 수는 없었다. 거기에는 의연(毅然)히 지켜야 할 법식이 있었고, 더 소중한 마음씨가 있어야 했다. 법에 의해 얻지 못하는 것과 법에서 말미암지 않고 얻는 것은 어느 쪽이 존귀한가? 그들로서는 말할 나위도 없이 법에 의하여 얻지 못하는 쪽이 훨씬 존귀하였다. 여기에 “기쁨을 음식삼아 살아가리라.”고 한 구절의 뜻이 있는 것이다.
그런 그들의 생활을 더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은 포살과 자자(自恣)라고 불리는 두 행사였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들의 교단에는 종교적인 의식이 없었다. 그러나 구태여 의식에 가까운 것을 찾는다면, 그것이 포살과 자자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이 두 가지 행사는 그들의 생활이 무엇을 목표로 영위되었나 하는 점을 참으로 명확하게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선 포살이란 무엇인가? 포살이라는 말은 아마도 산스크리트의 ‘호사다(poshadha)’의 음사이리라. 팔리어로 말한다면 ‘우포사타(uposatha)’가 될 것이다. 그것의 유래를 따지면 원래 외도(外道) 즉 불교 이외의 종교에서 행해지고 있던 의식을 채택한 것으로 그 소식은 [율장] 대품(大品) 2 ‘포살건도’라는 대목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그것은 붓다가 라자가하 교외의 ‘깃자쿠타’라는 산에 있었을 때의 일인데, 앞에서 언급한 빈비사라 왕으로부터 붓다에게 한 제안이 들어왔다. 그 왕은 불교 교단의 성의 있는 보호자였거니와, 그때 라자가하 부근에 있는 외도의 교단에서는 반달에 두 번씩 집회를 열어서 그 기회에 일반 신자들을 위해서도 설법을 베푸는바, 그것은 매우 좋은 행사인 것 같으니 불교 교단에서도 그와 같은 것을 시행해 봄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붓다가 그 제안을 그 자리에서 받아들인 결과, 불교 교단에서도 포살 행사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을 말하면 그 기원은 훨씬 더 고대로 거슬러 올라갈 것 같다. 포살은 ‘우파바사타(upavasatha)’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본래 소마(soma; 신에게 바치는 술)의 제사가 있는 전날에 행해지는 단식일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아마 인도 게르만 어족은 훨씬 예전부터 그런 행사를 가져 왔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이 반달에 두 번이라 함은 달(masa)로 헤아리는 것이 아니라, 반 달(pakkha)을 단위로 1일, 8일, 15일, 23일처럼 대체로 1주일에 한 번 꼴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인도 특유의 주일제이어서, 외도가 그것을 이용하여 행사를 해 오던 것을 붓다도 빈비사라 왕의 제안으로 채택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렇게 하여 포살의 집회가 결정되었으나, 처음에는 단순한 집회에 그쳤다. 그러나 이윽고 그 집회에 참가했던 신도들로부터 새로운 제안이 있게 되었다. 우리는 모두 법을 들을 수 있을까 하여 모인 것인데, 비구들이 모두 ‘벙어리 산돼지’처럼 침묵하고 있다니 말이 되는가. 부디 모인 사람들을 위해 법을 설해 달라, 이런 요청이었다. 그것도 그렇겠다고 하여 포살일이면 대중을 위해 설법이 있게 되었다.
다음으로 붓다 자신의 발기에 의해 계본(patimokkha)을 그 집회에서 외도록 결정하였다. 계본이란 계율의 항목만을 나열한 것이니, 그것을 해설하고 그 성립 과정을 서술한 것이 뒤에 이루어진 율장(律藏)이다. 말하자면 여기에 계율의 근본이 있다는 뜻에서 이것을 계본이라고 번역하게 되었거니와, 포살일에 그것을 낭송케 해서 반성과 참회의 기회로 삼고자 한 것은 그것에 의해 포살에 새 뜻이 부여되고 그것이 불교 특유의 것으로 승화된 것이라고 보아도 좋을 줄 안다. 그 양식 역시 그때 붓다의 손으로 정해진 것이어서, 그것은 대개 이렇게 진행 되었다.
반달의 14일이나 15일, 해가 넘어가고 등불이 켜지면 비구들이 모여들고, 조금 후 장로가 일어나서 목청을 돋우어 먼저 계본의 서문을 읽어 갔다. 그 부분을 나는 첫머리에 인용해 놓았거니와, 그것은 “대중이여, 들으시라. 오늘은 15일 포살일이니”로 시작되는, 말하자면 개식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고는 이제 계본을 읽겠으니 죄 있는 사람은 참회하라고 전제한 다음, 계본의 낭송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한 항목마다 세 번 되풀이되었다. 비구들은 그것을 자기 한 사람을 향해 묻는 것으로 알고 들어야 한다고 요구받았다. 일 대 일로 묻는다면 가부간 대답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런 마음으로 세 번 반복되는 계본을 들으라는 것이었다. 죄 있는 것을 자각하면서도 참회하지 않을 때는 ‘고망어(故妄語)’의 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 그것은 도에 장애가 된다고 붓다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청정하기를 바라거든 그것을 고백하라. 고백하고 참회하면 마음의 편안을 되찾게 될 것이다. 이것이 서문의 대체적인 뜻이었다.
이 서문의 낭송이 끝나면, 계율의 하나하나의 항목을 세 번씩 적었다. 그 항목의 수효는 현존하는 계본에 따르면 대략 250(부파에 따라 다름)개 정도가 되거니와, 붓다 재세 시에는 더 적었을 것이고, 더구나 포살의 제도가 정해지던 당시에는 훨씬 적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계율은 처음부터 한꺼번에 정해진 것이 아니라, 무슨 사고가 있을 때마다 하나씩 정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주요 부분, 이를테면 불사음(不邪淫), 불투도(不偸盜), 불망어(不妄語) 같은 조목은 일찍부터 결정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것들을 이를테면
“어느 비구라도, 만약 마을이나 숲에서 주지 않은 걸 취했다면… 그는 바라이(波羅夷 ; 승려로서 자격을 잃고 교단에서 추방되는 무거운 죄)에 해당하니 함께 있지 못하리라.”하는 식으로 낭독했다. 그리고 몇 조목이 끝날 때마다
“이제 나는 여러 대덕들에게 묻노라. 이 점에 대해 청정한가? 다시 묻노라. 이 점에 대해 청정한가? 세 번째 묻노라. 이 점에 대해 청정 한가?”
라고 대답을 재촉했다. 이런 물음에 대해 모든 사람이 잠자코 있으면, 장로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여러 대덕은 이 점에 대해 청정하시오. 그러기에 침묵하신다고, 나는 그렇게 알겠소.”
이런 식으로 낭독과 재촉이 자꾸 반복되는 중에 포살의 행사는 끝나곤 했다. 그 무렵쯤에는 밤도 깊어져서 천지의 적막이 그들의 주변을 감쌌다. 그것은 참으로 엄숙하기 이를 데 없는 광경이었으리라. 또 하나의 행사인 자자(自恣, pavarana)는 우안거(雨安居)의 마지막 포살일(15일)에 행해지는 더 없이 순수하고 아름다운 집회였다. 자자란 자진해서 자기의 죄를 지적해 달라고 동료 비구들에게 청하는 일이니, 현장(玄奬622~664 ; 중국의 승려. 인도에 건너가 많은 경전을 가지고 와서 번역한 사람. 그의 여행기인 <대당 서역기>는 유명하다)은 이것을 ‘수의(隨意)’라고 번역했다. 이것도 포살일의 행사라고 하여 ‘포살 자자’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것 역시 붓다의 제안으로 시작되었으며, 그 인연은 [율장]의 대품 4 ‘자자건도’에 의하면 이러했다고 한다.
그것은 붓다가 제타의 정사에 있을 때의 일이었다. 그때 마침 여름 장마철이 되었으므로, 코사라의 어느 고장에서 많은 비구들이 함께 안거에 들어갔다. 안거(vassa)란 본디 ‘비’ 또는 ‘장마철’의 뜻이니, 여름 장마철 석 달 동안은 비구들도 도저히 활동할 수 없으므로 정사나 동굴 같은 데서 외출하지 않은 채 수행에만 전념하는 것을 이렇게 불렀다. 그것은 비가 많은 인도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로 보이거니와, 이제 코사라의 어느 고장에서 안거에 들어간 비구들은 그 석 달을 화목하고 분쟁이 없이 지내기 위하여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생활하기로 약속하였던 것이다. 경은 그것을 “우리는 담화하지 않고, 질문하지 않으리라.”고 기록하고 있다. 문답을 하든지 남을 탓하든지 하는 것은 분쟁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리라.
그리하여 무사히 우안거를 마친 비구들은 비가 개자 기원정사로 붓다를 뵈러 왔다. 그런데 붓다는 그들로부터 그 동안의 생활에 대해 보고를 듣고 나서, 무엇인지 부자연스러운 것을 느끼게 되었다. 당시의 외도 중에는 ‘아계(啞戒)’라고 하여 무언의 행(行)을 닦는 것도 있었지만, 인간이 언어를 전혀 안 쓰면서 공동생활을 한다는 것은 짐승이 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인간은 도리어 그 생각하는 바를 적극적으로 이야기해야 한다. 이런 생각에서 붓다는 우안거를 맺음 하는 행사로서 이 자자의 의식을 정했다고 한다.
그 의식은 대체로 이렇게 진행되었다. 그 날은 마침 7월 14일이나 15일에 해당하므로 해가 넘어가면 곧 보름달이 떴다. 그때는 나이든 비구나 새로 입교한 비구나, 모두 마당에 내려가서 쭈그리고 빙 둘러 앉았다. 그러면 한 비구가 일어나 개식 선언을 하였다.
“대중이여, 들으시라. 오늘은 자자가 있는 날, 만약 대중에게 이의가 없다면 교단은 자자를 베풀려 하오.”
이리하여 의식이 시작되면, 먼저 장로부터 시작하여 교대로 모든 비구가 다 합장한 손을 높이 쳐들면서 동료 비구들을 향해 간청하는 것이다. 내가 지난 안거에서 무슨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는가? 만약 여러분 중에서 그런 일을 보았거나 들었거나 또는 의심을 품은 분이 계신다면, 부디 나를 위해 그것을 말해 달라. 경전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나는 교만에 대해 자자를 행하노니, 나에 대해 무엇을 보고 무엇인가 듣고 또는 나에게 의심을 지니신 분이 있다면, 대덕들이여, 나를 가엾이 여기어 그를 말씀해 주소서. 죄를 알면 그를 제거하오리다.”
그것을 비구마다 세 번 반복하여 장로부터 신입 부구까지 마쳤을 때, 자자의 의식이 끝나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하기 짝이 없는 의식이었지만, 매우 아리따운 광경이었던 것 같다. 한 경([상응부 경전] 8:7 자자. 한역 동본, [아함경] 45:15, 자자)은 어느 해의 자자의 정경을 이와 같이 서술하고 있다.
그것은 붓다가 사바티의 동쪽 교외인 미가라미타(鹿子母)의 정사에 있었을 때의 일이다. 그 해의 7월 15일, 안거가 끝나는 날 행해진 자자는 참으로 성대하고도 감동에 넘치는 것이었다. 해가 지고 달이 뜨자, 마당에 둘러앉은 비구의 수효는 대략 오백 명은 되어 보였다. 그 중에는 붓다도 끼어 있었고, 또 수제자인 사리푸타의 모습도 보였다. 붓다도 교단의 일원이므로 자진해서 자자를 행하여야 했다. 아니 자자의 규칙에 의하면 윗사람부터 하게 되어 있으니까. 제일 먼저 자자를 해야 되는 이가 붓다 자신이었다.
“대덕들이여, 나는 이제 자자를 행하노니, 대덕들은 내 행위와 내 언어에서 무엇인가 비난할 만한 것을 보고 듣고 또는 미심쩍은 생각을 지니지 않았던가?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나를 가엾이 여겨 부디 지적해 주오.”
붓다가 합장한 손을 높이 쳐들고 비구들 앞에서 자자의 말씀을 외자, 엄숙한 침묵이 장내를 뒤덮었다. 침묵은 그 청정을 긍정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침묵만으로 대하기에는 너무나 감격이 벅찼던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오른 어깨에 걸치고 붓다 앞에 고개 숙여 엎드린 비구가 있었다. 그는 사리푸타였다.
“아니 옵니다, 세존이시여. 누구도 세존의 행위와 언어에서 비난할 점을 발견한 이는 없나이다.”
다음은 사리푸타의 차례였다. 그도 또한 합장한 손을 높이 쳐들면서 감동에 떨리는 목소리로 자자의 발언을 했다. 다시 한 번 엄숙한 침묵이 그의 청정을 증명해 주었다. 그때 이번에는 붓다가 일어나서 그의 언행에 찬사를 보냈다. 이렇게 하여 오백 명이나 되는 비구들이 차례차례 자자를 행했으나, 그 날 밤 누구 한 사람 비난의 말을 들어야 했던 사람은 없었다.
그때 반기사(婆耆沙)라는 비구가 감동에 찬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붓다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재가 시절 시 짓는 데 뛰어난 솜씨를 보였던 사람이거니와, 오늘 저녁도 자자의 정경을 목격하고 갑자기 시상이 가슴속에 떠오름을 억제하기 어려웠던 것이리라. 붓다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 반기사여, 그것을 여기에서 발표하려무나.”
반기사가 그 날 밤 감동에 겨워 노래했던 8구의 게는 이렇게 기록되어서 지금까지 전해온다.
보름이라 달 밝은데, 신(身), 구(口), 의(意) 맑히려고
오백 넘는 비구들은 여기에 모였으니
번뇌의 올가미를 모두 다 벗어 던져
윤회를 반복 않는 성자들뿐이로다.
세존의 아들이요, 법의 씨 그들이매
당찮은 말 늘어놓는 사람이란 없어라.
갈애의 그 화살을 빼어 버린 우리가
아으, 세존 우러러서 예하여 뵈옵노라.
이런 데서 우리는 붓다와 그 제자들의 일상생활, 즉 원시 불교 교단의 생생한 모습을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