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착한 벗.
“비구들이여, 너희는 아침에 해가 뜨는 모양을 잘 알고 있으리라. 해가 나올 때가 되면 먼저 동쪽 하늘이 밝아지고, 그 다음에 빛이 눈부시게 발산되면서 해가 솟는다. 즉 동녘 하늘이 밝아짐은 해가 뜰 선구요 전조이다. 비구들이여, 그것과 마찬가지로 너희가 성스러운 팔정도를 일으키는 데도 그 선구가 있고 전조가 있나니, 그것은 착한 벗과 사귐이니라.
비구들이여, 그렇기에 착한 벗을 가지고 있는 비구라면, 그가 마침 내 성스러운 팔정도를 배우고 익혀서 그 공을 쌓게 되리라는 것을 기대할 수가 있느니라.” ([相應部經典} 45:49 善友)
이 아함부 경전 중에는 이렇게 착한 벗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경이 여러 개가 보인다. 또 하나 들어 본다면, 붓다는 더 간명 솔직하게 이렇게 설한 적도 있다. 이것은 상응부 경전에 보이는 역시 ‘선우’라는 경의 첫머리에 나오는 글이다.
“비구들이여, 여기에 한 법이 있나니, 성스러운 팔정도를 일으킴에 이로움이 많도다. 그 한 법이란 무엇인가? 그는 착한 벗이니라.
비구들이여, 착한 벗을 가진 비구는 성스러운 팔정도를 배우고 익혀서 그 공을 쌓게 될 것이 기대되느니라.”
나는 스스로 불민함을 고백하는 것으로 이 글을 쓰기 시작하여야 하겠다. 나는 이런 경들을 가볍게 읽어버리고 오랫동안 그 속에 숨어 있는 깊은 뜻에 생각이 못 미쳤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젠가 시세로의 [우정에 대해서]를 읽다가 갑자기 깨달은 바가 있어서, 그로부터 나는 ‘착한 벗’에 대해 말하는 이런 경전들의 뜻을 어느 정도라도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시세로(Cicero, Marcus Tullius, B.C. 106∼43)는 로마의 철학자로서 기원 전 2세기에서 기원 전 1세기 사이에 생존했던 사람이다. 그의 조그마한 저서 [우정에 대해서]는 그리스나 로마에서의 아리따운 우정의 실례를 많이 들고, 또 우정에 최고의 찬사를 바친 책이다. 이를테면
“벗은 눈앞에 있지 않을 때도 거기에 있으며, 가난해도 풍족하고, 허약해도 건강하고, 또 한결 말로 나타내기 어렵거니와, 죽었다 해도 살아 있는 것과 같다.”는 따위의 표현이 그 전권을 채우고 있다. 그런데 나는 그러한 우정의
실례와 그것에 대한 찬사를 읽다가 뜻하지도 않은 사실에 눈을 뜨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을 나는 이제 ‘우정의 역사’라고 부르고자 한다. 우정이 인류의 역사 속에서 맡아 온 구실이라는 정도의 뜻이다.
대체 인류의 세계에서 우정이라는 덕목(德目)이 생겨난 것은 언제부터일까? 나는 우정에 대한 새 사실에 눈뜨기 이전에는 지금껏 그런 일을 생각해 본 적도 없다.
“벗의 슬픔에 나는 울고, 내 즐거움에 벗도 춤춘다.”
그것은 필시 인간의 역사와 함께 시작된 일일 것이라고 무작정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인류가 아직 부족 제도에 매여 있던 시대에는 혈연에 의한 연결이 전부여서 우정이 생겨날 여지는 없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설사 있었다고 해도 인류의 역사 속에서 큰 구실을 담당했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그러면 우정이라는, 혈연과 관계없는 인간적 결합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언제였을까? 그것은 대개 기원 전 6∼5세기 무렵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플라톤(Platon, B.C. 427∼347)이 그 [대화편]에서 화려한 말로 우정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도 그때였으며, “한 명의 진정한 벗은 만 명의 친척보다 소중하다.”고 그리스 인 사이에 인식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리고 시세로가 그리스와 로마의 아리따운 우정에 대해 기록하여 그것에 최고의 찬사를 바친 것도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세기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리고 이런 일이 그리스나 로마에서만 일어났던 것은 아니다. 그와는 멀리 떨어진 극동에서도 저 공자가
“벗이 있어 먼 데로부터 오니, 또한 즐겁지 않은가!”라는 말을 [논어]에 남긴 것도 역시 그 무렵이었다. 그리고 이제 붓다가 ‘착한 벗’에 대해 힘을 주어 비구들에게 설한 것도 역시 같은 세기에 일어났던 일임에 틀림없다. 여기에 생각이 미쳤을 때, 나는 무엇인가 느끼는 바가 있어서 ‘착한 벗’에 관해 실린 경들을 다시 주의하여가며 읽어 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랬더니 거기에서는 이제껏 전혀 눈치 채지 못했던 새로운 뜻이 뒤를 이어 끊임없이 샘솟아 나왔다. 이 ‘착한 벗’에 관계되는 경들에는 나로 볼 때 그런 추억이 엉켜있는 것이다.
그러면 어째서 이 시기에 이르러 우정이라는 덕목이 갑자기 그 모습을 나타내게 된 것일까? 그 이유를 캐기란 나에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왜냐 하면 그 몇 세기의 그리스나 로마나 인도나 중국에 새로 나타난 공통적인 현상을 찾는다면, 그것이 바로 열쇠 노릇을 하여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 국가 사이에 공통되는 새로운 현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도시 국가의 출현이라는 것이 나의 견해이다.
이제 여기에서 고대의 도시 국가, 이를테면 그리스 인이 말하는 폴리스(polis)에 대해 자세히 논한다는 것은 이 책의 주제에서 멀어지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극히 간략한 언급밖에는 시도할 겨를이 없거니와, 어쨌든 로마, 아테네, 라자가하 또는 사바티 같은 곳의 구조나 생활을 생각해 볼 때, 대략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도시들은 모두가 성벽으로 에워싸여 있었고, 그 속에서는 수많은 시민들이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그런 시민들은 물론 동일 부족만은 아니었다. 로마의 경우는 세 부족에 속하는 사람들이 한 곳에 살았고, 아테네로 말하면 네 부족이 모여서 그 폴리스를 형성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런 생
활무대에서는 부족 중심의 생활 대신 시민 사회의 생활이 새로 등장하는 것이 필연적인 추세였다. 이것은 역사가 자세히 말해 주고 있지만, 여기에 이르러 혈연에서 말미암지 않은 인간의 정신적 결합이 비로소 인류의 역사에 크게 떠올랐던 것이라고 하겠다.
이제 눈을 돌려 붓다 시대의 인도를 자세히 살펴볼 때, 그 사회 구조는 고대의 로마나 그리스와 아주 유사했다고 할 수 있다. 거기서도 새로이 몇 개의 고대 도시가 생겼는데, 그 중에서도 라자가하나 사바티 같은 곳이 정치적, 경제적으로 가장 번영을 자랑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도시들이야말로 붓다가 주로 활약한 무대이기도 했던 것이다. 물론 붓다에게 귀의한 대부분의 신자도 이런 도시 사람들이었을 것이 쉽게 예상된다. 이런 사실을 배경으로 하여 생각해 보면, 붓다가 ‘착한 벗’의 가치를 이상하리만큼 역설한 까닭이 조금씩 이해되는 것이다.
불교 내부에서도 혈연 아닌 인간과 인간의 결합이 큰 구실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붓다의 교단(敎團)이다. 누누이 말한 바와 같이 붓다의 교단에서는 그 출신이나 혈통의 구별이 전혀 인정되지 않았다. 한 경([증지부 경전] 8 : 19 파하라다. 한역 동본, [증일 아함경] 42 사수륜)은 그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붓다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
“여러 강이 있어서 각기 강가, 야무나, 아치라바티, 사라부, 마히라고 불리거니와, 그것들이 한번 바다에 이르고 나면, 그 전의 이름은 없어지고 오직 대해라고만 일컬어진다. 그와 마찬가지로 크샤트리아, 브라만, 바이샤, 슈드라의 네 계급도 일단 법과 율을 따라 출가하고 나면 예전의 계급 대신 오직 사문이라고만 일컬어지느니라.”
불교의 교단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 그들도 재가 시절에는 저마다 가문과 혈통이 있었을 것이지만, 일단 붓다의 교단에 들어온 이상에는 그런 사회적 신분 관계는 모두 불식되어 모든 사람이 평등한 대우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여러 강물이 바다에 이르고 나면 오직 ‘바다’로만 불리는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따라서 붓다의 교단에는 계급도 없고 통솔자도 없고 또 통솔 받는 사람도 없었다. 주목해야 될 것은 그 속에서는 붓다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 가르침은 붓다에 의해 깨달아지고, 붓다에 의해 설해진 것임에 틀림없다. 만약 붓다가 나타나서 정각을 성취하지 않고, 법을 설하여 이 길을 나타내 보이지 않았더라면, 사람들은 마침내 이 법을 모르고 또한 이 길을 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이 길은 붓다 그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이 법(진리)은 태고부터 있었고, 이 길은 영겁에 걸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붓다는 그것을 발견하고 가르쳐 주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붓다 자신도 또한 이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의 하나이다. 그도 역시 서로 손을 잡고 같은 길을 걸어가는 동행의 한 사람인 것이다. 붓다는 이 사실을 명확히 자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자주 그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좋은 친구로 삼음으로써, 늙어야 할 몸이면서도 늙음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다. 병들어야 할 몸이면서도 병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다. 죽어야 할 몸이면서도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다. 고뇌와 우수를 지닌 몸이면서도 고뇌와 우수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다.”고 설하였던 것이다.
거기에는 삼가(samgha)라고 불리는 불교 교단의 기본적 성격이 가장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는 것 같다. 그것과 대조하기 위하여 이를 테면 기독교 교단의 구조를 생각해 보자. 거기에는 우선 그 교도들이 은총을 구하고 구제를 기원해야 하는 전능한 신이 있으며, 다음으로 그 신이 파견했다고 생각되는 예수 그리스도가 신과 인간 사이의 중개자로서 존재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 교도들은 그런 절대적 권위 앞에서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머리 숙이고 빌어야 할 어떤 대상도 없는 바이다. 거기에서는 모든 성원이 오직 법의 증지(證知)와 실천이라는 한 가닥의 길을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을 따름이다. 그 선두에는 붓다가 선구자의 자격으로 서 있어서 “너희들도 오라.”고 손짓하고 있는 것뿐이다. 이리하여 그 뒤를 따르고 그 수범에 힘입어 오직 자기 형성의 길을 걸어가는 것, 이것이 불교요 승가(僧伽)인 것이다.
이런 불교 교단의 성격을 곰곰이 생각할 때, 붓다가 ‘좋은 벗’의 소중함을 역설한 까닭이 차차 이해되어 오는 것처럼 여겨진다. 거기에는 은총을 드리울 신도 없고, 믿고 의지할 중개자도 없거니와, 그 대신 손짓하고 부르는 붓다의 수범이 있고, 힘이 되어 주는 좋은 벗의 큰 격려가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붓다조차 좋은 벗의 하나라는 것을 명확히 이해할 때, 불교의 진정한 면목을 파악한 것이 되는 줄 안다.
한 경([상응부 경전] 45 : 2 반. 한역 동본, 27:15 선지식)에 의하면 아난다(阿難)는 붓다에게 이와 같이 물은 적이 있다.
“대덕이시여, 곰곰이 헤아려 보매, 착한 벗이 있고 착한 동지와 함께 있다는 것은 이 성스러운 길의 절반에 해당한다 생각됩니다. 이런 소견은 어떻겠습니까?”
그도 또한 스승이 말씀하는 바를 늘 듣고 있었으므로, 벗의 소중함에 대해 꽤 많이 이해한 듯이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 소견을 말하여 붓다의 판단을 구한 것이다. 그러나 붓다는 이렇게 말씀했다.
“아난다여, 그것은 잘못이다. 아난다여,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아난다여, 착한 벗이 있고 착한 동지와 함께 있다는 것은 이 성스러운 길의 전부이니라.”
아마도 그것은 아난다로서는 뜻밖의 말씀이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는 착한 벗의 뜻을 곰곰이 생각한 끝에, 그것이 ‘이 길의 절반’에 해당한다고 하면 지나치지 않을까 주저하면서 이 질문을 했던 것이겠다. 그런데 붓다의 판단은 그것으로도 아직 부족하다는 것이다.
하기야 붓다의 제자 중에도 같은 문제에 관해 그것은 ‘이 길의 전부’라고 해도 되겠느냐고 물은 사람도 있기는 있었다. 사리푸타의 경우가 그렇다.
“옳거니 사리푸타여, 옳거니 사리푸타여. 그 말이 옳으니라. 착한 벗이 있고 착한 동지와 함께 있다는 것은 바로 이 성스러운 길의 전부이니라.”
이것이 찬탄의 말씀과 함께 사리푸타에게 내린 붓다의 판단이었다. [상응부 경전] 45 : 3 ‘사리불’이라는 제목의 경이 전해 주는 이야기이다.
돌이켜 보건대 나는 이 장(章)을 내 불민함에 대한 고백으로 시작하여야 했다. 나는 아직도 붓다의 ‘착한 벗’에 관한 사상의 뜻을 그 ‘절반’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도 또한 아난다나 사리푸타의 전례를 따라 한 가지 물음을 붓다 앞에 내놓고 싶다.
“대덕이시여, 삼가(교단)란 우정의 교단이라고 말한다면 어떻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