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연기(緣起)
이것 있음에 말미암아(緣) 저것이 있고
이것 생김에 말미암아 저것이 생긴다.
이것 없음에 말미암아 저것이 없고
이것 멸함에 말미암아 저것이 멸한다. ([相應部經典] 12:21:19)
이제까지 나는 10장에 걸쳐 붓다라고 불리는 사람을 여러 측면에서 관찰하고, 또 사상의 성격에 대해서도 몇 개의 특징을 든 바 있거니와, 한 마디로 말하여 붓다는 여느 종교가의 유형과는 썩 다른 인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어찌 보면 종교가라는 개념보다는 오히려 사상가 또는 철학자의 범주에 속했던 것으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그 인품을 말한대도 그렇지만 사상은 더욱 그렇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하늘로부터 받은 계시 따위와는 전혀 달라서 정연한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기에 그 가르침을 파고들면 들수록 우리는 그것이 지혜의 가르침인 점에 깊은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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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상 체계의 뼈대를 이루는 것이 이른바 ‘연기의 원리’이다. 그것은 이미 말했듯이 보리수 밑에서의 정각의 내용일시 분명하다. 정각이니 깨달음이니 하는 것은 바로 이 연기의 원리를 파악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후의 모든 사상적 전개는 최초의 설법의 내용이 된 ‘사제’의 가르침을 비롯해서 모두 이 원리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이 없을 터이다. 따라서 붓다의 사상을 파악하고자 할 때, 먼저 이 연기 사상을 명확히 이해할 것이 요청되기 마련이다. 이것이 붓다의 사상을 파고드는 정공법인 것이다. 그러나 이 원리를 파악하기란 그리 수월치가 않다. 이미 언급했거니와 붓다가 이 법을 설할 것인가 어쩔 것인가 하고 주저했던 이유도 바로 이 점에 있었던 것이다. [상응부 경전] 6:1 ‘권청’은 그것에 대해 이런 말을 기록해 놓고 있다.
“내가 체득한 이 법은 심히 깊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다. 적연 미묘하여 사람들의 생각을 초월하며, 심원하여 오직 지혜로운 이만이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욕망을 즐기고, 욕망에 빠지고, 욕망을 좋아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연기 즉 모든 존재는 원인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생겼다는 이치를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것을 잘 살펴보건대 연기설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로 두 가지 점이 지적되고 있다. 그 첫째 이유는 심히 깊다든지, 적연 미묘하다든지, 또는 오직 지혜로운 이만이 능히 알 수 있다든지 한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 둘째 이유는 세상 사람들은 욕망을 즐기고 욕망에 빠지고 욕망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되어 있다. 이제 이 두 가지 이유를 검토할 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게 된다.
먼저 첫째 이유로 말한 ‘사상이 심히 깊다’함은 어떤 사실을 가리키는 것일까? 후대의 불교 문헌에서도 우리는 흔히 ‘심심(深甚)’이니 ‘미묘’니 ‘난견(難見)’이니 하는 어휘에 부닥치게 되거니와, 불교 사상이 미묘해서 파악하기 어렵다는 것은 어떤 뜻에서 하는 말일까? 현대인들도 불교를 이해하려 들다가 그것이 너무 난해함을 탓하는 수가 많다. 그리고 그 난해한 이유는 대개 엄청난 술어 때문이라고 하는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정각 직후의 붓다에게는 아직 한 개의 술어도 없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지금 우리가 문제 삼고 있는 ‘연기’라는 술어마저도 틀림없이 후일에 성립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가 난해하다고 한 것은 결국 그것이 추상적인 원리였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인도인들이 추상적인 사고를 즐기던 민족임은 문헌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으나 아직 붓다 시대에는 추상적 사색이 발달해 있지 않았던
것이다. 몇몇 사상가들이나 그들을 따르는 사람 중에는 충분히 그것을 감당해 내는 이도 있기는 하였으나, 여느 사람들에게까지 그것을 바란다는 것은 무리였다. 이 연기의 원리는 아주 추상적 원리인 까닭에 도저히 여느 사람들의 이해를 기대하기 어려웠던 것이겠다. “적연미요”하다든지 “사람들의 생각을 초월한 것”이라든지, 또는 “지혜로운 사람만이 능히 알 수 있다.”든지 한 것은 이런 사실을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먼 후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미 추상적인 사색에 익숙해져 있으므로, 이 첫째 이유가 우리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하여도 좋을 줄 안다.
그 둘째 이유로서는 세상 사람들의 생활 태도가 지적되어 있다. 사람이란 흔히 그 도리가 진리임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자기 비위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같은 경의 다른 대목에서 “이는 세상의 조류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붓다가 말씀한 것도 이런 사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여 진다. 뒤에서 밝혀지겠지만 이 연기의 원리가 요구하는 실천이란 욕심을 떠나는 문제, 즉 고의 멸진을 실행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욕망에 빠져 있을 때에는 아무리 연기의 도리를 설해 보았자 도저히 그들에 의해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없다고 하여야 될 것이다. 이리하여 “나는 오직 기진맥진할 따름이리라.”는 이유가 붓다로 하여금 설법을 주저케 만들었던 것이다 . 이 점에서는 현대에 사는 우리라 해서 조금도 고대인 보다 나아진 것은 없을 터이다. 우리 또한 욕망을 즐기고, 욕망에 빠지고,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아니 고대인보다 훨씬 욕망에 민감한 것이 우리이며, 욕망 이외의 것은 알려고도 들지 않는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런 태도를 그대로 지녀서는 아무리 불교를 알려고 애쓴다 하더라도 결국은 인연 없는 중생이 되고 말 것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왜냐 하면 실천 없는 불교란 존재할 수 없는 까닭이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나는 짐짓 연기 사상의 난해함을 강조하고 있는 듯이 보일지 모르나 사실은 그와 정반대이다. 하기야 붓다도 그리고 후세의 불교인들도 자주 그것의 난해함을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내가 힘주어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것은 이미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을 알리기 위해 나는 붓다가 열거한 난해의 이유를 나누어서 설명했던 것이다. 그 첫째 이유, 즉 심심 미묘하기 때문이라는 것은 추상적인 사고에 익숙해진 우리에게는 이미 해당되지 않는다고 보아도 된다. 문제는 오히려 둘째 이유에 있다.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느냐 하는 점이다.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이다. 도리는 잘 알겠으나 자신은 그것에 의해 살아갈 뜻이 없다고 한다면, 결국 불교와는 인연이 끊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선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 것인가? 그 실마리가 될까 해서 나는 이 장(章)의 첫머리에 ‘연기의 공식’이라고도 할 수 있는 몇 구절을 인용해 놓았다. 그것은 붓다가 정각한 직후, 아직도 보리수 밑에서 명상하고 있을 때에 정리해 둔 것이다. 사실을 말한다면 나도 역시 붓다가 정각을 성취한 그 순간의 소식에서부터 해명해 가고 싶지만, 그것은 누구의 손으로도 불가능할 것임이 틀림없다. 그것은 마치 뉴턴이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깨달은 그 순간 같은 것이어서, 그때의 내적 체험의 경위는 아마 본인으로서도 밝힐 수가 없었으리라 믿어진다. 따라서 경전에도 그 순간의 내적 체험을 이야기한 붓다의 말씀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우리는 오직 그런 체험에 입각하여 정리해 놓은 사상 체계를 통해서 어느 정도 그것을 짐작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는 것이겠다.
그런 뜻에서 우선 이 ‘연기의 공식’을 취택한 것이고 이것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이것 있음에 말미암아 저것이 있고, 이것 생김에 말미암아 저것이 생긴다.”는 부분이다. 붓다는 일체 존재의 발생을 이 공식으로써 풀어 간 것임에 틀림없다. 이를테면 그 보리수 밑에 있었을 때, 붓다는 자기의 과제와 대결하면서 “무슨 까닭에 노사(老死)가 있는가? 무엇으로 말미암아 노사가 있는가?”하는 문제를 생각했다고 한다([상응부 경전]12:10). 이미 그런 사고방식이 연기의 원리에 입각한 것이려니와, 여기에서는 존재의 발생을 문제 삼고 있는 것이니 “말미암아(緣) 생긴다.”는 말을 줄여서 ‘연생(緣生)의 공식’이라 해도 좋을 줄로 생각한다.
또 하나의 부분은 그 후반의 것으로 다음 같은 말로 되어 있다. “이것 없음에 말미암아 저것이 없고, 이것 멸함에 말미암아 저것이 멸한다.”
붓다 자신이 이 공식을 사용한 보기를 살피건대, 역시 보리수 밑의 명상에서 “무엇 없는 까닭에 노사(老死)가 없는가? 무엇이 멸함으로 말미암아 노사가 멸하는가?”를 생각했다고 한다. 이것 또한 연기설에 의한 사고법이며, 여기서도 “말미암아(緣) 멸한다.”는 말을 줄여서 ‘연멸(緣滅)의 공식’이라고 해도 좋을 것으로 안다. 이리하여 이 전반과 후반을 합친다면 ‘연생, 연멸의 공식’이 되겠으나, 그것을 다시 줄여서 나는 ‘연기의 공식’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그리고 연기의 공식이란 결국 이런 공식에 의해 모든 존재의 발생과 소멸을 생각해 가는 일임에 틀림없다.
여기에서 다시 한걸음 나아가, 더 직접적으로 연기의 원리가 붓다에 의해 어떻게 설해졌는지를 생각할 때,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상응부 경전] 12:20 ‘연(緣)’이라는 제목의 경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더없이 귀중한 자료라고 생각된다. 왜냐 하면 연기란 무엇인지에 대해 붓다가 직접 정면에서 이야기한 경전은 아함부의 여러 경중에서도 이것밖에 없는 까닭이다.
그것은 붓다가 사바티(舍衛城)의 교외에 있는 제타(祇陀) 숲의 정사 즉 기원정사에 계시던 때의 일이거니와, 붓다는 자진해서 비구들에게 “오늘은 연생의 법에 대해 설하고자 한다.”고 말문을 떼었던 것이다. 비구들은 필시 긴장한 표정으로 붓다의 다음 말씀을 기다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때 붓다가 설하신 말씀을 경전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비구들아, 연기란 무엇인가? 비구들아, 생(生)이 있는 것으로 말미암아 노사(老死)가 있느니라. 이 사실은 내가 세상에 나오든 안 나오든 법으로서 확정되어 있는 바이다. 그것은 상의성(相依性)이다.
나는 이를 깨닫고 이를 이해하였다. 이를 깨닫고 이를 이해하였기에 이를 가르치고, 선포하고, 설명하고, 나타내고, 명백히 하여, ‘너희는 마땅히 보라.’고 말하는 것이니라.”
이 설명 속에는 세 가지 중요한 사항이 포함되어 있다. 그 하나는 연기의 성격에 대한 언급이다. 그것은 계시도 아니고 영감도 아니며, 더구나 붓다가 발명한 도리일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붓다의 존재 여부와는 관계없이 예로부터 이제까지 엄연히 정해져 있는 법칙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이 원리가 본래 존재 사실 자체임을 말하는 것이겠다. 그런 뜻을 다른 곳에서 붓다는 ‘오래 된 기(古道)’에 비유해서 그것이 원래부터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씀한 적도 있다.([상응부 경전] 12:65 성읍)
그러면 그것에 대해서 붓다는 어떤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이 둘째 사항인바, 붓다는 그것을 깨닫고 그것을 이해함으로써 가르치고, 선포하고, 설명하는 구실을 맡고 있는 데 지나지 않는다고 되어 있다. ‘오래 된길’의 비유를 가지고 말한다면 붓다는 다만 그 오래 된 길을 발견하여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그 길을 정비하여서 사람들로 하여금 가게 할 뿐이라는 뜻이 될 것이다.
그리고 셋째 것은 이 원리의 구조에 관한 사항이다. 이것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알고 싶은 당면 문제이거니와, 이에 대해 두 군데에서 언급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 하나는 “생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노사가 있다.”는 구절이다. 이는 연기설의 구체적인 보기라고 해도 좋겠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것은 상의성”이라고 한 구절이다. 극히 짧은 말이기는 하나, 그것이야말로 이 원리의 구조를 표현한 소중한 자료라고 하지 않을 수 없겠다.
‘연기’라는 말이 “말미암아 일어난다.”는 뜻임은 이미 언급했다. 이것을 팔리 어의 원어에서 따져 보아도 역시 Paticcasamuppada, 즉 ‘조건에 말미암은 발생’이라는 뜻이 된다. 일체의 존재는 모두가 그럴 만한 조건이 있어서 생겨났다는 것, 홀연히 또는 우연히 또는 조건 없이 존재하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 이것이 연기 사상의 내용이다. 또 그것을 뒤집어서 말한다면 일체의 존재는 그것을 성립시킨 조건이 없어질 때 그 존재 또한 없어져 버린다는 것, 따라서 독립, 영원하여 불변하는 것이란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 이것이 연기 사상이다. 그것을 하나의 원리로 추상화 시킨다면 ‘조건에 의한 발생’이요, 그것을 약간 현대식으로 말하면 ‘관계성’이 될 것이며, 과거의 불교인들은 흔히 이것을 ‘인과성’이라고 했거니와, 이제 붓다는 그것을 ‘상의성’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말했듯이 고대인 중에는 그런 추상적인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붓다의 제자들도 그 예외는 아니었던지, 한 경전([상응부 경전] 12:67 노속)에 의하면 코티카라는 제자도 그것이 아무리 해도 이해되지 않아서 친구인 사리푸타에게 물은 적이 있다고 한다.
“사라푸타여, 그것은 대체 어떻게 이해하여야 되겠는가?”
그것에 대답하면서 사리푸타는 한 비유를 들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친구여, 이를테면 여기에 갈대 단이 있다고 하자. 그 갈대 단은 서로 의지하고 있을 때는 서 있을 수가 있다. 그것과 같이 이것이 있음으로써 그것이 있는 것이며, 그것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두 단의 갈대에서 어느 하나를 치운다면 다른 갈대단도 역시 넘어져야 할 것이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이것이 없으면 그 것도 없는 것이며, 그것이 없고 보면 이것 또한 있지 못하는 것이다.”
현대인은 그들보다 훨씬 추상적인 이해에 뛰어나다고 보아야겠으나, 그래도 연기의 원리가 잘 이해되지 않는 분이 있다면 이 비유를 곰곰이 생각해 주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