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과 설날, 기도로 날마다 새롭게
불자 여러분!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시지요. 네, 그렇습니다.
오늘은 입춘입니다.
어제는 우리 고유의 명절인 설날입니다.
입춘은 일년 24절기의 첫 번째로 맞는 절기입니다.
새봄의 문턱인 입춘을 한 해의 시작으로 한 것은, 겨우내 추워 움츠러들었던 몸과 마음을 털고 이르기는 하지만 희망의 새봄을 맞으려는 설레는 기대감에서일 것입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듯이, 시작과 출발의 시점은 중요한 것입니다.
새해 첫 날을 ‘설’이라 하여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듯 인생에서 ‘처음’이 갖는 의미는 매우 큽니다.
초하루, 첫사랑, 첫국밥, 첫손님이라는 말이 풍기는 의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 민족은 출발과 시작의 자리를 소중히 여겨, 이를 맞는 태도는 마치 기도하는 마음인 양 경건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첫 정월을 맞아 전국의 모든 절에서는 정초 산림 기도를 봉행하여 한 해의 시작과 출발을 의미 있게 하여주는 것입니다.
‘산(山)’같은 죄업을 소멸하고 ‘숲(林)’같은 공덕을 쌓아 간다는 의미에서 ‘산림(山林)’ 기도라고 합니다.
우리는 보통 음력 정월 초하루를 새해로 생각하고 있는데 엄밀히 말해서는 입춘부터 새해로 보아야 합니다.
입춘 전날이 절분(節分)인데 이것은 절기의 마지막이란 뜻으로 이날 밤을 해넘이라고 부르며 콩을 방이나 문에 뿌려서 마귀를 쫓고 새해를 맞는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 불자들은 입춘을 맞아 어떤 마음을 갖고 기도해야 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1.첫째로 입춘은 ‘소박한 희망’을 나타내는 날입니다.
입춘에는 도시나 시골 할 것 없이 가정에서 대문, 기둥, 대들보, 천장 등에 좋은 뜻의 글귀를 써서 붙입니다.
이것을 입춘첩(立春帖) 또는 춘축(春祝) 이라고 합니다.
그 내용은 주로 나라의 발전과 백성의 안락함을 빌고 부모의 무병장수와 자손의 번영, 재물과 복락이 집안 가득하여 입춘 날로부터 크게 길하기를 바라는 소박한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의 글귀들을 글씨를 쓸 줄 아는 사람은 손수 쓰고, 모르는 사람은 남에게 부탁해서 써 붙이기도 합니다.
다만 상중에 있는 집에서는 이를 시행하지 않습니다.
사실 입춘은 단순히 음력의 한 절기로서가 아니라 우리들의 일상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입춘은 고달픈 일상사를 살아가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보다 나은 내일을 기약하는 희망의 날이요. 알곡을 생산하기 위해 일 년의 농사일을 계획하는 날이며 현실에 찌들린 일상사를 훌훌 털어 버리고 마음으로나마 풍요로움을 갈구해 보는 넉넉한 날일 것입니다.
새해 새봄 새 출발을 부처님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은 불자로서 당연한 자세라 하겠습니다.
더구나 묵은 먼지를 훌훌 털어내고 새로운 봄기운을 단장하는 의식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입춘의 기도이며 불공입니다.
여기에 종교인이 아닌 일반인도 소망의 성취를 위해 춘첩을 써 붙이는데 종교의 세계에서 그런 풍성한 ‘꺼리’가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입춘의 ‘부작(符作)’ 입니다.
민중의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소망을 종교적으로 담아내어 그들의 욕구에 부응하여 나타난 것이지요. 불경의 말씀과 중생의 소망을 적은 부작, 부리부리한 눈과 날카로운 부리를 가진 매의 머리가 3개나 되는 매 부작도 있습니다.
중생의 소망을 담은 부작을 정성껏 준비하여 기도와 불공을 올리고 집에 붙이면 어찌 호법 성중의 가호가 없겠습니까. 그러나 입춘이 진정한 불자의 재일(齋日)로 자리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개인적인 기복의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 주위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따뜻한 새봄을 맞을 수 있도록 보살다운 큰 마음을 내어야 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불자답게 입춘을 맞이하려면 불공 기도와 함께 어려운 이웃들과 ‘모두 함께 나누는’ ‘회향’을 실천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부작과 함께 보이지 않는 마음의 부작은 이러한 회향의 적극적인 실천으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2.둘째는 더욱 깊은 신심을 갖는 생활을 서원하는 날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진정으로 참된 기도를 하고 싶으시다면 크나큰 원력을 세우셔야 합니다.
가정경제나 사회경제를 꾸려감에 있어서도 설계를 하고 어떤 목적을 설정한 뒤 그 목표를 향해 매진하게 마련입니다.
하물며 자기자신을 완성하고 불국토를 지향하고 나아가서는 인류의 밝은 미래를 꿈꾸는 것이 기도일진대 어찌 원력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올 한해를 기도하는 해, 크나큰 원력을 세우고 실천해나가는 해로 실정해 놓고 힘있고 용기있게 가꾸어가야 할 것입니다.
모든 불보살님께서는 그분들 나름대로 원력을 세우셨습니다.
아미타부처님은 마흔 여덟 가지의 원력을 세우셨고, 약사여래는 열두 가지 원력을 세우셨으며, 관세음보살은 열 가지 원력과 여섯가지 지향적인 서원력을 세우셨고, 보현보살도 열 가지 원력을 세우셨습니다.
지장보살도 크나큰 원력을 세우셨지요. 불보살님께서는 이미 어느 정도 완전한 단계에 이르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나름대로의 크나큰 원력을 세우시고 그를 실천하는 데 게을리 하지 않으셨는데 우리 중생들이 어찌 아무런 서원력 없이 무슨 일로 성취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불보살님들께서 공통적으로 세우신 원력이 무엇인지 여러분은 이미 알고 계시겠지요. 그것은 다름 아닌 사홍서원입니다.
즉 네 가지 크나큰 서원이지요. 가없는 중생을 다 건지겠다는 것, 다함없는 번뇌를 다 끊겠다는 것, 한량없는 법문을 다 배우겠다는 것, 위없는 불도를 다 이루겠다는 것입니다.
중생의 세계는 무변합니다.
인간만이 중생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수십만 종의 생명이 살고 있습니다.
지상에서 하늘에서 물 속에서 바다 속에서 땅 속에서 오물 속에서 숲 속에서 갖가지 생명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삶의 방식을 이용하여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사는 한 중생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한 중생들을 모두 다 제도하겠다고 하는 원력, 그것이 불보살님들께서 세우신 첫째 서원력입니다.
이제는 우리 스스로가 우리 불교를 책임지는 원력 보살이라는 각오를 가지고 더욱 더 깊은 믿음을 가지고 수행과 포교에 매진해야 하겠습니다.
3.셋째는 보시, 회향하는 생활을 시작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지난 일들을 너무도 쉽게 잊어버리고 삽니다.
우리 삶을 위협하였던 여러 사건들을 너무도 쉽게 잊어버리고 삽니다.
작년보다도 그렇게 좋아진 것도 없는데, 모두 작년의 일들을 잊어 버리고 현 상황도 망각한 채 끝없는 향락과 과소비의 길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안전불감증에 의한 지난날의 악몽들이 아직도 우리 주위를 맴돌고 있는데, 눈앞의 이익 자신만의 이익 때문에 아직도 그렇게 많은 이들을 죽음의 길목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그 밑바닥에는 인간성을 상실한 재물에 대한 노예 근성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재물이란 덧없는 것입니다.
돌고 도는 것이 돈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날 현실을 보면 하염없이 돈을 모아 숨겨 두고서 베풀 마음을 내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 때문에 목숨마저 잃는 경우도 있습니다.
항상 자신의 이익만을 탐하며 어떻게 살아갈까 항상 걱정함으로써, 심지어는 처자식으로 하여금 눈을 흘기게 하고 형제들로 하여금 담 안에서 싸우게 합니다.
그리고 권속들은 서로 으르렁거리고 벗들은 멀리 떠나가게 됩니다.
바로 돈(재물)을 돌게 하지 않고 자신의 울타리에만 두고자 하는 인색한 마음이, 끊임없이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욕심이 그 근본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인색한 마음과 욕심으로 인하여 베푸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자신의 부를 더욱 키워 나갑니다.
즉, 인간의 착한 본성을 어기고 이웃과 함께 하려는 마음을 막으며, 이로인해 걱정 근심 등 번뇌만 일으키는 것은 바로 인색한 마음과 욕심 때문입니다.
이러한 인색한 마음과 욕심은 남에게 베풂으로써 다스려 나가야 합니다.
욕된 것을 참아 분심을 이기고 착함으로써 악을 이겨라 남에게 베풀어 인색을 이기고 지극한 정성으로 거짓을 이겨라 부처님께서는 경전 여러 곳에서 ‘보시’에 대해 누누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보시가 모든 행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순서로 말하자면 6바라밀에서 보시바라밀이 첫째 덕목이며, 보시(布施), 애어(愛語), 이행(移行), 동사(同事)의 사섭법(四攝法) 가운데 첫째 덕목입니다.
‘나다’, ‘내 것이다’ 하는 생각과 그 생각에 의한 인색한 마음, 그 반대로 인색한 마음과 그 마음에 의한 ‘나다’, ‘내 것이다’ 하는 생각을 다스리는 것이, 바로 남에게 끊임없이 베푸는 보시행이 우선되기 때문입니다.
‘나’가 없고 ‘내 것’이 없는데 어떻게 ‘나’를 고집하겠으며, ‘내 것’을 고집하겠습니까? 이것이 세상을 올바르게 보는 눈입니다.
끊임없이 보시행으로 인하여 ‘재물의 덧없음’을 관하고, ‘재물의 덧없음’을 관함으로 다시 끊임없는 보시행을 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모든 법이 항상 존재하지 않고, 모든 법에 나라는 영원한 실체가 없으며, 그러므로 모든 존재자는 괴로움이다’ 고 관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 급고독(給孤獨) 장자는 황금을 보시하면서 인색하지 않았고, 가난한 여인도 등(燈)을 마련하여 정성스럽게 불을 밝힘에 기쁜 마음으로 하였습니다.
한편 부처님도 전생에 보살로서 수행할 때 비둘기를 위해 허벅지의 살을 베어 매의 먹이를 대신하였고, 상대국의 바라문에게 훌륭한 흰 코끼리를 주저하지 않고 보시하였습니다.
이러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은 보살들이 어찌 재물을 쌓아 창고에 쌓아 두겠으며 자신과 가족과 국가의 안락을 위해 불의(不義)를 행하고 수행을 게을리 하겠습니까? 불자 여러분! 입춘과 설날을 맞아 여러분들이 깊이 생각하고 실천해야 할 네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모쪼록 일상생활 속에서 늘 마음속에 새겨 날마다 조금씩이라도 실천하는 불자가 되길 바랍니다.
한번 실천을 해보면 여러분의 마음은 여유로워질 것이며, 행복이란 것이 어떤 것인가를 알아갈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