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불교의 뿌리 – 보조 지눌스님 (6)

우리 선불교의 뿌리 / 보조 지눌스님 (6)

선교의 융회 (禪敎의 融會)  지눌은 선과 교의 대립과 갈등을 보면서 그 둘은 과연 화합할 수 없는가 하는 의문에 사로잡혔었다.

그는 바로  이 의문을 풀기 위하여 보문사에서  3년간이나 대장경을 열람하였다.

선승인 그가 3년간이나 대장경을 열람 하였다는 일은 그가 선교의 갈등 해소를 위해 얼마나 진지하였는가를 짐작케 하는 일이다.

 그는 드디어 <화엄경>을 통하여 선교가 계합하는  구절을 발견하였다.

그때의 감격을 그는 “그 경책을 머리에 이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을 흘렸다”고 적고 있다.

그 후, 이통현의 <화엄론>을 읽으면서 더욱 선교가 하나라는 확신에 이르게 되어 드디어는 이렇게 말하였다.

   ”부처가 입으로 말한 것은 교요, 조사가 마음에 전한 것은   선이다.

  부처와 조사의 마음과 입은 필연 서로 어긋나지 않는   것인데, 어찌  그 근원을 궁구하지 않고 각기 제가  익힌  데에  편안히  안주하여 망령되이 논쟁함으로써 헛되이 세월을 보내겠는가?”  선은 부처의 마음(佛心)이요   교는  부처의 말씀(佛語)이다.

   마음과  말이  분리될 수 없듯이,  선과 교가  둘일  수 없다.

이것이 지눌의 선교융회정신의  기본이다.

그가 돈오점수를 강조한 것도 선교를 하나로 융화하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4) 사상의 성격과 의의 지금까지 살펴본 지눌사상에 나타나는 특성은 어떠한 것이며 그 의의는 어떠한 것일까. 먼저 그의 사상 전반에 흐르는 두드러진 성격은 묘합(妙合)과 회통(會通)을 기본으로 하는 원융한 것이다.

이러한 성격은 그의 돈오점수,  정혜쌍수, 간화선사상,   선교융회의 사상에 그대로  나타난다.

지눌에  있어서 깨침과 닦음은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깨침(悟)을 통한 닦음(修), 닦음을  게을리하지  않는 깨침의 체계이다.

또 이는 悟를 강조하는  돈문(頓門)과, 수(修)를 강조하는 점문(漸門)의 회통을 말하기도 한다.

   중국선에서  우리는 깨침과 닦음, 돈(頓)과 점(漸)이 분리, 강조된 느낌을 버릴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지눌에 있어서 정과 혜, 그리고 선과 교는 항상 묘한  조화를 잃지 않는다.

그는 인교오심(因敎悟心)의 길과 함께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하는 경재(徑截)의 길 또한 포용하였다.

치우치지 않는 묘합회통(妙合會通)의 정신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듣는 이의 능력과 소질에 따라 각기 다른 길과 가르침을 펴고 있는 이른바 응기설법(應機說法)의 원융한 방편 을 그의 사상 전반에서 볼 수 있으니, 이 또한 지눌사상의 한 특성이라 하겠다.

   이러한 지눌사상의 사상사적  의의는 어떠한 것일까?    첫째, 한국선의 탈 중국적인 전통의 확립이다.

지눌 이전의 선이  중국선의 연장, 혹은  강한  영향 아래   있었다면, 지눌에  이르러 비로소 선과 교, 깨침과 닦음, 돈과 점을 하나로 보는 회통적 선의 전통이 이 땅에  수립된 것이다.

이러한 지눌의 사상적 전통은 오늘의 한국불교에도 면면히 전승되고 있다.

이는 외래사상의 주체적이고도 창의적인 수용의 한 훌륭한 예이다.

외래문화의 무분별한 수용으로 가치관이 크게 흔들리고  있는  우리의 실정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지눌의 사상에서 외래문화 수용의 창의적 자세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무엇보다도  우리는 지눌사상에서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에  대한  철저한 규명을 볼 수 있다.

깨침과 닦음을 통하여 인간의  본래적인 자기의 모습에 눈뜰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지혜와 자비의 구현자가 될 수  있다는 움직일  수 없는 확신을 그의 사상에서 볼 수 있다.

 그가 그토록 강조하였던 깨침과 닦음이란 바로 우리가 우 리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 우리답게 살기 위한 과정인 것이다.

이는 자기회복(自己回復), 자기형성(自己形成)의 가장 직접적인 메시지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자기상실의  깊은 늪에서 허덕이는 현대인에게 이보다 더 절실한 생명의 원음이 없겠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눌과 같은 인류의 영원한 스승이 이 땅에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알아야 할 것이다.

  ***한국 근대사의 거목 효봉스님은 지눌스님에 대한 존경과 애정으로 스스로 학눌(學訥)이시기를 자칭하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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