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불교의 뿌리 – 보조 지눌스님 (2)  

우리 선불교의 뿌리 / 보조 지눌스님 <2>  

 (2) 求道와 敎化의 삶  사람의 삶이 어떠하였는가는 그 사람의 죽음의 장면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한다.

죽음이란 삶의 총결산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죽음은 그들 삶의 질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불타와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그러했고, 예수의 마지막이 또한 그랬다.

보조국사 지눌의 생의 마지막 장면 또한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았는가를 잘 보여준다.

불일보조국사비명<佛日普照國師碑銘>에 의하면, 그는 타계하던 날 새벽 목욕 재계하고 법당에 올라가 향을 사르고 큰 북을 쳐 송광사내 대중을 법당에 운집시켰다.

   그리고는 육환장을 들고 법상에 올라 제자들과 일문일답으로 자상하게 진리에 대한 대담을 계속하였다.

마지막으로 한 제자가 “옛날에는 유마거사가 병을 보이었고 오늘은 스님께서 병을 보이시니 같습니까, 다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같은가 다른가 하는 질문은 선가에서 진리를 시험해 보는 질문이다.

임종이 가까운 스승께 이렇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것은 오직 진리의 세계 에서만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임종이 가까운 스승께 이렇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것은 오직 진리의 세계에서만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여기에 대하여 지눌은 육환장을 높이 들어 법상을 두어 번 내리친 다음 “일체의 모든 진리가 이 가운데 있느니라”하고는 법상에 앉은 채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이때가 1210년 3월 27일, 그의 나이 53세였다.

그이 생의 마지막 장면은 최후의 순간까지 제자들과 진리에 대한 가르침으로 일관한 불타의 入滅을 연상케 한다.

그는 진리 속에 살다가 진리 속에 간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다.

그의 생애는 41세 때(1198)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에서의 깨침을 중심으로 그 이전과 이후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이전의 생애가  고려불교의 타락상에 대한 깊은 인식과 그를 바로잡으려는 정열이 깨침(覺)을 향한 줄기찬 정진으로 승화된 기간이었다면, 깨침 이후의 삶은 모든사람을 위하여 정법을 펼친 자비의 실천 기간이었다.

   전기에 의하면 국사의 휘는 知訥이며 자호는 牧牛子였다.

  황해도 서응군에서 태어났고 속성은 鄭씨로 국학의 學正인 光遇의 아들이다.

佛日普照國師는 입멸 후 희종으로부터 받은 시호이다.

그는 어려서 입산하여 25세에 僧選에 합격하였다.

  당시 승선은 승려의 과거 제도로 그의 합격은 출세의 관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승선에 합격한 젊은 지눌은 생의 일대전환을 결심하기에 이른다.

당시 서울인 개경을 떠나 남하하여 깨침을 향한 정진에 몰두한다.

전남 창평 청원사에서 그의 일생에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六祖壇經>을 읽다가 깊은 종교적 체험을 한 것이다.

이 체험은 지눌의 구도열을 더욱 굳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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