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수행 – 육바라밀
5. 육바라밀 불교는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라는 두 개의 바퀴로 굴러가는 마차에 비유할 수 있다.
그 최종 목적지는 〈오분향 예불문〉의 맨 마지막 구절에서 보이듯이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동시에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그러나 그 가르침이 너무나 깊고 넓어 이제 막 불교에 입문한 사람들은 무엇을 어떻게 따르고 믿어야 할지 혼란스러울 때가 많다.
팔만 사천의 경전들과 많은 계율들 그리고 그에 비례하는 경전에 대한 주석서들과 많은 불교관련 서적들은 부처님 말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혼란을 가중시키는 면도 없지 않다.
따라서 만일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고 쉽게 따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무엇일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이와 같은 의문에 대한 답이 여기에서 공부할 육바라밀이다.
육바라밀이란 보살이 부처님이 될 수 있는 여섯 가지 실천 덕목으로 불교의 핵심인 지혜와 자비를 골고루 갖추고 있다.
또한 석가모니 부처님이 인간 세계에 오기 전에 도솔천에서 보살로 계셨는데 이 육바라밀에 의지하여 수행을 하여 부처님이 되셨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여섯 가지의 바라밀은 생사윤회의 바다를 건너 깨달음의 세계로 가기 위한 뗏목과 같은 것이다.
한편 우리에게 너무나 친밀한 대지 문수 사리보살, 대행 보현보살, 대비 관세음보살, 대원본존 지장보살 등의 보살들은 자기만의 깨달음을 위해 정진하는 아라한과는 달리 자신의 깨달음과 중생 제도를 위한 수행을 구분하지 않는, 즉 이 여섯 가지 바라밀에 의지해서 정진하여 그 수행의 단계가 이미 부처님이 될 수 있을 만큼 높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중생 제도를 위해 계속해서 보살로 남고자 서원을 세우신 분들이다.
또한 모든 중생들은 부처님이 될 수 있는 불성(佛性), 즉 본래 청정한 마음을 지니고 있기에 이 육바라밀에 의지해서 정진하면 누구나 다 보살이라 할 것이다.
육바라밀에서 여섯 가지란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를 말하고 바라밀이란 산스크리트어 파라미타(pa-ramita-)를 소리로 옮긴 말로 ‘완성’이라는 뜻과 ‘피안(彼岸 : 깨달음의 세계)에 이르게 한다’ 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보시 바라밀이란 보시의 완성 또는 보시를 통해 깨달음에 이른다는 의미이다.
1) 보시 바라밀 인색한 사람은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
어리석은 사람은 베풀 줄을 모른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은 베푸는 걸 좋아하나니. 그는 그 선행으로 인하여 보다 높은 세상에서 행복을 누리게 된다.
『법구경』 옛날 인도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 무엇이든지 베풀어주면 그 공덕으로 자신에게 좋은 과보가 돌아온다고 믿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과 수행자 등을 만나면 자신의 복을 짓게 해준다고 믿고 기쁜 마음으로 베풀어 주었다.
그런 까닭에 도움을 받는 사람을 복전(福田) 또는 복밭이라고 했다.
불교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을 보시라 한다.
부처님은 깨달음에 이르신 후 고통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모든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이 땅에 머무르셨다.
부처님께서 보이신 연민과 사랑을 본받아 다른 사람들에게 항상 연민과 사랑의 마음인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 보시이다.
보시에는 재물을 베풀어 주는 재시(財施), 두려움을 없애 주는 무외시(無畏施),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해주는 법시(法施)가 있다.
자기 것을 다른 이에게 주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소유에 대한 강한 집착과 욕심으로부터 벗어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보시는 자신의 것을 남에게 기쁜 마음으로 베풀어 주는 것이다.
보시는 우리의 집착과 그로 인해 생긴 모든 번뇌를 없애 주는 길이기도 하다.
탐욕을 버리는 가장 좋은 길은 첫째는 지혜의 눈을 뜨는 것이요, 둘째는 행동으로 나의 것을 남에게 베푸는 마음이라 한다.
보시를 바라는 사람이 있음을 보고 나서 주는 것은 보시라고는 하지만 바라밀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만약 보시를 바라는 사람이 보이지 않아도 자진해서 베풀 때는 이를 보시바라밀이라고 부른다.
만약 이따금 하는 보시라면 이를 보시라고는 해도 바라밀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언제나 보시하는 경우, 이를 보시바라밀이라 부른다.
만일 남에게 주고 나서 뉘우침이 생긴다면 이를 보시라고는 해도 바라밀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주고도 뉘우치는 마음이 없을 때 이를 보시바라밀이라고 부른다.
궁극의 깨달음을 위해 수도하는 사람은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주고받는 물건이 여기에 있다고 보지 않는다.
오직 대승의 궁극적 깨달음인 영원의 법을 위해 보시하고, 세상에 삶을 받은 모든 자에게 혜택을 주기 위해서 보시하고, 모든 사람의 번뇌를 끊어주기 위해 보시한다.
『대반열반경』 이처럼 보시를 행할 때에는 주는 이와 받는 이가 따로 있다는 생각을 내서는 안 된다.
물질의 소유에 따라 사람의 가치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은 불성을 지닌 평등한 존재이다.
부처님은 보시할 때 어떠한 보답을 바라서는 안 되며 심지어 자신이 남에게 보시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2) 지계 바라밀 부처님이 생존해 계실 때, 전생의 과보로 열반에 들기 전에 등창이 생겨 고생했다고 하는 내용이 전생담에 실려 있다.
이것은 깨달음에 이른 사람조차도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 과보를 받게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즉 알게 모르게 행하는 우리의 행동은 결국 다시 본인에게로 되돌아온다는 법칙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행위를 하더라도 조심하지 않으면 나중에 가서 후회하게 될 것이다.
동기나 과정이 어찌 되었든 결과만 좋으면 되지 않겠느냐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원인 없는 결과가 있을 수 없듯, 악한 행위에 좋은 결과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오늘의 행동은 내일의 모습을 결정한다.
부처님은 우리가 행한 모든 행동은 결국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온다고 하셨다.
한 방울의 물이 모여 큰 항아리를 채우는 것과 같이, 우리가 ‘별거 아니겠지’라고 가볍게 생각하면서 저지른 악행이 결국 재앙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성인이 되면 자신의 행위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한다.
잠시라도 한눈을 팔게 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악행에 물든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좋은 행위는 쉽게 몸에 배이지 않지만, 나쁜 행위는 그렇지 못하다.
항상 자신의 마음과 말과 행동을 관찰하고 자신을 다스리는 데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열반경』에서 제자들에게 계를 스승삼아 열심히 정진하라고 하셨던 것이다.
이미 저질렀거나 아직 저지르지 않았거나를 막론하고 다른 사람의 결점은 일체 보지 말라. 이미 저질렀거나 아직 저지르지 않았거나를 막론하고 그대 자신의 잘못은 반드시 되돌아보라. 『숫타니파타』 3) 인욕 바라밀 불교를 흔히 수행의 종교라 한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참아가며 참사람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즉 참는다는 것은 탐내는 마음과 성내는 마음을 자제하는 것을 말하며, 탐내는 마음을 잘 참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지켜보는 것이 필요하고, 성내는 마음을 잘 참기 위해서는 자신을 화나게 하는 사물이나 조건 혹은 상대방을 잘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로 하여금 분한 마음이 솟아오르게 하는 상대방이 있을 때에는,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를 이해하거나, 혹은 그가 잘못된 지식으로 인해 그와 같이 행동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상대방을 이해하는 마음도 생기고 저절로 참을성이 생겨나기도 할 것이다.
마치 초보 운전자가 길과 교통체계를 알지 못해 방황하는 모습을 보고 경멸할 것이 아니라 자신도 그런 시절이 있었던 것을 떠올리며 살며시 웃어넘길 수 있는 여유와 이해하는 참을성을 길러야 하겠다.
4) 정진 바라밀 과거의 버릇이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가를 보여주는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이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바르게 실천하는 삶을 살려고 해도 과거의 탐욕에 길들여진 버릇을 하루 아침에 털어버리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몸과 말과 마음의 수행이 어느 정도 되는가 싶다가도 금방 그것을 흔들고 허물어 버리는 삼독심이 솟구치곤 한다.
그러므로 보다 굳건한 마음으로 생활하면서 과거의 습관을 바꾸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투철하게 깨달음을 이루어 다시는 어제의 생활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커다란 서원을 세우고 그 길을 용감하게 가는 일이 중요하다.
반복하여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그보다 더 끈질기게 다시 떨치고 일어나는 용맹한 정진심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깨달음을 이루고 못 이루는 것도 정진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행위의 결과를 미리 예측해 보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결과에 어떤 과보를 받을지를 안다면 정진에 많은 장애를 극복하게 될 것이다.
더욱 열심히 깨달음의 길을 향해 정진해야만 어제와 다른 내일을 맞이할 수 있다.
5) 선정 바라밀 선정(禪定)은 참선 수행을 말한다.
중생의 마음은 본래 부처님의 마음과 같이 청정한 것이나 탐욕과 혐오 그리고 어리석음으로 인한 번뇌에 의해 그 참된 성품이 가려져 있고 그 청정한 마음은 말과 글로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 경전과 같은 간접적 수단을 통해서는 결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참선 수행을 통하여 그 본래의 마음을 직접 살펴 번뇌를 제거하여 청정한 마음이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은 명상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참선과 달리 명상은 오직 자신의 몸의 건강함과 마음의 자유만을 추구하고 철저한 자기 자신에 대한 내부적 반성과 성찰은 무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의지하여 자신을 보지 않기에 현재의 자신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 하는 원인은 무시하고 현재의 자신이 보다 자유로워지는 것에만 초점을 맞춘다.
나아가서 어떤 사람이 명상을 통해 비록 마음의 자유를 얻어 성자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깨달은 자유에 대한 집착만은 버리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참선 수행 방법 중에서 가장 일반적인 것이 좌선(坐禪)이다.
좌선이란 몸을 깨끗이 하고 조용한 곳에 앉아서 보는 것, 냄새 맡는 것, 듣는 것, 맛보는 것, 신체의 접촉 그리고 마음의 잡념 등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모든 것에서 본래의 마음을 지키는 것이다.
이러한 좌선을 통해서 최종적으로는 삼매(三昧)의 경지에 들어가는데 삼매란 말로는 정확하게 그 뜻을 서술할 수 없어 다음과 같은 추상적인 표현으로만 짐작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조금도 차별이 없이 마음을 평등하게 지닌다.
둘째는 마음을 하나의 본래 자리에 머물게 한다.
셋째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넷째는 마음이 조화롭다.
다섯째는 마음의 자세나 생각이 항시 바른 곳에 머문다.
여섯째는 매사에 구분 짓고 옮고 그름을 따지는 마음을 쉬게 하고 우리의 본래 청정한 그 마음에 집중한다.
마지막으로는 청정하고 영원한 깨달음의 기쁨에 안주한다.
이와 같이 선정은 곧 부처님이 보리수나무 아래서 깨달음을 얻은 방법으로 특히 불교의 수행 방법 중에서 스님들과 재가 불자들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실천 덕목이다.
6) 반야 바라밀 반야(般若)라는 말은 불교 신도가 아니라도 한번 쯤은 들어 본 적이 있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불교 용어이다.
부처님께 예불을 드릴 때 항상 봉송하는 『반야심경』의 반야를 말하는데, 이 말은 산스크리크어 프라즈나(prajn~a-)를 소리로 옮긴 것으로 흔히 지혜라고 번역하나 세상을 사는 데 필요한 분별의 지혜를 넘어선 분별이 없는 깨달음의 지혜를 말한다.
『반야심경』은 이 깨달음의 지혜, 즉 반야 바라밀에 관한 내용으로 그 핵심은 깨달은 자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것들은 그 어떤 차별도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의 팔만 사천 법문을 반야라는 한 마디로 표현하기도 한다.
또한 반야바라밀은 보시, 인욕, 지계, 정진, 선정의 다섯 바리밀의 근본이 되는 바라밀인 동시에 이 다섯 바라밀의 실천을 통해서만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지혜의 완성이기도 하다.
즉 반야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보시를 하며 스스로 계를 지키고 남과 나의 구별에서 오는 탐욕과 분노를 인내하고 정진과 참선 수행을 한다면 그것이 곧 중생 제도를 위한 보살의 대자대비를 실천하는 것인 동시에 그 자체가 스스로 반야의 지혜를 구하는 길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반야바라밀은 『반야심경』의 첫머리에 관자재보살이 반야 바라밀을 실천할 때 세상의 본질이 공임을 꿰뚫고 괴로움과 재앙으로 가득한 중생의 삶을 구한다는 것처럼 지혜와 자비의 실천의 완성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육바라밀은 사실 각 항목들이 매우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결코 하나씩 떼어내어서는 생각도 실천도 할 수 없다.
마치 자동차가 수천 개의 부품으로 이루어져 각 부품들이 조화롭게 그 역할을 잘 할 때만이 잘 달릴 수 있듯이 육바라밀 역시 함께 실천될 때 비로소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육바라밀이라는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 즉 보살은 바로 우리들 자신이라는 사실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