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감에서 벗어나기
-법상스님-
우린 누구나 이따금씩 고독이나 허무, 허탈감을 느끼곤 합니다.
세상살이가 지독히 괴로워서도 아니고, 똑 부러지게 허무할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우린 이따금씩 알 수 없는 허무감과 고독에 빠져듭니다.
확연하게 붙잡을 만한 행복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무언가 심연에 큰 설레임을 가져올 이벤트를 꿈꾸는 것도 아니고, 살다보니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의 진부감에 사로잡혀 이따금씩 내가 지금 무얼하며 살고 있는지, 내가 가고 있는 곳은 어디인지, 딱히 잡히질 않는 경우에도 여지없이 그런 해답 없는 허무감은 우릴 덮치곤 합니다.
누구나 그런 고독감은 있게 마련입니다.
누구나 인생의 그 어느 때에 지독한 허무감과 한바탕 싸움이라도 벌여야 할 때가 있나 봅니다.
특히나 요즘같이 싸늘해지는 가을이면 더욱 마음을 휘젖고 다니는 고독감에 많은 이들이 허탈의 늪 속에 빠져들곤 하는 것을 봅니다.
알 수 없는 허무감에서 빠져 나오려고 일기며 편지도 써 보고 어디론가 여행도 떠나 보고 친구들과 만나 수다도 떨어보고 고독을 안주삼아 한 잔 거하게 술도 마셔보지만, 잠시의 발버둥은 오히려 더 큰 고독으로 나를 몰아갈 뿐 그 속에서 해답을 찾기란 참으로 어렵다는 이치만을 더하고 맙니다.
저 또한 그랬습니다.
아니 요즘도 이따금씩 밀려오는 고독감과 싸워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너와 나의 문제가 아니며 지금의 우리만이 가진 문제가 아닐 터입니다.
인류가 가진 공통적인 부분일 것이란 거창한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런 알 수 없는 고독감과 허무감은 우리 내면의 아주 깊은 곳에서부터 이끌어져 나옵니다.
저 밑바탕에 나도 모르게 숨 쉬고 있는 인생 근본의 허무감이랄까요…
우리네 겉모습의 무상성(無常性), 혹은 공(空)한 이치라든가 일체개고(一切皆苦)라고 말씀하신 부처님의 정견(正見)과 같은 이를테면 그런 존재 근본의 괴로움 같은 것들 말입니다.
이를테면 ‘태어난 사람은 언젠가 꼭 죽어야만 한다’든가, ‘이 세상에 항상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이치, ‘고정되게 나라고 할 만 한 것이 없다’, ‘욕망을 추구하며 살지만 욕망은 끝이 없다’ 라고 하는 등의 일체 존재의 겉모양이 가지고 있는 근본의 공성(空性), 이런 것들은 우리가 생각하건 하지 않건 간에 명상하고 진지하게 사유하건 하지 않건 간에 불교인이건 타종교인이건 간에 존재의 본성이기에 누구나의 밑바탕엔 깔려 있게 마련입니다.
바로 그런 모든 존재 근본의 허무성, 무상성, 공성등이 이따금씩 우리 현실의 가까운 부분까지 차올라 오게 되면 아무런 이유가 없이도 허무해 질 수 있고 고독에 휩싸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허무감이니 고독감에 빠진다는 것은 우린 누구나 본질적으로 수행자 일 수 밖에 없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추구할 방향이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사성제의 대진리와 맞닿아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그 옛날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한 청년이 얻고자 했던 괴로움의 소멸과 영원한 행복, 지고한 행복과도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꿈꾸어 오던 모든 것을 이루었을 때 지극한 행복을 맞볼 것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꿈꾸던 것을 모두 얻었을 때 오는 그 허탈감과 고독감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고 합니다.
박사학위가 꿈이던 한 젊은이가 너무도 고생하여 50이 넘어서야 겨우 학위를 받고는 얼마 안 되어 죽음을 맞이했다는 이야기는 많은 것을 생각게 합니다.
인생의 최종의 목적을 달성하고난 뒤에 오는 그 허무감은 자칫 인생의 목적 달성이라는 결과로 인해 실제 더 이상 갈 곳 없는 마음이 죽음으로 종결짓게 만들기도 합니다.
결론적으로 조금 극단적으로 말 한다면 ‘수행’만이 살 길입니다.
우리 인생 근본적인 목적은 수행이며, 우린 이 땅에 수행을 목적으로 태어났습니다.
돈을 벌려고 태어난 것도 아니요, 명예를, 지위를, 건강을, 여인을, 지식을 얻고자 태어난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 ‘수행’을 위해 태어난 삶이라는 사실을 바로 보아야 합니다.
알 수 없는 고독감이나 허무감이 몰아닥칠 때 우린 명상을 통해 그 고독이며 허무감을 바로 보아야 합니다.
정견(正見)할 수 있다면, 철견(哲見)할 수 있다면, 우리를 쩔쩔모르게 내몰아치는 그 허무감은 이미 허무감이 아닙니다.
‘허무’하다는 그 마음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명상을 핑계로 허무한 쪽으로 마음을 자꾸 몰아가서도 안 됩니다.
이 마음의 실체가 무엇인지, 어디에서 왔는지를 하나 하나 철저한 객관이 되어 명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알 수 없는 고독, 알 수 없는 허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는 아무리 하찮은 마음일지라도 그 모두는 결코 독립되어 일어나는 일이 없습니다.
반드시 원인과 조건, 상황을 동반하여 철저한 인과로써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인과에 빠지면 안됩니다.
인과를 철저히 관찰하여 얽매이지만 않으면 됩니다.
항상 그렇듯 상황이 우리를 괴롭힙니다.
괴로운 상황이 있어야 괴로운 마음이 일어나듯, 허무한 상황이 있을 때 허무한 마음이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나홀로 일어나는 고독감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첫째로 허무감, 고독감이란 그 마음을 가만히 관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고독 그 자체를 객관이 되어 지켜보는 것입니다.
고독이란 현상은 있을지언정 현상에 얽매이는 고독감은 철저히 배제해야 합니다.
고독감이란 마음에 빠지지 말고 고독이란 것을 하나의 현상으로 지켜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만 하나의 현상, 상황으로 있는 그대로 지켜보시면 됩니다.
둘째로 고독감이란 마음이 고개를 치켜든 그 상황을 연기법을 바탕으로 사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을이란 상황, 일이 끝난 저녁이란 상황, 싸늘한 바람이 불어온다는 상황, 상황 때문에 고독한 것은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대지가 생동하는 새해를 시작하는 봄이라는 상황, 개운하게 단잠을 자고 일어난 상쾌한 아침이란 상황, 포근하고 따뜻한 상황…
이런 상황에서도 똑같은 마음이 일어날까 하는 사유 말입니다.
보통 저녁 녁에 고독감에 시달리다가도 단잠을 자고 밝게 떠오르는 아침해를 바라보면 씻은 듯이 고독감을 떨쳐버릴 수 있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이런 두 가지 명상을 통해 내 안의 마음과 내 밖의 상황을 명확히 사유할 수 있다면, 이제 그 사유를 바탕으로 자기암시를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마음은 고정된 마음이 아니야.
상황이 바뀌면 따라서 바뀌는 마음이구나.
고정된 실체가 있는 마음이 아니구나.
또 다시 밝은 인연을 만나면 밝게 바뀔 마음이구나.
이렇게 말입니다.
실제로 저 또한 이따금씩 술렁이는 마음으로 고생을 할 때면 여지없이 그렇게 명상을 하게 되며 그런 진지한 사유는 술렁이는 마음을 다잡는데 크나큰 도움이 됨을 경험했습니다.
상황에 대한 끊임없는 자기암시는 상황에 얽매이는 자신을 여유있게 바라보는 자신으로 바꾸어 줍니다.
끊임없이 마음에 대해, 또 상황에 대해 명상할 수 있다면 고정된 실체 없이 상황따라 올라오는 그 어떤 마음이라도 얽매이지 않고 초월할 수 있는 집중의 힘, 사유의 힘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