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를 잘 파악하는 사람

문제를 잘 파악하는 사람

모든 경전은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로 시작하지만 부처님의 법문은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누군가가 질문을 하면 그에 대답하는 형식으로 설법이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질문을 하지 않으면 반드시 누군가가 알면서도 일부러 질문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부처님 혹은 장로들은 그 질문자의 의중을 꿰뚫고 그를 격려합니다.

“참으로 기특합니다.

그대는 지금 저 대중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질문을 하였습니다.

” 이따금 부처님 스스로 어떤 감흥에 젖어 법문을 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질문을 받고 그에 대답을 주는 식의 법문이 초기경전에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질문을 중요시하는 부처님의 자세는 반열반의 자리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반열반의 자리에 모인 대중들을 향해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느 수행자라도 부처님이나 가르침이나 승가나 실천도에 대해서 아주 작은 의혹이 있거든 지금 물어라. 행여 ‘스승께서 살아계셨을 때 질문드릴 것을…’이라며 뒤늦게 후회하지 말고 지금 물어라.”<앙굿따라 니까야> 그 어떤 질문이라도 좋으니 어서 물어보라며 세 번이나 거푸 권하십니다.

“물어보아라.” “물어보아라.” 때맞춰 말하고, 진실 말하고 가르침에 맞는 말을 하고… 최후의 자리에서조차 질문을 재촉하고 있는 모습은 세상을 살다 간 그 어떤 선지식에게서도 보기 드문 일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제자들을 일깨우려는 스승의 간절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제자들에게 질문을 유도하는 것은 그럼으로써 그들의 지적 능력을 계발함과 동시에 전혀 문제의식을 갖고 있지 않은 이들도 다른 사람의 질문과 대답을 통해 알고자 하는 욕구를 갖도록 동기를 심어주려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어떤 질문도 충분히 대답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담겨 있습니다.

부처님은 초기경전에서 질문에 대한 네 종류의 대답법을 여러 차례 설명하고 계십니다.

“어떤 질문에는 즉각적으로 대답해야 한다(應一向記問). 그리고 어떤 질문에는 질문의 화살을 되돌려 반문하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應反詰記問). 어떤 질문에는 답변을 하지 말고 질문을 젖혀두어야 한다(應捨置記問). 어떤 질문에는 그 질문 자체가 타당한지 그렇지 않은지 분석하는 것으로 답해야 한다(應分別記問).” 그러니 훌륭한 스승이란 사람들이 던지는 질문에 조금도 뜸들이지 않고 명쾌한 해답을 내놓기 보다는 질문에 대한 정확한 파악과 대응법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는 자라는 말입니다.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사람만이 “때맞춰 말하고, 진실을 말하고, 의미 있는 말을 하고, 가르침에 맞는 말을 하고, 계율에 맞는 말을 하고, 기억에 남을 만한 말을 하고, 알맞은 말을 하고, 이유가 분명한 말을 하고, 내용이 있는 말”을 할 것이요, 이렇게 대답할 줄 아는 사람만이 진실로 ‘슬기로운 장로’라 불릴 자격이 있다는 것이 부처님의 입장입니다.

<앙굿따라 니까야> 반면에 질문을 받고는 쓸데없는 말만 늘여놓으며 질문과 상관없이 자기 말만 하거나 혹은 ‘그런 무의미한 질문을 왜 품고 다니느냐’며 질문자에게 가차 없이 면박 주는 사람들도 종종 있습니다.

공부가 무르익지 않아서 체면 차리기에 급급한 어설픈 스승들이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백유경>의 현자도 딱 그런 사람입니다.

어린이 두 명이 강에서 놀다가 털 한 줌을 건져 올렸습니다.

한 아이가 말했습니다.

“이건 틀림없이 할아버지의 수염이야.” 그러자 다른 아이가 말했습니다.

“아냐, 이건 아주 덩치가 큰 곰의 털이야.” 두 아이는 서로 사람의 수염이니 곰 털이니 하며 한참 옥신각신하다가 근처에 살고 있는 현자에게 갔습니다.

“대체 누구 말이 맞나요? 판가름해주세요.” 두 아이는 현자의 대답을 기다리며 그의 입만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현자는 쌀과 깨 한 줌을 입에 넣고 씹다가 손바닥에 뱉더니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손바닥에 있는 것은 공작의 똥과 같다.

”(<백유경> 49번째 이야기) 아주 전형적인 동문서답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종교인들 중에는 그 대답 속에는 뭔가 모를 심오한 뜻이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심오’가 아니라 ‘엉뚱’인 줄 모르니 참 답답합니다.

[불교신문 2761호/ 10월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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