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성제
4성제(四聖諦, catu ariya sacca) Ⅰ. 붓다의 가르침은 모두 사성제로 포섭된다.
“도반들이여, 예를 들면 움직이는 모든 생명들의 발자국들은 모두 코끼리 발자국에 총섭되고 코끼리 발자국이야말로 그 크기로서 최상이라고 불리는 것과 같습니다.
도반들이여, 그와 같이 어떤 유익한 법[선법(善法)]이던 그것들은 모두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에 총섭됩니다.
무엇이 넷인가?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苦聖諦], 괴로움의 일어남(원인의 발생)의 성스러운 진리[苦集聖諦],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苦滅聖諦],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 닦음의 성스러운 진리[苦滅道聖諦] 입니다.
”『맛지마 니까야』 「코끼리 발자국 비유경(M28) §2」 붓다는 깨달은 분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초기불전에서는 크게 두 가지로 나타 난다.
하나는 사성제를 깨달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연기의 가르침을 통해서 무명 등의 연기의 구성요소 가 소멸한 것으로 나타난다.
“불교의 궁극적 행복인 열반을 실현하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초기불전에 나타나는 가르침을 ① 사성제의 관통을 통해서 ② 팔정도의 실현을 통해서 ③ 온, 처, 계의 무상.고.무아를 통찰하여 염오-이욕-소멸을 통 해서 ④ 12연기의 유전문. 환멸문을 통해서 등등으로 정리하여 보았다.
” 그런데 이들은 궁극적으로 사성 제로 귀결된다고 할 수 있다.
팔정도는 사성제의 네 번째인 도성제의 내용이다.
그러므로 팔정도는 사성제에 포함된다.
물론 팔정도 의 처음인 바른 견해(정견)의 내용은 사성제를 아는 것이다.
오온. 오취온은 사성제의 첫 번째인 고성제의 내용이다.
그러므로 온. 처. 계의 가르침은 사성제에 포함된다.
12연기의 유전문(流轉門)은 사성제의 고성 제와 집성제에 해당하고 환멸문(還滅門)은 사성제의 멸성제와 도성제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12연기의 유 전문과 환멸문은 사성제에 포함된다.
”『초기불교의 이해, 각묵스님. p93』 4성제란. 4가지 성스러운 진리란 뜻으로 ‘깨달음은 4성제를 꿰뚫고 관통하고 알고 보아서 실현 되는 것 으로 초기경[1]들은 강조하고 있다.
12연기의 무명은 4성제를 모르는 것이며 사성제란 다음과 같다.
고성제(苦聖諦, dukkha ariya sacca) :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 집성제(集聖諦, dukkha samudaya ariya sacca) :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 멸성제(滅聖諦 dukkha nirodha ariya sacca) :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 도성제(道聖諦, dukkha nirodha gāmini paṭipadā sacca) :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성스러운 진리. Ⅱ. 4성제란 불교는 염세주의가 아니다.
고성제는 일반적으로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로 번역되며, ‘삶이란 고통스럽고 괴로운 것일 뿐이다’라는 식으로 해석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올바른 해석이 아니다.
불교가 염세주의적인 사상으로 잘못 이해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한정되고 안이한 번역과 피상적인 해석 때문이다.
불교는 염세주의도 아니고 낙천주의도 아니다.
오히려 불교는 인생과 세계(시간과 공간)에 대한 지극히 현실주의적 종교라 할 수 있다.
불교는 사물을 객관적으로 있는 그대로 보게 한다.
붓다는 사람들을 하늘에 태어나 영생할 수 있다고 유혹하지 않으며, 허구적인 온갖 종류의 두려움이나 죄의식으로 사람들이 두려워하거나 고뇌하도록 하지 않는다.
붓다는 인간과 세계의 실상에 대하여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설명해 주며 완전한 자유와 평화, 그리고 적정(寂靜)과 행복을 얻는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
고성제의 문자적 고찰 고(苦)를 표현하는 빨리어인 dukkha가 고통. 고뇌. 슬픔. 비탄을 의미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붓다 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대표하는 진리로서의 dukkha라는 말은 더욱 깊은 철학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휠씬 넓은 뜻을 함축하고 있다.
Dukkha는 고통이라는 일상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더불어 현실에 대한 진단으로 불완전. 무상(無 常). 공(空) 등의 더 깊은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dukkha가 지닌 모든 뜻을 함축한 번역어를 찾기 어렵다.
그러므로 dukkha를 고난. 고통 등으로 안이 하게 번역하여 부정확하고 잘못된 인식을 유도하기보다는 번역하지 않은 채 그대로 ‘dukkha’로 사용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붓다는 괴로움에 대해 언급하였지만, 그렇다고 삶에 있어서 행복을 부인하지 않는다.
오히려 승. 속을 가리지 않고 여러 형태의 물질적. 정신적 행복을 인정하였다.
앙구따라니까야에서는 가정생활의 행복, 은둔의 행복, 애착의 행복, 이욕의 행복, 육체적 행복과 정신적 행복 등 여러 종류의 행복이 열거되어 있지만 이 모든 행복이 dukkha에 해당된다.
또한 명상의 실천으로 얻어지는 선정(禪定)도 dukkha에 포함된다.
붓다는 맛지마 니까야에서 선정의 정신적 행복을 찬양한 후에 그것들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되기 쉽다고 말했다.
여기서 dukkha는 일상적인 의미의 고(苦)가 아니라 ‘무상한 것은 무엇이든 괴롭다.
’라는 의미에서의 괴로움인 것이다.
Ⅲ. 사성제의 구체적 고찰 1. 괴로움(苦聖諦, dukkha-ariya-sacca): 4고팔고와 삼성(三性)으로 정리 1) 4고8고(四苦八苦)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이다.
태어남도 괴로움이다.
늙음도 괴로움이다.
병도 괴로움이다.
죽음도 괴로움이다.
싫어하는 [대상]들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다.
좋아하는 [대상]들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요컨대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五取蘊]들 자체가 괴로움이다”(상윳따 니까야 초전법륜 경(S56:11) §5) 일반적으로 사고팔고로 정의된다.
生老病死와 愛別離苦[2], 怨憎會苦[3], 求不得苦[4], 略 五陰盛苦(五聚蘊苦)[5]. 정리하면 생사문제가 된다.
출가는 생사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2) 삼성(三性) : 괴로움의 세 가지 성질 “도반 사리뿟따여, ‘괴로움, 괴로움’이라고 합니다.
도반이여, 도대체 어떤 것이 괴로움입니까?” “도반이여, 세 가지 괴로움의 성질[苦性, dukkhatā]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통스런 괴로움의 성질[苦苦性],[6] 형성된 괴로움의 성질[行苦性],[7]변화에 기인한 괴로움의 성질[壞苦性][8] 입니다.
도반이여, 이러한 세 가지 괴로움의 성질이 있습니다.
” – (괴로움 경(S38:14) §3 – 잠부카다까 유행승과 사리뿟따 존자의 대화) 고고성(苦苦性, dukkha-dukkhatā) 보편적인 괴로움이나 고통으로 인정되는 모든 종류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 生. 老. 炳. 死. 愛別離苦. 怨憎會苦. 求不得苦. 五陰盛苦 즉 사고팔고로 정리된다.
괴고성(壞苦性, viparinnama-dukkhatā) 아무리 큰 행복이라도 끝내 변하기 때문에 괴로움이다.
삶에 있어서 행복한 느낌이나 조건 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그것은 조만간 변화한다.
그리고 변화 시에는 고통. 고난. 불행이 뒤 따른다.
이러한 변화가 괴고성이다.
행고성(行苦性, saṃkhāra-dukkhatā)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절대적 존재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원인과 조건에 의해 서 형성(조건지어진)된 것, 조합된 것이기 때문에 苦다.
붓다가 말하는 존재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물질적. 정신적 힘이나 에너지로의 결합일 뿐이다.
간단히 말해서 ‘五陰盛苦’이다.
붓다는 언제나 분명하게 고를 五蘊으로 정의했다.
변하지 않은 실체는 없다.
‘존재’. ‘개체’. ‘나’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오온의 결합을 일컫는 편의적인 명칭에 불과하다.
이것들은 모두 무상하여 끊임없이 변화한다.
「무상한 것은 무엇이든 괴롭다(dukkha).」 이는 「오온이 바로 고다」라는 붓다의 가르침의 참된 의미이다.
연속되는 두 순간은 동일하지 않다.
A와A는 서로 같지 않다.
그것은 순간적인 생성과 소멸의 흐름 속에 있다.
붓다는 라타팔라에게 「세상은 끝없는 흐름 속에 있으며 무상하다」고 말했다.
하나의 사물이 사라지면 그것은 인과의 연속에 따라 다음 사물이 나타날 조건이 된다.
그 속에서 불변의 실체는 없다.
영원한 자아. 개체. 나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상호의존적인 오온이 하나의 육체적. 정신적 기관으로서 서로 결합하여 함께 움직인다면’나’라는 관념이 얻어진다.
그러나 이것도 그릇된 관념이나 정신적 행위에 불과하다.
그것은 행온의 52가지 작용(52가지 마음부수) 중의 하나, 즉 자아의 관념일 뿐이다.
보통 ‘존재’라고 불리우는 ‘오온’은 行苦性 그 자체이다.
이 五蘊의 배후에서 苦를 경험하는 存在나 自我는 없다.
붓다고사의 말처럼 「단지 괴로움이 존재할 뿐 괴로와 하는 자는 발견되지 않는다.
행위는 있지만 행위자는 발견되지 않는다.
」운동의 배후에서 도사리고 앉아 스스로는 운동하지 않는 그런 것은 없다.
단지 운동만이 있을 뿐이다.
삶이 운동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삶 자체가 운동이다.
삶과 운동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달리 말하자면 생각의 배후에 있는 생각의 주체는 없다.
생각 자체가 생각의 주체이다.
생각이 없었다면 생각의 주체는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삶에는 그 시초가 있는가 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다.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살아 있는 존재의 흐름은 불가사의 한 것이다.
즉 무시무종(無始無終)이라 하셨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붓다는 말했다.
「오, 비구여. 이 윤회의 순환에는 볼 수 있는 끝이라고는 없다.
무명으로 덮여 있고 갈애(渴愛)의 족쇄에 묶여서 끊임없이 순환하는 존재의 첫 번째 시초는 인지될 수 없다.
」 그리고 삶의 윤회의 주요한 원인이 되는 무명(無明)에 대해 「無明의 첫 번째 시초는, 어떤 한계를 넘어서는 무명은 없다고 가정하는 방식으로는 인지될 수 없다」라고 말했다.
따라서 어떤 한계점을 넘어서서는 삶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바로 이와 같은 것이 고성제의 의미이다.
이 고성제를 명료하게 이해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붓다가 말했듯이 고를 본 자만이 고의 원인(集)과 고의 소멸(滅)과 고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미소 짓는 붓다.
삶이 고라고 해서 불교인들의 삶을 슬프게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진정한 불교인은 가장 행 복한 존재이다.
그에게는 어떤 두려움이나 근심도 없다.
그는 항상 고요하고 평온하며, 변화나 재난에 처해 서도 좌절하지 않거나 흥분하지 않는다.
그것은 불교인이라면 사물을 있는 그대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 다.
붓다는 결코 음울하거나 슬픈 사람이 아니었다.
붓다의 동시대인들은 붓다를 ‘언제나 미소 짓는 사람’ 이라고 묘사했다.
삶에는 고통이 있기 마련이지만 불교인이라면 그 때문에 우울해하거나 그에 대해 성내거나 못 견뎌 해서는 안 된다.
붓다의 가르침 중에 삶의 근본적인 해로운 법 중의 하나가 증오이다.
증오는 살아있는 존 재, 고통, 고통과 관계된 것에 대한 악의(惡意)라고 한다.
그것은 불행한 상태나 악행의 원인이 된다.
고통 은 못 견뎌 하거나 화낸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고통이 어떻게 발생했으며, 어떻게 제거할 수 있는가 을 이해하고 인내. 지성. 결단. 용기로써 그 괴로움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오온의 고찰 3) 오온이란 무엇인가? ① 色蘊 : 고형성(地), 유동성(水), 에너지(化), 운동성(風)이라는 사대(四大)인 근본물질과 파생물질로 5근[9] 5경[10]에 마음의 대상 영역인 법처(法處)에서 일어나는 관념. 개념. 생각(意)이 포함된다.
내부적. 외부적 모든 물질 영역은 이 색온에 포함된다.
② 수(受) : 여기에서는 물질적. 정신적 기관이 외부세계와 접촉하여 경험되는 고. 락. 불고불락의 느낌으로 그것에는 모두 여섯 가지 종류가 있는데 눈이 형상과. 귀가 소리와, 코가 냄새와, 혀가 맛과, 몸이 닿음과, 마음이 마음의 대상. 생각. 관념과 접촉하여 경험되는 감각이 그것이다.
여기서 마음이란 물질과 반대되는 정신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감각기관일 뿐이다.
그 마음은 다른 감각기관과 마찬가지로 통제되거나 계발될 수 있다.
눈과 마음의 기능적 차이는 눈이 색깔과 형상의 세계를 감지하는 반면 마음은 관념과 사고와 정신적 대상의 세계를 감지하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색깔을 들을 수는 없지만 볼 수는 있다.
소리는 보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다.
이처럼 눈. 귀. 코. 혀. 몸의 다섯 가지 물질적 감각 기관은 각각 형상. 소리. 냄새. 맛. 닿음의 세계만을 경험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세계 전체가 아니다.
그 일부만을 나타낸다.
관념 또한 세계의 일부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느껴질 수 없으며 눈. 코. 귀. 혀. 몸의 기능에 의해서만 인식될 수 있다.
그런데 관념이나 생각은 다섯 가지 물질적 감각기관에 의해서 경험된 세계와 무관하지 않다.
실제 그것들은 물질적 경험에 의존한다.
그래서 타고난 장님은 색깔에 대한 관념을 가질 수 없다.
세계의 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관념이나 생각은 육체적 경험에서 비롯되고 조건지어지며, 마음에 의해서 인식된다.
그래서 마음은 눈이나 귀와 같이 하나의 감각기관으로 간주된다.
상온(想蘊) 감각과 마찬가지로 인식도 여러 가지 기관이 외부 세계와 접촉하여 발생한다.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대상을 인식하는 것은 바로 이 상(想)이다.
행온(行蘊) 여기에는 선악과 같은 의도적 행위가 포함된다.
일반적으로 업(業)으로 알려져 있는 것은 바로 이것으로 하여 생겨난다.
업에 관해 붓다는 “비구여, 내가 업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의도이다.
의도가 있으면 身. 口. 意로 행동하게 된다.
”라고 규정했다.
의도는 정신의 작용이며 행위다.
의도는 마음이 선하거나 악하거나, 혹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행위를 하도록 기능한다.
감각이나 인식과 마찬가지로 의도도 여섯 가지의 내적 기관(六根)과 그에 상응하는 외부 세계의 여섯 가지 대상(六境)과 관련하여 여섯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감각이나 인식은 의도적 행위는 아니기 때문에 업보를 낳지 않는다.
업보를 낳는 것은 52가지 마음부수(心所)이며, 이 정신적 행위들이 行蘊을 구성하고 있다.
식온(識蘊) 의식은 여섯 가지 기관(六根, 눈. 귀. 코. 혀. 몸. 마음) 중 하나를 근거로,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여섯 가지의 외적 현상(六境, 형상. 소리. 냄새. 맛. 닿음. 관념) 중 하나를 대상으로 하는 반작용이다.
예를 들면 안식은 눈을 근거로 하고 형상을 대상으로 하는 의식이다.
心識은 마음을 근거로 하고 관념을 대상으로 하는 의식이다.
그래서 의식은 다른 기관들과 연관되어 있다.
受(감각). 想(인식). 行(의도)와 마찬가지로 의식도 여섯 가지의 내적 기관(六根)과 그에 상응하는 여섯 가지의 외적 대상(六境)과 관련된 여섯 가지 종류(六識)로 구성된다.
의식이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존재를 깨닫는 것이다.
예를 들면 눈이 푸른색과 접촉할 때 하나의 색깔이 눈앞에 있음을 깨닫는 것이 안식(眼識)의 기능이다.
이 단계에서는 어떤 인식도 없다.
푸른색을 분별해내는 것은 인식(想)이다.
안식이라는 말은 ‘봄’이라는 평범한 말의 의미와 동일한 관념을 나타내는 철학적 표현이다.
‘봄’이 곧 안식은 아니다.
이.비.설.신.의식도 다 마찬가지이다.
불교철학에 따르면 물질의 반대개념으로서 ‘자아’. ‘영혼’. ‘자기’로 간주될 수 있는 영원불멸의 정신은 없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또 의식이 물질과 반대되는 정신으로 간주되어서도 안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의식이 바로 사람이 사는 동안 영원한 실체로서 지속되는 일종의 자아나 영혼이라는 잘못된 이해가 초기불교에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띠라는 붓다의 제자는 세존이 “윤회하고 방황하는 것은 동일한 의식이다”라고 가르쳤다고 주장했다.
붓다는 그에게 의식이란 무엇이냐고 물었다.
사띠의 대답은 평범했다.
“그것은 표현하고, 느끼고, 여기저기서 선행과 악행의 결과를 경험하는 어떤 것입니다.
” 붓다는 제자를 꾸짖는다.
“이 어리석은 사람아, 내가 언제 그런 방식으로 가르쳤다고 누구에게서 들었는가? 내가 조건에 따라 의식이 발생한다고 여러가지 방식으로 설명하지 않았느냐? 조건이 없으면 의식도 일어나지 않느니라.” 그리고 붓다는 계속해서 의식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했다.
“의식은 발생조건에 따라 이름지어진다.
눈과 보이는 대상 때문에 발생하는 의식은 안식(眼識)이라고 한다.
귀와 소리 때문에 발생하는 의식은 이식(耳識)이라고 한다.
…마음과 마음의 대상(관념) 때문에 발생하는 의식은 심식(心識)이라고 한다.
” 이어서 붓다는 하나의 예를 들어 자세히 설명했다.
“불은 타는 물질에 따라 이름지어진다.
나무로 인한 불은 장작불이라 하며, 짚으로 인한 불은 짚불이라고 한다.
그와 같이 의식은 그 발생 조건에 따라 이름이 지어진다.
” 위대한 주석가 붓다고사(buddhaghosa)는 이에 대해 꼼꼼하게 설명하고 있다.
“나무 때문에 타는 불은 오직 나무가 공급될 때만 탄다.
나무가 더 이상 공급되지 않으면 불은 꺼지고 만다.
그것은 조건이 변화됐디 때문이다.
그러나 그 불은 다른 장작에 옮겨 붙어 장작불이 되지는 않는다.
그와 마찬가지로 눈과 보이는 형상 때문에 일어나는 의식(眼識)은 눈과 보이는 형상과 빛과 주의력 등이 있을 때만 감각기관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그 존건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 그 의식은 사라진다.
조건이 변화됐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의식(眼識)이 귀 등으로 옮겨가 이식(耳識) 등이 되지는 않는다.
” 붓다는 의식(識)이 色. 受. 想. 行. 識(물질. 감각. 인식. 정신적 행위)에 의존하며 그것들과 무관하게 존재할 수 없음을 명백하게 밝혔다.
붓다는 말했다.
“의식은 물질(色)을 그 수단으로(色手段), 그 대상으로(色所緣), 그 기반으로(色所依) 하여 존재한다.
그리고 의식은 기쁨을 추구하면서 성장하고 증가하며 발전한다.
또 의식은 감각을 그 수단으로 하여 존재하기도 한다 … 또는 인식을 그 수단으로 하여 존재하기도 하며 … 또는 정신적 행위를 그 수단으로, 그 대상으로, 그 기반으로 하여 존재하며, 기쁨을 추구하면서 성장하고 증가하며 발전한다.
” 변하지 않은 실체는 없다.
‘존재’. ‘개체’. ‘나’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오온의 결합을 일컫는 편의적인 명칭에 불과하다.
이 것들은 모두 무상하여 끊임없이 변화한다.
「무상한 것은 무엇이든 괴롭다(dukkha).」 이는 「오온이 바로 고다」라는 붓다의 가르침의 참된 의미이다.
연속되는 두 순간은 동일하지 않다.
A와A는 서로 같지 않다.
그것은 순간적인 생성과 소멸의 흐름 속에 있다.
붓다는 라타팔라에게 「세상은 끝없는 흐름 속에 있으며 무상하다」고 말했다.
하나의 사물이 사라지면 그것은 인과의 연속에 따라 다음 사물이 나타날 조건이 된다.
그 속에서 불변의 실체는 없다.
영원한 자아. 개체. 나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상호의존적 인 오온이 하나의 육체적. 정신적 기관으로서 서로 결합하여 함께 움직인다면’나’라는 관념이 얻어진다.
그러나 이것도 그릇된 관념이나 정신적 행위에 불과하다.
그것은 행온의 52가지 작용(52가지 마음부수) 중의 하나, 즉 자아의 관념일 뿐이다.
보통 ‘존재’라고 불리우는 ‘오온’은 行苦性 그 자체이다.
이 五蘊의 배후에서 苦를 경험하는 存在나 自我는 없다.
붓다고사의 말처럼 「단지 괴로움이 존재할 뿐 괴로와 하는 자는 발견되지 않는다.
행위는 있지만 행위자는 발견되지 않는다.
」운동의 배후에서 도사리고 앉아 스스로는 운동하지 않는 그런 것은 없다.
단지 운동만이 있을 뿐이다.
삶이 운동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삶 자체가 운동이다.
삶과 운동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달리 말하자면 생각의 배후에 있는 생각의 주체는 없다.
생각자체가 생각의 주체이다.
생각이 없었다면 생각의 주체는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삶에는 그 시초가 있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다.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살아 있는 존재의 흐름은 불가사의 한 것이다.
즉 무시무종(無始無終)이라 하셨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붓다는 말했다.
「오, 비구여. 이 윤회의 순환에는 볼 수 있는 끝이라고는 없다.
무명으로 덮혀 있고 갈애(渴愛)의 족쇄에 묶여서 끊임없이 순환하는 존재의 첫 번째 시초는 인지될 수 없다.
」 그리고 삶의 윤회의 주요한 원인이 되는 무명(無明)에 대해 「무명의 첫 번째 시초는, 어떤 한계를 넘어서서는 무명은 없다고 가정하는 방식으로는 인지될 수 없다」라고 말했다.
따라서 어떤 한계점을 넘어서서는 삶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바로 이와 같은 것이 고성제의 의미이다.
이 고성제를 명료하게 이해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붓다가 말했듯이 고를 본 자만이 고의 원인(集)과 고의 소멸(滅)과 고의 소멸에 이르는 길(道)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2. 괴로움의 발생(集聖諦, dukkha-samudaya-ariya-sacca) 1) 이기적 욕망이 고통의 원인이다.
두 번째의 고귀한 진리는 집성제이다.
경전의 집성제에 대한 정의는, 「재생의 원인이 되고, 탐욕에 얽매여 있으며, 여기저기서 당장의 새로운 기쁨을 추구하는 것은 바로 갈증, 즉 갈애(渴愛)이다.
즉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증(欲愛)[11], 존재와 그 생성에 대한 갈증(有愛)[12],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증(無有愛)[13]이 고의 원인이다.
」 모든 형태의 고통과 존재의 연속(윤회)을 야기시키는 것은 갈증. 욕망. 탐욕. 원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제일 원인으로 간주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붓다의 가르침은 모든 것은 서로 연관되어 상호의존적이기 때문에 결코 제일원인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고의 원인으로 여겨지는 갈애조차 다른 어떤 것, 즉 느낌(受, vedanā)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갈애는 고의 발생의 제일 원인이거나 유일한 원인이 아니지만 가장 쉽게 알아챌 수 있는 직접적 원인이며, 가장 주요하고 보편적인 것이다.
이 것은 단지 무지에서 발생하는 거짓된 자아 관념이 이런 갈애의 핵심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갈애란 용어는 감각적 쾌락, 부와 권력에 대한 욕망이나 집착뿐만이 아니라 관념. 이념. 관점. 견해. 이론. 개념. 신념 등에 대한 욕망이나 집착(法愛)도 포함하고 있다.
붓다의 분석에 의하면 가족간의 작은 다툼에서, 나라와 국가 간의 큰 전쟁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의 모든 분쟁은 이 같은 이기적인 욕망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모든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문제들의 분쟁이나 갈등의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이 이기적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붓다가 라타팔라에게 이야기했듯이 「세상은 결핍되어 무엇인가를 갈구하며, 갈애의 노예가 되어 있다.
」 2) 苦는 苦 내부에서 일어난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모든 악이 이기적 욕망 때문에 발생한다.
그러나 이 욕망, 갈애가 어떻게 해서 재생과 윤회를 낳는가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여기서 검토해야 할 것은 업(業, kamma)과 윤회의 개념이다.
생존과 그 연속에 필수적인 요인, 혹은 조건으로서 네 가지 자양분(食)이 있다.
그것은 물질로 된 보통의 음식(段食), 감각기관의 외부 세계와의 접촉(觸食), 의식(識食), 정신적 의도나 의지(意思食)의 네 가지이다.
이 네 가지 자양분 중에서 의사식이란 살고, 존재하고, 다시 살고, 계속해서 자꾸 다시 생존하려는 의지를 말한다.
그것은 선행과 악행을 통해 몸부림치면서, 생존과 존속의 뿌리를 뻗친다.
그것은 의도(思, 행온에 포함된다.
)와 같다.
붓다가 정의했듯이 의도가 업이다.
정신적 의도에 대해 붓다는 「정신적 의도의 자양분, 즉 意思食을 이해하면 渴愛의 세 가지 형태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갈애. 의도. 정신적의도. 업은 모두 같은 것을 의미한다.
그것들은 존재하고, 존속하고, 더욱더 커지고 많아지려는 욕심이나 의지를 나타낸다.
이것이 고의 발생의 원인이다.
그리고 이것은 오온중 행온(行蘊)에서 발견된다.
고의 발생원인이 고 내부에 있는 것이지 결코 외부에 있지 않다는 점을 주의 깊고 명백하게 기억해야 한다.
초기경전 속에서 자주 나타나는 「발생의 속성을 지닌 것은 어느 것이든 멸의 속성을 갖고 있다」라는 명구는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
어떤 존재. 사물. 체계든 그 자신 안에 생성과 발생의 속성을 갖고 있다면 또한 소멸과 파괴의 속성을 자체 내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고(苦)나 오온(五蘊)도 그 자체 내에 자신의 발생의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소멸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3) 업의 이론은 자연 법칙이다.
빨리어 kamma는 ‘하다’라는 의미의 √kr(to do)에서 파생된 말로서 행위. 행동을 의미한다.
그러나 모든 행위를 의미하지 않고 ‘의도적 행위’만을 의미한다.
이것은 업의 결과를 의미하지 않는다.
불교교리에서 업은 결코 그 효과를 의미하지 않는다.
행위의 결과를 나타낼 때는 업보(業報), 혹은 과보(果報)라는 용어를 쓴다.
의도는 상대적으로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다.
그것은 욕망도 마찬가지다.
또한 의도적 행위인 업도 상대적으로 선하거나 악하다.
선업(善業)은 선과(善果)를 낳고 악업(惡業)은 악과(惡果)를 낳는다.
갈애. 의도. 업은 선하든 악하든 그 결과로서 선하거나 악한 방향으로 지속되려는 어떤 힘을 갖고 있다.
[14] 선하든 악하든 그것은 상대적이며 지속적인 순환(윤회)의 틀 내에 있다.
아라한이 되면 행동하더라도 업을 짓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거짓된 자아 관념, 지속적인 생성에의 갈애, 모든 번뇌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그는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다.
업의 이론과 소위 도덕적 정의나 상벌 개념과를 혼돈해서는 안된다.
도덕적 정의나 상벌의 관념은 초월적 존재인 하나의 하느님이라는 개념에서 비롯된다.
[15] 업의 이론은 원인과 결과의 이론이다.
작용과 반작용의 이론이다.
그것은 자연적인 법칙일 뿐 정의나 상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모든 의도적 행위는 그 결과를 낳는다.
그 결과는 그 행동을 심판하는 어떤 힘이나 인물에 의해서 주어지는 정의. 상벌이 아니고, 그 자신의 본성과 법칙에 의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업의 이론 중에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의도적 행위의 결과가 사후의 세계에서도 계속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4) 탐욕이 있는 한 윤회는 계속된다.
하나의 존재가 정신적. 물질적 힘이나 에너지의 조합에 불과하다.
우리가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물리적 신체가 전체적으로 그 기능이 중단된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신체의 기능정지와 더불어 이 모든 힘이나 에너지가 함께 없어지는 것인가? 불교에서는 아니라고 말한다.
존재하고 계속 존재하려는 욕망. 의지. 의도는 모든 생명을 움직이는 거대한 힘이다.
이는 세계에서 가장 큰 힘이며 에너지이다.
불교에 따르면 신체의 기능정지, 즉 죽음 후에도 이 힘의 작용은 중단되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형태로 계속 그 자신을 들어내며, 재생이라 불리는 윤회를 낳는다.
그러면 자아나 영혼과 같은 영원 불변하는 절대적 실체나 본질이 없다면 무엇이 다시 태어나는 가? 사후의 삶을 살펴보기 전에 현재의 삶이 무엇이며, 어떻게 지속되는 가를 먼저 살펴보자. 삶이란 오온의 조합이며, 정신적 물질적 에너지의 조합이다.
이것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두 개의 연속적인 순간에도 결코 동일한 것으로 남아있지 않다.
그것은 매 순간 태어나고 또 죽는다.
지금 살아있는 동안에도 매 순간 우리들은 태어나고 사라진다.
신체가 더 이상 기능할 수 없을 때도 에너지는 사라지지 않으며 다른 형태나 모습으로 계속 존재한다.
그것은 다른 삶이다.
영원불변의 실체란 없기 때문에 한 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영원 불변하여 한 삶에서 다른 삶으로 이어지고 전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파괴되지 않은 채 매 순간 변화하며 지속되는 일련의 과정일 뿐이다.
이 일련의 과정은 운동에 불과하다.
그것은 마치 밤을 새워 타는 불꽃과 같다.
초저녁 불꽃과 한 밤의 불꽃은 똑 같은 불꽃이 아니며 다른 불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여기서 죽어 다른 어디에 태어난 사람은 같은 사람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다.
그것은 동일한 일련의 과정의 연속일 뿐이다.
죽음과 탄생 사이의 차이는 생각의 순간의 차이일 뿐이다.
이 생에서의 마지막 생각의 순간이 소위 내생에서의 첫 번째 생각의 순간으로 이어진다.
사실 그것은 동일한 일련의 과정이 연속되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불교도의 입장에서 보면 사후의 삶의 문제는 큰 신비가 아니다.
이러한 존재와 생성에의 갈애가 있는 한 윤회는 계속된다.
본질. 진리. 열반을 보는 지혜로써 이러한 충동적인 갈애를 부수어야 비로소 그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
괴로움의 소멸(滅聖諦 dukkha-nirodha-ariya-sacca) 어리석은 자는 말에 묻혀버린다.
세 번째의 고귀한 진리는 고통과 고의 연속에서 해방된 자유로움이다.
이를 멸성제라 하며, 열반 (nibbana)을 의미한다.
고를 완전히 소멸하려면 고의 주요한 근원, 즉 갈애(渴愛)를 제거해야만 한다.
따 라서 열반의 상태를 나타내는 데 ‘갈애의 소진’이란 말을 자주 사용한다.
그러면 ‘열반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될 것이다.
인간의 언어는 궁극적 실재나 절대진리의 진실한 본성, 즉 열반의 본성을 표현하기 에는 너무 빈약하기 때문에 말로써는 완벽하고 만족할 만한 답변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언어는 인간이 그들의 감각 기관과 마음이 겪는 경험을 표현하기 위하여 창조하고 사용하는 것이다.
절대진리와 같은 출 세간적 경험은 그런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러한 경험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는 없다.
말이란 우리에게 알려진 사물과 관념을 표현하는 상징이다.
이러한 상징으로는 일상적인 사물의 진실한 본성을 전달하지 못하며 할 수도 없다.
진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언어는 기만적이며 오해를 유발할 수 있다.
2) 열반이란 무엇인가 열반은 탐.진.치의 소멸이다.
‘오온에 대한 욕망과 갈구를 포기하고 파괴할 때 바로 고는 소멸된다.
’ ‘연속과 생성을 끊음이 바로 열반이다.
’ 멸성제는 열반이며 열반은 탐진치의 소멸이며 출세간도를 체험하는 순간에 체득되는 조건 지워지지 않은 상태(asaṅkhata)를 뜻한다.
이러한 조건 지워지지 않은 상태를 체득하는 순간에 번뇌가 소멸하기 때문에 열반은 ‘탐욕의 소멸, 성냄의 소멸, 어리석음의 소멸’이라고 불린다.
3) 열반은 버려서 실천된다.
열반은 버림이다.
초기경전에서 열반은 “모든 형성된 것들(行)이 가라앉음, 모든 재생의 근거를 놓아버 림, 갈애의 소진, 탐욕의 빛 바램[離慾], 소멸, 열반이다.
”(A3:32) 이것을 실현하는 길이 팔정도요, 구체적으 로 37조도품이다.
이런 열반의 실현에 전념하는 방법으로 세존께서는 출가를 말씀하셨으며, 출가의 삶이야 말로 이 세상의 진정한 복 밭이라 강조하셨다.
4) 열반은 지금 이곳에서 성취할 수 있다.
자아 또는 아뜨만이 없다면 누가 열반을 깨닫는가? 생각하는 것은 생각 자체이며, 생각의 배후에서 생각하는 자는 없다는 것은 이미 살펴보았다.
마찬가지로 깨닫는 주체는 지혜 자체이다.
깨달음의 배후에 다른 자아가 있는 것은 아니다.
고와 윤회는 발생의 속성을 갖고 있으며, 따라서 소멸의 본성도 갖고 있음 에 틀림없다.
고는 갈애 때문에 발생하며 지혜로 인하여 소멸된다.
갈애와 지혜는 오온의 세계에 속하며, 발생의 씨앗이나 소멸의 씨앗은 모두 오온에 속한다.
이것이 붓다의 유명한 “육 척 단신 속에서 나는 세계 와, 세계의 발생과, 세계의 소멸과, 세계의 소멸로 이끄는 길을 본다”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이다.
이는 사성 제가 모두 오온 내에서, 즉 우리 자신 속에서 발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또한 고의 발생과 소멸을 낳 는 외적인 힘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5) 열반은 행복이다.
열반을 깨우친 이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존재이다.
그는 자아의 관념이 없기 때문에 과거를 한탄하 지 않으며 미래를 걱정하지 않는다.
그는 현재를 충분하게 살뿐이다.
그는 아무것도 얻거나 축적하려고 하 지 않는다.
또한 그는 자아의 환상과 생성의 갈애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정신적인 것조차 소유하거나 축 적하지 않는다.
4.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道聖諦, dukkha-nirodha-gāmini-paṭipadā-sacca) 1) 팔정도는 붓다 설법의 모든 것 고의 소멸에 이르는 길인 도성제는 두 가지 극단을 피하는 까닭에 중도라고 알려져 있다.
한 극단은 감 각적 쾌락으로써 행복을 추구하는 것인데, 비속하고 일반적이며, 유익하지 못한 보통사람들의 길이다.
다른 하나는 여러 형태의 고행을 통한 행복을 추구하는 것으로 고통스럽고 가치 없고 이롭지 못한 극단적 행위일 뿐이다.
붓다는 이 양극단을 다 시도해본 후, 그것들이 모두 쓸모 없는 것임을 깨닫고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 중 도를 발견해 냈다.
중도는 올바른 안목과 지식을 부여하여 적정. 열반으로 인도한다.
중도수행, 다시 말해 서 팔정도가 바로 세존이 가르쳐 준 세간을 멸하여 생사에서 벗어나는 출세간의 길이다.
세존은 이론적 중 도로 십이 연기를 이야기하고 다시 실천적 중도로 팔정도를 말씀하신다.
이 중도는 여덟 가지 범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팔정도라고 불려진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정견(定見) ② 정사유(正思惟) ③ 정어(正語) ④ 정업(正業) ⑤ 정명(正命) ⑥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⑧ 정정(正定) 팔정도는 위에 나열된 순서대로 순차적으로 수행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각 개인의 능력에 따라 다소간 동시에 수행될 수도 있다.
팔정도는 모두 함께 연결되어 있으며 각각 다른 것의 계발 을 돕는다.
2) 삼학(三學)과 팔정도 팔정도는 불교 수행의 핵심인 삼학(戒. 定. 慧)을 발전시키고 완성하는 것을 돕는다.
윤리규범인 계는 붓다의 가르침의 기초라 할 수 있는 모든 생명에 대한 보편적 사랑과 자비의 위대한 개념에 세워졌다.
붓다가 위대한 이유는 그의 철학적 형이상학적 가르침이 아니라 그는 많은 사람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그리고 세상을 향한 자비의 마음에서 가르침을 베푼 것이다.
붓다의 가르침에 의하면 한 인간이 완전해지려면 자비와 지혜의 두 가지를 동등하게 발전시켜야 한다.
여기서 자비는 사랑. 연민. 친절. 인내 등 정서적 측면의 성질을 나타내며, 지혜는 지적인 측면의 성질을 나타낸다.
지성적 측면을 무시하고 정서적 측면만을 발달시키는 사람은 선량한 마음의 바보가 될 것이다.
반면 정서적 측면을 무시하고 지적인 측면만을 발달시키는 사람은 타인에 대한 감정이 전혀 없는 냉혹한 인물이 될 것이다.
따라서 완전한 사람이 되려면 두 가지를 동등하게 발전시켜야 한다.
그것이 불교도의 궁극적 목표이다.
계(戒) : 사랑과 자비를 그 기반으로 하는 윤리 규범, 즉 계에는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의 팔정도의 세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정(定), 즉 정신적 수행에는 정정진(正精進). 정념(定念), 정정(正定)의 세 요소가 있다.
혜(慧) : 정견(正見)과 정사유(正思惟)는 삼학중의 혜를 구성한다.
1. 팔정도는 붓다 설법의 모든 것 고의 소멸에 이르는 길인 도성제는 두 가지 극단을 피하는 까닭에 중도라고 알려져 있다.
한 극단은 감각적 쾌락으로써 행복을 추구하는 것인데, 비속하고 일반적이며, 유익하지 못한 보통사람들의 길이다.
다른 하나는 여러 형태의 고행을 통한 행복을 추구하는 것으로 고통스럽고 가치 없고 이롭지 못한 극단적 행위일 뿐이다.
붓다는 이 양극단을 다 시도해본 후, 그것들이 모두 쓸모 없는 것임을 깨닫고 개인적인 체험 을 통해 중도를 발견해 냈다.
중도는 올바른 안목과 지식을 부여하여 적정. 열반으로 인도한다.
중도수행, 다시 말해서 팔정도가 바로 세존이 가르쳐 준 세간을 멸하여 생사에서 벗어나는 출세간의 길이다.
세존은 이론적 중도로 십이연기를 이야기하고 다시 실천적 중도로 팔정도를 말씀하신다.
이 중도는 여덟 가지 범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팔정도라고 불려진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정견(定見) ② 정사유(正思惟) ③ 정어(正語) ④ 정업(正業) ⑤ 정명(正命) ⑥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⑧ 정정(正定) 팔정도는 위에 나열된 순서대로 순차적으로 수행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각 개인의 능력에 따라 다소간 동시에 수행될 수도 있다.
팔정도는 모두 함께 연결되어 있으며 각각 다른 것의 계 발을 돕는다.
2) 삼학(三學)과 팔정도 팔정도는 불교 수행의 핵심인 삼학(戒. 定. 慧)을 발전시키고 완성하는 것을 돕는다.
윤리규범인 계는 붓다의 가르침의 기초라 할 수 있는 모든 생명에 대한 보편적 사랑과 자비의 위대한 개념에 세워졌다.
붓다가 위대한 이유는 그의 철학적 형이상학적 가르침이 아니라 그는 많은 사람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그리고 세상을 향한 자비의 마음에서 가르침을 베푼 것이다.
붓다의 가르침에 의하면 한 인간이 완전해지려면 자비와 지혜의 두 가지를 동등하게 발전시켜야 한다.
여기서 자비는 사랑. 연민. 친절. 인내 등 정서적 측면의 성질을 나타내며, 지혜는 지적인 측면의 성질을 나타낸다.
지성적 측면을 무시하고 정서적 측면만을 발달시키는 사람은 선량한 마음의 바보가 될 것이다.
반면 정서적 측면을 무시하고 지적인 측면만을 발달시키는 사람은 타인에 대한 감정이 전혀 없는 냉혹한 인물이 될 것이다.
따라서 완전한 사람이 되려면 두 가지를 동등하게 발전시켜야 한다.
그것이 불교도의 궁극적 목표이다.
계(戒) : 사랑과 자비를 그 기반으로 하는 윤리 규범, 즉 계에는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 명(正命)의 팔정도의 세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정어(正語), 즉 올바른 말은 거짓말, 개인이나 집안 간의 증오나 적대감, 불화를 야기시 키는 험담이나 중상, 거칠고 무례하고 악의적이고 사나운 말, 어리석고 쓸모 없는 농담이나 객담 등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형태의 나쁘고 해로운 말을 삼가 할 때 당연히 옳은 말을 하게 되며, 친절하고 인자하고 즐겁고 점잖고 의미 있고 유용한 말을 하게 된다.
경솔하게 이야기해서는 안된다, 올바른 때와 올바른 장소에서만 말해야 한다.
유용한 말을 할 수 없다면 점잖은 침묵을 지켜야 한다.
정업(正業), 즉 올바른 행위는 도덕적이고 명예로우며 평화로운 행위의 증진을 그 목표 로 한다.
그것은 생명의 파괴, 절도, 부정한 거래, 간통을 하지 말 것이며, 다른 사람들이 올바른 방식으로 평화롭고 명예로운 삶을 꾸밀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정명(正命), 즉 올바른 삶은 남에게 해를 끼치는 직업을 갖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즉 무 기거래, 마약거래, 독극물 거래나 도살, 협잡 행위와 같은 직업은 선택하지 말아야 한다.
이와 같이 계는 팔정도의 세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불교적인 도덕. 윤리규범은 개인과 사회의 행복하고 조화로운 삶의 증진을 그 목표로 하고 있으며, 개인의 드높은 정신적 성취를 위해 불가결한 기반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도덕적 기반 없이는 어떠한 정신적 성취도 불가능하다.
정(定), 즉 정신적 수행에는 정정진(正精進). 정념(定念), 정정(正定)의 세 요소가 있다.
정정진(正精進), 즉 올바른 노력은 사악하고 불건전한 마음 상태가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고, 이미 그런 것이 일어났을 땐 제거하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선하고 건전한 마음 상태는 일어나도록 노력하며, 이미 존재하고 있는 선하고 건전한 마음 상태는 완전하게 계발하려는 정력적인 의지다.
정념(定念), 즉 올바른 통찰이란 신(身) 신체의 활동, 수(受) 감각이나 느낌, 심(心) 마음 의 활동, 법(法) 관념. 사고. 사물과 관련하여 정성껏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호흡에 관한 통찰(數息觀)은 신체와 관련하여 정신적 개발을 이루는 가장 잘 알려진 수행법의 하나이다.
受, 즉 감각이나 느낌은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의 3가지가 있다.
마음의 활동과 관련해서는 마음의 번뇌에 잠겨있는가 아닌가, 증오를 갖고 있는가 아 닌가, 현혹되어 있는가 아닌가, 산란되어 있는가 집중되어있는가를 인식해야 한다.
그로써 마음의 모든 운동과 그 발생. 소멸의 방식에 대해 인식하게 된다.
관념.사고.개념.사물과 관련해서는 그 발생.소멸의 방식, 성장의 방식, 쇠퇴 및 파괴 의 방식 등의 속성을 이해해야 한다.
정정(正定) , 정신적 수행의 세 번째 요소는 일반적으로 황홀경, 무아의 경지로 알려진 선 정의 네 단계로 인도하는 올바른 집중, 즉 정정이다.
초선 : 다섯 가지 장애(감각적 욕망, 악의, 해태와 혼침, 들뜸과 후회, 의심)와 같은 격정적 욕망이나 불건전한 사고가 사라지고 나면 환희가 생기고, 환희로 운자에게 희열이 생긴다.
2선 : 모든 지적인 활동이 제어되고 적정과 마음의 집중(心一境性)이 발전되며 즐거 움과 행복의 감정은 여전히 남아있다.
3선 : 활동적 감각인 즐거움의 느낌은 사라지고 반면에 행복감이 마음의 적정과 함 께 남는다.
4선 : 행복과 불행, 즐거움과 슬픔 등의 모든 감정이 사라지고, 오로지 순수한 적정 과 깨달음만이 남게된다.
혜(慧) : 정견(正見)과 정사유(正思惟)는 삼학중의 혜를 구성한다.
정견 : 올바른 이해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연기적 관계론적 존재)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 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설명하는 것은 사성제이다.
고로 올바른 이해는 결국 사성제로 귀결된다.
이 이해는 궁극적 실재를 보는 최고의 지혜이다.
불교에서는 두 가지 종류의 이해를 이야기 한다.
일반적으로 이야기 하는 이해는 지식, 축적된 기억, 주어진 자료에 따라 지적 파악이다.
이는 수각(隨覺, anu-bodha)이라 하고 이것은 심원한 것은 아니다.
심원한 이해는 통각(通覺, paṭi-vedha)이라고 하는데, 사물을 그 진실한 본질대로 보는 것이다.
이 통각은 마음이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 명상ㅇ르 통해 충분히 개발되어 있을 때만 가능하다.
정사유 : 즉 올바른 사고는 모든 존재에 확산될 수 있는 사심 없는 이욕(離欲)과 초탈의 사고, 사랑과 비폭력의 사고를 의미한다.
여기서 이욕과 사랑과 비폭력의 사고가 지혜의 측면에서 한데 모아진다는 것을 지적함은 매우 중요하고 흥미로운 일이다.
이는 진실한 지혜는 이러한 고귀한 성질이 주어지며 따라서 이기적 욕망. 악의. 증오. 폭력의 모든 사고는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결국 삶의 영역에서 지혜가 결여된 결과임을 보여준다.
3) 도성제는 올바른 삶의 방식 도성제는 각 개인이 따르고 실천하고 개발해야 하는 삶의 방식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身.口. 意(신체.언어.마음)의 자기 수련이며 개발이며 정화이다.
그것은 신앙.기도.예배.의식 같은 것과 상관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일반적으로 종교적이라고 불리는 것과 상관이 없다.
그것은 도덕적, 정신적, 지적 완성을 통해 궁극적 실재의 깨달음, 완전한 자유와 행복과 평화로 인도하는 길이다.
불교국가에서 남방에서는 우기에 하는 하안거, 북방 불교권에서는 동안거 하안거가 있다.
이는 진실한 길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러나 그것들은 아직 덜 개발된 사람들의 어떤 종교적 감정과 욕구를 충족시켜 그들이 진리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데 그 의의가 있다.
Ⅳ. 결론 붓다는 현실진단으로 사성제를 설했다.
단순히 진단만 한 것이 아니라 처방까지도 했다.
즉 팔정도의 제시다.
팔정도를 통해서 우리는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누가 만지는가? 이것은 올바른 질문이 아니다.
나는 누가 만진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만지고 있을 뿐이다.
” 행위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
삶은 과정일 뿐이다.
붓다의 가르침이 방대하고(초기불교, 부파불교, 대승불교, 유식, 여래장, 티벳밀교, 중국의 선불교 등) 번잡하지만 그 핵심은 무아, 즉 이 세상에 존재하는 절대적인, 이 우주를 움직이고 인간을 조종하는 그 어떤 것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와 불교의 차이점이다.
모든 존재하는 현상들은 원인과 조건에 의해 조작(형성)된 것이다.
그래서 불안전하고 무상하며 공이다 라고 붓다는 주장했다.
무상하기 때문에 불완전하기 때문에 연기(중도. 공이 다 같은 말임)하기 때문에 몸과 마음(물.심)이 조건에 따라서 순간순간 생멸하기 때문에 괴롭다는 근원적 괴로움, 이것이 4성제의 괴로움이다.
4고8고, 3성이니 하는 모든 것들, 즉 보편적 근원적인 고, 구체적이고 분석적인 고의 표현이다.
이러한 근원이 비어있고 존재하지 않음을 알지 못하고 오온이 나라고 착각(오취온고)하고 그 눈에 보이고 귀로 듣고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즐기는 이러한 것들의 이면에 주관하는 자아가 있다고 착각하고 취(取)하고 집착하는 데서 고통이 발생한다.
전생으로부터 금생에 이르는 과정에서는 ‘식(識, viññāṇa)’이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그러나 금생에서 내생으로 연결되는 과정에서는 ‘집착(取, upādāna)’이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이러한 dukha의 성질을 알고 여기서 벗어나는 길은 계.정.혜 삼학을 통한 탐.진.치 삼독을 소멸하고 열반을 성취하는 길뿐이다.
붓다께서는 재가자에게 일시적인 방편으로 보시. 지계 生天을 주장하셨다.
허나 그것은 일시적인 고통을 해소하는 방법밖에는 되지 않는다.
사성제와 관련하여 수행해야 할 네 가지 기능이 있다.
첫 번째, 고귀한 진리는 고성제이다.
그것은 삶의 괴로움, 슬픔과 기쁨, 불완전과 불만족, 무상과 무아를 밝히는 고(苦)에 관한 진리이다.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苦를 완전하고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所遍知, pariññeyya)이다.
두 번째, 고귀한 진리는 집성제이다.
그것은 모든 격정과 번뇌와 망상을 수반하는 갈애, 즉 고의 원인에 관한 진리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단순히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것을 버리고 제거하고 소멸시켜 근절하는 것(滅作證, pahātabba)이다.
세 번째, 고귀한 진리는 고의 소멸, 즉 열반. 절대적 진리. 궁극적 실재에 관한 것이다.
여기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것을 실현하는 것(應作證, sacchikātabba = sacchikaraṇīya)이다.
네 번째, 고귀한 진리는 열반의 실현으로 인도하는 길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완변하더라도 단순히 알기만 해서는 열반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이 경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것을 따르고 지키는 것(修作證, bhāvetabba)[16]이다.
초기불교의 유일한 목적은 인간 개개인을 변화시키는 것이고, 연기법은 그에 대한 설명이자 처방이다.
우리가 초기불교를 공부하고 사성제를 구체적으로 공부하는 목적은 행복의 실현에 있는 금생의 행복, 내생의 행복(궁극적 행복)을 실현 하는 것이다.
궁극적 행복이란 성자가 되는 것이다.
금생의 행복과 내생의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보시와 지계로 되지만 궁극적 행복인 열반은 팔정도를 위시한 37보리분법을 닦아서 존재현상을 온.처.계.근.제.연으로 해체해서 이들의 무상.고.무아를 통찰하여 염오-이욕-해탈-구경해탈지(혹은 염오-이욕-소멸)가 성취됨으로써 실현된다.
초기불교의 유일한 목적은 인간 개개인을 변화시키는 것이고, 연기법은 그에 대한 설명이자 처방이다.
우리가 초기불교를 공부하고 사성제를 구체적으로 공부하는 목적은 행복의 실현, 즉 금생의 행복, 내생의 행복(궁극적 행복)을 실현 하는 것이다.
궁극적 행복이란 성자가 되는 것이다.
금생의 행복과 내생의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보시와 지계로 되지만 궁극적 행복인 열반은 팔정도를 위시한 37보리분법을 닦아서 존재현상을 온.처.계.근.제.연으로 해체해서 이들의 무상.고.무아를 통찰하여 염오-이욕-해탈-구경해탈지(혹은 염오-이욕-소멸)가 성취됨으로써 실현된다.
우리는 고의 성질을 확실히 파악하고 고의 원인인 갈애 집착심을 일으키지 말고 팔정도를 실천하여 하루빨리 구경지를 얻어 모든 중생에게 사랑과 자비를 실천해야 할 것이다.
팔정도의 윤리규범인 계는 붓다의 가르침의 기초라 할 수 있는 모든 생명에 대한 보편적 사랑과 자비의 위대한 개념에 세워졌다.
붓다가 위대한 이유는 그의 철학적 형이상학적 가르침이 아니라 그는 많은 사람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그리고 세상을 향한 자비의 마음에서 가르침을 베푼 것이다.
붓다의 가르침에 의하면 한 인간이 완전해지려면 자비와 지혜의 두 가지를 동등하게 발전시켜야 한다.
여기서 자비는 사랑. 연민. 친절. 인내 등 정서적 측면의 성질을 나타내며, 지혜는 지적인 측면의 성질을 나타낸다.
지성적 측면을 무시하고 정서적 측면만을 발달시키는 사람은 선량한 마음의 바보가 될 것이다.
반면 정서적 측면을 무시하고 지적인 측면만을 발달시키는 사람은 타인에 대한 감정이 전혀 없는 냉혹한 인물이 될 것이다.
따라서 완전한 사람이 되려면 두 가지를 동등하게 발전시켜야 한다.
그것이 불교도의 궁극적 목표이다.
[1] 『상윳다 니까야』 「진리상윳다」 [2] 사랑하는 사람?(물건, 대상)과 헤어지는 괴로움 [3] 원한 맺힌 사람과 만나는 것. [4] 구하는데 얻어지지 않는 것. [5] 줄이면 오온이 나라고 집착하는고 [6] 고통스럽기 때문에 괴롭다.
[7] 이 세상은 형성(조건 지어져)되어 있기 때문에 괴롭다.
[8] 무너지기 때문에, 변하기 때문에 괴롭다.
[9] 五根: ①眼, ②耳, ③鼻, ④舌, ⑤身, [10] 五境: ①色, ②聲, ③香, ④味, ⑤觸, [11] 욕애(慾愛, kāma-taṇhā) :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로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에 대한 탐욕의 동의어이다 [12] 유애(有愛, bhava-taṇha) : 색계. 무색계에 태어나고자 하는 존재에 대한 탐욕과 禪을 갈망하는 것의 동의어이며, 상견이 함께한다.
[13] 무유애(無有愛, vibhava taṇha) :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갈애(더 이상 태어나지 않음)라는 것은 단견이 함께하는 탐욕의 동의어이다.
[14] 물리학의 관성의 법칙과 유사한 면이 있다.
관성의 법칙이란 모든 존재현상(물질 및 정신적인 심리현상까지 포함)은 현 상태를 유지하려는 본성이 있다.
뉴턴의 운동법칙 중 제1법칙. “외부에서 힘이 작용하지 않으면 운동하는 물체는 계속 그 상태로 운동하려고 하고, 정지한 물체는 계속 정지해 있으려고 한다.
” [15] 이 하나님은 판관의 위치에 있으며 법의 제정자이고, 옳고 그름을 결정한다.
정의라는 말은 애매모호할 뿐더러 위험스럽기도 하며, 그 이름 하에 인간에게 이롭기보다는 해로운 일이 많이 행해진다.
[16] 수행이란 우리가 자신을 원하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스스로를 적극적으로 변화시켜 나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