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을 짓고 화를 부르는 잘못된 기도
법륜스님
자기를 중심에 놓고 자기만 옳다고 고집하는 것이 ‘아집’이며 ‘아상’ 이고, 나와 남을 함께 생각하는 것을 ‘연기’라고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자유롭고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욕망 자체를 버려야 하는데, 어리석은 까닭에 모두가 욕망 충족을 위한 기도만 합니다.
그런데 인과의 법칙에서 보면 그것은 화를 자초하는 길입니다.
결국 내게 화를 더 많이 달라는 말과 똑같습니다.
어느 신도가 하루는 이렇게 투덜거렸습니다.
“불전함에 돈을 수 없이 많이 넣었지만 아무 효과도 없더라.
내가 만원 넣어서 백만원 돌아온다는 보장만 해준다면 얼마든지 넣겠다.” 만 원 넣어서 백만 원 나온다면 누가 돈을 넣지 않겠습니까? 이런 마음으로 불전함에 보시한다면 그 마음은 결국 투기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모두들 노력은 조금밖에 안 하고 한꺼번에 많은 대가를 얻으려는 욕심으로 명산 대찰을 찾아다니며 기도를 합니다.
그것이 이루어질 까닭이 없습니다.
머리도 나쁘고 공부도 하지 않으면서 무조건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된다고 기도하는 것은 공부 잘 하는 남의 자식은 다 떨어지라는 소리가 됩니다.
이렇게 자기 욕망 충족을 위한 기도란 크게 보면 남을 못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도를 하러 다니는 것이 아니라 업을 지으러 다니는 셈입니다.
이렇게 절마다 다니면서 원망하고 업을 지으면 당연히 불행의 과보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연기적인 관점에서 이 세상을 바라보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바로 알 수 있습니다.
형제간이든 집단간이든 자기 고집과 이기심 때문에 갈등과 싸움이 일어나곤 합니다.
타인의 입장이 되어 한 번 이라도 생각해 본다면 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불자들은 자주 방생을 하는데, 생명을 아끼기 때문에 물고기를 풀어 주는 것이 아니라, 내 복을 빌기 위하여 물고기를 이용하는 꼴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라 등에 이름을 써서 놓아 주면서, “요놈! 내가 너를 살려 주는 것이니 나에게 꼭 복을 가져 오너라!” 이렇게 이기적인 기원을 합니다.
이것은 놀부가 제비 다리를 부러뜨려 놓고 치료해 주는 것과 똑같은 심보가 아니겠습니까.
이런 마음으로 기도나 방생을 한다면 복은 커녕 오히려 화를 불러오게 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탐진치에 눈이 멀어 진실을 바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자꾸 업만 쌓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