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스님─부처님께 내맡기라

부처님께 내맡기라

-법상스님-

때때로 그냥 가만히 앉거나 숲길을 걷거나 하면서 마음의 변화를 가만히 살펴보곤 한다.

그러다 보면 이놈의 마음이란 것이 참 허망한 것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챌 수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을 가지고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면서 온갖 상황의 변화에 따라 울고 웃고 하는 것이 보인다.

그런 원숭이처럼 변덕스런 마음을 붙잡고 세상을 살다보니 세상사는 일이 만만치 않음은 어쩌면 당연한 일.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렇듯 마음을 붙잡고 세상을 산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온갖 변화들, 이를테면 답답함, 서글픔, 외로움, 괴로움, 화 등 이러한 모든 감정적인 변화들이 고정된 ‘내 마음’인 줄 알고 그 마음에 울고 웃으며 휘둘리고들 살고 있다.

그런데 가만히 마음을 살펴보면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하는 점이 금방 드러난다.

하루에도 수십 번 수백 번씩 주변 상황 따라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고, 좋았다가도 금방 싫어지고, 괴로웠다가도 금방 즐거워지는 그 마음이란 것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가.

그렇다고 세상사는 일에 마음을 쓰지 않고 살기란 또 어려운 일이니, 이 마음이란 녀석은 붙잡지도 그렇다고 뿌리치지도 못할 일이다.

그러면 이 마음을 어떻게 하면 잘 다스릴 수 있겠는가.

화엄경 보현행원품에 보면 보현보살의 열가지 행원 중 세 번째로 ‘광수공양廣修供養’이 나오는데, 여기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경계에 울고 웃고 휘둘리는 마음을 자꾸만 ‘내 마음’이라고 여겨 ‘내 것’으로 붙잡아서는 안 된다.

그렇게 경계따라 휘둘리는 마음이 어찌 내 마음일 수 있겠는가.

‘내 것’이 아니라고 뿌리칠 수도 없으니 가장 밝은 답은 그 마음을 공양 올리는 일이다.

공양을 올리고 나서는 완전히 내맡겨야 한다.

공양을 드렸으면 그것이 부처님 것이지 어찌 내 것일 수 있겠는가.

내 것도 아닌데 자꾸만 이렇다 저렇다 시비 걸 것도 없고, 문제 삼을 일도 아닌 것이다.

다만 완전히 부처님께 공양올리고 내맡기고 가면 된다.

마음을 공양올리는 것, 내 것으로 붙잡지 않고 일체를 내 안의 자성 부처님께 내맡기고 바치는 것, 그것이야말로 얼마나 쉽고 직접적인 생활 속의 수행인가.

내게는 탁한 마음이고 이기적인 마음이라도 부처님 그 밝은 자리에 가면 모두가 부처님 마음으로 바뀐다.

부처님은 아무런 분별도 시비도 없기 때문에 좋고 나쁜 것이 없다.

그러니 부처님 전에 공양 올리기만 하면 좋고 나쁨도 다 녹아내린다.

마치 온갖 혼탁한 고철들이 거대한 용광로에 가면 하나로 녹아내리듯.

모든 것을 부처님께 내맡기고 공양 올리는 마음은 우리의 삶을 걸림 없고 자유롭게 해 준다.

부처님은, 이 우주법계는 오직 우리를 사랑과 자비로 보살필 뿐이다.

그 사랑과 자비 안에 모든 것을 내던지고 맡기라.

한 치도 나를 내세우지 말라.

이는 부처님을 그 어떤 실체화, 절대화함으로써 그 분들을 어떤 분으로 규정지으란 말이 아니다.

여기서 부처님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이를테면 나와 이 우주의 본질적 그 무엇으로써의 불성을 말한다.

물론 불성이라는 말로도 표현되지 않는다.

어떤 존재, 형상으로 규정된 분이 아니시다.

즉 부처님 하는 말에도 집착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그렇게 내맡겼을 때 사사로운 나는 사라지고 온 우주의 본질로써의 그 분만이 남아 진리에 합당한 자비와 사랑의 일을 행하신다.

그러니 사사로운 나를 내세우고 아웅다웅 하며 살아갈 것이 아니라, 우주적 근원인 본래면목으로써의 부처님께 모든 것을 다 내맡기고 자유로이 휘적휘적 길을 걸어 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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