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광스님─죽음을 생각하며 무덤을 생각하며 살라

죽음을 생각하며 무덤을 생각하며 살라 法이야말로 우주 최고의 선물임을 깨달으라 -능인선원

지광스님

– 베푸는 마음이 불교의 첫 장 불교의 근본사상은 하나 되는데 있다.

불교공부는 그래서 남에게 주는 공부에서 부터 시작된다.

서비스가 인간학의 첫 과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서비스정신,즉 남에게 베풀고 펼치는 것이 성공의 비결이요 서비스 정신의 결여가 실패의 요체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자비의 참뜻 역시 베풀며 펼치며 살라는 가르침에 다름 아니다.

정신적으로 보살피고 물질적으로 베푸는 마음이 불교의 제 1과다.

6바라밀도 보시바라밀부터 시작하지 않는가? 내가 상대를 어떻게 대하는가? 베풀며 펼침의 대상으로 대하라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첫 장이다.

상대를 대하는 것이 나의 수행의 척도가 된다.

‘부처를 먼 데서 찾지 말라.

네 앞에 있는 사람이 바로 부처’라 하신 가르침이 어디 다른 뜻이 있겠는가? 온 세상 사람들은 부처를 본다면 항상 베풀며 펼치는 마음, 버리고 비우는 마음이 되리라.

상대방을 부처로 본다면 어디 법당이 따로 필요하겠는가? 이 세상 그대로가 극락이 된다.

남편을 부처로 본다면 남편의 꾸지람이 부처의 가르침이 될 것이요, 아내의 걱정은 부처의 보살핌이 되리라.

모두가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이 되리라.

버리고 비우는 마음이 바로 불심이요, 버리고 비운 만큼 상대방을 더 잘 알 수 있다.

의사가 환자를 사랑하는 만큼 환자의 병이 잘 보이고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만큼 잘 보이고 잘 들린다.

끌어들이는 일등과 버리고 베푸는 일등의 차이 언제 어디서나 버리고 비우면 통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비운 마음이 부처님의 마음이 되고, 空의 마음이기에 하나로 통하게 된다.

버리고 비우라는 이유는 잘 통하기 위해서이고 잘 통하면 하나가 되고, 부처가 되기 때문이다.

소통, 신통, 천이통, 천안통 등이 모두 버리고 비우는 데서 열리는 세계임을 왜 모르는가? 그런데 버리고 비우는 마음이 모두를 통하게 하고 즐겁게 하는데도 중생들의 삶은 거꾸로 가기에 갖가지 고통 속을 헤맨다.

실제 중생들은 베풀고 버리기보다 끌어들이는데 일등이다.

누구나 끌어들이는데 일등이 되려 혈안이다.

그런데 불법을 깨달은 자들은 한결같이 버리라, 비워라한다.

참으로 기막힌 아이러니가 아닌가? 모두가 끌어들이려는데 버리라니 도무지 가당한 일인가? 깨달은 자들은 세상을 이긴 자들이니 세상에서 더 이상 구할게 없다.

그들은 세상의 일등도 포기했고 부모와 처자와 재산 모두를 버린다.

모두가 높아지려는데 그들은 낮아지라 낮아지라 외친다.

한 쪽은 끌어들이는 데 일등이고 한 쪽은 버리는데 일등이다.

일등이 되려한다는 점에서는 같으나 전혀 각도가 다르다.

왜 이 같은 괴리가 벌어지는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다.

누구나 마음 가운데 천상천하유아독존의 존재를 모시고 있으나 이를 깨달았는가, 그렇지 못한가의 차이다.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버리는 일에 일등이 되려하지만

어리석은 자는 끌어들이는 데 일등이 되려한다.

죽음을 생각하며 무덤을 생각하며 살라 생각해보라! 언제 어디서건 버리는 사람 비우는 사람이 탁월한 지도자가 되지 않는가? 버리고 비우면 강해지고 나의 이익을 적게 하면 성공한다.

비워지고 버리면 무한과 하나 되고, 부처님의 가피가 함께 한다.

버리지 못해 비우지 못해 스트레스가 크고 병이 생기고 노화가 빨리 온다.

버리고 비우는 삶, 욕망을 이기는 삶이 부처의 길이고 욕망을 따르면 삶은 폐허가 된다.

욕망을 따르는 자에게는 이 세상이 끌어들이기 위한 경쟁과 투쟁의 싸움터이지만 부처님을 따르는 자에게는 이 세상은 자신의 참뜻을 실현할 수 있는 도장이다.

그들은 그들의 사명과 임무가 끝나면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 세상을 떠난다.

욕망과 탐착의 삶은 부처를 저버리는 삶이요, 버리고 비우는 삶은 무한과 하나 되는 삶이다.

버리고 비운 사람은 죽음을 흔쾌히 맞아들일 수 있지만 탐욕의 사람은 갖가지 애착이 죽음 이후에까지 그를 괴롭힌다.

떠나지 못해 괴로워하는 영혼들의 고통을 아는가? 죽음이 두려운 게 아니고 애착이 더 두렵다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죽음 다음의 고통을 생각하며 항상 무덤을 응시하며 살라.

무덤을 응시하면 어떤 마음이 되는가? 무덤을 생각하면 좀 수수해지지 않는가? 무덤을 생각하면 모두가 부질없는 것이라는 느낌이 들고 좀 대범해지지 않는가? 탁월한 인물들이 항상 죽음을 생각하며 살라, 무덤을 생각하며 살라 한 이유를 반추해보라.

부처님께서는 항상 죽음을 생각하라 하셨다.

법이야말로 최고의 선물이다 空을 깨달으라 무량가피와 하나되리라 무덤이라는 두 글자는 모든 것을 삼키는 특별한 힘을 지녔다.

무덤은 언제나 나를 비우게 하는 동시에 욕망과 탐착을 절제하는 마음을 가르친다.

후회 없는 죽음을 생각하게 한다.

크게 죽을 마음을 낼 때 거칠것이 없어지며 무서운 힘이 뿜어져 나온다.

무덤을 생각할 때마다 시간이 소중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한 순간에 불귀의 객이 되는 중생들은 무엇을 그다지도 끌어들이려하는지! 깨달은 자들이 모두를 버리며 사는 이유를 생각해보라! 버림 가운데 영원과 하나 되는 때문이다.

어리석은 중생들은 끌어들이다 끌어들이다 지쳐 풀잎의 이슬처럼 스러져 사라진다.

그들의 어리석음을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부처님은 이 땅에 오셨다.

법을 설해 어리석음을 깨뜨리고 깨달음의 광명을 선물하러 오셨다.

법이야말로 어둠속 무명 중생들에게 가장 탁월한 선물이라 하신 의미를 반추해본다.

법을 통해 苦를 제하고 번뇌를 녹인다.

설한 바와 같이 수행케 하여 법을 따르는 자들을 안심케 한다.

허공이 부처님 몸임을 깨닫게 하고 空 이 만상의 어버이임을 체험케 하신다.

諸法空相이라 모두가 부처님의 몸이신 空으로 지어져있고 공을 이용하고 있으며 만상이 결국 공으로 돌아간다.

그 같은 진리를 분명히 깨닫게 하시려는데 부처님 가르침의 큰 뜻이 있다.

결국은 모두가 무덤으로 공으로 나아가고 한줌의 재가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은 자는 부처님 무량가피와 하나가 되리라.

[능인선원 홈에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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