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두가 필연일 뿐 우연은 없다 – 능인선원 원장
지광스님
– 관음경에 보면 관세음보살님께서는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가 원하는 사람을 보내 그의 원하는 바를 성취케 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이른바 32응신(應身)이 바로 그것이다.
진정 간절히 기도드리는 사람들에게는 그가 원하는 귀인이 나타나 그의 일을 달성케 하는가? 기도 얘기를 하다 보니 너무 신비주의로 흐르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한다.
그러나 진정 기도를 열심히 온몸과 마음을 던져 해 본 사람들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위신력이 기도속에 있음을 확신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도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가?” 내게 묻는다면 주저 없이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분명 선몽을 받고 법당 지을 땅을 샀다.
그런데 허가가 나지 않는 것이었다.
날 수가 없는 땅이었는지도 모른다.
내 집 드나들 듯 구청과 시청을 드나들었다.
시장만 네 명을 거쳤다.
도저히 풀릴 것 같지 않았다.
세월은 5년 4개월이 흘렀다.
그러나 부처님의 선몽을 굳게 믿었다.
6년 가까운 세월을 첫 삽을 뜨지 못하는 상황이 되자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절망감이 들기도 했다.
어느 저녁 수요법회 날이었다.
답답한 나머지 “부처님이 왜 이렇게 문제를 풀어주시지 않는가”라고 신도들에게 안타까운 마음을 토로했다.
법회가 끝난 뒤 내 방에 들어와 있는데 누가 노크를 했다.
“누구신가”하고 문을 열었다.
어느 낯선 신사가 “스님 좀 뵈올 수 있느냐”고 물었다.
왜 그러시느냐고 했더니 “스님께서 어려우신 일이 있으신가본데 혹시 제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라는 것이다.
성실한 인상이었다.
자초지종을 말씀 드렸다.
“한 번 알아보겠노라”고 했다.
그 후 오래지 않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서울시장을 만나게 됐고 부시장, 국장들의 전화가 날라들었다.
6년여 세월 풀리지 않던 난제가 풀려가기 시작한 것이다.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가? 그날 밤 제 방에 들어왔던 분은 이름을 밝힐 순 없지만 고위직에 계신 분이었다.
처음 뵙는 분이어서 조금은 이상했는데 후에 듣고 보니 참으로 기막힌 인연이 아닐 수 없었다.
서초동 법당을 열고 있을 때 옥상 꼭대기에 그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절 만(卍)자 철탑을 세웠었다.
아마도 서울시내 유일의 卍자 철탑이었을 것이다.
그 분이 서초동 길을 지나다 우연히 철탑을 목격하고는 참으로 용감한 스님이 계시는구나 싶어 궁금증이 일어 들어오셨다는 것이다.
또 법문을 듣고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에 끌려 나를 찾아오셨다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묘한 인연이었다.
결국 그분의 도움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법당을 지을 수가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신은 주사위놀음을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우주는 우연을 가장한 필연의 세계라 얘기했다.
“행운은 노력의 부산물”이라고 얘기한다.
또 “미래는 준비하는 자의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기도하고 정진하며 많은 준비를 한 사람에게는 참으로 우연한 사건이 발생한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항상하신데 우연일 수가 있겠는가? 항상 정성스럽게 살아야한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듯 정성스러운 마음은 하늘과 맞닿는 마음이다.
하늘의 힘이 깃드는 마음이다.
기도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이유는 바로 하늘의 힘이, 부처님의 힘이 가세하는 까닭이다.
지성스런 말 한마디, 생각하나 행동하나를 펼칠 때마다 하늘의 힘, 부처님의 힘, 법력(法力)이 붙는다.
투철한 신심을 바탕으로 “분명히 된다”, “하면된다”고 하면 되는 것이다.
“되겠는가?”하는 의심이 앞서면 될 리가 없다.
하이젠베르크가 주장한 불확정성의 원리라는 것은 다른 게 아니다.
소립자물리학의 세계는 관찰자와 실험자의 의도에 따라 결과가 좌우된다는 것이다.
관찰자의 의도, 실험자의 의도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관찰자, 실험자는 실험의 주체다.
기도하는 사람이 된다고 하면 되는 길로 갈 것이고 안 된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길로 갈 것이다.
성취에 대한 투철한 신념을 가져라.
그리고 참으로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기도하라! 반드시 불가능이 가능케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