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인연에 연연해 가까운 인연 홀대말라 쌍계사 승가대학 강사 /
월호스님
三世心不可得 자신만의 깨달음에 치우쳐 눈앞의 것은 소홀하기 쉬워 훗날 방(榜)으로 유명해진 덕산선감 선사는 항상 〈금강경〉을 강의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주금강(朱金剛)이라고 불렀다.
남방의 선원이 자못 성대하다는 소문을 듣고 이를 깨부수고자 금강경주석서를 짊어지고 남방에 이르러 길에서 보니 한 노파가 떡을 팔고 있었다.
떡을 사서 점심을 먹으려는데, 노파가 말했다.
“질문 하나가 있는데 만일 대답을 하면 점심을 시주로 대접하겠지만, 만일 답하지 못하면 딴 집으로 가시오.
〈금강경〉에 이르기를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 하였는데 스님께서는 어느 마음에 점심(點心), 즉 점을 찍으려 하시오.” 이에 선사는 대답을 못했다.
당연히 떡도 못 얻어먹었을 것이다.
일개 떡 파는 노파의 질문에 대답을 못해서 점심을 쫄쫄 굶는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나름대로 경전의 내용을 꿰뚫고 있다고 자부하였건만, 한 구절 제대로 대답할 수 없게 되었으니….
만약 그대라면 어떻게 답변했을까? 어떻게? 궁리분별하면 굶는다.
그냥 “잘 먹겠습니다.”하고는 떡을 덥석 집어먹었으면 되지 않았을까? 어쨌든 노파에게 한 방 먹은 덕산이 용담선사의 처소에 있을 때, 밤늦게 입실하니, 용담이 말하였다.
“그냥 돌아가라.” 선사가 인사드리고 발을 거두고 나오려니, 밖이 어둡기에 돌아서서 말했다.
“스님, 밖이 어둡습니다.” 그러자 용담이 지촉에 불을 붙여 건네주었다.
선사가 막 받아 가지려는데 용담이 확 불어 끄니, 선사가 모르는 결에 소리를 질렀다.
“내가 지금부터는 천하 노화상의 혀끝을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이튿날 선사가 금강경주석서를 가지고 법당 앞으로 가서 횃불 한 자루를 들고 말하였다.
“온갖 현묘한 말재주를 다 부리더라도 터럭 하나를 허공에 날린 것 같고, 세상의 온갖 재간을 다 부리더라도 한 방울 물을 바다에 던진 것 같다.” 그리고는 그 책을 태웠다.
노파에게 한 방 먹은 덕산이, 드디어 용담선사에게 두 방 째 먹으면서 정신을 차린 것일까? 이러한 내용에 대하여 〈염송설화〉에서는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아놓고 있다.
“스님 밖이 어둡습니다.”라고 한 것은 이치로도 맞고 사변으로도 맞는다.
사변으로 맞는 것은 그만 두고 이치로 맞는다 함은, 과거 깨달음이 있었던 것은 다만 자기 자신만을 깨달았을 뿐 눈앞의 일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니, 옛사람이 이르기를 “열반의 마음을 깨닫기는 쉬우나 차별된 지혜는 밝히기 어렵다”고 했다.
자기 자신만을 깨달았을 뿐, 눈앞의 일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은 무엇일까.
삼세심불가득(三世心不可得)을 이치로만 이해할 뿐, 눈앞의 떡 조차 집어먹지 못한 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사람으로 치자면, 눈앞의 가까운 인연에게 충실하지 못하는 경우에 해당될 것이다.
사실 가까운 인연 일수록 소홀하기가 쉽다.
‘맨 날 보는 사람이니까 대충 소홀해도 다 이해하겠지’ 하는 생각도 들 수 있다.
하지만 가까운 만큼 더 소중히 대하는 것이 차별된 지혜가 아닐까.
이런 가정을 해봄직도 하다.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은 누구일까? 어디론가 영원히 먼 길을 떠난다 하자.
오직 한 사람만 동행할 수 있다면, 그 길을 누구와 함께 떠날 것인가? 이렇게 소중한 사람에게 나는 정말 소중한 만큼 잘 대해주고 있는가? 그만큼 나의 시간과 정성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 바쁘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점은 없는가? 먼 인연들에게 한눈팔려 정작 가장 가까운 인연을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