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도단(言語道斷 )
-혜국스님-
신심불이(信心不二)요 불이신심(不二信心)이니, 믿는 마음은 둘이 아니요 둘 아님이 믿는 마음이니라.” 道란 말로 설명하면 할수록 멀어지기 마련…언어의 길이 끊어지니 ‘임제 할’ 나온 것.
부처님께서는 진리에 대해 “내가 세상에 나오기 전에도 그대로 있었고 깨달은 후에도 억만년 후에도 그대로 존재” 두손 모아 합장하고 들어야 할 말입니다.
우선 믿는 마음 즉, 믿음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신(神)을 믿는다고 하는 믿음은 나(我)와 신을 둘로 보는 믿음입니다.
믿는 마음을 내는 나(我)가 있고 믿어야하는 신(神)이 따로 있는 것이지요.
여기에서 신이라고 하는 말이 어디서 나왔는지 생각해 봅시다.
신만이 아니라 일체의 모든 이름은 인간이 지어낸 말이며 만들어낸 단어일 뿐입니다.
신이라는 개념 자체가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말이거든요.
사람들의 불안한 마음이나 두려운 마음에서 의지할 곳을 찾아 고뇌하다가 사람들 자신이 신이라는 세계를 만들어낸 겁니다.
그에 반해서 ‘신심명’에서 말하는 신심은 나와 신이 둘이 아닌 ‘믿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둘이 아닌 믿음이란 생각을 일으킬 줄 아는 자와 대상이 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세계 즉, 전체로서의 믿음입니다.
빛과 그림자가 하나요, 바닷물과 파도가 둘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유 역시 둘이 아님을 설명하기는 거리가 먼 이야기입니다.
그 만큼 둘이 아닌 세계를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이 세상 일체의 삼라만상이 모두 생각의 그림자니까요.
그렇다고 눈앞에 있던 산이 갑자기 없어졌다거나 눈에 보이던 사물이 사라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있고 대상으로서의 사물이 있었는데 둘이 아님을 깨닫고 보니 대상으로서의 사물이 없어졌다는 말입니다.
나와 사물간의 거리가 없어지고 나니 전체로서의 내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보는 자와 보는 대상이 하나가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좋은 산이니 나쁜 산이니 하는 분별이 없어집니다.
직관이 되는 것이지요.
‘직관’이란 좋다 나쁘다는 생각 없이 그냥 볼 뿐입니다.
이러한 직관을 아인슈타인 박사는 인간에게 주어진 거룩한 선물이라고 했더군요.
그러나 우리들 육안 즉, 육신의 눈으로는 볼 때는 볼 뿐, 들을 때는 들을 뿐인 직관이 되지 못하고 ‘좋다, 나쁘다’의 감정에 따라 색깔을 입히고 보게 됩니다.
있는 그대로의 사물이 아니라 내 생각이 덧씌워진 내 생각의 그림자를 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실오라기 만큼이라도 믿는다는 생각이 남아있는 믿음은 둘이 아닌 믿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믿는다는 생각의 틈새가 전혀 없이 믿음 그 자체가 돼야 한다는 말이지요.
이 말은 한 생각 일어나기 이전 무념 무심 즉, 존재 자체를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믿음이 100%면 깨달음도 100%라는 겁니다.
영원한 자유, 영원한 현재인 겁니다.
대상이 없는 ‘空(공)’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공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전체를 말하는 겁니다.
내가 따로 있다고 생각할 때는 사물 하나하나가 나의 상대성이요, 걸림돌이었는데 나 하나 없음을 깨닫고 나니 우주전체가 그냥 존재 자체인 겁니다.
본래가 그러했으니까요.
결국 ‘신심명’ 전체가 이 한 소식 보여준 겁니다.
구절구절이 본래 부처인 우리 본질을 보여주신 것이지만 오늘 이 신심명을 마무리하는 입장에서 다시 몇 구절만 살펴볼까 합니다.
신심명 첫 구절인 “지도무난(至道無難)이요, 유혐간택(唯嫌揀擇)이니”하는 구절이나 중간에“허명자조(虛明自照)하야 불로심력(不勞心力)이라”는 구절 그리고, 오늘 마지막 구절인“신심불이(信心不二)요 불이신심(不二信心)이니”하는 구절은 볼수록 그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는 가르침입니다.“지도무난(至道無難)이요”하는 대목에서 지극한 도는 전혀 어려운 게 아니라 ‘좋다, 나쁘다, 너다, 나다’하는 간택심만 몰록 놓아버리면 바로 ‘그 자리다’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은 ‘나니 너니’하는 분별심이 남아 있는 한 결코 지극한 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지극한 도는 전혀 어려울 것이 없는 게 진실이지만 간택심이 있는 한 지극한 도를 보기는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이러한 때에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생각이니 간택심이니, 모두가 꿈속 일이란 걸 알고 꿈에서 몰록 깨어나던지 아니면 간택심이 끊긴 무심(無心)을 위하여 피나는 정진을 하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그래서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 모든 업식이 오직 모를 뿐인 의정독로(疑精獨露)가 되도록 하기 위하여 화두참선을 하라고 하는 겁니다.
그렇게 볼 때 화두 참선법 즉, 간화선이야말로 생각의 한계를 뛰어넘는 참으로 묘한 약이라고 생각합니다.
화두란 허명자조(虛明自照)이니까요.
왜냐하면 ‘덕산방’이니 ‘임제할’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니거든요.
위로는 부처님의 은혜를 갚고 아래로는 중생을 위하는 마음이 하나가 된 ‘허명자조’에서 나오는 대자비라는 걸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흔히 ‘임제할’이라고 하는 ‘할’이 나오기까지 임제 스님께서 걸어오신 공부 길을 갖고 그 할이 얼마나 대단한 할인가를 이론적으로 나마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임제 스님이 젊은 시절 황벽 스님의 문하에서 지낼 때라고 합니다.
임제 스님으로서는 그야말로 젖 먹던 힘을 다하여 정진을 하셨겠지요.
그러나 조실이신 황벽 스님의 문하에 찾아 들어온지도 2년이 넘어가고 3년이 넘어가니 내가 누구인가를 모르는, 그 답답함이 온몸에 넘쳐났던 겁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그 당시 수좌이신 목주 스님이 한 마디 하십니다.
“이 보게 젊은 수행자 그렇게 답답하고 목이 타 들어가면 조실 스님께 찾아가서 여쭈어 보게나.” 임제 스님이 “스님, 저는 도대체 무엇을 물어야할지 조차 모르겠습니다”하니 “이 사람아 어떠한 것이 부처입니까 하고 물어보게”라고 답합니다.
결국 임제 스님은 조실 스님을 찾아뵙고 그대로 묻습니다.
그런데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하는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30방을 내리치는 겁니다.
한 마디도 못하고 30방을 맞고 나오니 목주 스님이 조실 스님께서 뭐라고 하시던가 하고 다시 묻습니다.
“아무 말씀 안하시고 30방을 때리셨는데 제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목주 스님이 “이 사람아 조실 스님께서 한 평생 도를 위하여 사신 어르신인데 그냥 때렸겠나.
다시 한 번 가보게”라고 이르십니다.
목주 스님의 격려에 임제 스님은 다시 조실 스님을 찾아 갔는데 또 다시 30방을 맞고 나온 겁니다.
이렇게 찾아 가기를 세 번, 세 번에 걸쳐 세 번 모두 30방을 맞고 나왔으니 임제 스님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정말이지 죽고 싶었을 겁니다.
옛날 어른들은 스승을 믿는 마음이 요즘 사람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그렇게 맞고도 생각하기를 “조실 스님께서는 오로지 우리 수행자들을 위해서 사시는 어른인데 이렇게 방을 칠 때는 뭔가 이유가 있을 텐데, 내가 우둔해서 저러한 큰 자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구나”하고 생각을 하신 겁니다.
그렇게 생각한 뒤 떠날 준비를 합니다.
어디에 가서, 어떻게 해서라도 내가 누구인가를 깨닫고 와서 기필코 이 은혜를 갚겠다고 길을 나섭니다.
도(道)를 위해서 이 한 목숨 온전히 바치지 않고는 이렇게 생각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때 목주 스님이 임제 스님의 생각을 알아차려 그래도 조실 스님께 인사는 하고 가야한다고 일러줍니다.
임제 스님은 또 그대로 따릅니다.
조실 스님께 하직 인사를 올리자, 조실 스님께서 “어디로 가려는가”하고 묻습니다.
“예, 조실 스님 어디로 가면 좋겠습니까?” “응, 저 고한에 있는 대우 스님을 찾아가 보게나.” 임제 스님은 그 길로 대우 스님을 찾아갑니다.
대우 스님의 첫 마디가 “어디서 왔는가” 하니, 임제 스님은“예, 황벽 스님 문하에 있다가 왔습니다”라고 답합니다.
그러자 대우 스님이“그래 황벽 스님은 법을 어떻게 쓰는가?”라고 재차 묻습니다.
그러자“예, 법을 어떻게 쓰는지는 모르겠고 3차례 참방하여 3차례나 30방을 맞았습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말씀드립니다.
이에 대우 스님 하시는 말씀이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이로군.
황벽 스님이 그렇게나 자비로운 법을 쓴다는 말인가”라고 찬탄하십니다.
그러자 임제 스님은 한마디 말씀에 크게 깨닫게 됩니다.
“허명자조(虛明自照) 불로심력(不勞心力)”의 도리를 깨달아 홀연히 소리하기를 “아이쿠 황벽의 불법도 몇 푼어치 안 되는 구나”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심불이(信心不二)입니다.
여기에서 대우 스님과의 거량이 끝나자 대우 스님 말씀이 “자네는 황벽 스님 법에 의해서 깨쳤네.
어서 돌아가게”라고 이르니 임제 스님은 다시 황벽 스님의 회상으로 돌아와서 그 법을 이으신 겁니다.
글재주가 없어서 이렇게 밖에 쓰지 못하기는 하지만 이 안에 숨겨진 임제 스님의 위법망구(爲法忘軀)나 황벽 스님과 대우 스님께서 사람을 위하는 활발발한 그 마음은 무슨 말로도 표현할 수가 없는 겁니다.
지도무난(至道無難)은 이렇게 해서 지도무난(至道無難)이 되는 겁니다.
생각이 끊긴 자리에서, 그렇게 된다면 허명자조(虛明自照)는 설명이 필요 없이 그 자체가 됩니다.
텅 비면 밝음이요, 밝음이면 스스로 비춤이니 결국 말로 설명 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기에 언어도단(言語道斷)인 겁니다.
“언어도단(言語道斷)하야 비거래금(非去來今)이로다, 언어의 길이 끊어져 과거·현재·미래가 아니로다”라는 의미입니다.
임제 스님이나 스승들이 스승될 때까지 걸어오신 길, 그 길이 다하고 나니 바로 언어의 길이 끊어진 겁니다.
그래서 임제의 할이 나온 겁니다.
할이란 즉, 진리란 말이 나오기 이전의 소식입니다.
불이신심(不二信心)인 것이지요.
그 사실을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연기법, 다시 말해서 진리란 내가 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도 그대로 있었고 내가 깨닫고 나서도, 성불하고 나서도 그대로요 억만년 후에도 그대로라고.
이 얼마나 고구정녕하신 말씀입니까? 그러니 ‘영원한 현재’라고 하는 겁니다.
영원한 현재라면 현재가 영원한 걸로 생각하는 이가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과거도, 미래도, 현재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과거가 없어지고, 미래도 없어지고 나니 현재도 없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냥 존재 자체이기에 부득이 영원한 현재라고 ‘이름’하는 겁니다.
영원한 현재가 있을 까닭이 없기에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 과거·현재·미래가 아닌 겁니다.
이제 일년간 써왔던 ‘신심명’을 끝냅니다.
도(道)란 말로 설명할수록 멀어지기 마련인데 지난 일년간 허물이 많은 줄 압니다.
생각생각에 보리심 이어지기를 발원합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1275호 / 2014년 12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