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더불어 시작된 불교
-지광스님-
불교가 꿈과 더불어 시작했다하면 잘못된 얘기일까? 마야부인의 흰 코끼리 꿈이 없었다면 불교가 성립 될 수 있었을까? 불교는 꿈과 긴밀한 연관성을 지닌다.
흰 코끼리 꿈 외에도 삼국유사에는 조신의 꿈과 같이 꿈으로 뒤덮여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연스님은 왜 꿈과 관계된 설화를 그렇게 여러 차례 언급하셨을까? 도무지 꿈이란 우리 삶과 어떤 관계가 있길래 이토록 많은 꿈 얘기가 불교에 등장 할까? 반야심경에는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이라 해서 꿈에 대해 터부시하기도 한다.
개꿈도 있다지 않는가? 그런데 분명히 부처님의 가피 가운데 현전가피(現前加被), 명훈가피(冥熏加被), 몽중가피(夢中加被)라 해서 꿈속에서의 예지적 기능을 중시하기도 한다.
실제 우리들의 삶 가운데는 선몽 또는 현몽이라 해서 미래를 미리 보는 꿈을 얘기하는 분들이 적지 않다.
꿈이 꼭 맞는다고 하는 분들도 있다.
꿈의 과학자라 불리던 프로이트(G.S.
Freud)와 그의 제자였던 융(C.G Jung)은 꿈 때문에 서로 큰 싸움을 벌이기도 했었지만 인간의 예지몽(precognition Dream)에 대해서만은 공히 인정을 했다.
종교학에서는 원시인들이 꿈속에서 돌아가신 분들과 만나는 경험이라든지 전혀 다른 차원의 존재들과 조우하는 꿈이 종교적인 어떤 심성을 일깨우는데 기여하지 않았겠느냐고 얘기하기도 한다.
꿈에 대해 누가 뭐라고 하던 꿈 가운데 무엇인가 영원과 만난다든가 다른 차원과 만나는 통로가 있다는 사실만은 부정할래야 부정할 도리가 없다.
그렇기에 몽중가피란 가르침이 등장했고, 마야부인의 꿈이 등장하지 않았는가 한다.
여타 종교에서도 역시 꿈에 관계된 얘기가 종교 전반을 뒤덮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종교뿐만 아니라 현대심리학, 정신분석학 전반에 걸쳐 대부분의 학자들이 꿈을 연구하는 학자라 해도 크게 잘못 될게 없다.
프로이트 역시 꿈의 해석을 통해 성과를 쌓지 않았는가? 제자 융 또한 꿈속에 인류 공통의 꿈이 있다 해서 집합적 무의식 (Collective subconsciousness) 이란 말을 창안하지 않았던가? 그 밖에도 매슬로(Maslow) 패러데이(Faraday), 디멘트(F.Diment), 크라이트맨 등 꿈을 연구해 이름을 얻은 연구가들은 일일이 열거하기가 어렵다.
분명 꿈속에는 영원을 관통하는 세계가 있다.
불교를 통해 보면 유식학과 더불어 꿈의 심층세계가 전개 된다.
짧은 지면에서 꿈에 대한 얘기를 일일이 늘어놓을 순 없고 참선만 하고 살던 사람이 대중들을 상대로 치열하게 기도하라 강조하다 보니 선에서는 금기시하는 측면도 있으나 참으로 신묘한 꿈의 경계를 항상 체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천수경 첫 머리에 오방내외안위제신진언(五方內外安慰諸神眞言) 등등해서 보이지 않는 세계의 거룩함에 대해 예경을 해야만 하는 이유를 분명히 깨닫게 하였다.
진실로 전혀 예측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열심히 기도를 해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미래를 선명히 볼 수 있는 경우를 참으로 많이 체험하고 살았다.
능인선원의 현재 자리를 꿈속에서 선명히 보았다든지 건축설계사를 선정하지 않았는데도 선명히 미래의 법당 설계도를 미리 보았다든지, 꿈속에서 열렸던 미래의 vision은 도무지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부처님 세계에 대한 신심을 굳게 다지게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항상 기도를 강조하는 이유 역시 항상 부처님과 더불어 살고 있음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경이로운 일들의 연속 속에서 살고 있기에 더욱더 그러하다는 사실을 강력히 강조하고 싶다.
무언가 바라는 기도가 아니더라도 원력을 세워 열심히 정진하다보면 내 마음을 나보다 더 잘 아시는 부처님이시기에 분명 기도에 응답이 있고 가피가 있다는 사실을 꼭 말씀드리고 싶다.
어찌 보잘 것 없는 나에게만 가능한 일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