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 그릇에 증오심을 담고 다닐수야
-혜국스님-
미움과 증오심을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현명한지에 대해 이야기 해 보고자 합니다.
수년전, 달라이라마 스님을 만났을 때 여쭈어씁니다.
“스님은 중국인이 정말 밉지 않습니까?”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1959년 중국군의 무력탄압으로 인해 티베트는 점령을 당하였습니다.
그 때 중국군이 티베트 여인들에게 저지른 참으로 끔직한 짓을 대부분의 티베트 스님들은 망명길에 오르면서 보았습니다.
비참하게 죽어가는 그 처참한 모습을 보면서 비통함과 애절함을 품고 히말라야를 넘어 다람살라까지 온 것입니다.
히말라야를 넘는 것은 쉬은 일이 아닙니다.
나도 한 번 가 본적이 있는데 3천m를 넘어서자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4천m를 가면 들이 마실 공기가 없어 숨소리가 “헉헉” 하고 매우 거칠게 변합니다.
눈앞에서 어머니와 누이들이 당하고 죽는 모습을 보고 그 힘든 길을 걸어온 티베트 스님들인데 중국인이 어찌 밉지 않을 리 있겠습니까? 보통사람이라면 그 생각만 나도 두고두고 외칠 것입니다.
이 못된 중국놈들! 하늘 아래 같이 살지 못할 이 원수들! 그 원한만은 꼭 갚겠다.
그런데 달라이라마께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이 이 육체를 가지고 타락의 길을 선택하면 한없이 굴러 떨어져서 축생이나 다름없는 길로 들어 갑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어린아이 납치나 가도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게 됩니다.
반대로 몸이라는 자동차를 잘 이끌면 부처의 길로 살 수 있게 되는데, 이때의 몸은 아주 소중한 그릇이 됩니다.
이렇게 부처를 담을 수 있는 그릇에 남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생각을 담고 다닌다면 소중한 인생을 망치는 것이 됩니다.내 몸뚱이에 중국인들을 증오하고 미워하는 생각을 품고 다딘다면 결국에는 중국인보다 내 자신이 먼저 망가져 버릴 것 입니다.
증오로만 살다가 인생을 마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금생에서는 연꽃을 피우지 못하고 마음농사 역시 짓지 못하게 됩니다.
나는 스스로가 이렇게 사는 것을 허락하지 못합니다.
부처의 길을 가야 할 소중한 육신에 남을 미워하는 더러운 생각을 담아 두어서야 되겠습니까? 내가 증오를 이겨내며 평생 동안 수행을 한 까닭은 중국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였습니다.
지금 내 마음에는 그들을 미워하는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미워하고 증오하고 원망하는 마음이 마음을 없애기란 정말 쉽지가 않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이에 대해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편이나 자식들 , 이웃과 친구 동료 등에 대해 미워하는 암금이 조금씩 있습니다.
곧 주변에 ‘꼴통’이 있기 마련이며, 나와 맞지 않는 이 꼴통들이 애를 먹이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그런데 ‘나를 애먹이는 사람’도 그냥 이 세상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전생에 그 사람에게 빚을 졌기 때문에 나에게로 와서 꼴통 짓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향상을 하고 부처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복을 쌓고 공덕을 짓기 위해서는 꼴통인 그 사람을 참아내야 합니다.
가족 중에도 유독 꼴통 짓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친구 회사동료 중에도 맞지 않는 사람, 싫은 사람이 꼭 있기 마련입니다.
자연 그와 같은 사람을 만나면 싫어지고 짜증이 나고 기분이 나빠집니다.
하지만 그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역보살입니다.
나로 하여금 역행을 극복하게 하여 나를 한 단계 높이 올라 갈 수 있게 만들어 주는 보살입니다.
그르므로 그와 같은 사람을 만나면 ‘증오’ 보다는 향상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저 사람이 없다면 내가 어떻게 참는 법을 수행하겠는가? 이렇게 역행보살의 인연으로 만났으니 향상의 기회로 삼을 뿐 저 사람을 미워하면 안된다.’ 나아가 달라이라마 스님처럼 ‘부처를 이루어야 할 내 몸 안에 증오심 같은 쪼잔한 마음을 넣어둘 수 없다.’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그리고 증오심을 자비심을 바꾼다면 정말 대단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