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멀리서 찾는 것이 아니다 /
지명스님
내가 늙음, 병, 죽음, 이별, 좌절, 실패 등의 고통을 많이 다루다 보니, 독자들로부터 질문을 받는다.
“태어남, 성장, 건강, 발전, 만남, 승리, 성공 등의 기쁨을 느끼면 안 되는 것인가요? 스님은 왜 어두운 허무를 주로 강조하나요?” 내가 인도하고자 하는 지향점은 “지금 바로 눈앞에 있는 것으로부터 행복을 찾아내자”는 것이다.
허무만 부각되었다면 내 본의와 달리 글을 잘못 쓴 것이다.
“왜 사는가?”에 대해서는 즉각 답이 나오지 않지만, “어떻게 살려고 하는가?”에 대해서는 “잘 살려고 하지요”라고 바로 답할 수 있다.
건강, 돈, 명예 등을 얻으려고 하는 것도 잘 살기 위해서이고, 불도를 닦아서 깨달음이나 해탈 열반에 이르려고 하는 것도 잘 살기 위해서이다.
‘잘 산다’는 말이 막연하다면 ‘이고득락(離苦得樂)’ 즉 “고통을 여의고 즐거움을 얻는 것”이라는 불교의 전통적인 표현을 써도 좋다. 짧게 끝나버리는 세간의 즐거움을 가짜라고 하고, 영원히 간직할 수 있는 출세간의 즐거움을 진짜라고 구분하는 것과 관계없이, 우리는 어떤 종류의 것이든 즐겁게 살려고 한다.
행복하게 살려고 한다. 『화엄경』의 “모든 사물은 마음의 규정이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하다”는 가르침, “마음은 화가와 같아서 세상의 모든 것을 그린다”는 가르침, “마음과 부처와 중생의 셋이 아무런 차별이 없다”는 가르침을 연결 지어서 보자.
중생인 나와 내 마음과 부처가 차별이 없다면 “지금 나의 중생심으로 행복을 그려내고 지어서 볼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즐거움 또는 행복을 멀리서 찾는 것이 아니라, 내 주변의 모든 사물에서 발견해 내라는 것이다.
의상대사는 『화엄경』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분이다.
그의 ‘법성게’는 “한 티끌 가운데에 시방세계가 포함되어 있다”든지 “한 생각이 바로 무량겁이다”라고 한다.
『화엄경』의 마음이 모든 것을 지어낸다는 말과, 마음, 부처, 중생이 하나라는 말을 달리 표현한 것이니, 행복을 멀리서 찾으려고 하지 말고, 바로 내 곁에 있는 사소한 것에서 발견하라는 뜻이다.
작은 티끌이 온 우주를 포함하고 있다면 그 티끌이 바로 우주의 견본이다.
한 티끌도 견본이라면 이 세상 어느 것 하나 전 우주의 견본 아닌 것이 없다.
처처에서 행복을 발견하고 음미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행복을 찾는데 큰 장애가 있다.
끊임없이 변하는 형상과 마음이다.
꽃이 피기까지는 오래 걸리는 듯 하지만 일단 피고나면 바로 시들어 버린다.
사랑이 맺어지기까지는 꿈처럼 아름답지만 얼마지 않아 시들해진다.
사랑과 친절은 끊임없이 쏟고 베풀어야 한다.
100번 잘해 주더라도 한 번 소홀히 하면 토라질 수가 있다.
세상은 변하기 마련이고 인간은 변덕의 동물이다.
아무리 우리가 주변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싶어도, 주변이 계속 변덕을 부린다면, 세상을 아름답게 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흔들림이 없이 즐거움을 찾으려면 피고 시들고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해야 한다.
가장 친한 친구가 어느 코너에서 나와 경쟁하는 처지가 될 때도, 철석같이 믿었던 사람이 배신했을 경우에도, 그러한 상황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받아들여야 한다.
모든 것의 무상함과 흔들림을 체달해야만 세상의 급작스러운 변화를 보고도 기죽지 않을 수가 있다.
허망한 세상과 마음에 대한 면역력을 기르기 위해서 삶의 어두운 면을 피하지 말고 똑바로 드려다 봐야 한다.
절집에 있으면 거의 자살 직전에 이른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그들이 세상의 무상함을 새롭게 되씹고 절감하게 되면, 오히려 저 허망한 세상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주변의 변덕에 실망할 것도 좌절할 것도 없다.
그래서 강해진다.
불교를 제대로 공부한 이 가운데 자살하는 이는 없다.
3일 후에 죽을 사람과 30년 후에 죽을 사람이 꽃 옆에 있다고 치자.
누가 더 깊고 진하게 감상할까? 참, 질문이 잘못되었다.
무상을 철견(徹見)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이를 비교해야 한다.
촌스럽게 답과 이유를 길게 늘어놓을 필요는 없으리라